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요즘 치매가 심해지셔서, 내색하기가 좀 그랬어. 가을아 괜찮아?"
다희는 테이블에 올려져있는 가을의 손을 붙잡고 곧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니깐 뭐가..."
"나 유학갔다 온지 얼마 안되서, 최근에 들었어. 네 소식."
"아..."
왜 계속 그녀가 가을을 그런 눈으로 바라봤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네 연락처도 바꿔서 모르고, 동창들한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르고. 왜 부모님 돌아가신걸 아무한테도 연락 안했어?"
왜 힘든걸 말하지 않았냐는 서운함이 담긴 말투로 다희의 눈동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난 괜찮은데 다들 왜 그런표정으로 바라보지? 순간 다희의 얼굴에서 지혁의 표정이 겹쳐졌다. 진짜가을이 받아야 할 위로를 대신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정신이 없어...어, 아니. 왜 네가 울어?"
"흐엉엉, 넌 왜 이상황에서도 안우는거야"
갑자기 다희가 울음을 터트렸다. 가을은 당황하며 티슈를 그녀에게 건넸다.
"울지마..."
"허엉 이 기집애야, 네가 안 우니깐 흐윽 나라도 울어야지. 어엉"
"난 괜...응? 왜이러지."
또 이랬다. 다희의 눈물을 보고 있으니 몸이 마음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스위치가 되는 듯 또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희는 울고있는 가을의 모습을 보더니 그녀를 꽉 껴안고 더 크게 울었다.
"가을아, 허어어엉!!"
"흐...흐윽, 윽... 왜 울고 그래 허엉엉엉"
따뜻한 체온이 몸을 감싸자 가을은 가슴 한구석 얼어있던 호수가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목구멍으로 소리를 참아보려 했지만 한번 깨진 물줄기는 막을 수가 없었다.
***
"크흥!! 넌 옛날부터 그러더니. 힘든거 있음 내색도 좀 하고!"
다희가 코를 시원하게 풀면서 퉁퉁부운 눈으로 훈계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서로 부운눈을 마주치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쿡, 크흠. 여튼 엄마아빠도 서운해 하시더라고, 상 치를때 연락도 안하고, 너 그때 여기와서 말해줬다면서?"
"가...아니, 내가?"
"응, 한달전쯤 너 여기에 왔었다던데? 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소식 들었다고."
오랫동안 비워진 집 치고는 깨끗했던 이유가 있었다. 진짜가을이 쓰러지기 전 여기를 방문했던 것이다.
"여기를 왔었어?"
가을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진짜가을이 쓰러진 원인이 여기에 있었을까? 가을은 그녀의 영혼이 있을만한 곳에 조금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여기 온거 기억이 안나?"
"아, 사실... 한달전에 쓰러졌다가 깨어났어. 의사 말로는 해리성 기억상실이라고."
다희의 태도를 보니 진짜가을과 친한사이인것 같았다. 그녀를 통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듯 해 가을은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어... 어디까지?"
"미안, 다희야. 너도 누군지 모르겠어."
"얼..마나...힘들었..으면."
다희는 또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에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보다 가을이 기억을 지우고 싶을만큼 정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그러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육체를 버리고 떠났을까. 그녀를 몸에 가둬두고 떠나던 진짜가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기억 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살았던 곳 위주로 여기저기 다녀보고있어."
"아, 그래서 여기 온거였구나. 너 고3때 갑자기 이사가고 난 후에 처음으로 왔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남아있는 짐을 정리하고 갔다던데."
"갑자기 이사갔다고?"
"응. 그때 할머니가 아저씨한테 쓸데없는 소리계속해서 이사간것 같다고. 엄마가 그러긴 했는데. 사실 할머니가 치매라서 모시고 온거였거든"
"아 그래서 방금전에..."
"그땐 치매도 심하지 않았는데 계속 그런말 해서 너 이사가게나 만들구. 같이 학교 등교해서 얼마나 좋았었는데. 그럼 기억 찾는 건 좀 진행되고 있어?"
"아니 아직."
실제로는 진짜 가을을 찾으러 다니는 거였지만, 기억이든 가을이든 진전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말야, 혹시 내가 자주 갔던 곳이나, 아니면 좋아했던 장소? 그런 곳 생각나면 말해줄래?"
"어... 학교?"
거긴 누구도 좋아할 곳 같지 않은데. 다희도 말을 던져놓고선 무리수라고 생각했는지 멋쩍게 웃었다.
"흐흐, 너 공부하는거 좋아하긴 했는데. 나도 오랜만에 들어와서 잘 기억이 안나네. 혹시 생각나면 나중에라도 말해줄께."
"응 그래. 생각나면 연락줘."
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는 문득 생각났는지 다희가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참, 근데 너 요새도 계속 악몽 꿔?"
"어? 악몽?"
"아...기억안나겠다. 그... 초등학교때부터 1년 마다 한번씩 꾼다고 했었던것 같은데..."
"무슨 악몽?"
"그게... 정확히 기억이 안나. 고등학교때도 매년 그래서 그때만 되면 힘들다 했거든, 뭐 어쨋든 지금은 안꾼다니 다행이다"
"그러게..."
무슨 꿈을 꾼걸까. 그러다 문득 가을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부터 매일 꾸던 꿈을 한번도 꾸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늘 꿈속에서 울고 있는 여자아이, 삐걱 거리는 초록 대문의 소리. 그리고 여자아이의 볼을 가볍게 건드리는 작은 아이의 손가락...
응? 무슨 기억이지?
불쑥 한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장면이 가을의 머리속을 스쳐갔다. 연기처럼 흐릿하게 퍼져가는 장면을, 아이의 손가락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을아. 가을아! 어디 아파?"
가을의 손을 잡고 다급히 부르는 다희의 목소리에 흐릿한 장면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잡힐 듯 했는데. 속으로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냐. 잠깐 어지러웠나봐."
"휴, 나 너 어디 아픈줄 알고."
한참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자 가을이 다시 아파오는가 싶었는지 다희는 걱정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이잉, 지잉
가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폰을 꺼내어 보니 주지혁 이름 세글자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요새 바쁘지도 않은지 틈만 나면 전화였다. 꼭 가을을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 취급을 하듯이.
***
뚜루루 뚜루루
꽤 긴 신호음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자 지혁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이 세번째 연결음이기에 이제는 무슨일이 생긴건 아닌지 조금 초조해졌다.
같이 갈걸 그랬나.
지혁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박비서가 도끼눈을 뜨고 문을 걸어잠궜겠지만, 현실적으로 책상 위에 빼곡히 쌓여있는, 그의 결제만을 기다리고 있는 서류의 뒷감당을 그도 할 자신이 없어 이렇게 초조하게 전화만 걸고 있었다.
주말에 같이 가자니깐 정말 말도 안듣지.
만나서 얘기할때는 꼬박 꼬박 네라고 대답을 잘만 하면서 아침에 다녀오겠다고 문자 한통만 달랑 보낸 가을의 행동에, 어차피 그녀가 순순히 말을 들을거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지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이라 생각되는 긴 연결음이 끝날 무렵, 기계음의 여성 안내목소리가 아닌 가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여보세요.]
"하, 이가을. 진짜 전화 안받지?"
[어... 음.... 진동이라서 몰랐어요. 몇번... 했네요?]
정말 몰랐다는 듯 미안함이 섞여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혁은 언제 초조했냐는 듯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직 고향집은 아니지? "
지혁이 시계를 보니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가 전화를 한 이유도 지금쯤이면 버스를 탔다고 문자라도 올 시간이었는데, 오지 않아서 걱정되는 마음에 연락을 한것이었다.
[아직인데. 아 오늘 고향친구를 만나서 시간 가는줄... 헉 벌써 6시에요?!]
그녀도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아직 고향집에 있는 모양이었다.
거긴 시골이라서 버스가 늦게 까지 없을 건데
"데리러 갈께. 꼼짝말고 거기있어."
이미 쌓여 있는 서류 따윈 지혁의 머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바로 뛰어 나갈 듯 차키를 챙기며 일어서려는 지혁을 그런 그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한 듯 가을이 막아섰다.
[잠깐 스탑. 지금 일은 다 끝내고 온다는거죠?]
어정쩡하게 멈춘 상태로 아직 반 넘게 쌓여있는 서류를 보고도 뻔뻔히 지혁은 거짓말을 했다.
"당연히 다 끝냈지."
[거짓말 하지 마요.]
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어디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다 감시하듯이 문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박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도끼눈 보다는 퇴근하고 싶다는 간절한 눈망울에 지혁은 어쩔 수 없이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앉혔다. 박비서의 눈빛에서 라기 보다는 가을의 다음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기때문이다.
[그리고 걱정 마요. 친구가 터미널까지 데려다준데요.]
"그럼 다행이군. 그런데 친구가 남자는 아니지?"
[맞아요. 지혁씨만큼 잘난 친구가...]
"그런 사람은 없으니깐 여자인가보군."
지혁은 가을이 남자 동창을 만났다면 남자라는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 그 남자가 누구던지 간에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에 위기감은 없었다.
[네네, 그렇죠.]
"도착하면 연락해. 터미널에 데리러 가지"
[아니, 택시타고 집에...]
"아님, 지금 거기로 갈까?"
[도착하면 연락할께요. 얼른 일 하세요. 나중에 봐요.]
"그래, 좀 있다..."
뚜 뚜 뚜
자신이 정말 갈까 싶어 쫓기는 사람처럼 가을이 전화를 끊었다. 말도 다 끝나기 전에 들리는 기계음 소리에 지혁은 기분이 나쁠만도 했지만 자신의 말에 당황스런 얼굴로 후다닥 말을 뱉었을 가을의 모습이 상상이 돼 피식 웃었다.
지혁은 깍지를 끼고 준비운동을 하듯이 기지개를 켰다.
"속도 좀 내볼까"
서류를 하나 꺼내들고 검토하는 속도가 아까보다 더 빨리진것은 착각이 아닐듯 싶다.
***
놀릴 재미도 없는 사람이다. 어차피 어떤 농담을 한다해도 농담 또한 사실로 만들 만큼 본인이 잘난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입만 아프지. 다희가 데려다 준다해서 망정이지 말한번 잘 못했다가 박비서님의 사슴같은 눈동자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뻔 했다는 사실에 가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남친?"
궁금하다는 듯 다희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회사원? 결혼할 사이야?"
"응, 회...사원이고 남자...친구."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깐 틀린 말은 아닌데,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연인사이는 맞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계약관계. 진짜가을이 나타면서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랬다.
"어떤사람이야?"
어떤사람...일까? 까칠한듯 하면서도 다정하고. 그리고 알고보면 하나하나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 그리고
"...진짜 내것이 될수 없는 사람."
"응?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해 다희가 되물었지만 가을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호호호, 얘 말 아끼는것 봐. 어쨋든 나중에 결혼하면, 아니 결혼하기 전에 꼭 소개시켜줘야해."
"훗, 그래"
대답하는 가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