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헉...헉...허..”
설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눈 앞에 너른 초원 드러났다.
‘국립공원도 아니고, 무슨 숲이 저렇게 커!’
설영은 양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모아 쥐곤 옷감을 문질러 보다 저가 빠져나온 숲을 흘깃 쳐다봤다.
“어휴, 미친 사람들이였어.”
혹여나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털레털레 걸음을 늦추니 짙푸른 풍경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초원의 한 가운데, 호수가 잔잔히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고 어디선가 새소리도 들려왔다.
정말이지 이상한 하루다. 하루가 원래 이렇게 길었나?
“나 핸드폰 잃어 버렸나. 아이고."
중얼거리던 설영이 문득 이어폰 케이스를 눈 앞으로 들어 올렸다.
작은 큐빅이 햇살을 받고 반짝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영은 잠시 흐릿한 기분이 들었다. 땅을 향해 내리누르는 드레스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실종되고 나서부터 설영은 이랬다. 갑자기 희망이 떠오르다가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은.
드레스 자락을 툭툭 쳐서 정리를 하다 발 아래에 작은 물웅덩이를 무심코 본 설영이 걸음을 멈췄다.
"뭐야..."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린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몸을 돌려 커다란 호수의 언저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호숫가에 다다르자 부드러운 가죽 신 앞코에 투명한 물이 부딪쳐 온다.
“....”
설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마음을 굳혔는지 천천히 허리를 구부렸다.
심장이 작게 두근거리고 이윽고 수면 위로 머릿 속으로 그리던 얼굴이 드러났다.
“아!”
설영은 신음을 삼켰다. 호수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십대 후반쯤 됨직한 소녀가 호박색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고 설영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주근깨가 잔뜩 박힌 콧잔등과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토실한 볼. 그 위로 삐죽 올라간 눈매.
소녀는 상당히 언짢은 모양인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떨리는 입술을 뗐다.
“너, 너 누구니?”
대답이라도 하듯 구불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물 속에서 반짝거렸다. 정신을 다잡으려 머리를 흔들자 물 속의 소녀도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흠칫
설영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갑작스레 메스꺼움이 몰려온다.
이이이잉- 위이잉-
어지러움과 함께 이명이 설영의 귓속을 거세게 울렸다. 급기야 쓴물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으, 욱... 우, 웩!"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설영은 그대로 드레스 앞섶에 토악질을 해버렸다. 다급하게 땅을 짚으려 손을 뻗어봤지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을 길이 없었다.
지저분한 토사물을 잔뜩 묻힌 채로 쓰러진 설영은 그대로 심연 속으로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
엘다 모스 자클라리.
자클라리 공작 가문의 영애.
18살의 나이로 온실 속 화초와 같은 공작 영애의 삶을 지내왔으리라 짐작되는, 현재 설영이 내려다보고 있는 몸의 당사자.
열흘이 흘렀다.
설영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숲 속에 있는 저 빌어먹을 담나무를 기어오르는 거였다. 이곳에선 감 열매를 ‘담’이라 불렀다.
자신은 돌아가야만 한다. 가서 가희와 가온, 자신의 두 아이들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 설영은 제정신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나무 속에서 떨어졌고, 엘다라는 아이 역시 이곳 담나무에서 떨어졌다했으니... ... 그래. 다시 떨어져 보는 거야!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설영을 ‘엘다’로 알고 있는 모두의 걱정과 관심을 피하기 위해 매일 동이 트기 전에 숲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다시 찾아간 담나무는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잎사귀만 아니었다면 세계를 나누는 성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웅장했다.
설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처음에야 머뭇거렸지 마음먹고 나무를 타니 쭉쭉 오를 수 있었다. 실제 설영 자신의 몸이였다면 엄두도 못 낼 높이였다.
세계의 성벽 위에 서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설영이 한 일은, 그 속으로 과감히 몸을 날린 것.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속전속결.
허나 바뀐 건 없었다.설영은 여전히 이곳이었고, 여전히 엘다라는 소녀의 몸이었다.
의아한 건 아찔한 높이에서 몸을 던졌는데도 귀신같이 시작 지점으로 착지했다는 점이다. 어째서 숨 하나 차지 않고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은 걸까.
설영은 솜털이 보송보송 앉은 창백한 팔뚝을 들어 올리며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아흔 여섯.”
“응?”
“자그마치 담나무에서 떨어진 게 아흔여섯 번이라구요.”
열흘의 시간을 곱씹고 있었던 설영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바로 앞에 아침부터 들이닥친 테라가 엄한 표정으로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불타고 있는 것 같은 붉은 바지정장을 차림으로.
설영 자신도 테라처럼 바지정장을 입고 싶다 했는데, 다들 이상하게 쳐다 보길래 그만뒀다.
당분간 의심받을 짓 하지 말자, 이설영.
마주보는 테라의 눈가에 그늘이 잡혔다.
“엘다 아가씨. 제가 조언 해드려도 될까요?”
“싫다고 해도 말할거잖아.”
짧은 기간동안 겪은 테라는 본인 하고 싶은 말을 꼭 뱉고 마는 인간이라는 거다.
“아가씨, 남자란 말입니다. 자고로 코 끝으로 봐줘야 하는 생물입니다.”
테라가 고개를 들어 코끝을 높이 쳐 올렸다.
어머. 얘, 너 그런 구시대적인 발언을 하다니. 설영은 매끄러운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한 몸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대머리가 머리 벗겨지는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는 심산인지 테라의 턱 끝이 뾰족해지면서 펼친 수첩을 거칠게 덮었다.
“하인 일리 반스. 슈텐국의 4번째 왕자. 무예, 지성, 심성 3박자를 고루 갖춘 인재 중의 인재!”
이윽고 말을 멈추고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설영은 테라의 얼굴을 흐리멍텅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게 나랑 상관인데?”
그러자 테라의 두 눈이 촉촉해지더니 두 손을 뻗어 설영의 손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4왕자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 심정, 이해가요. 하지만 아가씨! 이건 아니죠!”
‘왕자를 졸졸 따라다녀?’
설영은 엘다에게 속사정이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테라는 혹여 엘다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나 싶어 기색을 살폈다.
테라가 보기엔 엘다 아가씨가 기절 한 이후로 많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이다. 인생 몇 십년을 산 사람마냥, 호박색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연륜이 느껴졌다.
‘에이, 착각이겠지.’
테라는 화제를 전환하고자 목소리를 가볍게 띄웠다.
“차라리 타겟을 바꿔보심이 어떠세요.”
“(남자는) 절대 싫어.”
설영은 중요한 주어를 생략한 채 진중하게 선언했다. 아이들을 낳은 뒤론 연애, 결혼에 대한 희망은 깨끗이 접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신뢰, 믿음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20살, 사랑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임신이라는 말을 전했을 때 그 인간은 어땠던가. 영상통화로 작별을 고하던 그 인간, 김민재가 이설영 인생에서 마지막 남자였다.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설영은 느릿하게 턱을 괴었다.
그때, 그 모습을 보던 테라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더니 빳빳한 상의 안에서 커다란 종이를 꺼내들었다.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손목을 한번 털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초상화가 펼쳐졌다. 초상화 속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남성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설영이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테라가 자신만만하게 손을 뻗어 상단 첫 번째 남자를 가리켰다.
“흠! 헤이건 일리 반스"
테라는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뗐다.
"압도하는 검술 실력으로 아가씨 오라버니인 에드님과 자웅을 겨루시는 슈텐국 1왕자.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두 분이 군사학교 라이벌이 된 일화가 꽤 유명하시잖아요."
'엘다에게 오빠도 있었어? 유명한 일화라니?'
설영이 흥미가 생긴 듯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은회색 머리칼이 테이블 위로 부드럽게 쏟아졌다.
눈 앞에 보이는 남자는 단단한 몸과 잿빛 눈, 진한 갈색 머리칼로 시원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테라가 음흉한 눈빛을 띠더니 말을 붙였다.
"사족입니다만, 헤이건 왕자님 가슴팍에 꽃꽂이도 가능하다는 소문이.... 흐흣!”
테라가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 설영은 콧바람을 내뿜었다.
“테라, 난 가슴팍으로 꽃꽂이를 하던 우산꽂이를 하던 관심 없어.”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빠르게 타겟을 변경했다. 손가락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다 멈춘다.
“2왕자이신 앨버리트 왕자께서는 걸어 다니는 얼음 조각으로 불리죠. 특히 이목구비의 비율은 환상이예요."
설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테라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신의 눈엔 이들이 죄다 아들 친구쯤으로 보인다는 걸.
"파리한 청록색 눈동자가 무척 매력적이셔요. 무예 실력은 평범하시지만 왕국 정책의 상당 부분 관여하고 계시다는 소문. 그 말인즉슨 폭주하는 왕.실.브.레.인-!"
“하하.... 폭주하는 구나.”
설영이 대충 대꾸하자 테라는 실망스러운지 작게 투덜거렸다.
"초상화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담 베일 왕자님도 별로시겠네요."
손가락이 아래로 움직였다. 하지만 가리킨 곳은 빈 공간이었다.
"이름처럼 베일에 쌓여있으신 분인지라 소문만 무성하고 실물 본 이는 직계 가족말고는 없다네요.”
“실물을 본 사람이 없다라...”
설영이 습관처럼 빨간 입술을 검지로 세게 비틀며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곤 무언가 마음 먹었는지 허리 위에 작은 주먹을 올리며 말했다.
“테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그럼요!”
“우리 저택에 서가... 있잖아?”
설영이 혹시 서가가 없을까 싶어서 조심스레 말을 띄웠다. 그리곤 얼른 덧붙였다.
“역사책 좀 읽을 수 있을까?”
“아, 장작이 필요하시구나.”
테라가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설영은 그 말을 고쳐주었다.
“책을 장작으로 쓰진 않지.”
“그런가요?”
“보통 책은 배우기 위해 읽지 않니?”
설영은 테라의 단호한 얼굴에 할 말을 잃고 뻐끔거리다 천천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덧붙였다.
"우리 슈텐국 왕자님들 초상화를 보니 갑자기 유구한 왕가 역사가 궁금해지잖니~ 저렇게 넷 다 잘났다는 건 유전자가...“
테라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설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설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하인 왕자님의 뽜밀리 스토리가 궁금하단 말야. 다 알고 싶어. 가슴팍이 아니라 뿌리 깊숙한 그곳까지. 그리고 이왕이면 대륙 전체를 기술한 서적이었음 좋겠다!”
설영이 눈을 찡긋거리며 눙을 치자 테라는 다른 면에서 경악했다.
‘우리 아가씨는 지금까지 읽은 종이라곤 메뉴판이 전부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짐작조차 못한 설영은 묘한 테라의 표정을 보며 의심받을까 조바심이 들었다.
“나 말야... 담나무에서 떨어진 뒤로 기억이 드문드문해진 걸까. 하아-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괜히 한숨을 폭- 내쉬어보았다.
“그건 기억을 잃었다기보다 원래. 전무하신 분야였어요.”
테라가 사실을 정정해주었다.
“그, 그랬지.”
설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아마... 있을거예요. 지금 가보실래요? 서고.”
설영의 두 눈이 간절히 깜빡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