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4)
눈을 떴을 때 하늘이 보이지 않다니. 정말 희귀한 경험이다. 나는 실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새겼다.
대체 왜 천장이지?
구울
“아!”
튕겨지듯 움직이는 몸의 눈앞에 칼이 쑥 들어왔다.
“누워.”
회귀자가 별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부류끼리 죽이는 게 협박이 안 되는 건 피차 알 텐데.”
“응. 그래서 눈을 후비고 팔다리 힘줄을 끊은 뒤에 알몸으로 숲에 버릴 거야. 그런 몸 상태면 자살하기도 힘들 걸.”
“젠장.”
저건 진심이다. 우리는 그런 꼴을 당해도 언제든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회귀자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알려주지. 너는 구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뛰쳐나왔고, 죄 없는 꼬마와 부딪쳤다. 꼬마가 울면서 소리 지르자 그 시체 조각으로 애 머리를 깨버렸지. 참고로 그 아이 이름은 정수야.”
회귀자가 턱짓한 자리를 보자 미라손이 창가에서 은은한 달빛을 받고 있었다. 미라손은 다시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럼 그 녀석은……”
“죽지는 않았어. 사실 다치지도 않았지.”
“응?”
회귀자가 자신의 목을 검지손가락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이해했지?”
“아.”
회귀자가 자살한 뒤에 과거로 돌아가 나를 기절시켰구나.
“원래 같았으면 아예 구울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이전까지 돌아가는 게 편하지만, 아무래도 같은 부류 상대로는 시간 가지고 장난치는 것 보다는 정직하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게 정직이야?”
“움직이면 양 눈을 후비고 힘줄을 자른다. 응. 정직했는데? 혼자 살다보니 어휘력이 떨어졌구나. 정직과 비폭력은 다른 거야.”
아.
“이 근방에 구울 무리가 있어. 대체 왜 인간 노예들을 데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그냥 미치광이들이다. 인간 노예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실질적인 쓸모가 아닌 가학적인 욕구 충족에 있겠지.”
“그래?”
“이전에 투기장을 운영하던 구울을 본 적이 있었다. 남편의 눈과 혀를 뽑은 뒤, 투기장에 집어넣고 상대를 죽이면 아내는 살려주고 식량까지 챙겨 보내주기로 했지.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말해봐야 뻔하겠지?”
“아.”
“살리려면 우선 죽어야 하니까. 구울은 약속대로 남편이 죽인 아내를 좀비로 살려냈다. 식량으로 남편을 먹인 뒤, 저세상으로 보내줬지. 진부하지만 놈들에게는 꽤나 자극적인 오락거리거든.”
갑자기 천장 어딘가의 어둠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거 모라티 말하는 거야? 눈 쳐지고 귀 찢어진 녀석. 예전에 직소일 부대에 있었을 텐데 잘렸나? 아니면, 그냥 취미 겹치는 다른 녀석인가?”
들리지 않아야 할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미라손으로 손을 뻗었지만, 회귀자는 위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칼등으로 내 손등을 후려쳤다.
“아!”
“됐어, 신경 쓰지 마. 우리 편이니까. 이봐요, 체피. 조용히 있으라니까.”
“아니, 아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나? 미안해. 지금부터 닥치고 있을게.”
“하, 그냥 내려와요. 어차피 인사는 했어야 할 테니까.”
회귀자의 말에 천장에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물질 통과 능력자인가? 아니, 2차원에 스며드는 능력에 더 가깝겠다. 천장에 붙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거야.
천장에서 튀어나온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고 어린애를 겁 주는 것처럼 가볍게 얼렀다.
“애비!”
“가 없다고?”
“……나 얘 맘에 안 들어.”
남자가 슬라임처럼 축 늘어져 바닥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올라왔다.
“하아 지이 마아아안, 새로운 주민은 언제나 환영이야!”
“저 미친놈은 누구지? 아니, 그보다……”
“맞아, 이 사람은 내가 회귀자인 걸 알고 있어. 정확히는 사람도 아니지만.”
남자가 입꼬리가 크게 올라가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기형적으로 큰 송곳니와, 파충류처럼 세로로 찢어진 눈이 묘한 섬짓함을 주었다.
“내 이름은 체페슈. 인간의 구원자이자 사육자이며 언데드, 정확히는 흡혈귀의 왕이지.”
“흡혈귀?”
뭐지?
이 땅에 내려온 언데드는 총 다섯 종류만이 존재한다. 구울, 귀신, 키메라, 데스나이트, 좀비.
“흡혈귀 같은 건 없어.”
“그럼 이건 뭐게?”
자칭 흡혈귀가 입술을 당겨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흡혈귀는 있어. 그저 모든 우리가 여기에 모여서 사람들을 구하고 있으니 모를 뿐.”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회귀자를 바라보고 눈을 찌푸리자 회귀자가 첨언했다.
“좀비나 구울, 데스나이트는 먹지 않아도 생명활동이 가능해. 그게 생명활동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신은 영체에 손상이 있으면 생기를 필요로 하지만, 손상을 입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인간이 궁하지 않아. 키메라야 식사를 필요로 하는 족속들이 있지만, 애초에 자아가 없는 것들이니 상관없고. 하지만 흡혈귀는 다르지.”
“인간의 사육자라고?”
“흡혈귀는 인간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처음에는 우리도 다른 언데드와 함께 멸망 사업에 동참했지만. 어라? 이 망할 놈들이 생각보다 인간을 너무 죽이네? 어쩌겠나. 나와서 편을 바꿔야지. 그런데 이미 늦었을 때 편을 바꿔서 결국 그쪽 인류는 멸망했지. ‘아이고! 우리는 다 죽었네!’ 싶어서 울적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놈들이 차원문을 열었네? 일단 문을 열어준 놈에게는 감사하고, 여기는 지켜야지.”
“아, 저쪽도 망했군.”
“응?”
“아니다.”
“알겠어? 나는 언데드가 없는 편이 이득이라고. 걱정 마. 피는 빨아도 죽을 만큼 먹지는 않으니까.”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려준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채피는 정신 공격이 특징이지. 나 몰래 주민들을 잡아먹고, 주민의 존재를 내 기억에서 지울 수도 있어.”
“그러다가 걸리면 몇 번이고 자살해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나를 죽이고 말겠다 이거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영원히 속이나?”
흡혈귀와 회귀자는 서로에게 장난치듯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상호확증파괴가 신뢰와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식의 관계인가? 아니, 더 효과적이겠군.
나는 흡혈귀에게 관심을 갖기를 포기했다. 일단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지. 그 구울들은 어디에 있지?”
“어? 그럼 난 사라질까?”
“됐어요, 들킨 김에 옆에 앉아요.”
흡혈귀가 빙긋거리며 미라손 옆에 앉았다.
회귀자가 말했다.
“놈들은 북쪽으로 하룻길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해. 구울 일곱에 좀비는 꽤 많고, 인간 노예가 열 명 정도. 매일같이 땅에서 아스팔트 조각을 줍는 일을 시키고 있대. 처음에는 놈들이 환경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재미로 하는 거지. 손톱보다 작은 조각 하나를 위해 땅을 헤집고 지렁이를 잡아먹는 꼴을 즐기는 거야.”
그 미라손 도둑은 먹을거리라도 있기를 기대한 걸까? 고작 총 한 자루로 구울을 이길 수는 없으니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겠군.
“그게 맞겠네. 내가 살던 세상에는 아스팔트 같은 건 없었으니까. 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쓸모 있는 물건은 아니지. 하여간 거 깔끔하지 못한 놈들.”
흡혈귀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런 흡혈귀의 모습을 보니 문득 의아해졌다.
“이 마을에 싸울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지?”
“인간? 흡혈귀?”
“둘 다.”
회귀자가 대답 대신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우리 동족은 별로 남지 않았어. 일단 멸종 위기종인 상태기도 했고, 준비된 상태로 넘어온 게 아니라 저쪽 놈들이 문을 열었을 때 급하게 들어온 거라 전부 넘어오지도 못했고. 아마 거기에 있는 친구들은 얼마 못 가겠지.”
흡혈귀가 처음으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언데드는 전투 인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기 있는 나를 포함한 47명 모두 전투 인력이라 볼 수 있겠지.”
47명. 많은 건가? 흡혈귀의 전투력을 본 적이 없으니 별로 의미는 없겠다. 좀비 47마리면 그냥 돌부리와 다를 게 없고, 데스나이트 47마리면 천재지변이니까.
질문의 요점은 그 뒤에 있었다. 이 곳의 사람들은 멸망 이전을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살아남기 위해 남을 물리적으로 죽여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인간은?”
“너, 그리고 나.”
“주민이 천 명은 넘어 보이는데 고작 우리 둘이 끝이라고?”
“그 아이들은 싸우지 않아.”
싸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확고한 의지 부정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싸울 수 없다고 하면 대체 이 많은 전력을 제대로 훈련시키지도 않은 것에 한심스러워 하겠지만, 적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는 있다. 그런데 싸우지 않는다고?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식량을 조달하려면 기본적인 체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전력이라고 하면 내가 끝이야. 저들은 싸우지 않아.”
“그런 저것들은 용도가 뭐지? 고기방패인가?”
“저 사람들은 옷감을 짜고, 신발을 만들고, 요리를 하고, 집을 짓고,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지. 싸움은 내 역할이야.”
“멍청한 생각이야. 언데드가 마을을 직접 공격하면 혼자서 마을을 지킬 수 없을 텐데?”
“그러면 반복된 회귀로 언데드가 우리 마을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면 되지.”
“아니면 나도 있고.”
흡혈귀가 자신을 가리키며 잔망스럽게 웃었다.
나는 흡혈귀를 무시하고 일어났다.
“놈들이 어느 방향에서 오고 있지?”
“알아서 뭐하게?”
“너희들은 운이 좋았던 거지. 구울은 내가 모조리 죽이고 떠나겠다. 식량이나 좀 내놓아 주면 고맙겠는데.”
“식량?”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나는 여길 떠날 거고, 떠나는 김에 구울도 전부 죽이고 가겠다. 네가 아는 대로 나는 회귀자니 호신용품은 필요하지 않아. 어차피 저것도 있고.”
나는 눈짓으로 미라손을 가리켰다. 흡혈귀는 미라손에 흥미를 갖고 손가락을 댔고, 미라손이 손을 꿈지럭대며 거부감을 표현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즐거워했다.
“그러니 식량이나 좀 넘겨주면 좋겠다는 거지. 회귀로 허공에 빵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식량을 주지 않는다 해도 별 상관은 없다. 회귀자가 끼어 있는 이상 한 쪽이 포기해야만 끝나는 지루한 싸움이 될 테고, 근처에 잡아 죽일 구울이 있는 상태에서 그런 지리멸렬한 싸움에 집착할 생각도 없었다.
간만에 일곱 구울을 어떤 식으로 해체하면 기분이 상쾌해질지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니 회귀자의 입이 뻐끔거리고 있었다.
“말 하고 있었나?”
“안 듣고 있었네?”
“일단 내 물건부터 돌려주지. 식량은 많을수록 좋다. 움직임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는.”
“진짜 안 듣고 있었네?”
“그럼 감탄하지 말고 다시 말하시지.”
“너는 여기 남으라고. 걔네들은 우리 몫이니까.”
회귀자의 목을 바로 비틀지 않은 것은 상당히 힘든 자기 통제였다. 저 자칭 흡혈귀의 왕의 힘도 모르고, 거기에 내 능력을 아는 나와 같은 능력자가 있는 이상, 함부로 달려드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구울은 내 거야.”
“그리고 여기를 떠날 이유도 없지 않아?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인간이야. 그리고 여기는 인간들이 안전할 수 있는 이 세상 유일한 땅이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아니, 거의 교과서에 예시로 써도 위화감이 없을 네 알 바인 사안인데.”
“대체 이런 쓰레기 같은 대화는 왜 이루어지는 거지? 나는 죽이고 싶은 놈들을 죽이는 거고, 네놈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일 텐데.”
“왜냐면 우리는 살리고 싶은 놈들을 살리려고 하니까.”
“그 포로들? 포기해. 구울의 노예가 되면 옆에서 자는 친구도 뜯어먹는 놈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네 둥글둥글한 온실에 위협만 될 거다.”
“환경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면, 환경이 만든 악행이 사람의 책임인가?”
“현학적인 선문답은 때려 쳐. 관심 없으니까. 피타고라스도, 공자도 대가리에 방탄 효과가 붙어 있지 않는 이상 이런 세상에서는 똑같은 시체일 뿐이야. 그 노예들도 네 이야기를 회귀자 오른다리 육회에 곁들일 클래식 음악 정도로 생각하겠지.”
회귀자는 자신의 오른다리를 힐끗 내려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내기할까? 네가 구울을 죽여. 대신 노예는 단 한 명도 죽어서는 안 돼. 그리고 너는 그 노예들 중 한 명이 네 말대로 살인이나 폭력 사태를 저지르거나 죽을 때까지 남아서 이 마을에 기여하도록 해.”
“거절한다면? 저 놈들은 내 꺼야.”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갈 수 있는 건지 신기하네. 일단, 이 구울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처음 알아냈으니까, 생사여탈권은 우리한테 있어. 네가 그 권리를 무시한다면, 채피가 지금 바로 가서 그 구울들을 죽일 거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네가’ 구울을 죽인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이는데? 물론, 약속 해놓고 수틀리니까 도망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나는 이 시점으로 회귀한 뒤에 채피가 나가서 그 구울들을 죽일 거야.”
“흐음……”
나는 미라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지금은 할 일이 있다. 800년 만의 대화라면 밀린 이야기가 많겠지. 그동안 안전하고 편한 환경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나중에 여기를 떠날 때인데……’
나는 내게 권총을 들이밀었던 미라손 도둑을 떠올렸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인성이라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회귀자의 말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었다.
‘살인이나 폭력 사태를 저지르거나 죽을 때까지.’
죽는다는 말은 노예들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마을 사람들의 폭력성을 자극하는 경우까지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언급되지 않은 요소를 추가한 모양이지만, 이번에는 회귀자의 말실수가 치명적이었다.
구울 일곱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매력적이지만,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절박한 것은 아니다.
“정말 멍청한 내기군. 마음에 들어.”
노예가 죽으면 내가 이긴다. 누가 죽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