일상.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사람들은 지루, 권태 등의 낱말로 그 항상성의 힘을 얕봤다.
하루를 뒤흔드는 사건을 만나고서야 그들은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책임과 감정을 요하는 일인지를 깨달았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쳐도, 자아를 나눌만큼 아낀 누군가가 떠나도, 자괴의 파도가 밀려와도, 일상은 그저 묵묵히 견뎌내는 수밖에 없는 일방통행로라는 것을.
반대 행성의 어느 올디펜서 소녀도 그 몰인정한 사실을 마주쳐버린 참이었다.
소녀는 호수에 뜬 뱃머리에서, 가입증 절도 사건이 남긴 여파를 몸소 느꼈다.
말이 입안으로 말려 들어간지 오래고, 넋은 머리에 반쯤 걸려 위태로운 춤을 추었다.
그 뒤로 벤더와 온조가 앉아 노를 젓고 있었다.
세 학도는 수행 수업 중으로, 그들이 배를 타고 가로지르는 장소는 거대한 호수처럼 뵈는 강이었다.
은사에 따르면 무려 불에 타는 강이라 하였다.
- 물이 어떻게 불에 타죠?
- 오염된 강이라서다. 반 뼘 두께의 기름이 떠다니지.
- 그럼 흐른다기보단 고여있는 강이네요.
- 흐르긴 한다. 꾸역꾸역. 네 녀석들의 성적처럼.
소녀에겐 ‘그리고 어쩌면 제 인생처럼’이 아니었을까.
‘꾸역꾸역’의 나쁜 점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계속 겪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수도국경 수색청의 발표 아래 타르데오는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무수한 말이 돌아도 그 자에 대한 일은 늘 비공개적인 형태로 진행되어왔기에 전례 없는 일이었다.
가입증에 찍힌 인장의 권위 때문인지, 아니면 수색청을 꿰차고 있는 유력한 가문들의 입김 때문인지, 타르데오는 공공연한 표적이 되었다.
공문서 절도자. 상아탑 학도들은 와중에 ‘절도’라는 말이 우습다며 수군거렸다.
절도는 무슨 절도야 학교가 두 눈 뜨고 분실한 거지. 멍청하게.
그 새 소녀도 한 식구라는 인식이 생긴 것인지, 최근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학교의 대처에 답답함을 비춘 것인지, 걱정만큼이나 비난이 많았다.
그들은 교장의 간절한 청으로 도적이 공개 수배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직 교장와 직접 대면한 준만이 은사진의 고충을 알았을 뿐.
아침 무렵 열매가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소녀는 제 존재가 실로 농담 같았다.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풍랑 속의 배.
눈앞이 캄캄할 적에 열매가 소녀의 손등에 난 헤나를 가리키더랬다.
달 문양의 그것은 녀석이 그려준 날보다 희미해졌지만 아직 제법 멀쩡했다.
‘ 달은 낮에 안 보여!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냐. 지금이 네게 낮이라고 생각하자. 그깟 가입증 몇 개 사라졌다고 네 존재가 없는 게 되는 게 아니니까! 아무튼 이거 다시 해, 당분간. ’
열매가 채워준 것은 적 관할자의 뱃지였다.
소녀는 하루 사이에 그를 되돌려받게 될 줄 몰랐거니와, 그것이 저의 마지막 동아줄이 될 것은 더더욱 몰랐다.
소녀가 강의 표면으로 너울대는 제 얼굴과 뱃지, 문신 따위를 응시하다 물었다.
“ 여기 이매망량의 호수야? ”
오늘 뱉은 첫마디였다. 온조가 퍼뜩 답을 보냈다.
“ 아니. 이매망량의 호수는 밤에만 볼 수 있어. 낮에는 사라지거든. ”
은사가 공간 이동 전 학도들에게 설명한 바 있으나, 소녀가 집중했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굳이 꼬집지 않은 온조에게 소녀는 끄덕거리며 이매망량의 호수가 달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여긴 그냥 강이야, 돌머리. 요정의 강. 줄여서 요강. ”
킬킬대는 벤더를 온조가 자중시키는 눈초리로 보았다.
뭐 이씨, 돌머리 기분 전환해주려는 구만.
“ 걱정 마 돌머리. 너 꼭 상아탑에 등재 시켜줄게. 국보급 문화재인데, 누가 널 놓치려 하, 아! 이 망할 령이! ”
일순간 온조의 령(토끼 말이다)이 앞발을 들고 뛰어올라 벤더의 무릎을 갈겼다.
벤더야 당한 입장이니 혼각령을 거북한 존재 취급했지만, 이 행성 이들은 령들 덕분에라도 절대적인 외로움에 잠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영혼을 공유한다는 건 심리적으로 제법 효율적인 행위니까.
소녀는 지금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심정을 느낀다면 그것이 짐승이라 해도 큰 위로가 될 듯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숲에 닿았다. 배를 정박시키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자 서쪽, 북쪽, 동쪽 방향의 세 갈림길이 나왔다.
셋은 효율적인 동선을 위해 경로 하나씩을 도맡기로 하였다.
소녀가 맡은 방위는 북이었다. 벤더는 그곳을 ‘그림자 숲’이라 불렀다.
“ 경험 없는 네가 가기에 가장 안전해. 요정들 장난 빼고는 크게 걱정할 게 없거든. 게다가 장난들이 그렇게 짓궂지도 않아. ”
벤더는 헤어지기 전 소녀에게 행운을 빌며 가방으로부터 주사위처럼 생긴 것을 꺼내 쥐여 주었다.
손가락 마디만한 각설탕이었다.
“ 요정들은 단 거 좋아한대. 너도지? ”
켈켈댄 벤더는 스스로가 한 말에 감명을 받은 듯이 보였다.
녀석은 곧 토끼에게 귀를 제대로 깨물렸다. 세 개로 갈린 비명이 숲으로 뻗어갔다.
***
누군가 그랬다. 식물에게도 고통을 지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누군가 숲에서 목숨을 끊으면 주변 나무들이 그이의 죽음을 감각하고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 결과 숲이 더 삭막해지는지 더 울창해지는지 모르지만, 전자라면 이곳은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목숨이 도살됐을 장소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나아갈수록 푸른 잎보단 헐벗은 가지들이 빽빽했고, 적막이 나무 키에 비례하게 커졌다.
땅은 먼지 바람이 일만큼 건조해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상상과 먼 이 길은 토템의 소굴이 아닌 것 같다고, 소녀는 반 시간가량의 걸음을 멎고 결론지었다.
접선 장소로 가려 뒤돌아서던 중,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선 이에 놀라 나자빠졌다.
음산한 곳에 저 홀로가 아니었다는 것도 기겁할 일인데 상대는 개인 구획을 철저히 지키곤 하는 이였다.
…우경우?
소녀는 풀썩, 이는 먼지 바람 속에서 뜻밖에 제게 접근한 이를 올려보았다.
“ 찾았어, 토템? ”
녀석은 웬일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으켜주려는 듯 손을 내밀며.
소녀가 도리질을 하자 입꼬리를 꽤나 우호적으로 올리기까지 했다.
전날 오고 간 방 열쇠가 친밀감을 쌓아 주었을까. 오묘한 인상이 오늘 따라 낯선 자상함을 풍겼다.
경우는 이내 휙, 돌아 길을 나아갔다. 정확히 소녀가 가려던 길에 수직 하는 방향으로.
평소라면 냉랭한 이가 멀어지는 걸 그저 보고 있었겠지만, 소녀는 녀석이 보인 친근에 현혹돼 엉거주춤 따랐다.
경우는 한 손으로 무언가를 재빠르게 비벼대고 있었는데, 실처럼 얇고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길이로 보아 녀석의 것 같았다.
몸의 한 부분을 강박적으로 움직이는 건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이들의 특징이라던데(온조도 손에 쥔 것은 뭐든 베베 꼬는 버릇이 있었다), 경우에게도 그런 습관이 있는 줄을 몰랐다.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건 낯선 면들을 발견해가는 일이구나.
낭만적인 사고를 하던 소녀가 한순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제 막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 지대로 들어선 참이었다.
볕을 받은 소녀의 그림자가 빛의 연장선처럼 길게 늘어졌고, 나무들의 그림자 역시 바닥에 긴 사선을 내며 흑백 그림을 만들었다.
그러나 경우의 발아래로는 여백뿐이었다. 그를 발견한 소녀가 이 지대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림자 숲. 벤더와 온조는 이곳에 깃들어 사는 존재가 있다고 했다.
소녀가 돌아본 이에게 경계의 투를 하였다.
“ 경우 아니지. ”
녀석은 친한 열매에게조차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건다 해도 신체적 접촉까지 허락하는 법은 없었다.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눈을 깜빡이던 경우가 별안간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들켰네. ”
그는 곧 작고 어린 날개를 단 형상으로 변모하였다.
“ 인간들은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
***
“ 맛있다! 이거 이름이 뭐라고, 인간? ”
“ 각설탕. ”
“ 인간들은 이 맛있는 걸 매일 먹어? ”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자주라 해도 그렇게 설탕 결정체만을 통째로 먹지는 않았다.
소녀는 설명을 물린 채 신이 난 존재를 멀거니 보았다.
나뭇가지로 앉은 그것은 흡사 인간 아이의 모습이나 키가 평균적인 키의 반의 반의 반의 반 토막으로 작았다.
두 귀가 뾰족하며 등 뒤론 빛 가루를 뿜는 얇은 날개가 팔랑거렸다.
그것은 자신을 요정이라 부르면 매우 화를 내었는데, 그 단어는 요사스러운 정령이라는 뜻이라며 지극히 인간 관점의 호칭이라고 했다.
“ …그럼 뭐라고 불러? ”
“ 수피아라고 해, 인간. ”
버젓이 이름 있는 소녀를 ‘인간’이라 일컫는 것도 지극히 그쪽 관점이라는 걸 알까.
여하간 그들이 단 것에 환장한다던 벤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녀는 고작 손가락 마디만 한 먹거리로 한 생물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설탕 두 어 개를 더 안겼다.
수피아가 양 날개로 박수를 치며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내려앉았다.
“ 착한 인간! ”
수피아는 인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비비거나 인간의 손톱을 먹고 그들로 둔갑할 수 있다고 했다.
녀석이 경우의 얼굴로 음흉하게 웃었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금세 본체로 줄어들지 않았더라면 소녀는 아침 때와 같은 소름을 느꼈을 터였다.
수피아는 협박과는 거리가 먼 투로 손을 내밀며 ‘인간, 나 배고파’라 말했고, 소녀는 벤더가 낄낄대며 건넸던 식량을 안겼더랬다.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수피아 마을이라는 진기한 구경을 하게 되었기에.
소녀가 삭막하다 여긴 숲의 나무들은 사실 그들의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홀로 지날 때는 미처 못 본 작은 창과 문 등이 나무 밑동이나 그늘진 사각 지대에 나 있었다.
색다른 장소를 동화 같은 기분으로 살피고 있었을까, 수피아가 소녀의 어깨로 옮겨왔다.
“ 히히, 잘 먹었어 인간. 진짜 진짜 맛있다. ”
녀석이 볼록해진 배를 문지르며 외쳤다.
“ 소원 들어줄게! 허기진 요정을 지나치지 않은 보답! 요정을 귀찮아하는 인간 많아. 상대해주는 인간 별로 없어. 아까 내가 변했던 인간, 그냥 지나갔던 인간! ”
“ …… ”
“ 근데 넌 착한 인간! 소원 들어줄게! 지금 가장 원하는 거! 뭐든지! 아무거나! 말만 해! ”
수피아는 기운이 넘치는지 온 사지로 빛을 발산하며 소녀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 천진한 모습에 미소를 띠기도 잠시, 소녀가 망설임을 담아 물었다.
“ 토템이 있는 곳을 알려줄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