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연 만만치 않은 전대고수의 관록
주유곤의 태도는 여전히 도발적이었다. 퉁명스러운 반문이 튀어 나갔다.
“어떻게 말이오?”
“너희는 삼 초식의 무예를 발휘하여 나를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게 해라. 그때마다 한 가지씩 질문을 받겠다.”
“우리가 노선배를 움직이지 못하면요?”
“나도 한 가지씩 요구사항을 말하겠다.”
“병장기를 써도 됩니까?”
“물론이다. 나는 무기를 쓰지 않겠다.”
주유곤이 이문세를 바라봤다. 어찌할까, 묻는 눈빛이었다.
이문세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나설까요?”
문제를 해결하려면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때 등운룡이 나섰다.
“이 형님! 어차피 이건 한 번에 끝날 일도 아니잖아요? 또 우리는 인원도 많고요. 그러니 제가 먼저 겨뤄보겠습니다.”
“이왕자(二王子), 괜찮으시겠나?”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저런 노부인 하나쯤이야, 뭐. 안 그래요?”
정말 보통내기 소년이 아니었다. 무례한 말을 지껄여서 상대의 심기를 흩어놓겠다는 수작질이었다.
이문세도 혼잣말처럼 슬쩍 거들었다.
“하긴, 그렇긴 하네만.”
말하는 동안에도 눈초리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의용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차가운 음성만 내뱉었다.
“너희는 이제 다 이야기했느냐?”
돌연 등운룡이 포권지례를 갖췄다.
방금까지 오만방자했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럼 노선배께서는 조심하십시오.”
“작은 아이야, 너는 힘을 다해라.”
현의용녀가 얼핏 새삼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소년의 그 자신감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소년은 연자창운의 경공술을 펼쳐 몸을 솟구쳤다. 매화난무(梅花亂舞)의 초식이 펼쳐졌다.
꽃잎이 바람에 날려 마치 정신없이 춤추는 듯한 모양의 검광이 들이닥쳤다.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피할 길조차 막혀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슬쩍 휘두른 소매만으로 그 검광의 공세를 무마해버렸다.
등운룡의 초식은 허공만 찔렀을 뿐이었다.
그다음 아무렇지 않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장하다! 그러나 아직 매화가 만발하지는 못하는구나.”
초식은 훌륭하나 자신을 후려쳐 물러서게 할만큼의 내력은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아직 두 초식이 더 남았습니다.”
소년은 이를 앙다물며 내뱉듯 야무지게 대꾸했다.
거기 대답해주는 현의용녀의 목소리가 또 의외로 선선했다. 마치 무엇을 기대하는 듯, 격려하는 듯싶었다.
“너는 초식을 한꺼번에 이어서 써도 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직 어린 네가 사양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잠시 망설이던 등운룡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자기 사형을 한번 쳐다보더니 품에서 단검 두 자루를 빠르게 꺼내 들었다.
주유곤은 말릴 틈도 없었는데 현의용녀가 조금 놀란 목소리를 냈다.
“음양비검(陰陽飛劍)?”
“그렇습니다.”
“비도탈명추혼(飛刀奪命追魂) 엄수수가 그 한 벌의 단검을 네게 주었더냐?”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제 손에 있겠습니까?”
“좋다!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나는 그 단검을 본 적이 있다.”
“그러셨습니까?”
소년의 대꾸는 여전히 도발적이었는데, 현의용녀의 태도가 이상했다. 마치 무엇을 가르쳐주듯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었다.
“당시 엄수수가 펼친 수법은 비도문의 절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너도 배웠을 테지?”
“시험해보십시오!”
“오냐! 손을 써보아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운룡이 몸을 솟구쳤다.
역시 연자창운의 경공술이었다. 제비가 비약하는 몸짓과 똑같았다. 허공에 떠올라 한쪽 발로 다른 쪽 발등을 다시 찼다. 그 탄력으로 몸을 더 높이 띄워 올렸다.
그다음 몸을 거꾸로 획, 뒤집었다. 동시에 두 자루의 단검이 그 손을 떠났다.
앞뒤를 잇던 단검 꼬리가 부딪더니 하나는 머리로 날아갔다. 또 하나는 다리를 향했다.
양검(陽劍)에서는 옅은 붉은색이 돋아났다. 부르르륵, 바람 소리를 냈다. 미미한 파란색을 띤 음검(陰劍)은 푸르릉, 파동만 일으켰다.
신묘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현의용녀가 옷자락을 휘저어 빠르고 가볍게 두 단검을 감싸 쥐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설관죽의 초식과는 비켜나 있구나. 아미파 금광신망(金光神芒)의 수법이 섞였으나 아직 완성된 초식은 아니다.”
그러더니 돌연 얼굴의 망사를 걷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했으나 희로애락의 흔적은 다 지워진 무심한 표정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나뭇가지에 앉았던 흰 앵무새가 깜짝 놀랐다. 빠르게 지껄였다.
“앗! 똑같다! 똑같다! 하나도 안 변했다!”
그건 들은 척도 하지 않은 현의용녀가 등운룡을 바라봤다.
묻는 음성이 여전히 부드러웠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가 졌습니다.”
“내 요구사항도 듣겠느냐?”
“말씀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너는 어린아이인데 배포가 쩨쩨하지 않구나.”
그러자 등운룡이 두 손을 모아 읍하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군요. 좀 전까지 제가 저지른 무례한 언행을 눈감아주시기 바랍니다.”
“오호! 깍듯한 예의범절까지? 좋다! 너는 내 뒤에 서 있어라.”
“네?”
현의용녀는 음양비검을 다시 던져주며 말했다.
“여기 일이 매듭지어지면 너는 나를 따라 자운궁에 가자. 거기서 일 년 동안 머물라는 것이 내 요구사항이다.”
등운룡이 뒤를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사제와 떨어지기 싫은 주유곤은 다급했다. 급하게 물었다.
“자운궁의 소궁주 염소소 소저는 안녕하십니까?”
“그 아이는 자운궁의 궁주가 된 지 오래다. 그걸 왜 묻느냐?”
“제게는 그분에게 무엇이든 한 가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직접 만나서 해라. 그런데 너는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냐?”
“자운궁은 검왕부에 사무침이 쌓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때문에 내 아우의 심신이 상하지는 않을까…….”
“형으로서 걱정도 되겠구나.”
“등에 진땀이 다 날 지경입니다.”
현의용녀가 망사를 다시 내려서 얼굴을 가렸다.
음색에 빈정거림이 섞였다.
“네 배포는 오히려 네 아우보다 여리구나. 그런 아녀자의 심성으로 어찌 천하를 도모하려느냐?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아무렴 내가 무림의 대선배로서 저 까마득한 후배를 괴롭히겠느냐?”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저 아이가 어여뻐서 잠시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다들 알아들었다.
분명 등운룡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 무림 고인들과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주유곤은 그 요구가 썩 달갑지 않았다. 자기 아우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약속을 무시하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형제가 떨어져 있을 시간은 일 년에 불과했다.
그동안에 이 동생이 많은 경험을 쌓고 큰 이득을 볼 것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서 싫은 건 싫은 거였다.
투덜거리듯 내뱉었다.
“어쩔 수 없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다음 화풀이하듯 발을 한번 크게 굴렀다. 바닥의 돌판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깨져 부서졌다.
전보다 훨씬 향상된 내공이었다.
그런데 주유곤은 미처 그걸 깨닫지 못했다. 이를 앙다물고 차갑게 말했을 뿐이었다.
“만약 내 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왕부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짓밟아주리라.”
말하는 입술과 눈매가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자기 아우를 위해서 모든 걸 다 걸겠다는 다짐이었다.
등운룡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기 형을 한 번 부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사형!”
지켜보던 현의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의 더없는 우애를 가상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주유곤의 음성은 강경했다.
“일 년 후 반드시 사제를 데리러 자운궁에 가겠소. 그리고 지금은 하나의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무엇이냐?”
“이제 저는 상고(上古: 오래된 옛날)의 절예를 펼쳐보려 합니다.”
“호, 그래?”
“노선배께서도 피하기만 하시지 말고 손을 쓰십시오.”
“하면?”
“삼합을 겨룬 뒤 승복하는 자가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손속을 펼치면 어쩌려고?”
“상관없습니다.”
“좋다. 그럼 손을 써라.”
“그럼!”
즉각 대답하며 자세를 취했다.
한발 물렀다가 두 발 내디뎠고, 두 발 물러섰다 다시 세 발 내디뎠다. 현환보의 기수식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를 단축했다.
현의용녀는 그 보법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즉시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 내딛는 발걸음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가슴을 번개같이 내리쳤다.
주유곤이 왼손으로 그 초식을 이어받았다. 오른손으로는 교탈조화의 장법 중의 두 번째 초식 창해풍운(蒼海風韻)을 펼쳤다.
웅장한 소리가 일어났다. 푸른 바다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고 커다란 파도가 휘몰아쳐 오는 것 같았다.
이어서 탁, 탁, 탁, 세 번 손이 부딪쳤다.
현의용녀가 반걸음, 주유청은 세 걸음 물러섰다.
“좋은 수법이다.”
“사정을 봐주셨군요.”
“아니다.”
그다음 현의용녀는 선뜻 말을 잇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방금의 격돌장면을 다시 상기해보는 모양이었다. 그다음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나는 억지를 부릴 수 없었겠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그 반문에 대꾸하는 발성에는 묘한 기대감과 이상한 안도감의 여운이 번져 나왔다.
“내가 강호에 나온 지 벌써 반백 년이 넘은 세월이다. 수많은 영웅호걸을 만났으나 이 초식만큼 오묘한 수법은 보지 못했다.”
그러더니 탄식과 함께 말을 매듭지었다.
“참으로 아깝도다. 네 내공이 일관되게 뒤를 받쳐주지 못했으니.”
“소생의 미숙함을 탓할 뿐입니다.”
“그것도 아니다. 우리가 세 초식만 겨루자고 하지 않았다면 다음 초식이 펼쳐지지 않았겠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지닌 내공으로도 반 시진 안에는 너를 제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주유곤은 서문옥연의 말을 또 떠올렸다.
누구든 반 시진 안에 이 장법을 제압할 사람은 없을 거라는!
그러나 지금은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를 기어코 찍어눌러야겠다는 무슨 적개심도 없었다. 다만 상관보의 상태와 상관보주의 안녕이 궁금할 뿐이었다.
현의용녀가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그 수법이 다음 초식으로 이어졌으면 어찌 됐겠느냐?”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