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무얼 하느냐?”
최 영감의 목소리에 희진은 끌어안고 있던 아이에게서 멀어졌다.
“영감님! 어디 계셨어요!”
희진의 볼멘소리에 최 영감은 성가시다는 듯 팔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경이와 이야기를 하고 오는 길이다.”
“경이요?”
희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님이 아니라 경이라니. 저 영감님이 갑자기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기신 거람.
“내려가며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느냐?”
“아무 말 안 하셨는데요?”
희진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최 영감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미간을 강하게 좁혔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풀어냈다.
“네놈이 하도 난리를 치는 통에 중요한 말을 까먹지 않았더냐!”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영감님 나이 탓이지!”
“어허, 네 놈이 그래도 자꾸!”
“아무튼 뭔데요!”
저놈 저거 말버릇 하고는. 최 영감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너와 경은 남매지간이다.”
“남, 뭐요?”
희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제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남매라니. 저 자기밖에 모르는 황태손이랑 남매라니! 우린 그냥 남인데, 왜 그 뒤에 매라는 글자 하나가 더 붙고 난리인 거죠! 왜죠!
“그리고 오늘 네가 데리고 온 아이는 네 동생이 되는 것이다.”
“그럼 저 둘째예요?”
희진은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최 영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진은 허탈한 얼굴로 마루에 털썩 걸터앉았다. 내가 둘째라니. 둘째라니. 하필이면 가장 서럽고 가장 불쌍한 둘째라니.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치이는 둘째라니! 아니, 경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오늘 데려온 이 아이는 어디서 뭘 하다 온 아이인 줄 알고 바로 동생으로 삼는단 말이야?
희진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최 영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건 자신이 둘째가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온갖 둘째들의 서러움을 간접 경험했던 희진이었다. 그러니 난데없에 둘째의 반열에 들게 되었을 때 당연히 반발이 더욱 클 수밖에.
“아, 왜 둘째예요! 싫어요!”
“허면 네가 누이를 할 테냐?”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아서라, 이놈아.”
최 영감은 희진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대꾸했다. 씨알도 안 먹힐 거 왜 물어보셨대. 희진은 입술을 쭉 내밀고 발을 통통거렸다.
“언, 언니……. 내가 싫어?”
속으로 최 영감에 대한 온갖 욕을 풀어내던 희진은 곁에서 제 옷자락을 조심스레 붙잡는 아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너 말고 내 오빠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있어. 엄청 못생기고 성격도 엄청 더럽다?”
“그거 설마 내 얘기는 아니렷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내 말은 네가 듣는구나. 희진은 떡하니 나타난 경의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네가 거기서 나올 줄은 몰랐지.
“진이가 그간 쌓인 게 제법 많았나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감님?”
게다가 그 뒤엔 커다란 밥상을 거뜬히 들고 있는 도영도 함께였다. 사면초가도 이런 사면초가가 없었다. 희진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사방을 둘러봤다. 어떻게 빠져나갈까 생각을 해 보아도 도무지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 맞다. 저 바깥에 그 아저씨. 재빨리 선달의 존재를 기억해 낸 희진이 말을 돌렸다.
“근데 밖에 저 아저씨는 저대로 그냥 두실 거예요?”
“저러다 얼어 죽든, 호랑이한테 물려가든 알 바 아니다.”
도영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처음 보는 도영의 살벌한 모습에 희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주먹다짐을 그렇게 할 때부터 수상하더라니.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인 거야?
“저기, 오라버니…….”
“행여 그자에 대한 말을 할 거라면 그만하거라, 진아. 이리 와서 밥이나 먹자꾸나.”
그쵸. 밥이 중요하긴 하죠. 희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마루 아래로 내려왔다. 도영은 마당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 상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보니까 늘 궁금했던 건데, 보통 조선시대는 어른들 따로, 남자애들 따로 밥을 먹지 않았나? 여긴 고구려라 상관이 없는 건가? 희진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을 눈치 챈 최 영감이 말을 붙여왔다.
“뭐가 또 불만인 게냐?”
“어, 불만은 아니구요. 아니, 영감님은 제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인 줄 아세요?”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않더냐?”
희진은 잠시 숟가락을 입에 물고 지난 날 자신의 행적들을 되돌아봤다. 딱히 불평이나 불만을 했다기 보다는……살아남기 위해서 발악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저 아이 정도면 괜찮죠. 영감님도 참.”
“허어, 이제 동생이라고 편을 드는 것입니까?”
“영감님이야말로 이제 말을 낮추시지요.”
희진은 경과 최 영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기, 가족인 척을 하려면 일단 제일 이상한 걸 고쳐야 할 것같거든요.
“그, 이제 영감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니예요?”
희진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최 영감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제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야겠습니다.”
희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어우, 그동안은 영감님이라 부르면서 얼마나 죄 짓는 기분이었던지 몰라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름을 막 부르면서 예의없는 애가 된 것 같고 그랬거든요.”
희진은 밥을 크게 뜨며 줄줄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말에 최 영감과 경, 그리고 도영까지 모두의 표정이 묘한 빛으로 변했다. 희진은 삽시간에 변한 분위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뭐 실수했나?
“이름이라니?”
먼저 질문을 던진 건 경이었다. 희진은 쫄래쫄래 제 곁을 따라온 아이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며 대꾸했다.
“최 영자 감자시잖아요?”
산채에 침묵이 내리깔렸다. 경과 도영은 심지어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이게 아닌데. 희진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최 영감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희진은 더욱 불안해졌다. 뭐야, 뭔데 이래. 이 분위기 뭔데!
“그건, 그건…….”
숙여진 경에게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우는 듯 웃는 목소리였다.
“영감님은 직책이란 말이다, 이 멍청아!”
결국 박장대소를 하며 뒤로 발라당 넘어간 경이 소리쳤다. 경을 시작으로 도영 역시 숨죽여 떨던 어깨를 마음껏 움직이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그게 직책이었다고? 아니, 이 나라는 무슨 영감님을 직책으로 써? 내 이름 소개 할 때 영감님이 영감님이라길래 당연히 영감님 이름이 영감인 줄 알았지 나는!
희진의 손에 들려있던 숟가락이 허망하게 떨어졌다. 희진은 허탈한 얼굴로 최 영감을 바라봤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는지 수염 위의 콧잔등이 찡긋거리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붉어진 얼굴까지 합하면 완벽했다. 희진은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정신없이 웃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그저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너도 알았니?”
희진은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제 곁에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숟가락을 놓고 희진의 손을 꼭 붙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그래, 내가 언닌데 너도 영감님인 거 알았냐고.”
“언니.”
아이는 희진을 보며 언니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희진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네 언니지. 저기 울면서 웃는 놈 동생이기도 하고.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인생아. 아이고, 내 앞날아! 희진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평상 바닥을 내리쳤다.
“아! 밥상머리 앞에서 그렇게 벌러덩 드러누우면 복 나간다, 오, 오라버니!”
차라리 도영을 향해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건 괜찮았다. 적어도 저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봐도 저보다 어른스럽기는커녕 한참은 어린 아이처럼 구는 경을 향해 오라버니라는 말을 부르려니 자존심이 상하는 그녀였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최 영감에 대한 호칭을 틀려서 한 차례 자존심을 구겼다는 점이겠지만.
“네놈은 그럼 여태 내 이름을 그리 불러댄 것이냐?”
최 영감의 말에 도영은 조금 멎는가 싶었던 웃음을 다시금 터뜨렸다. 그간 저 작은 아이가 얼마나 수도 없이 영감님을 외쳐댔던가. 그게 죄다 이름을 불렀던 거라니.
“허어, 네놈은 예의범절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최 영감은 고개를 내저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맛이 없구나. 오늘은 너희끼리 먹도록 해라.”
“영감님, 설마 속상하시기라도 하셨습니까?”
도영이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매단 채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최 영감이 대번에 눈썹을 그러모으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고작 이런 일로 심사가 좁아질 만큼 작은 사람으로 보이더냐?”
“그야 또 모르는 일이죠. 이런 일을 겪어보신 적이 없으셨으니 말입니다.”
도영은 얄밉게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허어, 참. 최 영감은 일으키려던 엉덩이를 도로 바닥에 주저앉혔다. 내 저놈이 얄미워서라도 밥은 먹어야겠다.
“하, 할아버지.”
경은 최 영감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순간 모두가 조용해졌다. 세상에. 저 잘나디 잘난 황태손이 할아버지라니.
“할아버지.”
처음이 어려웠던 모양인지 경은 재차 최 영감을 향해 할아버지라 부르며 조금 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최 영감은 씁쓸한 얼굴로 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경……아.”
어쩐지 감동스러운 장면이었다. 희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괜히 코밑을 스윽 훔쳤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도영의 눈빛 역시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천둥같은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꼬르륵. 아이의 뱃속에서 울려 퍼진 소리였다. 아이는 작은 얼굴을 푹 숙였다. 희진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많이 배고팠어?”
아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경과 최 영감은 서로 조금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멀어졌다.
“드십시다. 밥 먹고 이야기 해요, 우리. 밤은 기니까.”
희진은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마음 편히 먹어보는 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