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은 테라의 곧은 등을 따라 저택의 동쪽으로 향했다.
자클라리 공작가는 귀족이라면 으레 상상하는 화려한 장식 따위 하나 없는 성이었다.
“동쪽 건물은 그동안 오실 일이 별로 없으셨지요.”
“어? 그, 그렇지.”
모퉁이를 돌자 테라가 발걸음이 멈췄다.
“여깁니다.”
작은 발로 열심히 따라 걷던 설영 역시 걸음을 멈췄다.
“자클라리 가의 유일한 서고입니다.”
테라가 몸을 비켜서자 설영의 눈에 공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짚어주지 않았다면 자질구레한 고물을 쑤셔 넣은 깊은 벽장이라고만 생각했을 공간.
심지어 문도 없는 서고는 아무리 봐도 헛간 같았다.
설영이 미심쩍게 눈을 마주쳐오자 테라가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자클라리 가의 서고 맞습니다.”
설영은 작게 혀를 내두르며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내밀었다. 그 뒤를 테라가 이었다.
서가는 개미굴처럼 깊고 좁았는데 다행히 창이 작게 나 있어 주변을 둘러보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닥 위로 두껍게 깔린 먼지를 밟자 가죽신 아래로 짙은 회색 구름이 안개처럼 퍼진다.
“테라, 누군가 여길 쓰레기통으로 착각했나봐.”
설영이 나지막하게 한마디하자 테라가 속으로 ‘그 누군가는 당신의 아버지입니다.'라는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은근슬쩍 바닥의 먼지들을 문지르는 척 넘어갔다.
“그런데 어째서 제대로 된 책이 하나도 없어?”
거의 무너지다시피한 책장을 이리 저리 기웃거리던, 설영이 은회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툴툴거렸다.
창가로 걸어가 창턱 바로 아래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잡동사니 속을 들여다보더니 곧 분주히 헤집기 시작했다.
“책...인가?”
설영이 집게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들어올리자 테라는 깜짝 놀랐다.
“이게 여기 있었네!”
새삼 세월을 실감하는 목소리였다.
“공작님께서 어린 시절 무예 연습으로 사용한 거예요! 이거 보세요. 여기.”
책을 건네받은 테라가 흐뭇한 낯으로 책 귀퉁이에 [앙 쌘 조쉬프립]이라고 씌인 부분을 가리켰다.
왕 쎈 조시프림이겠지. 설영은 통탄함에 고개를 저었다.
“어머나- 열심히도 찔러 대셨었네요.”
테라의 감탄에 설영은 말을 하려다 그냥 말았다.
‘이건 뭐, 먹물이 없어 물로 글씨를 썼던 조선 최고 명필가 한석봉 선생님 못지 않는.........게 아니라! 이 나라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걸까?’
설영은 애써 이해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안되겠다. 서점에 가야겠어!”
여기선 건질 게 없다고 판단한 설영이 크게 외치자 테라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설마...”
“...........”
묵묵부답에 설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왕성 근처라면... 흠... 이안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테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
왕성 내, [뜨레츄르]는 왕족들도 종종 방문하는 고급 디저트 전문점이다.
초과 근무를 하느라 입이 댓발 튀어나온 비서 에솝과 슈텐국 4왕자 하인 역시 이곳에 있다.
눈을 가릴 듯 내려온 남색 머리카락 너머로 유려하게 뻗은 눈썹이 못마땅한 듯 접혀 있었다.
황금빛 하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성인과 소년 사이에 머물고 있는 남자 넷이 있었다. 하인이 그들을 보며 심기불편해하는 게, 귀족 가의 영애들을 안줏거리로 삼아 저들의 저속한 입에 올려서가 아니었다.
“담나무에서 담을 따려다 떨어졌다더군.”
“누굴 말하는 거야?”
“그, 자클라리 공작이 애지중지한다는 꼴통 딸.”
“크큭! 엘다 공녀말하는 거였어? 시종을 시키면 될 걸 뭐하러 담나무엔 기어 올랐지?”
“4왕자 때문이라더군. 들리는 말로는 떨어진 뒤로 맛이 완전히 가버렸대.”
“하인왕자랑 꼴통 공녀는 무슨 사이길래.”
조롱 가득한 말에 줄곧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한 청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닐, 테텐데... 내, 내가 알기론 엘다 공녀는 약...”
하지만 누구도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소년은 고개를 돌리다 뜻밖의 인물을 보고 어,어 더듬거리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이가 으르렁거렸다.
"루이자 입 좀 다물어."
하인은 고개를 들어 저들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모르는 치들이었다.
‘꼴통 공녀라’
곧 엘다 모스 자클라리를 떠올렸다.
자클라리 공작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보니 그 딸인 엘다 공녀는 하인에게 딱히 기억이랄 게 없는 인물이었다.
하인이 테이블 위를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자 맞은 편에 앉아 유유히 디저트를 잘라먹는 비서, 에솝이 괜히 옴찔거린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에솝은 왼쪽 입가에 생크림을 묻힌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어?"
“뭐, 뭘 말입니까.”
에솝 이 녀석... 하인은 기다란 손가락을 튕겨 디저트를 더 시켰다. 이번에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듬뿍 얹은 걸로.
“꿀꺽!”
맞은편에서 매니저가 직접 트레이를 끌고 오는 모습을 본 에솝이 목울대가 울리도록 침을 삼키더니 이내 테이블보를 만지작거렸다.
"하인님도 자클라리 공작가의 담나무 보신 적 있으시잖아요. 그런 나무는 대륙 안에서도 손에 꼽히죠."
"본 적 있어. 폐하께서 하사하셨지."
하인은 대꾸하며 자신의 접시를 교체하려는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건 질색이다. 반면 단거라면 환장하는 에솝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콧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은 매니저는 에솝 앞에 절인 과일이 소복히 쌓인 케이크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나이프를 뻗어 빠르게 케이크를 가르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말을 이었다.
"큼큼, 문제는 가녀린 여자에게 거대한 담나무로 기어올라가 담 열매를 따오라고 시킨…”
"놈이 나란 말이지.”
에솝의 말을 자른 하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네.”
에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웃기는 군."
하인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 말도 안되는 소문을 누가 냈을 거라 생각하지?"
"당연히 소문의 당사자, 엘다 공녀님 아닐까요?"
하인의 남색 눈동자가 더 짙어지다 이윽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공기 속에 습기가 진득히 베어나온다. 아직 우기철이 아니지만 얼마 안 있으면 우기에 들어설거다.
그때, 창 아래로 챙이 달린 베이지색 모자를 쓴 소녀가 막 걸어가는 게 하인의 눈에 띄었다. 도로 위에 세워진 화려한 마차를 지나쳐 걸어가는 내내 모자 밑으로는 은회색 머리카락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저 여자애?
"사실 말이죠. 엘다 공녀님이 왕자님을 스토...사, 사모한다는 건 꽤 유명하잖습니까. 자클라리 공작님만 아니였음 왕국법을 개정해서라도 고소하시라 읍소할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공작님이 너무 무서워... 아무튼 일방적인 사랑! 옳지 않아요!"
조근 조근 말하던 에솝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얼굴까지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이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게 느껴졌다.
하인은 얘가 왜 이러나,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에솝 지금 할 일이 하나 생겼어."
"아- 갑자기요! 저 퇴근했는데요."
잔뜩 열을 올리던 에솝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인이 몸을 낮추고 무언의 언질을 하자 결국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얼마쯤 시간을 일부러 흘려 보냈을까.
하인은 의자에서 일어서 길쭉한 다리를 움직였다. 구김없는 새하얀 상의 위로 목까지 꽉 채운 금색 단추가 반짝인다. 왕가의 문양인 늑대가 새겨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짤랑, 청량한 소리와 함께 벨트처럼 허리에 두른 금줄 끝에 왕가의 펜던트가 느릿하게 흔들린다.
하인의 발걸음이 딱 멈춘 곳은 소년 넷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곧 소년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 무식한 마차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하군요.”
하인의 손가락이 가리킨 손 끝에는 2층 창 너머, 도로 통행로를 가로막은 화려한 마차가 보였다. 그러자 황금색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소년이 단박에 인상썼다.
“뭐? 무식? 너 이 자식, 뭐야.”
그때, 창 밖의 풍경으로 청록색 제복을 입은 경비단이 그들의 마차 뒤로 하나 둘 다가왔다.
“저...저것들이 미쳤나! 마부! 이건 또 어디 갔어!”
"이것들이, 내가 누군줄 알고! 건들지 마!"
갑작스런 상황에 이들은 단박에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소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자 주위의 시선이 쏟아졌다. 하인은 양해를 구하는 듯 한쪽 손을 가슴 위로 얹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대들은 왕국 교통법을 위반하여 마차는 교통 경비대에 인계됩니다.”
“이 새끼 니가 뭔데! 감히!”
마차 주인인 소년이 입술을 비틀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아무런 표정 없이 내려다 보던 하인이 입을 열었다.
“하인 일리 반스입니다."
깨끗한 얼굴 위로, 무심함이 잔잔하게 흐른다.
“!”
“하인 일리 반스...왕자님?”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한껏 달아올랐던 이들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하핫! 무, 무식한 마차라니. 왕자님의 언행은 역시 듣던대로 거침이 없으시군요. 제가 마부를 잘 타일러볼테니..."
마차 주인인 소년이 괜스레 어색한 웃음과 함께 호기롭게 말을 내뱉었지만 곧바로 얼굴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그것 참 신기하군. "
하인이 한쪽 눈을 찌푸리자 단정한 생김새에서 묘한 불량함이 흘렀다.
"당신은 마부가 저리 했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당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드시군요. 고등 교육을 받은 귀족임에도 마차를 저리 세워둔 건, 그대가 정말 무식하다는 방증입니다."
"말씀이 너.."
차가운 말이 쏟아질수록 소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틈에 사라졌던 에솝이 어느새 다가와 소년을 흘깃보며 귓속말을 전한다.
“아구구! 데스페라 백작가의 첫째 아들입니다. 왕성 도로를 까는데 1할의 자금을 댄 곳이라구요.”
에솝의 난처한 얼굴을 바라본 소년은 용기를 얻은 건지 얼굴색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맞습니다. 저희 가문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수도 정비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명문 가..."
“그거 참 다행이군. 벌금을 치루기엔 충분하겠어.”
하인의 찌푸린 얼굴이 펴지며 미소가 진해지자 에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데스페라가의 자제의 얼굴이 아까와 확연히 다른, 차가운 빛을 띠었다. 거칠게 몸을 돌려 세운 소년에게서 짓이기듯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두고 보라지."
그러자 다른 소년들도 서둘러 따라 붙었다.
루이자라 불린, 소년은 갈팡질팡 하다 하인을 향해 목례를 하곤 떠났다.
“어차피 저것들은 금방 풀려날 텐데요. 매번 귀찮지도 않으세요.”
에휴, 적을 또 만들었구만. 에솝이 종알거리다 문득 돌아선 하인의 얼굴이 날이 선 검처럼 날카로운 걸 보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건 도통 크게 화를 내지 않는 자신의 상관이 지금 상황을 꽤 언짢아한다는 뜻이다.
'고지식한 인간같으니라구.'
궁 내에서도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그의 비서로 배정됐을 땐, 몰랐다. 이정도로 고지식할 줄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하인 왕자 곁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하인 일리 반스일 거다. 에솝은 갑자기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을, 당연히도 하는 것인데 그게 잘못인가."
에솝이 움찔했으나 하인의 눈은 이미 먼 과거로 향해 있었다.
*
[뜨레츄르]에서 나오자 쏟아지는 햇살이 도로 위에서 지글거렸다. 하인은 고개를 들어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만 퇴근해.”
“어디 가시게요?”
몸은 정반대로 향하면서 에솝이 괜히 물어 본다. 하인은 대꾸없이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알이딘과 효보씨네 서점]
하인은 가만히 서점 팻말을 보다 천천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힘없이 울렸다.
서점 안은 고요했다.
하인은 눈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빠르게 쫓았다.
격자무늬 창 사이로 햇볕이 쏟아지는 정오.
햇볕을 쬐는 고양이마냥 책장에 기대 등을 말고 책 속에 푹 빠진 소녀가 있었다. 서점은 한산했고, 숨 쉬는 거라곤 하인과 소녀뿐이었다. 반투명한 은회색 머리카락이 신기루처럼 구불거리고 길게 뻗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서 주근깨가 더 진해 보였다.
엘다 모스 자클라리
언젠가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호박색 눈동자.
- 담나무에서 떨어진 뒤로 완전 맛이 가버렸다더군.
하인이 보기에 그녀의 눈빛이 꽤 진지해 보였다. 책에 빨려 들어갈 듯 코를 박고 집중한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신기하군.
슈텐국은 기사가 세운 나라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과 무예에 있어선 독보적인 국가다. 강력한 무위로 신화를 써왔고 그로 인해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힘을 동경하고 숭배한다.
펜보다 칼을, 책보다 방패를 드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렇기에 그 외의 것들은 폄하되기 일쑤.
슈텐국 문맹률이 대륙 최하위에 해당한다는 게 하인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다. 하인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소녀에게 집중했다.
이젠 어쩐다.
불쑥 난감한 기분이 치고 올라왔다. 아까 서점으로 들어가는 공녀를 봤지만 딱히 이유가 있어 따라 들어온 건 아니었다.
하인은 손을 뻗어 자신의 짙은 남색 머리를 헝클어뜨리다 천천히 반대편 책장으로 몸을 옮겼다.
책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엷은 숨소리가 쌕쌕 들려왔다.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책장에 등을 기댔다. 종이는 빠르게 넘어가기도, 한참이 지나서야 넘어가기도 했다.
가만히 있던 하인은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기댄 몸에 힘을 줄라는 찰나, 불쑥 다리 사이로 책 하나가 삐져나왔다. 정확하게는 하반신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면서.
쿵.
자신의 다리 사이를 지나친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제일 잘 알아]
하인은 자신의 중심을 칠 뻔한 그것을 내려다 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어이쿠."
반대편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법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하인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곧 뒤에 이어질 상황을.
그러니까 손 하나가 하인의 다리 사이로 덜렁 삐져나온 걸 보는 순간에도 말이다.
작은 손은 허공을 휘젔더니 이내 빠르게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