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아 보이는 국수집에서 준혁과 한애리가 국수를 먹고 있다.
사방을 살피던 한애리가 신이 나서 준혁에게 말한다.
“와, 여기 내가 지난번 선배님 모셨던 그집이랑 비슷한 분위긴데요? 우리 확실히 통하나 봐요!”
“그냥 여긴 국수가 맛있고 추억이 깃든 곳이라.”
“추억이요? 어떤 추억인데요?”
“뭐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아이~ 말 시작하셨음 끝내주시는 게... 아니요, 됐어요! 추억어린 곳을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한애리의 감개무량한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수 먹기에만 집중하는 준혁.
그런 준혁을 보면서 한애리는 그가 자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걸로 여겨져 생각만으로도 기쁜 표정이다.
한애리가 크게 국수를 떠 입에 넣고, 준혁은 준혁대로 열심히 국수 먹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국수를 다 먹고 나온 그들 곁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힐끔거린다.
그들 중엔 또 어김없이 둘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이 보인다. 신경 안 쓰는 두 사람.
한애리가 준혁의 팔에 자기 팔을 두르자 화들짝 놀라 자기 팔을 빼려다 한애리의 팔을 쳐내게 된 준혁. 그러다 미안한지 어정쩡하게 한애리의 팔을 잡는데 그게 또 사진으로 찍히고 있다.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까 돌담길도 좀 걸어요, 선배님! 덕수궁 돌담길 유명하다죠?”
“난 덕수궁 돌담길 유명한 건 모르겠고, 여기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님 추모상이 있는 건 알아요.”
“누군데요?”
“이영훈님이라고. 우리 아버지 세대가 좋아하는 노랠 많이 만드신 분.”
“아, 그럼 그분 추모상 보러 가요, 우리!”
하면서 신나서 앞서가다 다시 돌아와 준혁의 손 잡아끈다. 아까 사진 찍었던 그 일행이 다시 쫓아오며 그들의 사진 계속 찍고 있다.
정민이 데스크에서 오준혁과 한애리 스캔들 관련 글 읽고 있는데 남선배가 들어오며 외친다.
“이제 오준혁이 한애리랑 연애하나 보던데 알고 있었어? 그때 캠핑장 갔을 때부터라던데?”
정민 표정 안 좋고, 정민을 바라보던 남선배는 얘 왜 이러지 하는 표정 짓고 있다.
“하여간 오준혁은 정말 스캔들의 아이콘이다! 이제 한애리까지! 근데 비결이 뭘까? 인기는 급락인데 여자들은 통 끊이질 않으니. 게다가 다들 잘 나가는 여자랑만.”
그러다 이번엔 연극적인 어투로 장난치기 시작한다.
“남자도 나처럼 얼굴과 몸매인가, 아님 돈인가? 이것이”
정민이 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내뱉는다.
“우린 이런 기사 내보내지 말죠! 사실도 아닌데.”
남선배가 정민 얼굴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정민은 목이 마르는지 옆에 있던 냉커피 원샷하고, 그 모습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남선배.
잠시 후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이다 급기야 알듯 모를듯한 미소 짓는다.
집으로 돌아온 정민은 오준혁에 대한 기사를 컴퓨터로 찾아보고 있다. 그의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나온 기사들을 꼼꼼하게 일일이 다 살펴보고 있다.
그 중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합숙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 간 왕래가 없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걸 보고 삶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는 준혁의 고백, 그리고 준혁이 여자 아이돌 생명을 구했다 등 여러 기사가 있다.
그리고 그를 인터뷰했던 잡지들이 옆에 가득하다.
정민은 정확하게 준혁의 문제가 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충격받은 것, 어려서 연예인 생활을 시작해 정서적으로 힘들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 등을 새삼 깨닫게 됐다.
또 그가 사랑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도 어찌 보면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보상심리였다는 걸 알게 됐고, 준혁을 좋아한다면서도 그의 아픔에 대해선 전혀 나 몰라라 했던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그의 속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소문으로만 안 것으로 그를 판단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정민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컴퓨터를 보다 잡지를 뒤적이다 마음의 번잡함을 드러내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마구 큰소리 내며 흐느낀다.
정민이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헤어샵에 와 있는데, 뒤에서 보조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린다.
“개 진상! 지 애인 머리숱 없는 게 우리 탓이냐?”
“글게 말이야. 머리숱 없어 택했을 땐 언제구? 그런 말 있잖아. 그거 없는 남자들이 그건 잘 한다며? 크크~ 그래서 택한 거 아니겠어?”
“내 말이! 또 바뀌었어! 델고 오는 남자가 도대체 몇 타스냐? 열 손가락이 모자라네~”
“이런 진실 사람들 알랑가 몰라? 교양 있는 척하는 미술관 대표가 껌 씹고 뱉듯 남자 갈아치우는 거?”
“야, 저 여자가 우리 본다. 그만 말해!”
정민의 눈에 저쪽에서 해람 대표 선우진과 젊은 남자가 희희낙락하는 모습 보인다.
그녀를 보는 순간 정민은 준혁에게 스폰에 대해 물었던 자신이 얼마나 준혁에게 한심스럽고 가벼운 여자로 보였을까, 아니 그것보다 얼마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또 깊이 반성하고 있다.
자기도 선우진에 대한 여러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직접 목격하고 보니 그저 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그러면서 오준혁이 괜히 또 그녀의 희생양이 되어 피해를 본 것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눈을 돌리다 또 다른 쪽에서 한애리가 머릴 손보고 있는 게 정민의 눈에 들어온다. 정민은 머리 손질을 마치자마자 한애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정민이 도착하자 한애리가 반갑게 아는 체한다.
“아, 지난 번엔 식사도 안 하시고 그냥 가서 좀 섭섭했어요. 속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네. 괜찮아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세요?”
“네. 말씀하세요! 아, 여기서 말씀하시기 그러면 좀 기다리실래요? 이제 다 끝나가니까.”
“네. 기다릴게요.”
정민이 말을 마치고 의자가 있는 쪽으로 가 앉는다.
그런 정민의 모습 보면서 의미 있는 미소 엷게 짓고 있는 한애리. 기분이 좋아 보인다.
정민과 한애리가 카페에 앉아 있다.
한애리가 정민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고, 정민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한애리가 먼저 입을 연다.
“물어볼 거라는 게”
“우선, 전 기자긴 하지만 오준혁 씨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말씀부터 드릴게요.”
“아, 그래요? 선배님 어렸을 때 어땠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훈남에 츤데레 매력 넘쳤나요?”
“한애리 씨! 오준혁 씨한테 관심 있나요?”
“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거죠?”
“오준혁 씨는 한애리 씨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네?”
한애리가 좀 놀란 얼굴을 하다 곧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녀의 행동과 상관없이 정민이 말을 잇는다.
“제가 한애리 씨 사촌오빠를 만난 건 말 그대로 만남이었을 뿐이에요. 이영진 씨에게 아무런 사심 없어요.”
“아, 그러셨구나? 물론 그럴 수 있죠. 사귀는 거 아니어도 만날 수 있죠.”
“내가 진짜 관심 갖고 있는 사람은 오준혁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걸 한애리 씨에게 말하고 싶어요. 아니 말해야 할 거 같았어요.”
“저한테 관심 있느냐고 물으셨고, 본인도 관심 있다고 하셨으니 같은 출발선 아닌가요?”
“......”
“진부하게 내가 먼저 관심 가졌으니 넌 꺼져라 뭐 이런 뜻은 아닌 거죠? 제 생각엔 같은 처지에 이런 말 하실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오준혁 씨와 나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모르겠는데, 이건 좀... 전 그냥 제 방식대로 오준혁 씨를”
“절대 감당 못 해요. 한애리 씨는 오준혁을.”
“그건 제가 신경 써야 할 제 문제고요! 그런 염려까진”
“전 분명히 말했어요. 제 여동생과 또래 같아 동생 같은 마음으로 말하는 거에요. 괜히 힘 빼지 말고”
“염려해주셔서 감사하단 상투적인 말씀은 드리지 않을게요. 저도 한 번 비겁한 카드 쓴 적 있으니까 오늘은 이해할게요. 그런데 다음에 이런 말 들으면 못 참을 거 같아요.”
하곤 한애리가 벌떡 일어난다.
겉으론 쿨 해 보이지만 내심으론 불쾌함을 누르고 있는 게 정민의 눈엔 역력히 보인다. 정민은 무표정하게 가만히 앉아 있다.
준혁이 방 안에서 폰으로 영화 시청 중이다. 영화를 보던 준혁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꺽꺽거리며 울고 있다.
그리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는데, 준혁이 급하게 눈물을 닦고 애써 진정한 다음 대답한다.
“네.”
문이 열리고 승철이 반가운 얼굴로 들어온다.
“아찌! 아니, 형!”
“오, 승철이! 잘 왔다! 이번엔 얼마 있을 거야?”
하는데 승철이 놀란 눈으로 보면서 가까이 오더니 준혁의 눈 주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울었어요, 또? 가만 보면 준혁 형 울보네요!”
“울긴. 내가 왜 울어?”
준혁 폰 들여다 보더니 승철이 다시 말한다.
“형, 영화 보면서 울기도 하는구나~ 진짜 감성 쩔어요! 그래서 그렇게 좋은 곡을 만드는 거구나!”
하면서 감탄 어린 눈길로 준혁을 쳐다보고 있다.
그때 선미가 들어오더니 승철을 데리고 나가면서 준혁에게 말한다.
“죄송해요! 야가 아직 철이 없어서.”
“아니야. 승철이가 오니까 갑자기 사람 사는 집 같고 좋네. 맛있는 거 많이 해줘.”
선미와 승철이 나가자 준혁이 한시름 놓으며 혼잣말한다.
“이럴 때 뭉치라도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보고 싶다, 뭉치야!”
다시 폰을 보다가 영화 중지하고, 기사 찾아 읽던 준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기 음악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정민과 같은 스포츠 신문사 남해룡 기자가 쓴 기사다.
[무릇 음악인은 음악으로, 연기인은 연기로 인정받고 비판받고 그래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그동안 우린 가수 오준혁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고... 그의 음악성만큼은... 우리에게 다시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곧 있기를 기대해...]
그때 준혁의 폰이 울린다. 대표라 돼 있는 거 보고 전화 받는 준혁.
“네. 대표님.”
“준혁아! 기사 봤니? 너 음악성에 대해 아주 길게 기사가 났어! 느낌이 아주 좋다!”
“네. 방금 봤어요.”
“이제 슬슬 분위기 뜰 거 같아. 조그만 더 기다려보자! 응?”
“네.”
“그리고 참 승철이도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오늘 휴가 줬다! 며칠 쉬다 오라고. 집에 갔지?”
“네. 왔어요.”
“그래. 이제 다 잘 될 거야. 다 니 조상님 덕이다! 아니지! 엄밀히 말해서 니 덕이지! 고맙다 준혁아!”
전화 끊고 준혁이 생각에 잠긴다.
꿈인지 뭔지 모를 희한한 상황을 통해 뜻하지 않게 승철과 선미를 만나게 됐고, 승철이가 가수의 꿈을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집으로 불러 들였다가 가수로 트레이닝까지 받게 된 일을 떠올린다.
자기랑 비슷한 환경에 비슷한 나이에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승철과의 만남이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오묘한 구석이 많은 거 같단 생각을 하고 있는 준혁.
수호천사라는 할아버지, 보조 수호천사라는 소녀,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녀를 준희라고 불렀던 걸 새삼 떠올리면서 갑자기 준혁의 눈이 크게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