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오늘따라 왜 그래?"
미젤링과 같이 일하는 친구인 지온은 오늘따라 유독 열심히 일하는 미젤링이 이상했다. 평소에도 물론 최선을 다하는 그녀였지만, 미젤링이 이렇게 전투적으로 일에 몰입한 건 같이 일하면서 딱 두 번 있었다.
백 년 전 어느 날. 무언가에 홀린 듯 온 세상을 이 잡듯 뒤지고 뒤졌을 때, 그리고 지금. 지온은 그때의 미젤링이 겹쳐 보이면서 순간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뭐가?"
"사진.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찍어?"
"원래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아니...좀 이상해서. 꼭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잖아."
그 말을 들은 미젤링은 표정이 굳었다. 백 년 동안 같이 일했던 지온은 이상하게 잘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지금 이 상황 역시 지온이 의도한 것은 아닐테지만 그녀의 심정을 잘 짚어내었다.
"내가 뭐에 쫓겨. 쫓길 게 없는데."
"그래? 그런데 왜 넌 이 일을 빨리 끝내야 하는 것 같지?"
"내가?"
"응. 마치 약속이 있는 것마냥 일에 미쳐 있잖아."
"그럴 리가. 칩 잃어버려서 그 죄를 갚기 위해 더 일하는 것 뿐인걸."
지온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닫은 게 결코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미젤링이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션과 마찬가지로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것 뿐일 터였다.
더 캘 수 있는데 못 캐는 척. 그냥 속아주는 척.
일면식도 없는 둘이었지만 이런 면에선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저기, 지온."
"왜?"
"만약에 네가 상대방한테 약점을 잡혔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사실 절대로 말해선 안 되는 문장이었다.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걸 지 입으로 고백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미젤링의 마음은 그걸 따질 수 없을만큼 지쳐 있었다. 악마와 계약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지난 삼 일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나누면 도움이 될까 싶어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글쎄...약점이 잡혔다면 그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 어떤 상황인 건데?"
"그냥...네게 가장 소중한 걸 상대방이 갖고 있는 거야."
"누군지에 따라 다르겠지. 만약에 네가 갖고 있다면 난 그걸 그냥 줄 수도 있을거야. 관계만큼 소중한 게 없으니까."
"네가 증오하는 상대면?"
"증오를 없애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게 최선 아닐까? 그렇게까지 소중한 거라면 상대방이 내게 돌려줄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해."
"돌려줄 마음이 들도록?"
"내가 빼앗을 순 있지만 그러면 상대방 역시 내 껄 다시 뺏으려고 눈에 불을 킬 거야. 차라리 사내의 코트를 벗기는 해처럼 대하는 편이 낫겠지."
"상대방에게 친절하란 소리야?"
"가능하면. 증오를 품어봤자 네게 이로울 게 없으니까."
조언을 해주는 지온은 완벽한 천사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에 맞게 살아가는 천사였다.
그러나 미젤링 본인은 지금 현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악마에게 어떻게 잘해줄 수 있을지, 혹은 그러다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간 정말 말려들 것만 같았다.
"...있잖아. 그러다가 말려들 것 같다면 어떡하지?"
"네 중심에 옳게 행동해야겠지. 아닌 건 아니라고 따끔하게 말할 줄도 알고."
미젤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온, 고마워."
"내가 뭘."
-
똑똑똑-
디블의 말대로 늦은 밤, 미젤링의 문이 울렸다.
"....."
"보통은 누군지 먼저 물어보고 열어주지 않아요?"
"넌 줄 아니까 그냥 열었겠지."
"그런가....그나저나 오늘따라 유독 예쁘네요."
"네가 아쉬운 소리 못하도록 할 작정이라."
"고마워요. 덕분에 첫 데이트부터 너무 즐겁네요."
그리 말하며 한쪽 팔을 내어주는 디블에 미젤링은 조금 웃었다. 그나마 불이 켜져있던 집문을 닫자 온통 깜깜했다. 때마침 어둠이 내려앉아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디블이 분명 본인이 웃은 걸 봤을 테니.
"가자."
"확 날아버릴 거에요. 그러니까 한 쪽 팔 단단히 붙잡고 있어요."
"뭐? 야...!!"
디블은 예고하자마자 날개를 펼쳐 지면 위로 확 날아 올랐다.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날아오르는 디블에 미젤링은 동앗줄마냥 팔을 꽉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너 그렇게 날 거면 나도 날개 펴버릴 거야."
"안돼. 아직 펴지 마요."
"왜!!"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으로 데려가고 싶은 거니까 좀만 이해해줘요."
디블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팔에 매달린 미젤링의 몸 쪽으로 당겨 안았다.
"자, 이러면 나랑 비행하기 좀 더 수월하겠죠?"
"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고 싶은 건데..."
"있어요. 밤하늘이 아름다운 곳."
디블은 그렇게 말하며 미젤링은 더 끌어 안았다.
밤바람은 추웠고, 그걸 가르고 지나가는 건 더 추웠다. 그래서 혹시나 미젤링이 추워할까 나름대로 배려해준 행위였다.
"클로크를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많이 춥죠."
"아냐. 참을만해. 근데 그러고보니까 평소에 입던 걸 안 입고 다른 걸 입고 왔네?"
"당신한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서요. 잘 어울려요?"
"응. 의외로 수트가 잘 어울리네."
"다행이다. 안 어울리면 어쩌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디블의 심장은 굉장히 빠르게 쿵쿵 뛰었다. 그리고 미젤링은 그 심장박동을 모조리 다 들어버렸다.
"다 왔다. 좀만 참아요. 금방 지붕 위로 올라갈 테니까."
"디블..."
설마 너, 나한테 진심이니?
-
똑똑똑-
"누구세요?"
"전령입니다. 대신 받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지온은 문을 열었다. 빵모자를 쓰고 있는 전령은 큰 가방 안에서 칩 하나를 꺼내 지온에게 건넸다.
"이건 뭐에요?"
"미젤링께서 시키신 겁니다."
"아아...얼마 전에 그거."
"또 전해 드릴 게 있습니다. 이것 또한 미젤링께 전해주세요."
전령은 그렇게 말하고 한 편지 카드를 꺼내 전했다. 그리고 모든 걸 다 전해준 전령은 가벼운 목례를 하고 다시 어디론가 날아갔다.
지온은 전령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집 안으로 들어와 카드를 살폈다.
"...Double loop O?"
그럼 잃어버린 게 아니야?
미젤링은 분명 칩을 신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는 거짓을 감식하는 기계로 보내져 글자에 거짓이 배어있는지 확인절차를 밟았을 것이며, 1g의 거짓이라도 있을 시, Double loop O가 쓰여진 카드가 배송되어 왔을 것이다.
즉, 미젤링이 잃어버렸다고 한 칩은 사실 잃어버린 게 아닌 것이다.
"대체 왜?"
미젤링은 모든 천사를 통틀어 자신의 일에 가장 책임감이 있는 천사였다. 그런 천사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지온의 머릿속에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왜 거짓말을 썼으며, 잃어버린 칩은 어디에 있는 건지 모든 게 궁금했다.
칩을 잃어버린다면 큰일 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쳤다는 건...그것보다 더 큰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미젤링...대체 뭔 짓을 한 거야..."
-
"여기 앉아 있어요. 더 잘 보이는 자리니까."
디블은 지붕 위로 올라가 미젤링을 내려놓았다. 미젤링은 날아오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넘겼다.
"대체 뭘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날아온 거야?"
지붕 위에 앉긴 했지만 주변은 적막했다.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곳은 외롭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여기서 대체 무엇을 보여주겠단 건지 미젤링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거요."
디블이 손가락을 튕기자 밤하늘에 형형색색의 불꽃이 번졌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불꽃은 아름답게 타오르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어둠과 색이 조화롭게 엮어진 하나의 예술이었다.
"우와..."
"아름답죠?"
디블은 웃으며 말했다. 미젤링은 그 미소가 어쩌면 무언갈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심장이 뛸 리가 없을 테니까.
"디블."
"왜요?"
"저 밤하늘의 불꽃이 너무 예뻐."
"고마워요."
"그런데 왜 네 눈에 비치는 불꽃은 위험해 보이지?"
그 순간 밤하늘을 수놓았던 불꽃이 일제히 꺼졌다. 디블이 손가락을 튕긴 탓이었다.
"위험하다면 보지 않게 만들어야죠. 당신이 내게서 눈을 떼는 것보다 저 불꽃을 없애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뭐가요?"
"모르는 척 하지 마. 너라면 알 것 같아서 물어봤잖아."
어둠 속에서도 미젤링이 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은 올곧게 디블 자신을 향해 있었으며, 눈빛은 타오를 듯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행동으로 보여줬어요. 그런 것들을 종합해봐도 헷갈려요?"
"네 뿌리는 악마니까. 그것도 가장 매혹적인 악마니까."
뱉어내는 문장 하나하나에 불신이 가득 끼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로 인해 좌우될 수도 있는, 아주 연약한 불신들이었다.
"난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난 내가 그렇게 불신의 대상이라고 생각치도 못했네요."
"어쩔 수 없잖아. 천국의 모든 이가 너와 네 부족을 싫어해."
"그럼 당신은."
당신도 싫어해요? 당신도 나와 내 부족을 싫어해요?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내보인 호의를 모두 거짓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거에요? 내가 단지 악마라서?
디블은 말을 삼켰지만 미젤링은 삼킨 그 말 또한 알아챘다. 백 년 전에 그랬듯이.
"너도 알잖아. 난 세상을 선하게 만들 의무가 있어."
"나에게도 세상을 악하게 만들 의무가 있어요. 그런데 당신의 요구를 들어줬었죠."
아이만은 악하게 만들지 말라고 해서 건드리지 않았어요.
"제가 해야 할 의무까지 저버렸는데, 이 행동을 당신은 뭐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할 말이 없었다. 디블의 존재 이유는 악이었으니까. 그걸 저버리면서까지 본인의 요구를 들어준 행위에 대해 미젤링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하아...미젤링."
입을 닫아버린 미젤링에 디블은 먼저 말을 꺼냈다.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이 순수한 천사를 몰아세울 순 없었다. 그랬다간 곧바로 떠날 것만 같았으니까.
"내가 악마라서 못 믿겠다면. 알겠어요."
"...미안해."
"아뇨, 내겐 아직 두 번의 기회가 있어요."
"..응?"
밤하늘엔 다시 불꽃이 터졌다. 이번엔 더 크고, 화려하게. 온갖 색을 하늘에 수놓을 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여기저기서 터져 올랐다.
"두 번의 기회 동안, 내게로 넘어와요."
"뭐?"
"당신이 넘어올 수 있도록 내가 최대한 착하게 살아볼게요."
악마라는 직업은 잠시만 내려놓죠 뭐.
"당신이 모시는 절대자의 눈에도 들게 한번 노력해 볼게요."
"...그래도 돼?"
"당신만 넘어와준다면야. 노력을 해봐야겠죠."
믿고 싶지 않지만 믿고 싶은 말이었다. 악마의 말에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디블의 문장에 눈 딱 감고 알겠다고 하고 싶었다.
"조건은..."
"...."
"날 사랑하게 됐을 때 추락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줘요."
"...왜?"
"그게 더 말하기가 쉬울 테니까. 악마들 사이에 통용되는 대표적인 은유 표현이거든요."
너무 사랑해서 차라리 추락해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게, 본인을 망쳐가는 이 사랑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중독되었단. 대표적인 은유 표현이에요.
"남은 두 번 동안, 날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해봐요. 칩에만 집중하지 말구요."
"...."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그것도 미쳐버릴 정도로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나 역시 내 존재이유를 잊고 살아갈게요."
악으로 태어난 내 본능을 잊고 살아갈게요. 미칠 정도로 날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에만 흠뻑 젖어서 살아갈게요. 악마의 본능이 당신을 질려하면, 그땐 차라리 그냥 소멸해버릴게요. 당신에게 상처 주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알겠죠? 날 꼭 다시 사랑해줘요."
"....알았어."
미젤링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널 사랑하도록 해볼게. 그래서 네가 악조차 잊어버리도록 사랑을 퍼부어주려고 해볼게."
내 사랑을 얻으려 존재이유조차 버리겠다고 하는 널, 도저히 이번엔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