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 했다.
“저번에 추천해줬던 책 읽어봤어요?”
“응. 다 읽고 반납했어.”
“그럼 새로운 책 추천해줄까요? 얼마 전에 읽은 책인데 진짜 좋았거든요.”
“그래. 제목이 뭔데?”
조곤조곤 대화하는 이 시간이 너무 사랑스러운데 어떡해.
“지도에 없는 마을이요.”
“소설이야?”
“아뇨, 소설은 아니고 그냥 일반 인문학 책이에요.”
“웬일로? 문학 좋아하잖아.”
신경 안 쓰는 척 하면서도 이미 시선 가득 나를 담고 있고, 모르는 척 하면서도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는 이 모습이 너무 제연다운 사랑인 걸 어떡하냐고.
“서점 갔다가 책 제목이 흥미로워서 산 건데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다들 살면서 한 번쯤은 해적 꿈꾼 적 있잖아요. 안 그래요?”
“글쎄. 해적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
“헐. 진짜 거짓말. 유치원 다니는 애기일 때도 없다고요? 캐리비안의 해적 보고도?”
“기왕이면 해적 말고 선장 해야지. 근데 은근슬쩍 말이 짧아진다?”
음…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아직 내 나이도 제대로 몰라서 연상 흉내 내는 발칙한 모습도 사랑한다고 치자.
“그런 김에 저 말 놔도 돼요?”
“왜. 말 놓고 싶어?”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나한테 말 높여 줄래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글쎄. 언제부터 아랫사람이 말 높이는 게 신기한 일이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그게 무슨,”
“아무리 연하가 귀엽다곤 해도 그렇게 당돌하게 누나 소리 빼먹는 건 별로다 제연아?”
“아니 언제부터 누나였어…요…?”
“언제긴. 태어났을 때부터지. 어어? 진짜 말 높이는 거야?”
“……높여달라면서요.”
“이제 와서 무슨 존댓말이야. 근데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누나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
“누나. 여름 누나. 됐어?”
억울함을 퉁치기에 과할 정도로 넘치는 귀여움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근데 민증 까봐야 하는 거 아냐? 진짜 나보다 나이 많다고?”
귀엽잖아. 이미 다 지난 여름이 다시 찾아오기라도 한 듯 푸르른 기운이 넘쳐흘렀다. 여름은 오랜만에 잠들기 전 미친 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푹 잠들지 못해 꿈을 꾸더라도 기분 좋은 꿈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달다. 한계치를 넘어설 만큼 잔뜩.
제연은 요즘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승원의 반응은 그라데이션처럼 변화했다. 놀랐다가 놀렸고, 생각보다 오래가는 모습에 경악했다. 지금은 제연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만 봐도 까무러치게 울 것 같다 말했다.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난다는 게 이유였다.
“또, 또 읽고 있어. 또!”
“시끄러. 왔으면 조용히 앉아.”
“너 이러다 학교 도서관 800번대에 있는 영미소설 중에 안 읽은 게 없겠어.”
“나쁘지 않네.”
“어디서 거지같은 말버릇만 배워 와서. 너 그 나쁘지 않다는 말 금지야.”
하나 더 하자면 요즘 제연이 자주 내뱉는 말인 나쁘지 않다는 것도 죽을 만큼 듣기 싫었다. 제가 아는 이제연은 죽어도 긍정 넘치는 류의 말을 옹호할 사람이 아닌데. 차라리 옹호하고 그런 사람들을 편드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왜냐고? 그걸 본인이 직접 사용하고 있으니까.
“…”
물론 전부 표현하진 못했다. 지금처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누구 때문에.
“야, 알았어. 취소. 누구 하나 세상에서 소멸시킬 듯이 쳐다보네.”
그냥 속으로 삭히면서 착한 내가 얘 친구해주지 누가 해주겠나 하고 마음 수련이나 신나게 하며 지냈다.
“그래서. 기말 발표 할 책은 정했어?”
“아직.”
“여태 읽은 책 중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너 기말 발표 때문에 그렇게 미친놈처럼 책 읽는 거 아니었어?”
“미친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아직 없어. 그래서 계속 읽고 있잖아.”
“징하다. 그냥 어느 정도 괜찮다 싶으면 해.”
승원의 입장에서만 열심히 참고 있는 거였지 사실상 못하는 말이 없긴 했다. 전부 마음에 담아두고 표현하지 못할 위인은 못된다.
“좀만 더 찾아보고. 넌 뭐 하는데.”
“대충 영화 원작 소설들 위주로 찾아보는 중. 나 원래 과제 닥쳐서 하잖아. 한참 멀었어.”
쓸데없이 해맑게 브이자를 그리며 말하는 승원에 쳐다볼 가치도 없다며 고개를 돌렸다. 딱 그 타이밍에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바람에 승원은 또 혼자 씩씩 댔다. 어휴, 저 지 잘난 맛에 사는 이제연.
하동에는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다. 물론 대한민국 어디나 단풍이 한창 알록달록 색을 더해가고 있을 시기이지만, 하동은 정말 예뻤다. 원채 바라만 봐도 기분 좋아질 정도로 예쁜 곳이었으니 쨍한 색감이 더해진 모습은 절경이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색감 팔레트는 안 예쁜 순간이 없다. 덕분에 여름은 매일 아침 조금씩 더 진하게 물들어가는 지리산의 풍경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로 눈을 떴다.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잠옷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마당을 살살 돌아다는 거. 제연이 서울로 돌아간 이후 서서히 아침운동을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이젠 아예 가지 않기에 나쁘지 않은 습관이었다. 운동이라 하기엔 좀 민망한 수준으로 설렁설렁 돌아다니다 눈 비비고 제대로 시야가 탁 트이면 다시 들어가는 꼴이었지만.
단풍이 갓 물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여름을 신기하게 보던 팀원들도 완연한 단풍이 찾아오자 이젠 날 잡고 단풍놀이에 가자며 들떠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단풍놀이에 가지 않아도 하동은 모든 곳이 벅차오를 정도로 아름답다. 주 촬영지인 여름의 집 주변도, 각 신을 촬영하기 위해 다니는 장소들도 전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여름, 우리 지금 출발해!”
“응. 나 지금 짐 챙겨서 내려가고 있어.”
“그때 우리 주문했던 택배 왔어?”
“어떤 거? 비눗방울?”
“응. 그거 오늘 촬영 때 쓰는 거 아니야?”
“맞아. 간당간당하게 어제 딱 도착해서 회관 들러서 챙기려구.”
“마실 거 사갈 건데. 뭐 마실래?”
“음, 네스퀵 초코!”
“요즘 그것만 마시더라. 알겠어, 이따 봐!”
종종 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여름은 이른 아침인데도 통통 튀는 목소리에 결국 웃음꽃이 피었다. 학기 중에 여기 내려와서 숙박을 하며 촬영을 돕는 건 분명 힘든 일이다. 굳은 일이고, 굳이 나서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이 고마운 사람들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밝아지는 것 같다. 말로는 하동이 힐링 스팟이라며 너무 좋아서 그렇다는데, 진짜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 여름아. 우리 오늘 실어야할 짐 많아?”
“그렇게 많지는 않아. 왜? 차에 자리 없어?”
“그럼 괜찮겠다. 오늘은 주 촬영지가 아니라 짐이 좀 많아서. 금방 갈게!”
“으응. 나 지금 정류장 앞이야!”
어깨에 메고 있는 큰 크로스백 하나에 팔에 걸친 에코백 하나, 품에 안고 있는 택배 상자까지. 길가에 서서 기다리는 여름의 모습은 마치 하동에 처음 내려오던 그때의 모습 같았다. 물론 최근 들어 항상 이 상태이긴 하다. 하동에 오기 전에도 질리도록 이러고 살았고. 그래서 여름에겐 익숙해야 하는 일인데, 얼마나 이곳에 머물렀다고 짐을 한아름 들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어색해 몸서리쳤다. 역시, 시간 빠르다. 적응도 정말 빠르다.
그래도 자신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다. 무턱대고 떠나고 싶어 찾아왔던 하동이지만, 넘치도록 채워지다 못해 흠뻑 젖어버린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 이곳을 떠날 날이 벌써부터 아쉬웠다. 미치도록 그리울 것만 같았다. 아마 현실로 돌아가 다시 학교를 다니고, 과제를 하고, 알바를 하고, 그렇게 바쁘게 치여 가며 살아가다보면 울컥할 만큼 이곳이 그리워 미칠 것 같겠지. 하지만 하동은 왠지 그냥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 이곳에 남아 언제든 반겨주지 않을까 싶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 하동이 변한다 하더라도 함께 지금의 여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참 감사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추억하고 함께 기억하며 웃을 수 있다는 거.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왔던 스무살의 여름은 사실 이게 간절했던 거였다.
“여름, 언니 왔다! 언니 차에 얼른 타!”
“야. 누가 보면 네가 운전한 줄 알아.”
“참나. 그런 걸로 생색내기야? 내가 운전면허가 없어, 가오가 없어?”
생각에 잠겨있던 여름을 깨우듯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한아름 안은 채 가만히 서서 허공을 보던 여름의 고개가 돌아가고, 투닥대며 싸우는 재야와 정민의 모습이 눈에 담기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뒷자리에 타있는 팀원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을 열고 여름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둘 다 없으면서.”
그에 화답하듯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던 여름이 재야를 향해 메롱하고 혓바닥을 내밀며 웃었다. 그 뒤론 틀린 것 하나 없는 여름의 말에 모두가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으며 촬영 장소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각자의 자리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 그대로.
“어? 제연이다.”
한창 저녁을 먹으며 왁자지껄 숙소에서 놀고 있는데 여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걸 본 여름이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집어들자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어우 한여름씨. 드디어 말 놓으셨나 봐요?”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서도 정민은 꿋꿋하게 장난을 걸어왔다.
“나 되게 박력 넘치는 편이거든?”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내던 여름은 그 한 마디를 던지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렇댄다. 동의하는 사람?”
“다들 우울할 때 한 번씩 떠올리면 될 듯.”
여름이 나가자마자 다시금 맥주 캔을 부딪치며 한 명 두 명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역시나 대화 주제는 여름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그러게. 외사랑인 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다들 장난처럼 틱틱 거리고 우르르 몰려 놀리곤 하지만 여름은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다. 존재만으로도 상큼하고, 사랑스러움이 우러나는 사람. 과에서 그런 사람을 꼽아보라 하면 학번을 막론하고 단연 여름뿐이었다. 여름은 정말 여름을 불러오는 사람이었다. 함께하는 순간마다 청량하고 시원한, 푸르고 활기찬 기운을 선물 받았다. 정말 좋은 사람들만, 좋은 일들만 가득 찾아가길 바랄 정도로 어여쁜 사람. 사랑이 여울져 방울방울 맺힐 만큼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 여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 과를 어떻게 버티려고 왔나 생각하다 여름과 시간을 보내며 겪어본 이후로 곧바로 수긍하곤 했다. 그만큼 여름이 택한 세부전공은 잘 맞았다. 왜냐면 모두를 끌어들이는 여름의 순수한 사랑은, 그 어느 누구라도 웃음으로 화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맞아.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어.”
“뭐, 다른 거엔 빠삭하면서 사랑에는 속 터지게 느린 사람인 것 같긴 했지만?”
“그건 걱정 안 되는데?”
“왜요?”
“그야,”
잠시 말을 끄는 사이 답변을 기다리는 채은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마주쳤다.
“여름이니까.”
그리고 보란 듯이 동시에 외쳐진 멘트에 다들 꺄르르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곧 채은도 알게 될 테니 아무도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