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은 자신을 향해 빠르게 오르는 작은 손을 보자니 머리 속이 깜깜해졌다.
공녀는 떨어진 책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째서 손이 위로 올라오는 거지?
탁
거의 중심에 닿을 듯 다가오는 손을 아프지 않게 잡아내자 작은 벽난로처럼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어, 어머머!”
책장 너머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힘을 풀자 잡힌 손이 포르르 빠져나간다. 하인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제일 잘 알아!]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편에서 부산스런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다다닥 발소리와 함께 푸른색 원피스 차림의 공녀가 나타났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 한 건 처음인가. 하인의 감상과 달리 상대는 투명한 얼굴 아래로 작은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옴칠거리는 볼을 보니, 겸연쩍으면서도 실수할 뻔한 상황이 꽤 재밌나보군.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날개처럼 바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공녀가 작게 헛기침을 한다.
“크큼! 미안해요, 청년!”
“뭐..”
하인이 눈썹을 찡그러뜨렸다.
정말,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너... 날 모르나.”
하인은 부러 담백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관찰하듯 공녀의 얼굴을 살피자 해맑게 싱글거리던 웃음이 뚝 그쳤다.
머리를 다친 게 사실이라는 건데.
하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소문이 제법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니까.
날 파렴치한 인간마냥 헛소문을 낸 건 누구지?에솝의 말대로 공녀일까.
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
들고 있던 책을 건네자 받아든 손이 살짝 떨린다. 공녀는 저를 관찰하는 시선이 불편한 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다쳤다고 하던데.”
하인이 한 발자국 다가가자 한 발자국 물러나면서 호박색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가락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더니 입술을 세게 비트는게 아닌가.
“내가 나무에서 떨어져서... 머리도 다치고... 그래서 기억이 드문드문해.”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하면서 자꾸만 창 밖을 흘깃거리는 걸 보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지금 내가 뭐하는 거지. 괴롭히는 모양새가 됐잖아. 하인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쾌차하길 바라지.”
“고, 고마워. 그럼 안녕.”
한껏 비튼 입술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눈에 들어온다. 하인은 허둥지둥 어깨를 추켜세우며 여러 권의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걸음을 옮기는 공녀를 끝까지 주시했다.
걸어가던 공녀 옆구리에서 얇은 책 한권이 힘없이 떨어져 나왔지만 이미 책장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져버린 뒤였다.
“아는 사이라 했는데, 이름 조차 궁금해하지 않다니.”
하인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떨어진 책을 주웠다. 표지엔 자클라리 공작 얼굴이 조악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조시프림 모스 자클라리 공작처럼 살기로 했다.]
이건 또 뭐야. 도무지 종잡을 수 없잖아.
하인은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 입술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자리를 뜨는 하인의 손에 여전히 책이 들려 있었다.
**
[쿠이드대륙, 그것이 알고 싶다!]
두꺼운 책장을 덮자 암갈색 표지 위로 제목이 드러났다.
설영이 침대에서 몸을 발딱 일으키자 침대가 출렁였다. 그대로 발을 뻗어 두툼한 슬리퍼를 꿰찼다.
생각 외로 재밌는 책이다. 쿠이드대륙과 관련된 온갖 잡학다식의 영역을 망라하여 다루었데, 흥미를 끄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단 말이지.”
관자놀이를 콕콕 누르자 얼마 안 가 작은 입 사이로 하품이 새어나왔다.
저녁 식사를 독특한 향이 나는 매운 수프와 매운 양념으로 조린 고기로 배를 두둑하게 채워서인지, 설영은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자버리기엔 시간이 아까워, 설영에겐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주위를 환기할 겸 창가로 걸어가 큰 창을 밀어 젖히자 시원한 밤공기가 흘러 들어온다.
“그나저나 아까 완전 당황해버렸네. 걔 의심하는 거 아냐?”
설영은 서점에서 실례할 뻔한 소년이, 실은 엘다가 졸졸 쫓아다닌 하인 왕자라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테라가 브리핑한 초상화를 건성으로 봤으니, 나중에 후회한들 어쩌겠나.
괜스레 복잡한 기분이 들어 창가에 몸을 기댄다.
이 아이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이런 저런 고민 속에 빠져있던 설영은 어느 순간부터 주위가 밝아지는 듯한 느낌에 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횃불을 꽂은 마차 무리가 저택 안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 밤에 누구지?”
똑똑.
들어와요, 설영이 대답하자 구김하나 없는 차림새로, 테라가 들어선다. 표정이 전에 없이 한결 밝아진 걸 보니 지금 들어오는 손님은 아마도.
공작이겠지. 설영은 속으로 짐작했다.
“아가씨,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네요.”
테라의 시선이 침대 위로 닿았다 다시 설영을 향했다.
“응, 읽다보니 이렇게 늦어졌네.”
“다행이예요. 방금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어요! 이게 얼마만인지~아아”
테라는 얼굴을 한껏 피며 빠르게 종알거렸다.
“제한지대 순찰을 마치시고 원래는 바로 왕성에 가시기로 하셨는데, 일정을 변경하셨대요.”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엘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바꾼 거겠지.
“저택에서 잠시 쉬셨다 내일 새벽 일찍 왕성으로 출발하신다니 아가씨도 얼굴을 뵙는 게 좋겠어요.”
“...인사하러 내려갈게.”
설영은 티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공작을 만나야 한다. 그것도 그의 딸인 척하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문 설영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 보다 그나마 무난한 연두빛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테라, 저 사람들은 누구야?”
설영이 던진 시선이 마차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 사람들은 눈에 띄게 아름다운 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가슴을 절반이나 드러낸 여자는 붉은색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깔깔깔거리며 막 웃음을 터뜨리던 참이었다. 어디에서건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느낌이 있는 사람이었다.
“천박한... 복식을 즐겨 입는 걸 보니 레베르트리스국 사람이겠네요.”
테라가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갈한 바지정장을 선호하는 테라에겐 이해 안 될 취향이겠군.
설영은 읽은 책에서 레베르트리스국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이곳, 쿠이드 대륙은 대부분 푸칠리안족으로 초창기 하나의 나라에서 부족 간의 이권다툼으로 세 나라로 분리됐다.
그게 슈텐국, 레베르트리스국, 프로다국의 시초였다. 세 나라는 못 말리는 앙숙이라지.
“왜 아버님이 레베르트리스국 사람들과 함께 오셨을까?”
“아마 무슨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예요. 이제 내려가실까요?”
의아함을 묻어둔 설영은 테라를 따라 방을 나섰다. 결국 만나는 구나. 조시프림 모스 자클라리.
그는 쿠이드 대륙 현 최고의 검신으로 불리는 최강 기사. 현 슈텐국 1기사단 단장이자 왕과 모든 전쟁을 함께 한 죽마고우이기도 했다.
칼이야 주방용 칼 밖에 잡아본 적이 없는 설영은 전쟁이나 기사, 검사라는게 딱히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이럴 때 보면 이곳이 정말 다른 세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층계참을 내려와 1층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중에 벌써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설영이 문가에 다다르자 그 소리는 더욱 커졌다.
머리 위, 박제된 곰의 머리가 설영을 내려다보았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킨 설영은 긴장한 기색을 지우고자 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곧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여기 저기 빈대떡처럼 널부러진 사내들은 보아하니 고된 출행을 겪은 기사들이고, 그들과 달리 귀족들로 보이는 이들은 레베르트리스국 사람들인듯 했다.
마침 반대편 입구에서 트레이를 끌고 편안한 차림을 한 이안이 들어섰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직접 차를 준비한 모양이다.
"체크홉! 여긴 슈텐국이라고. 알겠어? 이분들이 네 지저분한 입을 걸레짝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자고."
붉은색 드레스의 미녀가 옆에 있는 사내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새하얀 가슴 둔덕이 보일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몇 몇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테라가 그 모습을 보고 질색한다.
그 와중에 설영의 시선을 붙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
짙푸른 상의 사이로 드러난 두터운 근육, 그리고 길게 찢어진 호박색 눈동자.
남자는 오만해 보이기도 또는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임에도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착각을 일게 했다.
"정말 오랜만이시지요, 아가씨."
테라의 두 손을 맞잡고 눈을 살짝 글썽였다.
하긴. 공작이 자신이 이끄는 기사단과 제한지대 순찰을 떠난 게 마지막 눈이 내렸던 겨울이라 했으니 한 4개월쯤 됐겠네.
공작은 막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을 뻗어 테이블 테두리를 잡았다. 두꺼운 팔뚝부터, 핏줄이 불거진 손등까지 길게 이어진 자상이 눈에 띈다.
떠들썩한 가운데 권태로움이 가득했던 공작의 표정이 심술맞게 변하더니 그가 잡은 테이블이 들썩인다.
잠깐. 저걸 들려고? 누굴 패려고 저러는 거야.
그러자 뺀질뺀질하게 생긴 기사 하나가 두 손을 싹싹 비는 시늉을 한다. 공작은 흥, 하고 콧김을 뿜다가 싱겁게 소파 위로 몸을 뉘인다.
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죽이겠지?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입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괜스레 쫄아 주춤거리니 테라가 뭐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오 간다고요 가.
죽상을 하고 털레 털레 걸음을 옮기는데 공작 옆에 앉아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꼬리가 휘어지게 올라가더니 붉은 입술이 열린다.
“저 분이 엘다 영애님이시군요.”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통통 튀는 말투였다.
그러자 소파에 몸을 파묻은 공작이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동자를 치켜 뜬 공작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뭐지, 아까와는 분위기가 다른데.
“오구! 울 애기~~~~ 아직 자지 않았구나. 나의 천사- 보고싶었단다, 이리 오렴!”
설영은 30년 만에 듣는 애기 소리에 표정을 구길뻔 했다.
이 양반아, 내가 낳은 애기가 둘이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떼면서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하나, 설영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 아빠? 뭐라고 불러야 하지.
느릿한 설영의 걸음을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선 공작이 휘적 휘적 걸어오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 들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리 누르는 기분이었다.
“어, 어?”
무의식적으로 설영이 몸을 뒤로 물리자 뒤에서 바라보던 이안의 표정이 짧은 순간 변했다 지워진다.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한쪽 팔로 설영을 꽉 안아들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나의 아가, 엘다 모스 자클라리. 이 아비 보고 싶어 혼나쮜?”
두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인다.
하아-
“네에에- 너무 보고싶어서 눈에서 진물이 나오고 말았지 뭐예요.”
개발팀 차장이 개소리를 짖을 때면 같이 월월 짖기로 유명했던 일명 멍설영은 볼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습관적으로 입술을 세게 비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어야 하다니. 거기다 저렇게 눈망울을 반짝이는 사람 앞에서 거짓말까지!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이던 설영은 문득 하체 아래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온도에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을 인지했다.
맞다, 나 공작 무릎 위에 앉아있지!
“그래그래! 동이 트자마자 저 망할 담나무를 뽑아낼 것이니 이제 맘 푹 놓아라.”
단단한 손가락을 뻗어 꿀 떨어지는 눈으로 설영의 양 볼을 토닥이던 자클라리 공작은 당장에라도 검을 빼어들 것처럼 창 밖을 노려봤다.
“공작님, 저 나무는 폐하께서 하사하셨다는 걸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공작을 부드럽게 만류했다.
“오, 그렇지. 깜박했다.”
공작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기사들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내 딸이 제일 중요하지. 폐하야 뭐, 주고 까먹었을 거야.”
"공작님에 대한 일이라면 폐하께선 치아 갯수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이안의 말에 쩝, 입맛을 다시는 공작은 아쉬운 표정으로 숲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담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래그래, 담나무를 뽑으면 안되지. 정말 저 나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문이면 어쩔거야.
공작의 품에 어거지로 안겨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설영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때문에 아주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영애님, 헤르미아라고 불러줘요."
여자의 붉은 입꼬리가 예쁘게도 휜다.
마치 반달처럼.
그런데 설영은 여자를 마주하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