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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한여름의 치기
작가 : 이소이
작품등록일 : 2020.8.18

사랑이 가장 청량하게 빛날 수 있는 계절 여름, 그리고 그런 여름에 걸맞게 다채로운 선물들을 선사할 하동.

우리 모두가 각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듯 사랑에는, 삶에는 참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저 예쁜 풍경이 좋아서 기대를 끌어안고 향한 여름이와 어디든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떠난 제연이처럼요.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여태 살아온 삶과는 다른 결의 선택,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있는 그대로 반응 하는 것. 이걸 단순히 한여름의 치기라 치부해도 되는 건가요?

여러분은 언제 사랑을 느끼시나요? 또, 여러분의 사랑이 담고 있는 온기와 의미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요? 한 순간에 지나가버린 여름이 잠시나마 푸르르고 찬란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이곳에 제 사랑을 남깁니다.

 
liburan musim panas
작성일 : 20-08-30 05:17     조회 : 299     추천 : 0     분량 : 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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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여름방학

 

 “뮤즈가 존재한다 생각해요?”

  평상에 두 다리를 쭉 피고 앉아 부채질을 하며 공구를 들고 열일하는 제연을 본 여름이 물었다. 마땅한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제연에 혹시 질문에 설명이 부족했나 싶어 곧바로 덧붙였다.

 “예술 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림이든, 사진이든, 음악이든. 흔히 예체능이라 불리는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 보면 꼭 자기 뮤즈가 한 명쯤은 있잖아요.”

  사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연에게서 답이 돌아오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느새 제연은 다시 원래대로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랑이랑은 다른 결이라고 하던데.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 몸짓, 표정, 분위기 이런 것들을 보면 예술적인 영감이 떠오른대요.”

  몇 번이나 봤다고 답변 없는 정적이 편안했다. 혼잣말 같지만 분명하게 청자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끝내고 나면 한 마디라도 덧붙여줄 걸 알아서이기도 했다.

 “다들 그게 되게 로맨틱한 것처럼 받아들여요. 하긴, 어떻게 보면 로맨틱해요.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살아가다 누군가를 딱 봤는데 헐 난 이걸 표현하기 위해 삶을 살아왔구나 하는 충격. 그런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죠?”

  하지만,

 “…뮤즈도 그럴까요?”

  지금까지 했던 운명, 로맨틱 어쩌고 하는 얘기가 이어지지 않을 거 같은 느낌에 제연은 다시금 고개를 여름에게 돌렸다.

 “도구 같잖아요. 살아 움직이면서 창의력을 끌어내주는데 쓰이는 도구. 나는 평상시 하던 행동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상대방이 엄청난 걸 발견한 것처럼 소름끼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막 그림을 그려요. 어떨 거 같아요?”

 “모르겠는데.”

  짧은 대꾸에도 갑자기 신이 난 여름이 아빠다리를 하고 제연을 향한 방향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거기다 분명 나를 향한 시선은 호감인데,”

 “그게 호감인가.”

 “그럼요, 호감이죠.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니까 뮤즈가 영감이 되는 거잖아요.”

 “근데.”

 “나를 향한 감정은 텅 비어있는 것만 같은 느낌. 뮤즈는 이걸 예술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 느껴야 하잖아요.”

  짤막하게 대화 끝에 말꼬리처럼 달라붙는 반응에 여름이 한껏 진지하게 뮤즈에 대한 자기 생각을 펼쳐놓는 동안 제연은 제 할 일을 끝냈다. 공구함에 다시 사용했던 공구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뭐, 사실 세상에 뮤즈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건지부터 불확실하긴 해요. 그쵸?”

  벗어뒀던 신발을 찾아 평상에서 폴짝 내려온 여름도 기지개를 한 번 펴곤 더 이상 이 이야기에 미련 없다는 듯 가벼운 손짓으로 물티슈를 건넸다.

 

  아주머니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건네받은 찻잎을 들고 제연은 숙소로 향했다. 물론 옆자리엔 빠지지 않고 여름도 함께 했다. 데려다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제연이 머무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뭐해요?”

 “…없어.”

 “정말요? 아닌 거 같은데. 어제까지만 해도 완전 빼곡하게 뭐할 건지 짜여있었잖아요.”

 “오늘은 없어.”

  그렇게 산길을 걸어 올라가며 제연을 힐끔 힐끔 쳐다보던 여름이 물었고, 며칠간의 경험으로 깨달은바 하루 종일 제 일정대로 따라 움직일 걸 알기에 제연은 거짓말로 답했다. 이제연이 일정이나 계획 없이 지내? 친구들이 들으면 누가 그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망상 가득한 소리를 하냐고 거들떠도 안 볼 말이었다. 하지만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계획한 일정을 소화하는 건 더 싫었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고통의 강도를 줄여보자는 취지였다.

 “그럼 오늘 동정호가서 책 읽다 와요!”

  딱 그런 마음에서 한 발짝 뒷걸음질 쳐 양보한 거다.

 

  이 둘 사이에서 한쪽이 반말을 쓰게 된 장면만 보곤 둘이 꽤 긴 시간동안 지낸 거 같이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늘은 제연의 아침운동 길에서 여름과 재회하고 난 뒤 딱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굳이 뭐라도 하나의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하면, 제연의 하동 살이가 절반 조금 넘게 지난 날짜였다.

  일주일동안 둘은 정말 많은 곳에 다녀왔다. 제연의 타이트하고 완벽하게 짜인 일정 덕분이었다.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정보들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학교나 전공, 학번, 고향, 옷 스타일, 생활패턴 그런 것들.

  학번을 알게 되곤 여름에게 말을 놓기로 했다. 연중무휴 밝은 여름이 자기보다 선배이니 말을 놓으라고 한 것도 있었고,

 “아니, 단 맛을 완전 싫어한다는 게 말이 돼요?”

 “제가 싫다고요.”

 “저는 살면서 단 맛이 좋다고 하나 먹을 거 두 개 먹는 사람은 봤어도, 단 거 손도 대기 싫다는 사람은 처음 봐요.”

 “저는 싫다니까요.”

 “그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 맛이 나는 것들은 하나도 안 먹고 살았어요?”

 “그건 아닌데,”

 “뭐예요. 그럼 단 거 먹는 거잖아요!”

 “인공적인 단 맛은,”

 “근데 왜 망고 젤리 못 먹는다고 거짓말해요?”

 “인공적인 단 맛 안 먹어. 그게 싫다니까?”

 유치한 말다툼을 하다 욱해서 말을 까고 난 후 말을 놓은 게 더 편하다 느껴서 그런 것도 있었다.

  어찌됐건 여름은 제연과 함께 지내는 게 좋았다. 혼자 지낼 거라 생각하고 와서 그런가. 누군가와 함께 이곳저곳 다니며 대화를 하는 시간이 일상을 채우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방학이 끝나기 전 하루라도 하동에 와 놀다가고 싶다는 친구들의 부탁을 모두 거절했다. 하동 살이를 위해 짧게 내려온 사람이랑 최대한 같이 지내야지! 친구들은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언제든 올 수 있으니까. 좀 특이한 여름의 사고회로가 도출한 결론이다.

  고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준비를 일찍 마친 여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복조리 크로스백에는 책 두 권도 야무지게 챙겼다. 평소 이리저리 치여 바쁘게 지내도 시간을 어떻게든 내서 지켰던 습관 중 하나가 책 읽기였기에 여유로운 이곳에선 더 자주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장르는 보통 인문, 예술 그 두 가지가 주를 이뤘다. 이유는 많다. 흥미 있는 분야이고, 배경지식으로 알아두면 언젠가 전공에서 쓸모 있는 순간이 찾아오며, 아주 조금의 감성 충전도 된다. 그야 말로 일석삼조. 오늘 읽을 책은 서점에 갔을 때 보자마자 완전 꽂혀서 곧바로 사야겠다 싶었던 거라 더더욱 들떴다. 이런 여름의 기분을 아는지 선선한 바람이 볼가를 스쳐 지나갈 때면 여름은 자기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하동에 오고 한동안 장마 때문에 오후 내내 비가 쏟아졌다 그쳤다 반복이더니 요즘엔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완연한 여름 날씨다. 싱그러운 풀 향과 부드러운 공기가 어우러져 따사로운 햇볕조차 사랑스러운 여름. 오래도록 머물러 줬으면 하지만, 딱 이 시기, 이 만큼만 찾아와야 더 아름답게 기억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다면 더 많이, 후회 없이 잔뜩 머금고 싶었다.

 “어? 우리 완전 나이스타이밍! 버스 바로 탈 수 있겠네요?”

  이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있던 제연은 팔랑 거리며 걸어 내려오는 여름을 한 번 보고,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버스를 한 번 봤다. 그리곤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른 오라고 부르려다 말았다. 제 때 왔으면 됐다.

 

  동정호에 도착한 여름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여기 유럽수국이 많아서 예쁘다더니 진짜예요!”

  제연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느새 다시 가까이 와서 말을 걸고, 또 저 멀리 사라지는 여름을 뒤에서 눈에 담으며 천천히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풍경이 참 좋긴 한데, 여느 호수와 별다른 점을 모르겠어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렇게 또다시 멀어져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여름이 걸어간 길을 따라 움직이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감탄사를 내뱉는 여름의 모습이 신기했다. 말로만 듣던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사는 삶이 저런 걸까 싶었다. 저런 사람의 시야로 보는 세상은 어떨까 궁금했다. 전부 좋아 보일까? 웬만한 일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나? 그럼 힘든 일이 생겨도 금방 잘 털어내나?

 

 “그만해. 공감해주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거 듣는 사람한테는 더 상처인 거 알아?”

  때마침 머리를 가득 채우는 기억에 한숨부터 나왔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이래서 싫다. 인생을 살아오며 문제가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답을 찾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편이었지만, 난생 처음 겪어본 문제 앞에선 천하의 이제연도 소용없었다. 해결하지 못하고, 잊지 못할 바에야 기억이나 나지 말라고 여기에 왔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기억의 편린까지 막는 건 무리였다. 어쩌면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기억을 지우는 게 빠를 지도 모른다 생각할 정도로 제연은 이 문제를 딛고 일어설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우와, 여기 봐요!”

  멍해진 상태에서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제연의 시선이 여름을 향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여름이 제연을 부른 이유는 없었다. 여기 보라고 뭔가 꼭 봐야할 게 있는 거 마냥 외쳤지만, 그냥 제연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사진 찍어도 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연히, 찍히는 사람 의사 물어보는 게 먼저니까?”

 “나?”

  그렇기에 당연히 처음엔 제연의 사진을 찍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근데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제연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계속 마음이 쓰여서. 자신이 뭐라도 건네야 할 거 같은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어서.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사진이 정말 선물이 될지.

 “저 사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찍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들이 다 작가님이라 불렀어요.”

 “…그래.”

 “아 진짜에요! 사진 찍을 일 있으면 무조건 저만 찾는 애들 많아요.”

 “알겠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 순 없지만, 어찌됐건 제연은 이때 여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었다. 쫑알대는 여름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거든. 혼자는 무슨 수를 써도 헤어 나오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게 뭐 대수냐는 것처럼 여름은 깊은 늪에서 제연을 손쉽게 건져냈다.

 “그럼 찍을게요! 지금부터 시이작!”

  난생 처음 듣는 구호와 함께 제연은 처음으로 타인의 손을 잡고 문제 밖으로 빠져나오는 경험을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 당연하다는 듯이 두 명이 앉는 자리에서 여름은 창가자리, 제연은 바깥쪽 자리였다. 버스만 탔다 하면 창밖 풍경을 구경하느라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여름이 힐끔 옆에 있는 제연을 쳐다보고 물었다.

 “우리 되게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

 “운이 되게 좋은가 봐요. 국내는 여행 가면 그렇게 대중교통 시간 때문에 고생한다던데. 한 번도 버스를 오래 기다린 적이 없잖아요.”

 “그야,”

 “저 진짜 길에 서서 버스만 3시간 기다리고 그러면 어떡하지 걱정 많이 하고 왔거든요. 완전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쭉 이러면 좋겠다!”

 “…….”

 “근데 아까 뭐 말하려다 만 거예요?”

 “그런 거 같다고.”

  그야 내가 버스가 종점에서 출발하는 시간을 전부 알고 있으니까. 그야 매일 만나는 시간을 버스 올 때쯤으로 맞춰서 정하니까. 그야 만나기 전에 돌아올 때 버스도 미리 확인했으니까. 버스 시간을 모르고 무작정 오래 기다릴 일이 생길 수가 없지.

  그렇지만 네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서 계속 이런 날들이 이어지길 원한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행운으로 남겨도 되지 않을까. 설령 모든 우연이 노력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였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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