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남동 보랏빛 3층 건물에 낯선 남자가 들어선다.
탁! <기 빨아들이는 방법서 12권>이 덮여진 후 책꽂이에 들어간다. 인기척이 느끼자 뒤돌아보는 임하리. 상대방을 확인하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자주도 오시네요, 건물주님은. 할 일이 없으신가 봅니다.”
“하하. 우리 임하리 선생님 뵈려면 예약도 소용없으니 이렇게 제가 자주 찾아와야지 않겠습니까”
“거절엔 이유가 있다는 법은 모르셨나봅니다.”
순간 욱한 건물주는 주먹이 올라갔지만 곁에 있는 보디가드가 만류하자 참았다. 아무 일도 없는 듯 건물주를 등진 임하리는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건물주님은 국회의원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 운이 좋아 돈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덕을 쌓고 사세요. 그래야 내생에 복을 얻습니다. 인생사는 다 운명의 수레바퀴입니다. 돌고 도는 것이지요.”
하얀 피부에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긴 생머리를 한 늘씬한 그녀는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관상학계에서 알아주는 미인 관상가로 이름이 자자했고,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녀만의 비법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 사람의 인생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높은 확률로 맞추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하. 그러셨지요. 덕을 쌓고 살라고. 근데 돈 있는 제가 국회의원이 돼 덕을 베풀어야 국민들이 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더 고기 맛을 안다는데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가난한 자보다 부유한 자가 덕을 많이 베풀면 더 베풀지 않겠냔 소리로 들린다. 그녀는 쳇-싱긋 웃고 건물주에게 말했다.
“건물주님. 그리 말하셔도 점사를 거부하겠다는 제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 절대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전 잘된 인간과 앞으로 잘될 인간의 운명만 말할 뿐입니다. 이미 하락세를 접어든 인간의 명을 굳이 제가 왜 본단 말입니까. 설마, 본인이 손금을 일부러 찢어 그은 알렉산더 대왕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꿈 깨십시오.”
임하리는 빙그르르 돌아 건물주에게 환한 미소를 남기며 서재를 벗어나려고 했다. 누가 건들면 툭 하고 쓰러질법한 여리여리한 몸매였지만 범접할 수 없는 도인의 향기가 느껴져 함부로 다가갈 수 없어 보이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닫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화를 삭이고 있었던 건물주가 자신을 뜯어말리는 보디가드를 떠밀고 임하리에게 전속력을 달려가 그녀를 서재로 다시 끌고 와 구석에 패대기쳤다.
“운명? 그까짓 거 내가 만들면 돼.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참말이구나.””이게...무슨? 돌았어? 이 돌아이야!“
”잘 가거라! 남 운명만 알지 제 명을 알지 못한 니 무능함을 탓해라!“
구석에 처박힌 임하리를 향해 건물주가 권총을 발사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굴려 총알을 피했지만 책장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거대한 책장이 그녀의 몸 위로 쓰러져 두꺼운 책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겨우 의식을 차린 그녀가 고개를 가까스로 옆으로 돌렸을 땐 이미 머리에서 피어난 핏빛 줄기들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수 천 년 전 수율국. 지평선 너머의 신비한 섬.
덜컹거리는 비단 수레가 자갈길을 달린다. 임하리는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눈 떠보니 눈앞엔 앳돼 보이는 여자들 무리가 요란한 치장과 고운 빛깔 자랑하는 비단옷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서로의 손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아오 내 뒤통수. 망할...여긴 어디야? 이 사람들은 뭐지?
임하리는 머리가 괜찮은지 뒤통수를 문지르며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너무 놀라 숨을 멈췄다.
없다. 없어! 어디 갔지 내 머리카락?
잡혀야 할 머리가 어깨 위에서 잡히지 않자 그녀는 자신이 단발머리란 사실을 알게 됐다. 당황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손등에 쓰인 이상한 빨간색 글자도 발견했다. 제(祭)였다. 제물할 때 쓰는 그 제. 그 제!
이런 젠장!
본능적으로 그녀는 왜 저 어린 소녀들이 한껏 치장을 하고 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비단 수레는 어딘가로 소녀들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중이었다. 꿈을 꿔도 이런 꿈을 꿀 수는 없었다.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었다.
눈을 감고 뺨을 세차게 제 손으로 때렸다. 꿈이라면 느껴지지 않아야 할 통증이 느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바닥에 굴러다니는 거울을 집어 재빨리 얼굴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이 맞았다 하지만 거울 속 그녀의 머리카락 길이가 줄어들더니 다른 인상으로 바뀌어갔다. 그때 갑작스런 두통이 머리를 쿡쿡 찔렀다. 알 수 없는 나라의 이름은 수율국, 빙의한 여자의 이름은 임하리.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벌어졌다. 차원이동 했구나!
역사 속에서도 나오지 않는 나라에 온 것도 억울한데 하필이면 제물이라니 기기 차다!
동명인 임하리는 스무 살의 처녀로 수율국 황제를 제외한 5개의 막강 권력 가문 중 무공으로 유명한 임씨 가문에 셋째 딸이었다. 무공으로 가문을 이끌어온 친아버지가 수율국 황제의 다음 권력자인 현수문의 후원에 들어가 신비의 꽃을 꺾어 심기를 건드린 죄로 힘없는 지방 가문 여식과 함께 권세 가문 중 대표로 셋째 딸인 임하리를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처음부터 임하리가 제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미모와 재주가 출중한 여인들을 중심으로 선발하기에 둘째 딸 임송하가 뽑혀야 했으나 식음을 전폐하고 미음 한 숟가락조차 거부하니 구석에 있던 임하리가 언니 위한다고 제가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당대 최고 여류문인인 윤 부인의 미모를 빼닮아 태어나기에 세 자매가 모두 예뻤으나, 임하리가 열 살 때 어느 날 잉어 한 마리를 잘못 선물 받아 먹인 후 셋째인 임하리만 오른쪽 뺨에 알 수 없는 글자가 생겨 저주에 씌인 아이라 하여 가족들조차 멀리해 하녀와 하인들도 셋째 딸을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지 않았다.
말까지 더듬는 임하리인지라 그녀의 제안을 받은 임씨 가족들은 되레 떨떠름한 반응이었으나 다른 방도가 없자 최대한 그녀를 동여매고 둘러싸서 비단 차 호송을 관리하는 서 대장에게 은밀하게 은을 주어 출발에 무리 없게 하였다.
이 몸은 본 주인은 아마도...이불 같은 비단 옷에 파묻혀서 질식해서 죽은 것 같았다.
오늘은 제물을 바치러 가는 날이다.
수율국에는 십년 전, 지금의 황제가 오르기 전까지 황자의 난이 끊이질 않았는데 어느 순간 모든 황자를 제거하고 살아남은 자는 스물 중반의 용수왕 현수문 하나였다. 그는 모든 것을 평정한 후 황제에게 나라를 맡기며 황궁과 반대편에 자신만의 성 청훈궁을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비밀에 싸인 존재였다.
수도에 거주하던 임하리는 점점 멀어져가는 황궁을 마냥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물로 바쳐질 소녀들이 탄 비단 수레는 청훈궁으로 속히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숲길로 접어든 수레 비단 행렬은 걸음을 더 빨리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수레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지?
울먹이며 훌쩍거리던 소녀들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임하리는 잦아지는 두통에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비단수레를 세워둔 근처 나무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멈춰라! 죽고 싶지 않으면 가진 것을 다 내놓고 이곳에서 썩 꺼지거라!“
황궁과 외따로 사는 용수왕 현수문은 청훈궁을 둘러싼 12개의 산을 갖고 있었는데, 황제가 가진 11개 산보다 하나 더 가진 셈이라 민간 도적이라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 분명했다.
”흑흑, 우리 죽나봐. 흑흑“
안 그래도 데스로드로 향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아예 타는 불에 기름 붓는 격으로 만드는 말이었다.
임하리는 급한대로 사태를 파악하려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전생에 그녀의 특기는 사람의 눈동자를 3초 동안 뚫어지게 보고 기를 빨아들여 그 사람의 인생사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수레에 있는 소녀들은 얼굴이고 할 것 없이 온몸을 비단옷과 사치스런 장신구로 치장했기에 기를 빨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수레를 운송하는 사병이나 책임자인 서 대장의 눈동자를 보면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때 침착하지만 톤이 높은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