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으니까 괜찮아, 나랑 살자."
"저는 좋다고 한 적 없는데 제가 왜요!"
"그럼 나랑 잘래, 나랑 살래? 당장 사는게 걱정된다면 체험판 서비스라도 해줄게."
"그게 그거잖아요!"
예리는 달아오르는 얼굴이 주체가 안되는 듯 손부채질을 계속해서 해댔다.
그런 예리가 귀여운지 진우는 성큼성큼 걸어서 예리에게 다가간다.
예리는 굳이 다가오는 그를 막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왜, 그 모델이랑 나랑 뭐 있을까봐 불안했어?"
"네니요?"
"뭐라고 하는거야, 아무튼. 아무 일도 없고, 걔 내 취향 아니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말고 나한테만 집중해."
예리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걸 이제는 느껴버린 진우는 더 당당해진다.
그런 진우의 말에 예리는 더욱 더 쿵쿵대는 심장에 미쳐버릴 지경이다.
진우가 예리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우리 집 비밀번호, 알려줄까?"
"제, 제, 제, 제, 제가 본부장님 집 비밀번호를 왜 알아요…!"
"비밀번호 마음대로 누르고 막 들어와도 돼."
"거기 제 짐도 없고…! 갈 생각도 없다구요…."
"짐 다 필요없어. 옷이랑 필요한 화장품만 챙겨서 오면 돼. 와서 편하게 지내다가 돌아가, 눌러앉으면 더 좋고."
"진짜 됐거든요? 왜 그렇게까지 저보고 본부장님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다구요…."
예리는 끝까지 완강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
"본부장님, 대체 무슨짓을 하신거에요…!"
"유리학생이 그런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내가 훔쳐온 것도 아니고."
"으아, 전유리 정말…."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아무래도 사심이 약간 담긴, 예리의 안전을 확보할지에 대한 진우의 고민을 들은 유리가 예리의 필수 짐들을 진우의 집으로 보내버린 것.
예리는 진우의 집 안에 놓인 자신의 캐리어 가방을 보고 연신 한숨을 내쉰다.
캐리어 안에는 예리의 겉옷부터 속옷, 화장품 등등 예리가 주로 사용하는게 모두 들어있다.
예리는 캐리어와 진우를 번갈아 몇 차례 쳐다보고는 진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내용물 보신건 아니죠…?"
"뭔가 하고 대충 보기는 했…."
예리는 그대로 진우의 입을 막아버린다.
"이거, 제가 다시 가져갈게요."
"안될걸. 너네 집 비밀번호 바꿨대, 유리학생이."
"전유리,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예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금새 전화를 받는 유리.
["어…. 여보세요?"]
"전유리 너… 미쳤어?"
["뭐, 뭐를! 내가 뭘!"]
"내 물건들 왜 네 마음대로 본부장님 집에 가져다놨냐고!"
["언니의 사랑을 응원하는거지. 나같은 동생이 세상에 어디있어?"]
"그래, 너같은 막무가내 동생이 어디있냐!"
["예쁜 사랑해, 언니! 밤에 극적인 상황들에서 너무 막 빼고 그러지 말고! 안녕!"]
"너 진짜….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유리.
예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노의 숨을 내뱉는다.
그런 예리를 보며 진우가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유리학생 마음 바뀔 때까지만이라도 있어. 나는 너무 신경쓰지 말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하냐구요…."
"나는 정말 괜찮다니까? 아니면… 전예리 인턴이 혹시 나한테 다른 흑심을 품었다던가…"
관심있는 이성이랑 한 집에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써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오지만 억지로 삼켜내는 예리.
그저 진우의 말을 겉으로나마 부정하기 위해서는 지금 상황을 수긍하는 수 밖에 없다.
"일단은… 죄송해요, 신세 좀 질게요. 단 며칠만."
"내 집처럼 편하게 있어. 들어와, 집구경이라도 시켜줄게."
진우는 별다른 표정변화를 주지 않지만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은 예리의 입장을 너무나도 반기고 있었다.
진우를 따라 그의 집을 둘러보는 예리.
방이 다섯 개, 방마다 비치된 드레스룸, 예리의 집보다 큰 거실, 식당을 방불케하는 주방, 예리의 방만한 화장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꿈같은 집이 진우의 집이다.
"이런 곳에… 혼자 사신다구요?"
"이제는 전예리 인턴이랑 살지."
"자, 잠시뿐이죠!"
예리의 부정에 진우는 그냥 가볍게 미소를 날려버리고는 예리를 거실 소파에 앉힌다.
진우의 손길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버린 예리는 그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잠시 어색함에 정적이 흐르는 상황.
진우는 멋쩍어하는 예리에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뭐 마실래? 와인, 주스, 위스키, 칵테일, 건강음료, 소주, 맥주, 양주, 기타 등등…. 원하는건 다 있어."
"주, 주스요!"
"아쉽네. 술을 저 정도 말해주면 보통 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뭐가 아쉬워요! 술 먹여서 무슨 짓을 하려고…!"
"뭐, 나쁘기만 한 짓이겠어?"
"조, 좋은 짓은 뭔데요!"
"좋고 나쁜 짓은 많지. 전예리 인턴이 상상하기 나름이겠지만 말이야."
진우는 예리를 한껏 놀려대며 주방으로 가 주스를 한 잔 따라와 예리에게 건넨다.
예리는 진우의 모든 반응들에 민망한듯 몸을 움츠리며 진우가 주는 잔을 받아든다.
"아, 지낼 방을 안알려줬구나? 어떻게, 같은 방 쓸래?"
"네? 미치셨… 아니, 절대 그건 아니죠…!"
"농담인데 욕까지 들은 것 같아…."
"…아무튼 안돼요! 제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인 남녀가 같은 방을 쓴다는게…."
예리는 괜시리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진우는 방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일단 저 방 써. 좀 작은 편이긴 한데 다른 방들에는 내 짐들이 있어서."
"아, 네…. 작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퇴근할때는 나랑 같이 해. 출근도 나랑 같이 하고, 밥도 나랑 먹어, 야식도 나랑 먹어, 잠도 나랑… 아, 이건 안되나."
"잠은 당연히 안되지만… 그보다 다른 것들은 왜…."
"월세 안받고, 식비도 안받고, 보증금도 없는데. 그걸로 퉁쳐주겠다는거지. 순전히 내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전예리 인턴이 내 친구가 되어주는거지. 계약직 친구라고 해야하나?"
"친구가 아니라… 이건 거의 노예계약 아니에요?"
예리의 말에 진우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흠, 흠.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꼭 노예같은게 아니더라도…."
"아 정말 왜그러세요! 진짜 변태맞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주인님, 해보던가…."
"미쳤어요, 진짜! 먼저 들어갈게요!"
진우의 말들에 잔뜩 성이 난 예리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진우는 아직도 방금 전 대화에 대한 상상을 접지 못했는지 멍하고 붉어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평소처럼 목욕재개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진우.
그의 젖은 몸에는 커다란 샤워타월이 하반신만을 가린채 아슬아슬하게 걸터있다.
진우는 예리가 한 지붕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는지 휘파람을 불며 거실을 활보한다.
방 안에 있던 예리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에 궁금증이 생겼는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휘파람은 왜 불어대시는거지…?"
그냥 무시하려했지만 사람이라는게 뜬금없는 부분에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
예리는 그 상황에서 절대로 열지 말았어야하는 방 문을 열어버렸다.
"보, 본부장…님…?"
"어, 어라…? 뭔데…?"
정적, 당황, 황당, 변태, 야릇, 뭐, 기타 등등.
이 상황을 두글자로 표현하라면 이런 단어들이 나올 것이다.
아마 더 깜찍한 단어들이 많겠지만.
그리고 이 상황에는 꼭 따라오는 소리가 있다.
"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쾅 소리가 두번 울린다.
예리가 방으로 달려가 문을 닫아버리는 소리, 진우가 방으로 도망가버리는 소리.
백진우와 전예리의 아찔한 동거, 시작부터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