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괜찮아요! 이로님은 괜찮으신 거죠…?]
괜찮을 리가 있나. 블랙아웃이 하다 하다 낯선 이를 집으로 초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알 수 없는 연재의 메시지가 이로의 속을 더 타게 만든다. 물론, 이것뿐만이 아니다.
[고마운 건 나죠. 이로씨는 나한테 고마울 리가 없을 텐데?]
주하가 보낸 의미심장한 이 메시지 역시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체 왜? 뭘 했길래 고맙냐고!
이러니까 오늘도 술을 끊을 수가 없지. 그 핑계로 맥주 세 캔을 테이블에 세팅한 이로가 마른안주를 구워 자리를 잡는다.
“근데 이 자식은 왜 답도 없어?!”
자칭 유전자가 남다르시다는 해단에겐 여전히 답이 없는 상태다.
물론, 친해진지 얼마나 됐다고 다짜고짜 주소를 보내버린 이로의 행동이 이상하고 수상하게 여겨졌을 것은 당연했다.
어쩌면 해단의 반응이 가장 정상적일 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답이 없는 거면 순위엔 들지 않는다고 봐도…무방하겠지?”
하지만 집념의 김이로에겐 좀 더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다. 대충 누가 왔겠지 정도로 넘어가기엔,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집에 왔던 사람…그쪽이야?]
*
대충 돌돌 말아 묶은 머리에 한 건지, 만 건지도 모를 수준의 연한 화장 밖으로는 퀭한 다크서클이 여실히 드러난다. 제대로 잠그지도 않은 셔츠 단추와 구색만 갖춰진 청바지, 잔뜩 구겨 신은 스니커즈까지.
조수석에 올라탄 이로의 상태를 발견한 우진이 경악스러운 표정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쉰다.
“오늘 피디님이랑 미팅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근데 꼴이…꼭 그래야 돼?”
“눈 뜨고 있는 게 최선이야. 피곤하니까 말 시키지 마”
입을 떡 벌린 채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이로가 핸드폰을 꺼내 로맨스 어플을 켠다. 간밤에 날 새게 만든 세 남자에게선 아직도 답이 없다.
셋이 짠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같은 타이밍에 읽씹이라고?
궁금증을 못 이겨 꼬박 밤새며 연락을 기다리느라 제대로 잠 한숨 못 잔 이로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우진이 건넨 커피를 간신히 받아든 이로. 입술에 빨대만 집어넣고는 다시 창가에 머리를 기댄다.
“괜찮겠어? 하루만 못 자도 정신 못 차리잖아”
“뭐 어쩌겠어. 우리 피디님께서 굳이 사전탐방을 함께 하자시는데”
잠에 극도로 예민한 이로가 밤을 꼬박 새고도 아침부터 분주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으니, 열혈 피디 서인 때문이었다.
이미 끝난 웹드 촬영 장소 사전탐방을 꼭 작가와 해야 한다는 서인의 깊은 뜻이 게으르고 예민한 이로를 움직인 것이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근데 말이야, 대체 나는 왜 데려가는데?”
하품 쩍쩍하는 입으로도 억지로 미소짓는 연습을 하던 이로의 고개가 쓱, 우진 쪽으로 돌아간다. 찡그린 얼굴로도 곧잘 안전운전을 시행 중인 우진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이로가 힘없는 손을 들어 우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안 치우냐?”
“민대리, 안전운전 알지?”
“하……. 황금 같은 방학 기간에 내가 대체 왜 네 운전기사나 하고 있는 거냐고. 것도 주말에!”
불만 툴툴 나오는 입과 심술 맞게 잔뜩 올라간 눈썹이지만, 곧게 뻗은 팔과 전방을 주시하는 예리한 눈빛만큼은 우진의 말마따나 ‘운전기사’에 버금가는 솜씨였다.
“이이잉!! 오늘 한 번만! 웅?! 우찐아!”
“아 제발…. 알았으니까 입이라도 다물어줄래?”
도무지 받아들일 수준을 벗어난 이로의 치명적 애교에 우진이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뻔뻔하고 당당한 이로 앞에서 우진은 늘 한 수 접고야 마는, 이 앙증맞은 톰과 제리의 관계성이란.
오늘도 톰을 자처한 우진이 말로는 투덜대면서도 운전대를 놓지 않는 건, 햇빛에 치명적인 이로가 여름만 되면 운전대를 전혀 잡지 못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우진의 깊은 속내를 알고 있을 이로가 또 아들 바라보듯 엄마 미소를 지으며 우진을 쳐다본다.
“아우 잘난 내새끼. 어디 좋은 여자 없나?! 넌 왜 연애를 안해?”
“그 질문 안 지겹냐?”
“지겹지. 근데 지겨울 정도로 연애를 안 하니까. 그 누구냐…한송이인가? 걔가 마지막 연애였지?”
“그게 언제적인데.”
“그렇다면……”
집중하는 이로의 자세에 당황한 우진이 고개는 그대로 둔 채, 곁눈질로 이로를 쳐다본다.
“우리 윤피디님 어때?”
“뭐?!”
우진의 고개가 이로 쪽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재빠르게 우진의 얼굴을 잡은 이로가 전방주시를 시킨다.
“안전운전 하라고 이 자식아!”
“너 행여나 윤피디님 앞에서 쓸 때 없는 소리 마라.”
“별로야? 윤피디님 얼마나 귀엽냐? 아니면…우리 집 앞 카페 사장님? 무려 사장이야.”
“또 시작됐네. 제발 누구랑 엮는 것 좀 그만해”
내 연애는 답답해도 남의 연애는 재밌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금세 흥미를 잃은 이로가 툭 삐져나온 입으로 다시 빨대를 문다. 이제야 찾아온 적막에 다시 일정 속도를 유지하던 우진이 신호가 걸림과 동시에 이로를 쳐다본다.
손을 뻗어 조수석의 차광막을 내린 우진이 이로를 지그시 응시한다. 뭔가를 고민할 때면, 우진은 꼭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대충 눈치챈 이로가 고개를 쓱 돌린다.
“할 말 있구나?”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던 우진이 한숨을 푹 쉰다. 얄미운 제리 김이로는 하여간 눈치도 빨라서 우진에게 생각할 틈을 주질 않는다.
“너 강요한 결혼식 진짜 갈 거야?”
이로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다시 전방 주시를 시작한 우진은 눈치채지 못한 듯 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에 성공한 이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당근~ 와달라고 손수 청첩장도 보냈잖니. 그럼 가줘야지!”
“너 그거 오기야.”
“나 원래 오기로 살잖아. 알면서”
“정말 어플에서 알게 된 사람을 데리고 갈 거야?”
차마 쉽게 대답을 뱉지 못한 이로가 마른기침만 반복한다. 사실 이건 이로에게도 실수였다. 계획주의자, 완벽주의자, 플랜걸과 같은 호칭들이 이로의 이름 앞에 턱턱 붙으면 뭘 하나, 중요한 순간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앞선다.
오랜만에 머리보다 감정이 앞서버린 그 선택은 요한의 뻔뻔함에 자극받은 이로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뭐 그렇다고, 이로의 성격에 굳이 돌이킬 마음을 먹을 리는 없었다.
“그럼 지인들 데려가? 저랑 2년 만난 구남친 결혼식입니다, 이러면서? 생각만 해도 구질구질해”
자존심 쎈 이로의 성정에 지인들에게 치부를 보이는 일, 그게 용납이 될 리가 없다.
“썩 나쁠 것도 없잖아. 결혼식만 같이 갔다가 헤어지는 거지. 깔끔하고 좋잖아! 안 그래?”
“하…….”
고지식한 우진은 지나치게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이로를 15년간 감당해왔다. 그러니 어차피 설득당할 이로가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역시 우진이다.
“그래서 누굴 데려갈 건데?”
“오! 웬일로 빠른 태세 전환?”
“잘생겼다는 그 남자친구가 누군진 찾아냈어?”
안 그래도 그 여파로 밤을 새고 말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전혀 소득이 없었다. 갑자기 불현듯 화가 치밀어오른 이로가 주먹을 쥐고 꽥 소리를 지른다.
“아오!! 몰라, 답 없어.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놈도 웃겨. 집 주소를 알려줬다고 뭘 또 굳이 왔다가? 그래놓고 왜 말이 없냐고!”
“김이로 너 진짜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거 계속 해야겠어?”
“세상 험하니까, 진짜 누가 왔다 간 건지 찾아야지. 하여간 찾기만 해봐 아주.”
*
“에취!”
한여름에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에 걸린 건지, 요란스럽게 재채기를 내뱉은 주하가 에어컨 온도를 두 단계 올린다.
“사장님, 감기 걸리셨어요?”
“몰라. 누가 내 얘기하나?”
늘 직원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던 주하가 평소와는 다르게 라떼 한 잔을 공들여 만들고 있다. 나름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다고 실력이 제법 볼만했다. 데코를 마친 주하가 정갈하고 시원한 손님 접대용 미소와 함께 창가 쪽 좌석으로 향한다.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던 서인이 밝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 든다.
“우와! 커피도 직접 만드시나 봐요?”
“특별하고 감사한 분한텐 그렇죠.”
“에이~ 감사는 제가 해야죠! 흔쾌히 장소 협찬 해주신다고 하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야 카페 홍보도 되고 좋습니다. 대학로에서 일어나는 로맨스 스릴러라, 기대되는데요?”
“작가님이 워낙 잘 쓰셔셔요~ 아! 이 장소는 절대 스릴러로 안 쓰고 로맨스로만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긴 위치가 너무 좋아서 다른 메이저 방송사 협찬도 많이 들어오겠어요?”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원하는 단어를 발견한 주하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인다. 순수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카페를 구경 중인 서인을 빤히 보던 주하가 살짝 상체를 숙여 서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종종요. 근데 작가님 성함이 뭐였죠?”
“김이로 작가님이요! 프라하 저택 집필하셨는데, 얼마 전에 종영한 투데이라는 미니시리즈도 쓰셨어요!”
“아, 맞다. 그분. 제가 굉장히 팬이거든요. 얼마 전에 한번 뵙기도 했고”
먹잇감 포획을 눈앞에 둔 하이에나마냥 눈빛을 반짝이는 주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이건 뭐,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
대학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교통체증의 늪에 빠진 우진이 어느새 잠이 든 이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김이로 일어나. 다 왔어”
잠에서 깬 이로가 부스스한 눈으로 거울을 보며 대충 침을 닦는다. 뒤늦게 차가 막히는 밖의 상황을 확인한 이로의 인상이 구겨진다.
“차 엄청 막히네”
“카페 근처까진 왔으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나 차 대고 들어갈게”
최대한 카페 앞까지 온 우진이 이로의 손에 양산을 건넨 뒤, 먼저 보낸다. 양산을 펼쳐 겨우 햇빛을 피한 이로가 좁은 보폭으로 걷는다.
배경을 대학로로 정한 장본인이 자신이니 누구한테 화풀이를 할 수도 없고.
다음부턴 사람 없어 한적하고 나무 많아 시원한 곳으로 정해야겠단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던 이로.
이윽고 주하의 카페를 발견한다.
“여긴가?”
이로가 문 앞에서 제대로 접히지 않는 양산과 씨름하고 있는 그 시각, 서인이 깜짝 게스트로 초대한 누군가 역시 카페 근처로 도달하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로의 무자비한 손길이 양산을 여기저기 휘두르며 접고 있는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어오던 남자와 부딪힌다.
“아!”
누군가의 신음에 놀란 이로가 양산을 곧바로 내리는데, 파란 모자에 가려진 하얀 얼굴의 남자가 양산에 긁힌 팔꿈치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다치셨어요?!”
“하…온몸이 재산인 사람한테….”
남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이로가 몸을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와 동시에 카페에서 나오던 사람과 등이 부딪친다.
아뿔싸. 하필이면 이로가 발을 헛디디며 자신이 상처 낸 사람 품으로 넘어지려던 찰나였다. 놀란 눈의 남자가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어 이로를 받는데, 이로의 힘에 밀려 벽에 등을 부딪친다. 그 여파로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파란색 모자가 벗겨진다.
“윽…!”
벽에 등을 부딪친 채 이로를 팔로 안고 있던 남자가 또 한 번 짧은 신음을 뱉는다. 발목이 아픈 와중에도 엄청난 민폐를 저질렀음을 감지한 이로가 빠른 사과를 건네기 위해 고개를 번쩍 쳐든다.
근데…이 얼굴 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해, 해단…?”
연신 눈을 감고 인상을 구기고 있던 해단이 이로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뜬다. 가까이에 자리 잡은 이로의 얼굴을 한참 보던 해단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다.
“김이로?”
접지른 왼쪽 발목엔 힘이 들어가질 않고, 상체로 쏠린 무게중심 때문에 해단이 일으켜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안겨있어야 할 이 상황.
이로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오늘따라 더디게 돌아가는 머리만을 탓하는 중이었다.
첫 만남치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이로의 얼굴을 살피게 된 해단, 근데 그 시선이 꽤 자연스럽다.
“오늘도네”
“뭘?”
주어 없이 퉁명스럽게 내던져진 해단의 말에 이로가 눈을 크게 뜨고 해단을 올려다본다.
그러니까 이게 착각이 아니라면…해단의 눈은 이로의 얼굴을 훑고 있고, 해단의 입가엔 점점 알 수 없는 미소가 올라오고 있다.
답답해 죽겠는 이 와중에 몸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이로가 한쪽 팔로 벽을 지탱하고 접촉된 몸의 부위를 떼려는 찰나, 해단이 덥석 이로의 팔목을 붙잡는다.
“오늘도 몸부터 들이미시네?”
“뭐…?”
“기억 안 나? 그날 밤”
기어이 몸이 굳어버린 이로가 떡 벌어진 입으로 해단을 주시한다. 그날 밤…그러니까 지금 이 자식이 말하는 그날 밤은….
“너 설마……”
해단의 입가가 특유의 반달 모양으로 씩 접힌다. 여유롭고도 알 수 없는 그의 미소에 몸을 일으켜야 한단 생각도 잊은 이로의 몸이 잔뜩 굳어버린 그 시각.
뒤늦게 주차를 마치고 조수석에 떨어트린 이로의 핸드폰을 들고 걸어가던 우진은 뜻밖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네. 그날 이로님 집에 갔었어요.]
수신자 연재에게서 도착한 로맨스 메시지를 확인한 우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이 상황을 알 리 없을 이로에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코앞까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