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영원같던 순간이 흐르고 내뱉은 대답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마치 천사의 본능인 듯, 너무나 자연스레 거절했다.
"백 년전의 그걸 되풀이하긴 싫어. 그게 이유야."
"....그거까진 안 물어봤는데."
디블은 미젤링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거뒀다. 거절당한 이상 질척거릴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더 붙잡았다간 얼마나 구차해지는지 디블은 이미 인간들로 인해 알고 있었다.
"당신 대답 잘 알았어요. 틈도 안 보이게 철저하네요."
"...상처 받았어?"
쥐어짜내듯 뱉어진 물음에 디블은 헛웃음이 터졌다. 방금까지 거절로 심장을 그어놓고는 혹시나 아프지 않았을까 뒤늦게 자비를 베풀어온다. 상처와 진통제가 이런 느낌일까...
"거절 해놓고 그걸 물어보는 거에요?"
"...."
"만약에 내가 상처 받았으면, 달래줄 방법은 있어요?"
"...."
할 말이 없었다. 미젤링 본인이 뱉어놓고도 좀 웃긴 말이었다. 상처를 입었다 말해도 그걸 잠재워줄 방법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걱정이란 장치로 인해 본능적으로 튕겨나간 말이었으니까.
"그런 걸 위선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냥 마지못해 베풀어주는 자비의 끝자락 같은 거요."
"....."
"자비를 베풀려면 그 자비를 책임질 수 있어야 진정한 선이죠."
본인의 자비를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내게 손을 내밀어요.
"내가 덥석 물어버리면 어쩌려고."
"...."
미젤링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악마가 자비를 붙잡고 매달려 온다는 게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디블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핏자국은 대충 닦았는데 상처는 회복 안 됐을 거에요. 올라가면 꼭 치료받아요."
"...응."
"그리고 다신 우리 구역으로 오지 말아요. 미친놈들 소굴이니까."
"그러면 약속 하나만 해줘."
갑작스런 제안에 디블은 몸을 돌려 미젤링을 바라보았다. 꽂혀오는 시선이 바르고 곧았다. 백 년전의 자신을 굴복시킨 그 눈빛 그대로였다.
"...뭔데요."
"내가 도망치기 직전에 한 아이의 심장을 찍었어."
"그래서요?"
"...아이만큼은 악에 물들이지 말아줘."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세상을 선으로 뒤덮겠다는 목표를 가진 천사들처럼, 악마들 역시 온 세상을 악으로 뒤덮겠단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악하게 인간을 복종시키는 것이 악마들의 존재이유였다.
그런데 저 천사는 악마들의 존재이유를 버리라 한다. 악으로 물들이는 목표를 버리라는 걸 조건으로 내걸고 본인과의 약속을 지켜달라 부탁한다.
얼토당토 않은 얘기였다. 천국의 인간들을 악하게 만들라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제발...."
"하아..."
그러나 천사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미 백 년전에 지옥까지 덮고도 남을만큼의 선을 이 악마에게 보여줬으니 이 악마는 그 천사의 말이라면 일단 한 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만큼은 지켜달라 이 말이죠?"
"응, 부탁해. 아이잖아."
"알았어요. 대신 우리 구역엔 얼씬도 하지 말아요."
"...응."
디블은 그 말을 끝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새까만 날개가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과 잘 어울려 들었다. 새까만 날개로 먹구름을 휘젓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군."
션은 끝없이 늘어진 침대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인간세상으로 내려간 영혼의 몸들이 더 이상 이곳의 침대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저 까맣게 타버린 재만 남아 지옥으로 가 버렸다는 걸 알렸다. 차라리 세상을 여행하느라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이 반가웠다.
"...션."
"...미..젤링?"
금발의 생머리, 청록색의 맑은 눈. 우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수한 아우라를 내뿜는 이는 다름 아닌 미젤링이었다. 션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 하등 달라진 것이 없었다.
"너 몸이..."
"좀 치료해줄래?"
달려가 가까이 바라본 미젤링의 모습은 꽤나 심각했다. 온 몸이 여기저기 찢기고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여기까지 날아온 게 기적에 가까워 보였다.
션은 빈 침대에 미젤링을 눕히고는 옷의 주머니에서 약물을 꺼냈다. 영혼들을 돌아보다 갑자기 다쳤을 때를 대비해 사용하는 약물이었다.
"좀 따가울 거야."
약물 뚜껑을 열고 미젤링의 몸 곳곳에 부었다. 약물은 빠르게 스며들어 미젤링의 상처를 치료하고 봉합했다. 상처가 사라진 미젤링의 몸은 다시 예전의 새하얀 피부로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올라오기 직전에 D구역의 슬럼가를 좀 들렀어."
"뭐?!"
D구역의 슬럼가라면 악마들이 죽치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곳에서 재만 남은 영혼들 중 절반은 D구역으로 가서 태어난 영혼들이었다.
"제정신인거야?"
"아이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걔마저 악에 물들게 놔둘 순 없잖아."
"하아...너 이 정도면 그냥 죽을 수도 있었어."
천사가 다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그만큼 한번 다치는 순간 생명에 치명적이었다.
"거기서 바로 도망쳐 날아온 거야?"
"그건 아닌데..."
"그럼?"
"....."
미젤링의 입이 한순간에 닫혔다.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악마조차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는 D구역. 그놈이 없을 리가 없었다.
"설마..."
"맞아."
"그놈이 뭐라고 했어?"
"아니...안 했어."
미젤링은 디블에 관해 입을 닫았다. 션이 그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온 천국이 아는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악마새끼가 사람 홀리고 다녀서 천국으로 오는 영혼이 줄어들었다고 불평했다.
"그놈이 널 구해준 거야?"
"따지고 보면..."
"그래...?"
좀 의아했다. 본인 구역에 들어온 천사를 왜 굳이 살려 보내지? 뭔가 얻어낼 게 있었나?
"걔가 너한테 원하는 거 있어?"
"어, 있긴 있었어."
다시 잘해보는 거.
"그래서?"
"거절했지."
다시 잘해볼 생각 없으니까.
"그러더니?"
"뭐가?"
"그냥 그렇게 보내줬어?"
"응. 그냥 본인이 먼저 날아가던데?"
상처 받았나봐.
미젤링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들린 카메라만 만지작 거렸다. 떨어트릴 때 충격으로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왜 그래?"
"응?"
"왜 그렇게 착잡한 표정이냐고."
"무슨."
"날 속이려 드는 거야?"
"아냐. 내가 널 왜 속여."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션은 미친듯이 눈치가 빨랐다. 덕분에 필요한 걸 얻을 때 좋았지만 그와 동시에 감정을 숨기질 못했다. 아무리 숨기려 들어도 결국 션은 눈치채고 그 원인을 파헤쳤다.
"진짜? 진짜 숨기는 거 없어?"
"응. 없어."
"알았어. 네가 없다면 없겠지."
션은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미젤링은 저게 정말 몰라서 그러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았다. 눈치가 빨라 단지 숨기고 싶은 걸 숨기게 놔주는 거였다. 션은 그런 아이였다.
"카메라가 스크래치가 꽤 많이 났네."
"그러니까. 여기도 열렸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미젤링의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 사람들의 심장을 찍은 걸 모아둔 칩이 사라져 있었다.
"왜, 뭐가 없어?"
"칩...사람들 심장을 찍어놓은 칩이 없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데?"
"선하게 만들어놓은 마음이 다시 악해져."
그리고 다시 악해지는 것만큼이나 되돌리기 힘든 것도 없지.
"나 다시 가봐야겠어."
"벌써?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거 아니야?"
"그게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더 큰일이야. 뭔지도 모르고 함부로 만지다가 그 사람한테 다 몰리면..."
미젤링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악한 마음들이 모이면 어떤 괴물이 나올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졌다.
"다시 가서 찾아봐야겠어."
"어딜?"
"...."
"설마..."
미젤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칩만큼은 빼앗기면 안 되었다.
"너 거기 다시 가면 죽을 수 있어."
"그럼 나도 여기로 아예 올라오고 말지."
미젤링은 자리에서 일어나 빨리 날개를 펼쳤다. 새하얀 날개가 유난히 돋보였다.
"가볼게."
"잠깐 미젤링!"
"...?"
"제발...그 악마한테 엮여들지 마."
악마랑 엮이면 천사의 날개는 까맣게 타올랐다. 타락한 천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악에 있어 눈을 뜬 천사들이 악마들보다 더했으니까.
"날개가 새까매진다고."
"알았어. 절대로 엮이지 않을게."
미젤링은 어깨 위에 올려진 션의 손을 맞잡았다. 꽉 쥐어 흔드는 손이 얼마나 결연한지 보여주었다.
"...."
"걱정하지 마. 진짜 진심이니까."
절대로 다신 엮이지 않을 거야.
-
"끄으으으...."
"그러게 왜 그 천사를 농락해서..."
건장한 사내들...아니, 30분 전까지 건장한 사내들이었던 인간들 다섯이 핏덩이가 되어 콘크리트 바닥을 나뒹굴었다. 여기저기 흥건하게 고인 핏물이 30분 동안 그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보여주었다.
"...무슨."
"왜 이제 오느냐."
골목길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안은 잔인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평소에 나른하고 매혹적이던 악마인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마를 다 덮는 흑발의 곱슬에 모두를 홀리는 은빛의 눈망울. 나른하고 매혹적인 특유의 분위기까지. 모두가 디블이었다. 몸에 튄 핏방울마저도 아름답게 피워내는, 모두가 디블답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나 벌어진 상황은 그답지 않았다. 외관은 여지없이 디블 그 자신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 든 무언가가 바뀐 듯 했다. 슬림한 몸에서 무슨 힘이 솟아 이 다섯을 초주검으로 만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겝니까. 디블께선..."
"나답지 않다고 말할 작정이면 그만두거라. 그런 말 듣자고 부른 게 아니니..."
디블은 손을 들어 안의 말을 저지했다. 쾌락을 선사해 인간들을 조종하는 평소의 본인과 다르게 미친듯한 고통으로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본인답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처리하거라. 꼴도 보기 싫은 걸 직접 패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밑의 인간들을 시키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분이 안 풀릴 것 같아서 말이다."
그 천사를 다치게 한 놈들은 직접 패야지.
다친 미젤링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올라가다 말고 다시 내려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소한 그 꼴로 만들어 놓은 놈들은 족쳐야 할 것 같아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니 친절하게도 이 다섯놈들이 미젤링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얼마나 공격력이 셌는지 자랑하는 꼴에 디블은 핀트가 끊어진다는 게 무엇인지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의 죽음 직전으로 그들을 내몰고 있었다.
"저들은 내 악마적 본성에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게 악마라 간신히 정신줄 잡고 숨을 붙여놓은 것이니.
"...네."
아...눈빛이 무언가 홱 돌아버린 듯 한데.
대체 무엇이 디블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일단 보통 평범한 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디블은 그런 걸로 이성을 잃은 악마가 아니었으니까. 이 구역에서 제일 젠틀한 악마가 그였다.
"...어?"
"왜 그러느냐?"
"칩이..."
이 구역에선 절대로 생산되지 않는 칩이었다. 하트 모양에 화살을 꽃은 문양이 새겨진 칩은 피가 묻었으나 고귀해 보이는 자태를 뽐냈다.
"...이리 주거라."
"예?"
"이리 주래도."
디블은 안의 손에 들려있던 칩을 뺏었다. 이 칩이 누구건지 디블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게 기회를 주려고 온 세상이 안달한 걸지도 모르겠구나."
그 천사라면 책임감에 반드시 찾아올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