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함께 달려온 독자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몇 가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거다. 예를 들자면, “그래서 한여름 전공이 뭔데?”와 같은 것들. 그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한다.
Q1. 여름의 전공은 무엇인가요?
여름은 스무살의 봄, 약 2년간의 인도네시아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한 달 정도는 떠오르는 그리운 기억들에 시달려 앓았다. 그 다음 달에는 조금이나마 기력을 찾아 천천히 인도네시아에서 지내며 쌓아뒀던 기록들을 들춰봤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약속을 잡아 바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날도 평범하게 엄마 손에 붙잡혀 끌려나온 날이었다.
“요즘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온종일 방에만 있으면 안 답답해?”
아침 일찍부터 여름을 흔들어 깨웠기 때문이다.
“엄마 사야할 게 많아서 여기저기 들러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거면 같이 나가서 엄마 좀 도와줘.”
사유는 간단하게 짐꾼 정도.
한국에 온 후 외출을 한 기억이 손에 꼽았고, 그나마 나왔던 날들도 전부 가까운 거리만 다녀와 대중교통이라곤 버스만 타봐서 그런가. 여름은 너무 오랜만에 겪는 혼잡한 지하철에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도 깨질 거 같이 아픈 게 지하철역 안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차오르는 한숨을 꾹꾹 참으며 승강장 앞에 서있을 때, 엄마가 여름의 어깨를 슬슬 쓸었다.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음 더 어지러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 사람이 너무 많아 당황했던 여름은 고개를 숙였고 그 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수십 개의 발들만 시야에 가득 차 더더욱 토할 거 같았다. 그래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역 안을 둘러봤다. 일단 눈앞에 있는 스크린 도어부터 눈에 담기로 마음먹고 바닥에 있는 점자판을 따라 밟으며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었다.
그 사람이 꽃구경을 간대요.
뭐가 좋아서 가냐 물었더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하더군요.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잖아.”
날 그런 눈으로 바라만 봐준다면
잠깐 피었다 시드는 삶일지라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꽃구경 중, 서덕준
그러다 봤던 시는 여름의 인생이 됐다.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잖아.”
스크린도어에 적혀있던 시. 보자마자 눈에 들어와 잔상처럼 아른거리던 한 구절.
여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2년간의 생활을 담아뒀던 캠코더를 켰다.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는 것. 나에게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건,
“엄마. 나 영상 편집 배워볼래.”
그건 아마 내가 사랑으로 담은 순간들. 더 생생하게, 아름답게, 나답게 사랑을 기억하고, 표현하고 싶어서 영상을 택했다. 그렇게 영상 편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여름 전공이 뭔데?”
여전히 누군가 묻는다면,
“영화하러 왔습니다.”
여름은 씨익 웃으며 시원하게 올라간 입 꼬리와 함께 답하곤 한다. 영화과 연출 전공 17학번 한여름입니다.
여름이 여태 만들었던, 그리고 앞으로 만들 어떤 영화중에서도 가장 많이 신경 쓴, 최대치의 노력을 쏟아 부은 이번 영화. 오직 제연만을 위해 만든 영화.
무턱대고 시작해 혼자 고군분투하며 며칠 밤을 새 시나리오를 작성하던 것도, 캐스팅을 위해 전화를 쉴 새 없이 돌리던 것도, 촬영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 동네 분들을 찾아다니며 능청스레 굴던 것도, 장비와 소품들을 한가득 싣고 하동으로 나르던 것도, 연출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업체에 컨텍하고 촬영 시작 일주일 전부터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던 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밤샘을 하며 가편집부터 본편집까지 계속 달려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 영화엔 사랑이 녹아들지 않은 부분이 단 한 순간도 없다는 걸 네가 알까? 아니, 내가 네게 전할 수 있을까?
처음 편집을 배울 때, 살아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화면에 보이는 그리운 사람들, 순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받아 뭉클해졌던 순간이 있었다. 졸업할 학년이 되어 그 감동에 익숙해졌을 때, 받을 사람을 향한 마음이 차고 넘쳐 어느 때보다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소중한 순간이 찾아왔다. 수많은 외주로 실력이 다져졌던 지난날들의 고생이 한 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원하는 대로 작업물의 결과를 내고, 편집할 수 있다는 건. 스무살의 봄, 여름이 가장 간절히 바라던 미래였기에.
온전히 나다운 작품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에 할 수 있는 분야의 것들은 전부 본인이 했다. 그래서 많은 역할들 옆엔 여름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
미술감독 차정민
촬영보조 박다빈
촬영감독 권재야
음향감독 주의영
고마운 인연들, 소중한 내 사람들이 나오고 나면, 그 뒤론 전부 여름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한여름
편집담당 한여름
조연출 한여름
그리고 마지막 대망의 총감독도,
감독 한여름
음…, 여긴 다르게 쓰는 게 좋겠다. 엔딩 크레딧 장면을 편집하며 텍스트를 넣던 여름의 손이 백스페이스를 여러 번 치고, 다른 단어를 적었다. 이제야 여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렌더링 돌리고, 인코딩까지 하면 정말 끝. 완성이다.
“한여름 렌더링 돌렸어? 우리 떡볶이 시켰는데 와서 같이 먹어!”
때마침 들려온 의영의 목소리까지 완벽했다.
Q2. 제연의 학번이 더 높은데 어떻게 제연이 더 어린가요?
제연의 성격을 여태 겪어본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제연은 완벽주의자이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완벽주의자? 아니. 제연은 계획조차 완벽하게 수립하는 치밀한 완벽주의자다. 주변 사람들은 한 번쯤 제연이 완벽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게 아닌가 합리적 의심을 해본 전적이 있다.
실제로도 제연의 삶은 계획과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단 한 순간 빼고. 이건 아마 모두가 알 테니 생략하도록 하고. 아무튼 빠르게, 효율적으로,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제연은 국제중에 입학했다. 또, 한복 스타일의 교복으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었던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는 목적이 따로 있었다. 바로, 조기졸업.
“오늘 너 오전 강의만 들으면 끝이지?”
“응.”
“강의 끝나고 학식 먹으러 가자. 오늘 학식 메뉴 대박.”
“나 오늘 고등학교 가.”
“고등학교? 왜? 선생님 보러 가냐?”
“아니. 졸업사진 찍으러.”
우리의 이제연, 목적을 달성해 대학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1학년 2학기 도중 졸업 사진을 찍으러 고등학교에 당당하게 방문한 아이다. 생일도 빠른 편이라 만 19세가 차는 스무살의 봄, 제연은 군대에 갔다. 남들이 들으면 조기졸업으로 군 휴학 2년 중 1년을 번 것과 마찬가지라며 부러워하겠지만, 전부 짜여있던 미래 계획 중 하나였기에 제연은 덤덤했다. 목표를 세웠으면 이루는 건 당연하지 뭔 소릴 하는 거야. 정 그렇게 부러우면 본인들도 나처럼 살았어야지. 성격조차 참 제연했다.
“나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거 있는데. 해줄 거야?”
“아직 생일 한참 남았잖아.”
“해줄 거지? 나 원하는 거 말해도 되는 거지?”
“뭔데?”
“우리 제연이가 생일날 하루 종일 누나라고 불러주기!”
“……그건 기각.”
어쨌든 친구들보다 1년 일찍 대학에 간 제연은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간 여름보다 한 살이 어리다.
“근데 진짜 서울엔 언제 오려고?”
“아직 고민 중인데?”
물론 여전히, 아마 앞날에도 꾸준히 반말을 쓸 예정이긴 하다.
“매번 물어볼 때마다 고민 중이래. 그러다 거기 살겠다.”
“그거 완전 좋은 생각인데?”
“…”
“장난인 거 알지? 오래 있어도 올해까지만 있을 거야.”
“거긴 어때? 계절 바뀌는 게 그렇게 예쁘다고 맨날 신나서 얘기하잖아.”
“아……. 아직 눈 오는 날씨도 아니고, 비슷해.”
잠깐 동안 대답하지 못했던 공백이 어색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항상 사람이 신나있는 게 더 이상하다 생각하며 넘겼다.
“웬일이야. 하루하루 엄청 달라진다고 이것저것 잔뜩 말하더니.”
“그냥. 오늘도 도서관이야?”
“응. 지금 잠깐 나왔어.”
“또 도서관 뒷길에 있는 벤치야? 거기 진짜 좋아하나보네.”
“나중에 와봐. 조용해서 아무도 없고 좋아.”
여름과 통화를 할 때면,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할 때보다 생동감은 없지만 조곤조곤 대화할 때마다 들려오는 푸스스 웃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해지게 해서 좋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곳이라 좋은 건, 여름이 전하는 소리가 잘 들려서 그런 거 아닐까.
“시험 언제라고 했지? 얼마 안 남았던 거 같은데.”
“이거 휴학생이 재학생 놀리는 거 맞지?”
“그럴 리가? 응원해주려고 그러지.”
“다음 주 월요일부터.”
“헐 진짜 얼마 안 남았네? 한창 다들 벼락치기 시작할 시즌이잖아?”
“그래도 이번에 시험 몇 과목 안 봐.”
“듣던 중 다행이다. 얼른 시험 끝났음 좋겠다!”
“그러게.”
그러게. 이번 시험 끝나면 얼굴 좀 보여주려나. 벤치에 앉아 다 마신 빈 캔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 쓸어보던 제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들어갈 때 됐지 않아? 보통 이만큼 쉬었으면 다시 공부하러 갔던 거 같은데. 열심히 공부해! 또 연락할게!”
잠깐의 적막 끝에 여름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사라진지 오래였다. 요즘 계속 이렇다. 먼저 끊자는 얘기를 잘 안하는 여름이 어느 정도 통화하고 나면 알아서 정리하고 끊는다. 이게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아닌데, 괜히 뭔가 휑한 것도 같고 좀 허무한 것도 같고. 이런 게 서운하다는 건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 왜 그래 이제연.
스스로도 어이없어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은 제연이 손으로 머리를 털며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공부나 해야지. 여유부릴 시간이 어디 있어.
‘시험 잘 보라는 인사는 시험 보는 날 해줄게! 공부 파티잉!!’
문득 울린 핸드폰 알림에 화면을 봤다 밝게 웃었다. 서운함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앙증맞은 메시지가 반기고 있었다.
Q3. 제연에게 생긴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제연이 여름을 만나고 변한 점을 말해보라면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싫어하던 단어, 답변이던 ‘그냥’이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먼저 안부를 묻고, 일상을 궁금해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 더 이상 시간낭비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한여름 한정이긴 하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름도 구경하고, 손꼽힐 정도로 노을이 예쁜 날이면 어쩌다 한 번씩 사진을 찍기도 한다. 제일 쓸모없는 짓이라 생각하던 게 하늘 보는 거였으니 말 다했다. 덕분에 전공 서적들이나 원문으로 된 자료들 스캔 잔뜩 떠둔 사진첩에 어색하게 한 장씩 하늘 사진이 낑겨 있다.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습관도 생겼다. 이것도 한여름 한정. 원래 눈치가 빠른 편이라 관심 가지고 여름을 대하니 더 빨리 상대방을 알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연애를 해야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도 폭넓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어색함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달라진 걸 꼽자면, 제연이 받아들이는 언어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평생 알 수 없을 거라 장담했는데,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 사이에 조금씩 시의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당신이 나의 들숨과 날숨이라면
그 사이 찰나의 멈춤은
당신을 향한 나의 숨 멎는 사랑이어라.
호흡, 서덕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며 이 작품을 소개해줬던 여름에게 참 고마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너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늘은 물러나고
들꽃이 피고 햇볕이 번지고 나는 흔들리지.
네가 웃는 소리에 왜 갑자기
바람에선 여름 향기가 나?
네가 살짝 미소 지었을 뿐인데
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피어나고
왜 푸르른 너의 입꼬리에서
이렇게 여름은 시작되느냐고.
이렇게 여름은 시작된다, 서덕준
덕분에 제연은 최근 서덕준 시인의 시들 중 여름이 제목에 들어간 시들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었다.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도둑이 든 여름, 서덕준
이건 가장 꽂힌 제연의 최애 시다.
시를 곱씹어 생각하고 품 안에 담아두기를 추천한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더니, 여름과 제연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쏙 닮았다. 여름이 완성할 영화와 제연이 여름을 짙게 떠올리는 시마저도. 이건 독자들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