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앉은 모습을 가릴만큼 쌓여있는 서류와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집무실의 문을 연 에이비는 문을 열자 펼쳐지는 광경에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문 앞에 멈춰 섰다.
물론 내가 서류와의 데이트가 취소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바라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취소되기를 바란건 아니었는데...
그래. 절대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고! 누군가 침입했다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활짝 열려있는 창문과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커튼과 사랑의 왈츠라도 추려는 듯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는 서류더미들. 게다가 무늬라고는 바닥과 맞닿아 있는 경계부근에 있는 선이 전부인 밋밋한 벽지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새빨간 색으로 새겨진 글씨가 쌓여있는 서류 대신 그를 맞이했다.
평소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던 은은한 백색이었기에 붉은색으로 적힌 글씨는 그를 격렬하게 환영하듯 방 안에서도 미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아. 저기 목 꺾인 닭도 있네. 저 피로 쓴 건가, 저 글씨? 서류와의 데이트는 멋지게 파기시켜주었지만 할 일은 잔뜩 늘려준 눈 앞의 광경을 도피해보고자 에이비는 현재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그런다고 딱히 답이 나온다거나 할 일이 줄어든다는 기적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일의 양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질 것 같았다.
명백하게 에이비를 싫어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광경을 보며 협박을 받은 당사자는 생각했다. 눈 앞의 상황을 만들어 낸 범인의 의도가 자신을 비명지르게 하려 한 것이라면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물론 무서워서가 아니고 일이 늘어나서이기는 하지만 일단 비명은 무지하게 지르고 싶으니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닐까.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생판 모르는 타인의 일을 바라보는 것처럼 서술도 해보았으나 그의 바램대로 뿅 하고 현 상황이 다른 사람의 일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울며 겨자먹는 꼴로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에이비는 커다랗게 글씨가 쓰여진 벽으로 다가갔다.
" '보좌관을 그만둬라' 라니 이건 제가 바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늘려놓으면 더 그만두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닭 모가지를 꺾어 그대로 쓴 것인지 거칠게 벽에 쓰여져 있는 제 바램을 바라보며 에이비는 이를 한 번 으득 갈았다. 분명 자신과 목적은 같건만 그 결과는 정반대다. 일을 늘려놓아 한층 더 그만두기 어렵게 되버린 상황에 에이비는 누군지 모를 범인을 향해 절규했다.
"날 그만두게 하려면 저 서류더미를 처리해줬어야지!!!"
에이비는 진심으로 범인을 눈 앞에 앉혀 놓은 채 세시간 정도 '황태자의 보좌관을 해고되게 만드는 법' 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싶어졌다.
*
"흐음. 그래. 협박을 받았다고."
"네. 현재 조사중입니다."
레트라가 없는 틈을 타 서류처리를 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뒤 범인의 어리석음 - 서류처리가 아닌 일을 늘려놓고 간 것 - 에 대하여 혼자 속앓이를 하던 에이비는 결국 체념을 하고 경비대를 불렀다. 솔직히 협박을 당한 상황이야 무섭지도 귀가 가렵지도 않았고, 경비대를 부르면 귀찮은 일만 생기기에 그냥 넘어가고 싶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일단 황궁. 그것도 황태자의 집무실 바로 옆 방에 침입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의 수리였다.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당한건데 벽지 교체 비용을 내가 대는 건 좀 아니잖아. 황궁 내부이기에 벽지만 해도 고급재질을 사용해서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신고를 했으니 당장은 현장 보존이라며 그대로 놔두겠지만 조사가 끝나면 당연한 수순으로 교체해 줄 것이다. 거기에 위로금도 좀 나오면 금상첨화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에이비가 신고를 한 이유는 후자의 이유가 매우 강력했다. 황태자의 집무실 옆 방의 치안따위 알 게 뭔가. 황태자의 침실에도 덥석덥석 침입자가 들어가는 상황인데.
딱 봐도 위험해보이는 사안을 별거 아닌 것으로 넘겨버린 뒤 에이비는 현재 레트라에게 그가 없는 사이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는 중이었다. 마음같아서는 그냥 입다물고 싶었으나 바로 옆 방에서 일어났으니 숨겨질 일도 아니고 방의 위치가 위치이기 때문인지 경비대를 불렀는데 사건은 기사단이 맡게 되어서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어차피 그의 귀에 들어갈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직접 보고하는 편이 낫지. 어차피 알게 될 거 직접 말하자는 생각에 보고를 하기는 했는데 왠지 레트라의 다음 말이 한 발 먼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에이, 그래도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겠어...?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럴까 하는 미약한 희망을 가지며 에이비는 애써 미간을 피기로 했다.
"마음이 아프군. 그대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괜찮습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아, 아니군. 이렇게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보세. 얼른 바지 좀 벗어보게나."
제길. 설마가 사람잡는군. 에이비의 결심은 3초가 채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입으로는 걱정된다 말하는 주제에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아, 정말. 파업이라도 한 번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면서도 이 말을 그냥 넘기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입을 열었다. 이제는 거의 자동반사가 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왜 바지입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마시죠."
"어허. 수작이라니. 이래뵈도 내가 황태자이거늘. 자, 그러니 어서 의심말고..."
"말이 험하게 나왔군요. 그러니 괜찮습니다. 전하께 말실수나 하는 신하따위 걱정하셔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투를 지적해보았지만 진심으로 실수를 했다는 듯한 표정은 한조각도 없이 태연하게 받아친다. 오히려 한 발 더 나가 자신의 위치를 까내리면서까지 거절하는 모습에 결국 레트라가 먼저 포기선언을 뱉었다. 분명 상사는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말싸움을 이긴 기억이 거의 없다.
"하는 수 없군. 그래서 현재 자네 집무실은 못 쓰는 상태겠구만?"
"예. 그래서 다른 방으로 옮겨갈까 합니다."
"이런. 그건 안되지. 내 집무실과 멀어지면 내가 불편해."
이를 어쩐다... 포기선언을 하고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온 레트라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며 에이비의 의견을 거절했다. 그의 말에 '이유가 말이 되기는 해서' 라기 보다는 헛소리가 아닌 '제대로 된 이유를 들어 거절해서' 라는 사실 때문에 에이비가 아무 말도 못한 채 놀라워하자 레트라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비는 물론 신경쓰지 않았다.
"음... 그래. 자네가 내 방에서 일을 하면 되겠군."
"네?"
"... 너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군 그래."
"아. 실례."
너무 격하게 싫어서요. 왠지 뒷말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들리는 것 같다면 이상한 걸까... 어째서인지 극히 당연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격하게 싫어하는 반응이 돌아오자 레트라는 잠시 잘못 들었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음, 잘못 들은 건 아니군.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사죄의 말을 들으며 확인사살을 받은 레트라는 곧 '뭐 어떠랴' 라는 생각을 하며 생긋 웃어보였다.
"그래도 다행일세. 자네가 '협박을 받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심신미약 상태가 되어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렇다면 일을 그만두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
저 방법은 생각도 못 했다. 우와. 역시 땡땡이치기 좋아하는 사람의 두뇌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순간적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착각이 들 정도로 참신한 느낌이 드는 아이디어에 에이비는 멍하니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전하. 제가 협박을 받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안 되네. 이미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쳇."
"쳇? 지금 쳇이라고 한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 행동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레트라는 자신이 꺼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으려하는 에이비의 모습에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러자 대체 상사 앞이라는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자신의 유감을 표현하는 그 모습이 또 웃기다.
세상에. 저렇게 순진할 수가. 나중에라도 써먹지 못하도록 미리 원천봉쇄를 한 것이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생각도 못 했을 줄은 몰랐다. 어느새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며 유쾌해진 레트라는 이 소재로 놀리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재미있었으니 보상을 조금 주도록 할까.
"뭐, 어쨌든. 자네가 방을 옮기는 건 내가 불편하고. 나랑 방을 쓰는 것은 또 싫다고 하고."
"......"
부정은 안하는군. 빈 말이라도 '아닙니다!' 라는 대답이 흘러나올만도 하건만 그건 또 안나온다. 대체 얼마나 싫은거야? 이쯤되면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행동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든다. 한결같은 태도에 다시금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본인 말로는 협박때문에 두렵다고 하니."
"어? 들어주시는 겁니까?"
해고. 해고. 제발 해고! 레트라의 의미심장한 말에 혹시? 하는 희망이 고개를 드니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다. 드디어 해고당할 수 있는건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해고에 대한 희망을 가득 품고 레트라를 바라보는데 그럼 그렇지. 그가 그렇게 순순히 원하는 바를 들어줄 위인은 아니었다.
"일주일 휴가를 주도록 하지. 내 보좌관이 협박때문에 심신미약상태가 될 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조사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일을 시키면 되겠는가. 푹 쉬고 오게."
"아. 휴가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 그렇다면 그냥 내 집무실에서..."
"아닙니다. 와. 신난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이해에 감읍하옵니다."
"역사학 개론책 읽기 하는 거 다 티 나네."
"아. 티납니까?"
해고는 역시 너무 큰 꿈이었나. 조금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마자 바로 휴가를 없던 일로 하려는 레트라의 태도에 재빨리 영혼없는 대사를 읊은 에이비는 그 부분이 지적당하자 깔끔하게 인정한 뒤 그대로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올렸다.
해고가 아닌 게 불만이기는 하지만 휴가만 해도 어디인가. 한순간의 변덕일지도 모르니 이런 건 빨리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다.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에이비는 레트라가 반박할 틈도 없이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그 모습에 결국 터져버린 레트라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복도로 나온 그가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끔은 협박받는 것도 괜찮을지도. 오랜만에 집에나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