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왔는지 뒤에는 아까 그 안경 미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깜짝이야 뭔 사람이 기척이 없어
"네?"
나도 모르게 나온 얼빠진 소리에 여인이 손을 들어 내가 들고 있는 네임택을 가리켰다.
"그 네임택 말이에요. 요즘에는 이런 거 없잖아요"
그녀의 고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역시나 조잡하기 그지없는 종이 쪼가리다.
하긴 요즘에는 이런 유치한 거 집어 넣고 팔면 도리어 욕이나 먹겠지, 싼티 난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는 않은 느낌이다.
"유치하긴 한데, 그렇게 나쁘진 않네요. 옛날 감성도 나고."
내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돈 주고 사라고 하면 미치셨냐고 정중하게 물어볼테지만 감성자체는 그렇다는 거다.
요즘 나오는 것들보다는 이쪽이 익숙하다고 할까
아니 애초에 요즘 어떤 게 나오는 지도 모르니까 의미 없나?
"유치한게 꼭 나쁜 건 아니니까요. 몸서리 치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들은 대체로 그런것들이죠"
"네?"
뭐라는거야 이 사람은? 뭐 허언증이라도 있는건가?
너무 어이없는 말을 들었더니 순간 표정관리가 안됐다.
내 표정을 내가 볼 수는 없었어도 분명 조금전의 엄청 썩어있었을 거야 내 표정.
'아 내 손발 어쩔거야'
점원의 말에 대답한 건 나도 모르게 옛 감성에 빠져서 그런거지 저런 드라마나 순정 만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주고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드라마는 내 감성도 아니었고 애초에 저 점원과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만큼 가까운 관계도 아니잖아?
만난지 아직 10분도 안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고 있자 눈앞에 있는 여자가 나를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펜?'
뭐야 이건? 사달라고 주는거야?
일단 주기에 무심코 받아서 살펴보니 그냥 평범한 펜이다.
특별할것도 없는 그냥 모나미 펜
"이건 왜?"
뭐 어쩌라고?
"집으신 김에 한번 써보시라구요."
써? 뭘? 집은거?
설마 이 네임택말하는거야?
"아, 저. 진열된 물건에 그러는건 좀"
에의상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냥 툭 까놓고 말해서 싫다.
무슨 복권방에서 로또 마킹하는것도 아니고 누가 보는 앞에서 굳이 이런 허접한 옛날 역할 놀이 종이 쪼가리에 끄적거려야 하는건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펜을 돌려주는데 이 점원이 펜을 안 잡는다.
뭐야? 왜 고개는 가로 젖는건데? 저 이거 필요없으니까 가져가시라구요, 필요 없어요, 안 사요
씨익
아니 웃지만 말고 빨리 펜 가져가라니까?
뭐지? 이 여자.
아까부터 웃는 표정이 한점 흐트러짐이 없다.
무슨 로봇이야? 뭐야 무서워
"괜찮아요. 한장만 있는 것도 아닌데요. 다 써도 파일이 있어서 다시 인쇄해면 되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내가 지금 그걸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그냥 하기 싫다고.
내가 이 매장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걱정을 하겠습니까?
생긴 건 되게 도서관 미녀 사서처럼 생긴 주제에 진열된 물건을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거야?
"괜찮으니까 해보세요"
.............거 웃는 얼굴로 되게 집요하네.
할 때까지 옆에서 재촉할 기세라 할 수 없이 펜을 잡고 네임텍을 다시금 바라본다.
계승자 이름: _____________________
하아
이게 뭐하는 짓인지. 진짜 안 땡기네.
다시금 고개를 들어보니 예의 그 미녀 점원이 조금전과 한치도 다름 없는 그 무섭고도 집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나는 그냥 집에나 갈 것이지 뭐 한다고 와본 적도 없는 가게를 들어와서는'
한숨을 쉬며 모나미 팬을 눌러 내 이름을 써넣는다,
굳이 본명이 아니라 ‘대충 아무런 이름이나 쓸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내 이름인 이민준을 다 쓰고 난 뒤라 의미가 없었다.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 거지
[띠리링, 띠리링]
잠깐 네임텍에 적혀있는 내 이름을 보고 현자타임이 오려는 찰나 주머니에서 들리는 벨소리에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 : 박부장님]
액정에 표시되는 상대방의 정보에 다시금 위가 쓰리다.
아니, 이 사람은 내가 아무리 눈에 찍히고 만만해도 그렇지.
때가 어느때인데 퇴근을 하고 나서도 연락을 하고 난리야.
"더이상 구경은 못하겠네요. 급한 연락이 와서"
좋은 소리를 들을리 없는 통화를 굳이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받을 필요는 없겠지
벨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잠깐 들어보이며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 말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황급히 매장을 나왔다.
나가는 내 뒤로 무언가 소리가 들린거 같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서둘러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찾아 들어간 뒤 핸드폰을 받았다.
"네, 부장님"
[이대리 퇴근했나?]
.* * *
.
띠띠띠띠 띠리링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7평정도의 원룸에 도어락은 약간 사치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가방을 던졌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대충 벗어 둔 추리링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걸터앉으니 자연스레 한숨이 나온다.
"휴... 퇴근해서도 난리네"
남자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면 다 똑같아지는건지.
집도 안 들어가는 워커홀릭 모드의 부장과의 통화는 역시나 좋은 적이 없다.
이번에도 거래처 납품건과 관련한 잔소리가 주 내용이었으니까
아직 기일이 몇일 남아있기에 준비만 하고 있던 내용들이었는데 급작스럽게 전화를 해서 하나하나 일일이 체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퇴근후에 필요도 없는 잔소리와 닥달을 경험하고 말았다.
"이게 내가 해 놓은 일들의 결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짜증나네"
정말 짜증나지만 애초에 내가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던 사람이었으면 이런 상황이 되지도 않았을걸 알기에 더 짜증이 나고 있었다.
"하.. 진짜 그냥 퇴사하고 외국이나 나갈까"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 보면 그런 게 보인다.
해외 취업 알선 학원이라던지 해외 파견직을 구한다는 공고 같은 거.
정확한 조건 같은 건 적혀 있지도 않고 지원자 급구! 자격 무관! 이런 식으로만 적혀 있어서 언제봐도 혹 할 만한 광고들이다.
나도 이 광고들이 대부분은 허위 광고들이고 막상 간다고 해도 우리나라 해외 노동자 취급이나 받을 거라는 건 아는데 이럴 때마다 자꾸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퇴근 후 연락하는 것도 불법일텐데 부장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신고할 깡따구가 있지도 않다는 게 문제다.
툭
"응? 뭐지?"
대충 걸어둔 양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하얀 종이에 잠깐 붙였던 엉덩이를 침대에서 때고 다시 움직인다.
이때 이상함을 눈치 챘어야 헀다.
평소라면 그냥 떨어지던 말던 바로 누웠을 내가 다시 일어나는 귀찮은 짓을 했을 때부터 평소와 내가 다른 거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멍청했던 이때의 난 몰랐다.
"아 이거 결국 집까지 가져와버렸네"
혹시나 돈인가 싶어 주웠던 종이는 조금전의 만화점에서 가져온 네임텍이었다.
원래라면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두고 왔을 텐데 부장과의 전화가 길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쑤셔 넣어 놨던 모양이다.
다시 봐도 허접하기까지 한 그 두꺼운 도화지같은 네임텍을 침대 옆 탁상에 던져두고 일어난 김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평소라면 시간이 아까워 핸드폰이나 tv라도 봤을테지만 부장의 쿠사리에 정신이 없었던 하루라 한시라도 빨리 방전된 정신을 충전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 * *
.
[민호, 일어나라.]
한창 꿀 잠을 자고 있는 내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민호, 정신차려라, 어서]
뭐야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좀 조용히 좀 깨우지.
동네사람 다 깨울 일있나.
[민호, 뭐하고 있어, 어서 일어나!]
아 거참 좀 조용히 좀 깨우라니까
어떤 자식인지 웬만하면 이제 일어나라, 관계없는 사람 피해주지 말고.
잠 좀 자자 잠 좀.
[민호! 안 들리나? 민호! 정신 차려라 민호!]
아 진짜 아무리 소심한 나라도 더이상은 못 참겠다.
"야! 민호야! 웬만하면 일어나라 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니 순간 간이 쪼그라든다.
먼저 큰소리를 낸 쪽은 저쪽이니 설마 나한테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
그래도 집으로 찾아오면 절대 문은 열어주지 말아야지
[무슨 소리냐 민호! 아직 정신이 안 든건가? 빨리 정신 차려라 시간이 없다]
엉?
이거 내 말에 대답한 거 같은데, 내 착각인가?
그런데 옆방에서 나는 소리가 원래 이렇게 잘 들리는거였나?
이건 옆방에서 들린다기 보다는 흡사....
"내 귀에다가 바로 이야기 하는 것 같은....이게 뭐야?"
이상함에 눈을 뜬 내 시야에 나타나는 것은 급격히 다가오는 주먹
평소에 일머리는 없어도 반사신경 자체는 꽤 빠른 나라 나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을 줘서 바닥을 굴렀다
윽, 너무 급하게 구르느라 근육이 놀랐는지 여기저기 시큰거린다.
[다행이다. 늦지 않게 정신을 차렸구나 민호!]
"이, 이게 뭐야?"
다시금 들리는 소리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금 내 주변의 모습이 너무 놀라웠으니까
분명 내 기억에는 내 방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지금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두컴컴한 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상태였다.
바닥은 붉은색을 띄며 은은히 빛이 나고 있는 중이라 덕분에 그나마 어둑어둑한 내부를 볼 수 있었는데 살펴보면 볼수록 지금 내가 희한한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이 어두운 거야 그렇다 치고 허공에 무슨 블랙홀 같은 것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너머에 저마다의 화면들이 보였다.
그 화면들이 대체로 이상한 로봇들이었고 그것들이 화면의 이쪽에 있는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는 느낌은 잠시 덮어두자
지금은 그거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하나둘이 아닌 것 같으니까.
……….아니 그래도 저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저거 로봇이야?"
검고 푸른 색의 철골구조물로 된 외형에 머리에는 뿔리달려있고 눈은 LED같은 불빛이 번쩍번쩍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로봇이 맞…겠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민호.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조심해라 사동족 병사들이 아직도 많다.]
"사, 사동족? 그게 뭐야?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뭔데?"
보이는 풍경들은 죄다 살풍경인데 정신이 난 아직도 멍하다.
그런데 왜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거지?
나 그렇게 감각이 뛰어난 놈이었나? 아닐텐데?
짝짝!
양 손으로 세수하듯이 얼굴을 쳤다,
좋아, 지금의 충격이랑 혼자 잡생각을 한 덕분인지 조금씩 정신줄이 잡히는 느낌이다.
[집중해라, 지금은 장난칠 시간이 없다. 아직 얼마나 녀석들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말이다 민호!]
다그치는 듯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허공을 보며 인상이 찌푸려진다.
머리에 저 목소리가 하나하나 꽂히는 느낌이다.
자네 성우해볼 생각없나
목소리가 아주 동굴에서 우렁우렁 하는걸 보니 성우로 대성하겠어
마이크에 대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울림통은 잘 알겠으니 내 귀에다가 외치는 것 같은 발성 좀 그만둬줄래?
[조심해라, 다시 온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블랙홀인지 웜홀인지 모를 공간 너머에서 보이던 로봇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양 옆에 있는 녀석들은 손을 벌리고 다가오는 폼이 나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앞에 있던 녀석은 다가오며 상체를 트는 걸로 봐서는 크게 한방 먹일 요량인가?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이런 상황에 침착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파악이 빠른 놈이었냐?.
"으아악!"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괴성과 함께 양옆에서 다가오는 녀석들을 피해 전방으로 몸을 날린다.
그 와중에 앞의 녀석의 주먹에 맞지 않기 위해 몸을 트느라 허리가 빨래 비틀어 지듯이 틀어진 건 빌어먹을 운동신경의 부족 때문이겠지
콰앙
배운 적도 없는 낙법을 할 수 있을리 없으니 그냥 바닥에 처박히겠다 싶었는데 내가 바닥에 부딛치는 타이밍에 맞춰 무슨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의 바닥에 일직선으로 엎어졌는데 놀란 상태라 그런지 의외로 충격이 없다.
덕분에 다시 후다닥 일어나 경계태세를 취하고 재빨리 날 공격한 녀석들을 찾아 살피는데 뭔가 이상하다.
내가 몸을 날리기 전까지만 해도 바로 주먹을 내리 뻗을 것 같던 로봇의 몸이 조금전에 내가 있던 공간으로 이제서야 주먹을 뻗고 있는데 그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뿐만 아니라 날 양옆에서 잡으려고 다가오던 녀석들 또한 느린 속도로 움직이며 나를 잡으려던 자세를 멈추고 이제서야 나를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데 어? 너 거기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안 될 텐데?
푸콰앙!
내 눈에는 나를 공격하던 로봇이 나를 잡으려던 로봇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거 그거인가?
꽁트? 몰레카메라?
[방금의 움직임으로 몸에 무리가 생기긴 했지만 잘했다 민호!]
그때 또 들리는 동굴 목소리
아 그 참 더럽게 시끄럽네
이건 지적질이야 칭찬이야?
뭐든지 간에 나한테 하지 말고 니가 찾는 자식한태나 가서 말하라고 나 말고
"저기, 다른 사람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저한테도 들리거든요? 그냥 알고 계시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다른 사람이 대화를 엿듣는 건 좀 그렇잖아요?"
치솟는 짜증에 나도 모르게 울컥해 한마다 하다 급 쭈굴해져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족을 달아본다.
[내 말이 사동족에게 들리는게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말은 오직 마동 전사들만 들을 수 있다.]
사동족인지 오동족인지가 엿들을까 봐 걱정하는게 아니고 내 귀에 쏙쏙 박혀 들어서 걱정이라고
이정도면 거의 MC스퀘어야.
귀 아프다니까?
"그런데 저는 왜 들릴까요?"
잠깐 자제력을 잃은 주둥이가 지 멋대로 비아냥대고 있다.
쭈굴대며 뒷말을 이었던 게 몇 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이놈의 주둥이가 뭔 짓을?
평소에는 움직여야 할 때도 파업을 하던 놈이 왜 갑자기 이리 나불대
[민호, 너는 아직 완벽한 마동 전사는 아니지만 마동력의 소질이 있다. 조금만 훈련을 하면 마동전사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다행히 내 비아냥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잠깐 숨을 돌리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대화가 뭔가 미묘하게 맞질 않는데?
눈앞에서 아직 엉켜있는 로봇들을 보자니 잠깐 정도는 시간이 있을것도 같아 상황 정리를 해봤다
"그러니까, 지금 저랑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맞죠?"
우선 첫번째 의문점
조금전까지 들리던 동굴 목소리 아저씨는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가?
동굴 목소리는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잘 들렸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듣질 못했으니까
[맞다. 민호.]
....어 우선 첫번째 의문점은 됐고
내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으나 저 아저씨가 나와 대화란 걸 하고 있었다고 하니 우선 패스.
그럼 두번째 의문점
"그런데 왜 아까부터 저를 민호라고 부르시는지.....?"
[너의 이름이 민호라고 알려주지 않았나? 나는 창조될 때 계약자의 이름 외에 다른 호칭을 부르도록 설정되어 있지 않아 이름 외에는 다르게 부를 수 없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상황이 엉키는 거다.
내 이름은 민호가 아니었으니까.
내 이름은 이민준.
굳이 비슷한데를 찾자면 이름 첫 글자가 같기는 하지만 발음도 표기도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름을 왜 지 편한대로 부르고 있는 건데?
이러니 암만 불러도 나를 불렀다고는 생각 못하지.
"재가 언제 제 이름을 민호라고 말씀드렸는지?"
[이상하군, 조금전의 일인데 기억을 하지 못하는건가? 변신 모드로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서 이름을 묻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나]
아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군요
변신 모드로 들어가기 전에 제가 이곳에서 말했군요.
제가 기억하는 이곳의 처음 모습은 누워있다가 집체 만한 주먹이 날아오는 장면이었던 거 같은데 멀쩡히 이곳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눴다는 말이군요
[조심해라. 적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
동굴 아저씨의 말에 시선을 다시 전방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엉킨 자세를 풀고 나를 향해 움직이려 하는 로봇들이 보이고 있었다.
나를 못 잡은 죄로 친구에게 한방 얻어맞은 녀석은 충격이 꽤 컸는지 제일 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눈의 LED가 깜빡깜빡 거리는 것이 꼭 윙크를 하며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진다.
너는 제일 마지막에 보자.
아까와 같이 묘하게 느리게 움직이는 적(정체야 모르지만 일단 그리 호의적이진 않은 것 같고 이 동굴 아저씨도 계속 적이라고 하니 우선 적으로 인식해본다.)들을 보며 일단 이들을 제압해놔야 편하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겠다 싶어 나도 마주 달려간다.
평소의 소심하고 찌질한 성격의 내가 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이지만 이상하게 저놈들이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초등학생들 상대하는 느낌?
아니 요새는 초등학생들도 무서운 애들이 많으니 유치원생쯤으로 느껴지려나?
그러고 보니 나보다 크기가 꽤 작은 것도 같다.
"얍!"
제일 앞에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꿀밤을 먹인 후 옆으로 돌아 두번째 녀석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린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계속해서 윙크를 하는 녀석은 기분이 더러우니 풀스윙으로 엉덩이를 걷어차주자
유치원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심하게는 못하고 대충 위협만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쿠콰쾅!
퍼펑!
어랍쇼?
가볍게 가격한 내 공격으로 인해 녀석들의 몸이 부서지고 뭉개지더니 마지막에 풀스윙으로 엉덩이를 맞은 녀석이 몸체가 상하로 절단이 되어 각각 녀석들에게 날아가 같이 폭발했다.
유치원생 훈계하듯 가볍게 때린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렇게 훈계했으면 아동살해범으로 사형집행 당하겠는데?
[잘했다 민호, 첫 전투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잘했다.]
"아..네... 고맙습니다"
뭔가 복잡한 심경이다.
할말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칭찬에 답례부터 해주자 싶었다.
[마동력이 다 됐군.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겠다. 다음에 사동족과 싸우기 전까지 훈련을 해두는 걸 잊지 마라 민호]
"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싶어 고민중인 내 귀에 예고 없는 동굴 아저씨의 작별인사가 들려왔다.
뭐야 이 절묘한 치고 빠지기 전술은?
내가 어이가 없어 잠깐 멍 때리고 있을 때 공간이 일렁이더니 갑작스럽게 내 주변을 감싸는 공기방울이 보였다.
동시에 검은 공간이 사라지고 주변 경관이 드러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초원으로 된 지평선에 잘 닦인 도로가 덩그러이 보였다
"우, 우와앗!"
더럽게 잘 보인다
잘 보일 수 밖에 난 지금 허공에 떠있으니까
아파트로 치면 대략 15~20층 정도의 높이에서 빛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하강하는 중이다
말이 천천히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둥둥 떠서 내려가는 기분은 정말이지 방광에 좋지 못하다.
모든 장기가 뇌부터 발끝까지 트럼플린을 하는 기분이랄까
오줌이 찔끔찔끔 나오려 하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겨우 땅에 근접했을때가 되어서야 내가 착지할 지점에 있는 두명의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인이라고 하긴 좀 뭐한 것이 한 명은 이제 갓 초등학교를 들어갈 법한 소녀였고 한명은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였다.
둘은 내가 바닥에 발을 딛자 나에게 다가왔다.
"수고했다 민호야"
"잘했다 구리"
뭐지?
난 이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이 둘도 아까 그 동굴 아저씨처럼 나를 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내 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이들인데 퍽퍽한 인생살이에 집중하느라 잠깐 기억에 묻혔나?
아니면 나는 모종의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었는데 그때 나를 돌봐 주던 이들을 내가 이전의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던 때의 기억을 잃었다거나?
,,,,,,,,,,,,뭐라는거야 정신차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중첩되자 자꾸 현실을 도피하려고 하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나를 향해 반갑게 말을 이어나가는 이들을 다시금 찬찬히 살핀다.
이해가 되는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런 내 노력은 소녀의 머리를 보는 순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졌다.
"귀가...?"
소녀의 머리는 이리보고 저리 봐도 토끼귀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 물건이 달려있었다.
무슨 행사용 머리띠인가 싶었으나 이마에 밴드 하나만 두르고 있는 소녀의 모습과 앞뒤 자우로 자유자제로 움직임은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 진짜 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연스레 내 눈이 옆에 있는 할머니의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녀의 머리에 달려있는 귀보다 더 크고 긴 귀가 나를 향해 까딱까딱 인사를 하고 있었다.
"토끼귀네?"
"민호야?"
"오빠"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두 조손을 내 정신줄이 하늘위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