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 타닥-.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는,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는 즐거운 감정인가? … 대부분 현대인은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이듯이 사랑도 기술임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음악, 미술, 건축, 의학, 공학의 기술을 배울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노트북 옆 독서대에 책을 펼쳐 고정해두고 화면과 책을 번갈아 보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던 여름이 저장 버튼을 한 번 누르고,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둘은 함께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연은 필요한 물건이 있어 주문한 택배를 가지러, 여름은 다빈과 함께 공구했던 특이한 물건이 도착해서였다.
“택배 뭐 시켰어요?”
“일회용 면도기랑 이것저것.”
“생필품 위주로 시켰나보네요? 저는 친구랑 공구한 물건 택배예요. 걔가 새로운 거 시도해보는 거 좋아하는데 이번 거는 좀 재미있을 거 같아서 같이 사자고 했어요.”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 웃음을 잔뜩 머금은 여름이 신나는지 조용히 허밍을 하기도, 의미 없이 손장난을 치며 이리저리 휙휙 둘러보기도 했다.
“뭔데?”
“그건 비밀이요. 이따,”
비밀이라는 말을 할 땐 눈가를 조금 찡긋거렸던 것도 같다.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시는 근처 농장 아저씨를 보고 인사를 건네느라 잠시 대화가 끊겼다.
“어휴 이젠 뭐 가족 같다 안카나.”
서울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여름과 대화할 때면 열심히 표준어를 쓰시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는 사투리에 여름은 푸스스 웃었다.
“하긴 요 근래 많이 보긴 했죠?”
“나중에 여름이 가면 허전해서 우째.”
“있는 동안 더 자주자주 얼굴 비출게요!”
“그려. 총각도 함 와서 과일 좀 받아가.”
이걸 알겠다고 해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여름을 힐끔 보자 여름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알아서 하라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승낙 같은 감사 인사를 드렸다. 제연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순식간에 가던 길로 사라지셨다.
“아 그래서 제가 공구한 게 뭐냐면, 이따 놀러 와서 봐요!”
좀 더 걷다 회관 앞에 도착해 손잡이를 잡은 여름이 문을 열기 전 옆에 서있는 제연을 올려다보며 밝게 외쳤다.
평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심히 만지던 여름이 당황한 투로 말했다.
“근데 이거 자막 설정이 안돼요.”
“영어 영화야?”
그에 필요한 물건을 이것저것 챙겨 나오던 제연이 신발을 구겨 신고 여름 가까이에 갔다.
“네. 분명 다운받고 자막 설정하면 된다했는데 제 노트북이 문젠지 안 되는 거 같아요.”
“한글 자막 없어도 돼?”
“전 완전 괜찮죠. 그럼 그냥 자막 없이 볼까요?”
“괜찮으면 그렇게 해.”
산이라 공기가 차니 매번 여름이 평상에 있을 때면 덮던 얇은 담요, 영화 보며 집어먹으려고 꺼내온 주전부리들, 얼음 동동 띄운 아이스티까지. 하나씩 평상 위에 내려놓은 제연이 신발을 벗고 평상에 올라왔다.
“우리 둘 다 굳이 자막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에요.”
“그러게.”
“아, 혹시 모르니까 보조배터리 하나 가져와서 연결해둘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여름은 종종걸음으로 뛰어 방에 들어갔다. 혼자 남은 제연은 바탕화면을 빤히 쳐다봤다. 오른쪽 모서리에 둔 한글파일들이 눈에 띄었다. 글을 쓰나?
“혹시 너,”
“웬일로,”
뒤에서 여름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말을 건 제연과 부지런히 걸어오며 말을 건넨 여름의 오디오가 겹쳤다.
“너 먼저 말해.”
“아니에요. 혹시 저 뭐요?”
“별 건 아니고, 글 쓰냐고.”
“사실 뭐라고 말하기 되게 애매하긴 한데요, 쓰긴 써요. 누구한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글들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재밌어서요.”
“…그렇구나.”
“바탕화면에서 봤어요?”
따지고 보면 글을 열어 읽어본 것도 아니라 잘못한 건 아닌데, 그냥 그 물음에 제연은 뭔가 찔렸다. 괜히 남의 비밀을 제가 캐물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다.
“어. 파일명이 글 제목 같아 보였어.”
“파일 이름이 제목처럼 보였다니 영광이에요. 이거 작가로서 듣는 칭찬 맞죠?”
“네가 칭찬이라 생각하면.”
칭찬으로 들어준 여름에 금방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글과 여름. 글을 적는 여름. 글로 말과 생각을 전하는 여름. 쉽게 상상가지 않는 모습이라서. 글을 쓰면 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분위기를 낼까. 하나도 감이 잡히는 게 없었다.
“특별히 미공개 글 하나쯤은 제일 먼저 보여드릴게요. 언젠가, 원한다면?”
여기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재밌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거였다. 글에 대해 얘기하는 여름은 즐거워보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여름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넌 뭐 말하려다 말았는데?”
“저도 별 건 아닌데. 신발 꺾어 신은 거, 처음 봐요.”
여름의 말을 듣자마자 제 신발로 시선이 향했다. 컨버스화가 보기 안 좋게 구겨져있었다.
“신기해서요. 여태 봤던 성격으로는 이런 거 완전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요.”
맞다. 살면서 한 번도 신발 구겨 신은 적 없다. 단언코 지금이 처음이다. 제 아무리 급한 순간이고, 서둘러야 한데도 무조건 바르게 신고 나갔다.
“싫어해. 신발 구겨 신는 거. 해본 적도 없고.”
“그래요? 해보니까 어때요?”
“어떻고 말고 할 게 있나.”
“급할 때나 대충 잠깐 신을 땐 그게 편하잖아요.”
“잘 모르겠는데.”
“근데 이것도 좀 감동 포인트인 거 맞죠?”
“뭐가?”
“신발 꺾어 신은 걸 본 첫 번째 사람이 전거요.”
제연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왜? 내가 왜 신발을 그냥 막 신었지? 평상시였으면 절대 안 이랬을 텐데 왜? 말해주기 전까진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건 또 왜인 거지? 골똘히 생각하는 제연의 시선은 다시금 신발에 가있었다.
“완전 풀어지지 않는 사람은 아니구나 했어요. 그냥, 생각보다 굽혀줄 줄 아는 사람인가보다 싶었어요.”
자각하지 못한 행동을 한 건 무슨 의미일까. 여름의 마지막 문장은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도 좀 하고, 차도 한 잔 진하게 우려내 홀짝이던 여름이 다시 책상 앞으로 와 자리에 앉았다. 괜히 후 하고 심호흡도 한 번 하고, 한글 파일을 열었다. 아까 적었던 부분 뒤로 이어지는 글들을 눈으로 슥 훑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무얼 하든 좀 더 풍부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저명한 사람들의 글을 따라 쳤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집중해서 읽고, 그 단어가 수식하는 대상을 떠올려보고,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맥락을 읽어 내렸다. 적정한 온기와 냉기를 지닌 글들. 뜨겁게 닳아 오르는 마음을 주기도, 차게 식어 내리는 생각을 주기도 하는 고민의 흔적들.
대강 큰 맥락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자판을 두드리던 손길이 조금씩 느려지고, 자연스레 생각에 잠겼다.
숙소에 돌아온 제연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거 같이 하자.”
“…뭐가 하고 싶은데?”
항상 하잖아. 했잖아. 해왔잖아. 이 말은 꺼내지 못했었다.
“처음해보는 건데, 꼭 너랑 같이 하고 싶어서 우리 만나는 날까지 기다렸어. 완전 설렌다 그치?”
“응. 좋네.”
누군가와 처음을 함께하는 게 들뜨는 일이구나. 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우와! 제연아 너 진짜 잘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뭘 하든 대충하는 법이 없으니까 보기에 잘 한 거 같지 않을까. 이 말까지도 참았다.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게 아닌 거 같아 생각하기를 포기했었다. 답을 찾지 못하는 건 용납이 안 되니 일단 답을 찾을 수 있는 나머지 것들을 우선으로 해결하자는 마인드였다. 근데, 왜 이제 와서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이 좋아한 게 아닌 거 같지? 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 같지?
“어쩜 너는…, 나한테 한 번을 안 져줘.”
“…”
“나는 언제쯤 네가 우는 모습 볼 수 있어? 넌 왜 항상 내 앞에서 완벽하기만 해?”
“…”
“한 번은, 한 번쯤은 휘어지기도 하고, 풀어져주기도 하고 그래주라.”
네 말이 맞았던 거 같다는 생각이 왜 드는 걸까 지원아. 싸워서 서운하다 얘기할 때면 빠지지 않았던 말들이 떠오른 이유는 뭘까. 이 애가 말하는 모든 말들이 너랑 정반대라는 함정에 빠져 더 미로 깊숙이 가버린 게 문제인 걸까? 아니면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나도 불가항력적으로 변해가는 과도기를 보내고 있는 걸까?
평소보다 오래도록 멈춰 깊게 고민하던 제연이 계속해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푹 젖어 얼굴에 붙어버린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 넘겼다. 평소 머리를 쓸어 넘길 때면 자동으로 올라오던 오른손은 벽을 짚은 채였다.
“생각 안하려고 와서 더 열심히 생각하는 꼬라지라니.”
샤워기를 끄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자조하듯 말했다. 어찌됐든 제 꼴이 웃긴 건 사실이었다. 남들은 헤어진 거에 후폭풍 와서 연인을 그리워할 때 저는 연인이 했던 말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고 있다니. 하긴 애초에 사랑의 쓰라림을 경험한 게 아니었다. 헤어져서 힘들다기 보단 지적당한 문제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앞으로는 제가 어떻게 대처하고 예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게 힘들었던 거다.
그러니 웃기지 않은가. 피하려고 온 곳에서 더 열심히 지원의 말들을 떠올리는 것도 모자라 모든 기억에 자연스레 함께 자리잡아가고 있는 여름을 막지 않는 자신이. 잠옷을 입고 선풍기 앞에 앉아 오른손을 내려다보던 제연이 헛웃음을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참…, 모르겠다.”
여름이 해준 헤나가 뭐라고, 씻는 내내 오른손을 벽에 고정시켰던 자신이. 어이없어 웃겼다.
「첫째는 이론 습득, 둘째는 실천 습득이다. 곧 직관이 모든 기술 숙달의 본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습득 이외에도 기술 숙달에 필수적인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 숙달이 궁극적 관심사로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음악에도, 의학에도,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한다.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했는데도 왜 사랑의 기술을 거의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아마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부분 발췌
궁극적 관심사가 되어야한다…. 사랑이 궁극적 관심사가 돼야한다…. 한참을 생각하던 여름은 이 문단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