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3)
“너, 회귀자지. 나와 똑같은?”
회귀자가 이길 수 없는 적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같은 회귀자.
내가 백만 번 죽이고 한 번 죽여도, 내 기억 속에는 죽였던 기억이 사라지고, 한 번 죽었던 기억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나와 여자는 셀 수도 없는 회귀 속에서 서로 패배하기만 하게 된 셈이다.
“사망으로?”
나는 여자 뒤의 무리를 보았다. 이 여자는 자신의 능력을 알려준 건가?
‘그러면, 네가 회귀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럴 리는 없지. 여자의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따라와.”
“잊었나? 아직 나는 지지 않았는데.”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없다면 지치는 쪽이 지는 거다. 그리고 정신력은 이 형편없는 몸뚱이에서 내가 그나마 가장 내세울 수 있는 자산이다.
“아니지, 넌 졌지. 생각해봐. 나는 네가 항복하면 이기는 거고, 너는 내가 죽어야 이기는 거잖아? 그런데 네 시간에서 나는 절대로 죽을 수 없어. 죽으면 나는 부활하고 너는 나를 죽였다는 기억을 잃어버릴테니. 그러니 이 싸움을 끝낼 방법은 네가 항복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내가 이겼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가 덧붙혔다.
“참고로 도망칠 생각은 마. 네가 회귀자인 것을 깨닫자마자 연속 자살로 내 기억을 백업했으니까, 도망쳐도 싸움이 끝날 때까지 추격할 거야.”
연속 자살로 기억을 백업한다고?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시간이 돌아가도 기억은 남으니까. 연속 자살과 백업이 가치가 있을 경우는 오직 같은 회귀자와 싸울 때뿐이다. 내 능력을 깨닫자마자 약점과 해결책을 파악하고 바로 자살한 건가?
미친 사람이다. 아니, 나 같은 사람이다.
나는 권총을 들어 여자의 머리를 겨눴다. 1대1 주먹다짐에서 대화를 시작하더니 갑자기 총을 꺼내자 여자 뒤의 무리가 술렁였다.
“혹은, 네가 죽으면 너와 내 시간이 따로 그렇게 흘러갈지도 모르지.”
“만약에 그랬다면 진작에 너는 네가 이긴 시간선에서, 나는 내가 이긴 시간선에서 알아서 갈 길을 갔겠지. 그래도 궁금하면 한 번 쏴 봐.”
“얼마든지.”
나는 방아쇠를……
*****
“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지.”
“뭔데?”
나는 여자의 흰 옷에 그어진 빽빽한 빗금을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빗금이 여자의 옷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죽은 횟수인가?”
“아, 이거?”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꽤나 신경질적인, 하지만 그런 자신까지도 즐거운 농담거리로 삼는 유쾌한 웃음이었다.
“아, 그렇지. 네가 총을 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죽은 횟수야. 몇 번째 빗금에서 눈치 채나 궁금했는데. 어때, 기왕 시작한 거 만 번 채우고 따라올래?”
아니, 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틀렸다.
이 사람. 나보다 더 미친 사람이다.
마음 속에 작은 유혹이 살아남아 속삭였다. ‘그래도 한 발은 더 쏴 줄 수 있잖아?’
그럴지도 모른다. 여기서 방아쇠를 당기면 그대로 여자는 머리가 터지고, 나는 내 시간선에서 나만의 여정을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시간의 반복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거라면? 그리고 내가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것으로 이 무한에 갇혀 버린다면?
저 녀석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게 여기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나?
나는 권총을 내렸다.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권총 한 자루를 눈앞에 두고도 웃음으로 상대를 제압한 전설 같은 것이 탄생하는 모양이다.
여자는 어깨를 털고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도르마무, 이제 거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나?”
나는 손을 무시하고 여자를 지나쳤다. 여자는 삐뚜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머리가 터진 여자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 여자. 당신이 죽인 거야?”
*****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살려준 게 아니다. 죽이려고 했는데 저 빌어먹을 놈들이 방해한 거지.”
미라손 도둑은 나와, 저 회귀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무리에 끼어들었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쏴 죽였으면 편했을 것을. 회귀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거리며 나와 함께 앞장서 길을 걸었다.
나는 묶여 있지도 않았다. 묶었으면 저항했겠지만, 회귀자는 저항할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나를 무력화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그저 나란히 내 옆을 걸을 뿐이었다.
“너도 안 늙어? 그럼 언제 태어났어? 설마 멸망 이전부터? 반갑네. 그 날을 살았던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멸망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하나?”
회귀자는 다시 웃었다. 그래, 확실히 미친 여자다.
“아, 아아! 그래 넌 시간을 모르겠구나? 회귀를 반복하다보면 시간 개념이 꼬이니까. 나처럼 함께 다닐 사람들이 있다면 모를까 너처럼 혼자 지냈다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겠지.”
“멸망 후 얼마나 지났지?”
“꽤 많이 지났지.”
회귀자는 애매한 태도로 대답했다. 정보를 아끼는 건가?
“구체적인 시간이 궁금해? 그럼 너부터 좀 풀어봐. 그 팔 대체 뭐야? 뭐가 그리 단단해?”
회귀자가 미라손을 가리켰다.
“내 친구. 멸망 때 죽은 내 친구 팔이다.”
“아.”
“살아있었을 때 친구한테도 능력이 발현되었다. 기본적으로 단단하지. 다른 기능도 있지만, 일단은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거래 할 만 할 텐데.”
어차피 시간대 계산은 단순한 호기심 충족 이상의 가치는 없다. 그렇다면 나도 호기심 충족 이상의 정보를 알려 줄 생각은 없다.
내 의도를 알아챈 회귀자가 입을 삐죽였다.
“와, 삭막한 녀석. 그렇게 꼼꼼하게 1대1 교환을 걸어버리면 나중에 나도 똑같이 한다? 사람이 베푸는 맛이 있어야 그게 돌아오지.”
“네가 먼저 거래하자고 하지 않았으면 설득력 있었을 말인데.”
“고건 맞지.”
회귀자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좋아. 멸망 후 824년이 지났어.”
“800년?”
무심코 신음이 터져나왔다. 800년. 800년이 지났다고?
“1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얼추 맞을 거야. 멸망 뒤에 나름대로 연호를 다시 만들었거든. 올해는 재생 823년이야.”
“800년이 넘었단 말이지.”
죽음 1번에 반나절. 4번 연속해서 죽으면 하루. 1400번 죽으면 1년. 100만 번 죽어야 800년.
추억했던 모든 과거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뭐야, 정신 나갔나?”
“아니, 됐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직접 봐. 거의 다 왔어.”
그 뒤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걸었고, 회귀자는 내 반응이 기대된다는 듯 손을 비비적대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에 도달했다.
작은 산이 여럿 자리해 있고, 그 안에 움푹 패인 분지가 있었다. 그 안에는 마을이 있었다.
“와.”
고개를 돌리자 미라손 도둑이 회귀자의 손에 붙들려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불쾌감이 더 한 경악에 사그라들었다.
십자로 길게 뻗어진 대로 사이로 주택가가 늘어져 있다. 언제든지 버리고 갈 수 있게 기본적인 생존권만 지킨 여느 집과는 달리 제대로 된 주택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 수백, 어쩌면 천 명을 넘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안정되어 있었다. 800년간의 삶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무게를 모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회귀자가 말했다.
“일단 소연아, 네가 이 아이를 좀 챙겨 주렴. 어디에서 왔는지, 근처에 일행이 있는지 물어보고. 특별한 능력도 없이 혼자 살아남았을 리는 없으니 근방에 일행이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친구? 넌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하자.”
회귀자가 나를 데리고 십자로를 걸어 마을 중앙으로 들어섰다. 회귀자의 집일까? 지붕의 색이 혼자 하얗다는 것을 빼면 다른 집과 별로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회귀자의 집 앞에는 어린 아이들이 모여 나무 막대기를 휘적이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현란한 헛손질로 주변 아이들을 웃게 만들던 한 꼬마가 회귀자를 보고 외쳤다.
“어, 누나다!”
그 말을 신호로 꼬마들이 와르르 모여 회귀자 주위를 둘러쌌다. 회귀자는 웃으며, 아이들을 안아 올리며 아이들의 일상을 듣고 맞장구를 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떤 아이들은 내게 관심을 가졌다. 아니, 사실 오래 가지지는 못했다. 미라손을 보고 질색을 하며 회귀자 뒤로 숨었으니까.
회귀자는 그제야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 자. 얘들아. 너희들은 이제 저기 가서 놀자! 알겠지? 오늘은 이 처음 보는 아저씨랑 놀아야 되거든?”
“남자친구?”
“데이트?”
“키스?”
“섹x?”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회귀자가 무서운 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올리자 꼬마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회귀자의 집은 평범했다. 방이 3개인 평범한 1층집. 거실에는 식탁과 의자 넷이 놓여있고, 방 하나는 부엌으로 쓰는 듯 각종 조리도구가 놓여 있었다. 물론, 멸망 이전 기준으로 평범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진짜 주방에 감탄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지금까지 봤던 가장 큰 집단은 어린이 인신매매 전문이었지. 다 큰 아이는 작은 아이 무게만큼의 고기와, 작은 아이는 다 큰 아이 무게만큼의 고기와 교환이 가능했거든. 그것도 한 번 이용에. 그것보다 큰 인간 집단은 처음 보다보니 기분이 묘한데.”
회귀자는 별로 불쾌한 기색 없이 물을 끓였다. 설마 차가 있다고?
주전자에서 나오는 것이 뜨거운 맹물이라는 점에 조금 맥 빠지기는 했지만, 나는 회귀자가 내민 컵을 받아들었다.
“우리 사이에 독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렇지.”
맥 빠진다고 말했지만, 뼛속에 녹아드는 뜨거운 물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회귀자가 식탁에 앉아 문가를 보며 말했다.
“말이라는 거 참 신기해. 사람들이 나를 신격화하는 게 싫어서 누나, 아니면 언니라고 부르게 했거든? 그랬더니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가 신을 숭배할 때는 그 이름을 누나로, 여자가 신을 숭배할 때는 그 이름을 언니라고 부르는 것처럼 배우고 있더라고.”
아련한 눈으로 문가를 보던 회귀자가 피식 웃었다.
“물론 내가 여신처럼 아름답기 때문이겠지만.”
“지랄.”
회귀자는 식탁에서 내려왔다.
“나는 최정은. 멸망 이전에는 전주에서 살았었지. 뭐, 지금 와서 지연은 의미가 없지만. 네 이름은?”
나는 말문이 막혀 회귀자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말해본 것이 언제였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대는 내 이름에 관심이 없었고, 나도 상대의 가방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름 대신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까 그 여자. 정체가 뭐지?”
“응? 아, 아까 그 도둑 아가씨?”
“그래.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 거지? 그 사람이 대단히 특별한 사람인가?”
그 여자에게 가방을 도둑맞은 뒤 미라손과 소통이 가능해졌다. 그 여자에게도 특별한 것이 있을까?
회귀자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좋은 일은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안 하는 거고, 나쁜 일은 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하는 거야. 안 그래? 뭐, 좋고 나쁨의 기준이 어디 있냐고 한다면 사람마다 다를 테니 진리를 내려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사람 생명을 구하는 건 좋은 일이야.”
“그 여자는 도둑이야.”
“환경이 만든 도둑이지.”
“그렇다면 내가 죽이는 건 환경이 만든 죽음이겠네. 자연사군.”
회귀자가 이마를 짚고 신음했다.
“다른 사람이 죽인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 너와 나만큼은 예외야. 회귀 하면서 그런 생각도 못 해본 거야?”
“무슨 생각 말하는 거지?”
“하아, 그래. 잘 들어. 내가 알려주지. 하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
회귀자는 내심 기쁜 듯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지금 되시나요?”
그리고 이건 복화술이 아니다.
회귀자가 잠깐만 기다리라는 듯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들어오라고 하자, 미라손 도둑을 데려갔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 소연아 왜?”
“그…… 방금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무래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고, 회귀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갯짓했다.
“괜찮아, 말해봐.”
“그 사람, 노예였대요. 간신히 탈출한.”
“노예? 누구 노예?”
“볼더롤이요.”
볼더롤? 나는 회귀자가 깜짝 놀라 ‘그 볼더롤?’ 같은 소리를 하고 적의를 불태우는 것으로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회귀자는 나와 마찬가지로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구울이요. 이 근방에 구울 무리가 있다는 모양이에요.”
깜짝 놀라 적의를 불태우는 것은 내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