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들(1)
인간과 교류하지 않고 떠돌기만 한지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꾸준히 죽고 회귀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시간 개념은 흐릿해진다. 한 번 죽을 때마다 회귀한 시간만큼 더 시간을 보내야 남들과 같은 시간선에 도달하니까. 어딘가에 표시를 해놔도 돌아갈 때마다 다시 초기화되니 결국에는 외우는 수밖에 없다. 물론 못 외웠다.
이름 모를 산 정상에 앉자 눈이 쌓인 휴전선 저편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DMZ와 원래 같았으면 죽을 때 까지 밟지 못했을 땅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괜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밟을 일 없었을 지뢰를 밟고 뒈졌다. 계속 죽으면서 지뢰의 위치를 외운다면 결국에는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공포영화에서도 호기심 많은 놈들이 먼저 죽고 그런 거지.”
갈 수 없는 땅을 눈으로 담은 뒤 나는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한반도는 반도다. 여길 넘어가지 않는다면 결국 한반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과거라면 한국에서 살다가 죽는다고 한들 답답하다고 느낄 이유가 없었는데, 이제 이곳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불쾌감이 돌았다.
그렇다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중국이나 러시아에 가본 적이 없는 것처럼 통영에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남해 바다에 도착해 봐야 그 뒤에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으니.
“안전하게 여길 넘어갈 방법이 없나?”
어쩌면 바다 쪽으로 간다면 배를 타고 돌아서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방탄이 아닌 인간은 하나쯤 있겠지.
나는 새로 손에 넣은 샷건을 만지며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시야에 바다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바라봤지만, 바다까지 거리가 꽤 되는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
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려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낮추고 천천히 따라갔다.
푸른 옷에 산이라. 아마도 이 근처에 교도소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저들이 사회가 있던 시절 범죄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범죄자들과 함께 교도소를 점령한 자들일 것이다.
“아니, 군인인가?”
사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같은 한 덩어리라 해도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난민들과, 오열을 맞춰 보폭까지 일치하는 군인은 그 느낌부터가 전혀 다르다.
군인이라면 교도소의 범죄자들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죄수복을 입고 밖을 돌아다닐까?
군복은 자연에서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졌고, 죄수복은 자연에서 눈에 잘 띄게 만들어졌다. 군인이라면 굳이 죄수복을 입고 다닐 이유가 없다.
“과연 그럴까? 또 모르지. 군복이 다 망가져서 남은 게 이게 다일지도.”
잠시 미지의 인물들의 정체를 고민하던 나는 내가 멍청한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바보였나? 군인일 리가 없지. 총이 없잖아.
무리의 정체를 고민하는 와중에도 저들은 변함없이 완벽한 대형을 유지했다. 간혹 무리는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기도 했는데, 보통은 나물이나 버섯 따위로 아무래도 식량으로 쓸 만한 것들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멈췄고, 대열이 완전히 멈추고 나면 단 한 사람만이 고개를 숙여 주워야 할 물건을 줍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면 그들은 다시 한 마디 말없이 어디론가 이동했다.
나는 무리를 따라가야 할지 망설였다. 저들의 행동은 훈련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만약에 대규모 정신 조작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가 여기 있다면?
사망회귀는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키는 모든 것에 약하다. 나는 죽으면 대략 반나절 정도 과거로 깨어난다. 팔다리를 묶어 자살을 방지하고 굶어 죽게 만든다면? 혹은 강력한 정신 조작으로 반나절 이상 조종한 뒤에 죽인다면? 나는 영원히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
아니, 더 나쁘다. 다른 이들이 죽는다면 신이 있다면 사후세계로 갈 것이고, 사후가 없다면 그저 무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자의식이 사라져 미쳐버릴 때까지 죽는 것만 반복할 테니.
사망회귀는 신의 유무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지옥에 갈 것이 정해진 능력이다.
지금까지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 나아갔는데, 겨우 상성의 차이로 영원히 죽어버릴 수는 없다.
지금은 식량도 충분하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나는 오른발을 뻗었다.
나는 오른발을 뻗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뭐야?”
오른발을 뻗으면 당연히 그 뒤에 쳐진 왼발을 뻗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죽었구나.”
발을 뻗는 순간 나는 의식을 잃었고, 반나절 뒤에 죽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내가 발을 뻗었기에 죽었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지금도 나는 계속 죽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완벽한 형태의 정신 지배를 구사할 수 있다. 만약에 뒷통수를 때려 기절시키는 물리적인 형태의 기절이었다면 막연하게나마 충격이나 통증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죽인 녀석은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 특정 행동을 계기로 나를 인지하고 죽인 건가?
범인은 인간일까, 언데드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해야할 것이 있다.
나는 샷건을 꺼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준 뒤 그대로 내 머리를 쐈다.
*****
나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 앉아 휴전선 저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저 반대편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도망쳐야 돼.
이건 개미와 호랑이의 싸움 같은 게 아니다. 쇠구슬과 중력의 싸움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푸른 옷을 입은 무리를 봤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산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나는 산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젠장.”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내가 보여? 내 목소리가 들려? 원하는 게 뭐지? 나한테 말할 수는 없는 건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산을 다시 내려가려 든다면 다시 이 위에서 부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위에 앉아 멍하니 자구책을 모색하던 차에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지난 루프에서는 없었던 소리였다.
미라손이 발광하지 않았으니 언데드는 아니다.
“나와.”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40대 정도 되는 여자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여자 역시 그 무리와 마찬가지로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진짜네. 사람이 있었어.”
“그놈이 불렀나?”
“그분이 부르셨지. 나이도 젊은 총각이 말이 왜 이리 싸가지가 없어?”
“그놈이 날 죽였으니까.”
“죽였다고?”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이 하기는 어딘가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고개를 기울이고 의아해 했다.
“아무튼 따라와. 여기는 보는 눈이 많아서 안 돼.”
“누가 보고 있다는 거지?”
“그건 보는 눈이 없을 때 설명해도 되지 않겠니? 어차피 네가 따라올 거라고 들었는데.”
여자의 말대로였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어차피 상대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괜히 뜸 들여서 심리전을 걸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젊은 남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이깟 산길……”
“아, 참 말 많네.”
여자가 내 말을 끊고 내 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배경이 바뀌었다.
“아.”
20여명의 무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도, 어린 사람들도, 나이 든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푸른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래 전과자였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멸망 이전의 한국 사회가 7살 이하의 꼬마를 위한 죄수복을 만들어뒀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테니까.
무리를 한 바퀴 둘러보며 주위를 살핀 내가 말했다.
“여긴 교도소가 아닌 것 같은데?”
교도소에 갇혀 본 적은 없었지만, 여기가 교도소가 아닌 건 알겠다. 여기는 동굴이다.
나는 샷건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러운 웅성거림을 무시하고 내가 외쳤다.
“누구냐 날 죽인 놈은!”
“안녕하세요?”
머리를 박박 민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손을 살짝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총을 겨누자 남자가 깜짝 놀라 양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잠깐만요! 당신이 죽이면 우리도 당신을 죽여야 해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겁 많은 모습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남자의 협박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내가 저 남자를 죽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
내가 죽을 때까지 얼마간은 더 죽일 수 있겠지만, 능력자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고, 내가 죽어버리면 모두의 죽음이 초기화된다.
원래는 이건 내게 유리한 점이지만, 저놈이 내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대도 나와 싸울 때에 한해서는 회귀자의 능력을 그대로 사용하는 셈이다.
내가 총구를 내리자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부담스럽죠? 우리 개인적으로 이야기할까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 그러면 내게 의사를 전달할 수는 없는 건가?”
“그, 그건……”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건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이게 막 편하게 되는 건 아니라서.”
정신 조작보다 의지 전달이 더 고급 기술이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경험상 당사자의 말을 증거 없이 부정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가능성이 높다.
“앞장서.”
“자, 사람들? 잠깐만 비켜주시겠어요?”
동굴 밖으로 나가는가 했는데, 남자는 오히려 동굴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동굴이라 소리가 울릴지도 모르니 조용한 게 좋겠죠?”
“너희는 뭐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먼저 대답해요?”
남자가 주먹이라도 날릴 듯 위협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인간이에요. 살아남으려 노력하고 있죠.”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질문이 두루뭉술하면 대답도 마찬가지인 것 아닌가요?”
나는 당장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정신 조작자가 상대라면, 생각하기 전에 공격하지 않는 이상 결국에는 제압당할 것이고, 성공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동굴 안으로 들어왔으니 반대편에 출구가 없다면 결국 총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그럼 그냥 편하게 하지. 지금 내 생각 읽을 수 있지? 그거에 답을 해봐.”
“좋아요, 어차피 당신을 여기로 부른 것을 설명하려면 그 호기심부터 충족시켜줘야 할 테니 말해주죠.”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언데드를 피해 도망치다가 이 산에 교도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어요. 교도관은 도망쳤고, 죄수들은 갇힌 채 굶어 죽었겠죠. 어쩌면 창살을 벗어날 능력을 얻은 죄수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곳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았어요.”
그들은 그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식량도 있었고, 그 밖으로는 산이었기에 외부의 위협을 미리 감지하기에도 좋았을 테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내부의 악이 분출되지 못하게 막는 교도소의 모든 장치는 외부의 악을 막기에도 적절했다. 그야말로 푸른 옷의 사람들이 새운 요새였다.
“……라고 생각한 게 큰 실수였죠. 그리고 귀신들이 이곳에 날아들었어요.”
까다롭지 않은 언데드가 없지만, 강함을 떠나 가장 까다로운 존재가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귀신이다.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은 구울이나 키메라를 상대할 때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귀신을 상대할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귀신은 말 그대로 귀신이기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성립하지 않는다.
“요새가 함락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아니, 함락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죠. 그냥 들어와서 그냥 빙의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귀신 들린 사람이 되어 자의식을 잃은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 말에 산을 떠돌던 푸른 옷의 무리가 떠올랐다. 물론 이번 루프에서는 내가 그들을 본 적이 없지만, 내 기억을 읽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요. 아무튼 꽤 오랜 시간동안 그곳에서 우리는 의식이 없이 지냈지만, 그런 중에도 밥은 먹고, 잠도 자고, 심지어는 비유적 의미의 잠도 잔 모양이에요. 제가 태어났으니까요.”
“거기서 태어났다고?”
나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절대로 어려 보이지 않는 남자가 언데드의 침공 후에 태어났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인가 생각했는데 남자의 미소를 보니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아, 그래.”
“맞아요. 이 모습은 제가 아니에요. 아무래도 이런 얼굴이면 위압감을 줄 수 있겠다며 나서더군요.”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대며 말을 전했다.
“아무튼, 제가 태어났어요. 아니, ‘저’는 아니죠. 우리 주인님이 태어났죠. 왜요? 주인님 맞잖아요? 아님 말고요. 아, 알겠어요. 다시 시작할까요? 제가 태어났어요.”
그는 엄청난 힘을 가진 정신 능력자였다. 탄생과 동시에 능력을 각성한 그는 교도소 안의 모든 인간의 기억을 읽어냈다. 그리고 인간들을 탈출시키리라 결심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한 사람씩 귀신을 쫓아내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지만, 한계는 있었어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통제하기는 어려워졌죠. 그리고 제가 태어났다고 했죠? 다른 아이들도 있었어요. 말 그대로 진짜 ‘아이’들. 방향성 없는 순수함으로 오로지 보호받아야만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쉽지만 그 뒤에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죠. 결국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귀신들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저는 귀신을 몰아낸 사람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쳤지만, 제 어머니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요새에서 여전히 귀신 들린 채 갇혔죠.”
남자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덧붙였다.
“우리는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죠. 폭력과 공포로 끊을 수 없는 사랑은 도덕과 윤리로도 끊을 수 없어요. 어머니의 세뇌를 풀었다면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저만을 도망치게 했을 거예요. 그걸 막기 위해 어머니는 가장 나중에 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죠.”
귀신들은 그를 도발하기 위해 그의 부모를 찾아내 고문하고 그것을 확성기로 매일같이 틀어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비명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부모가 저들의 부주의함으로 마침내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새를 탈출한 뒤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각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들을 저곳에서 구원한 당사자가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의미가 있는 결론은 아니에요. 그런데 멸망한 세상에서 의미 있는 행동이라는 건 존재하지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의미 없이 하고 싶은 걸 하려고요. 우리는 저 요새를 무너뜨리고 싶어요. 귀신들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쫓지 않고 머물러 있어요. 아마 저 요새 안에서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겠죠. 그리고 그건 꽤나 소중한 사안인 모양이에요. 하나의 삶에서 그 정도 이루면 나름 즐거운 삶의 추억거리 아닌가요?”
“그걸 도와달라고 날 몇 번이나 죽였다고?”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처음에는 당신을 구하려고 했어요. 당신은 푸른 옷의 요새로 가려 했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능력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죠. 나는 저들의 정신을 보호할 수 있지만, 저들의 심장을 노리는 화살은 막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정신은 보호가 필요하지만, 죽음은 두렵지 않죠. 비록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구했으니 당신도 우리를 도와주면 좋은 거래가 아닌가요?”
“부족해.”
남자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지령받은 내용을 내게 전달했다.
“알겠어요. 당신의 기억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더군요. 인격적으로 닳고 닳아 망가진 인간인 거겠죠. 그럼 그대가 기꺼워 할 약속을 하나 추가하죠.”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그럴듯한 폼을 잡더니 말했다.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알아야 하지만 모르고 있는 비밀이 있어요. 우리를 도와준다면 그 비밀을 풀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