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필리핀에서 왔다.
나이는 41세, 불법 체류 기간은 5년이 넘었다. 사전에 넘겨받은 프로필을 읽어가면서 나는 힐끔 남자를 봤다. 갈색 머리에 미비하게 들러붙은 머리칼은 부드럽게 흔들렸고, 두툼한 입술에는 흡사 성자를 연상시키는 듯한 차분함이 서려있었다. 도무지 범죄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과 마주치자 그것이 곧 크나큰 착각이란 걸 깨달았다.
언제나 그렇듯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 눈은 사람을 죽인 눈이 맞았다. 5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광기의 눈.
- 납치라고…… 적혀있네요.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아무리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이미 그런 사람들을 숱하게 접하는 나로썬 두려울 게 없는 눈이었다.
“못 믿겠죠? 납치라니.”
어눌하지만 막힘없는 한국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리더니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이런 꼴만 안 당했어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다 큰 어른이 납치된 뒤에 실험을 당했다니, 제가 이 나라 사람이었어도 다들 개소리라고 했겠죠? 그치만 사실이에요.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없어요? 농장에서 기르던 가축이 어느 날 아침 죽어있었다는 이야기요. 아,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냥 단순히 죽어 있었다는 얘기면 꺼내지도 않았어요. 딴 게 아니라 가축의 시체가 일부 부위만 없어진 겁니다. 누가 그 부분만 도려내 듯 일부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내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 덕에 흰 이가 더욱 부각돼 보였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 그러니까 당신도 잡혔었다는 얘긴가요? 외계인한테.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설마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니,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일단 확인을 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책상 위에 놓인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 그럼 시작합시다.
“어떤 것부터 말하면 될까요?”
묘하게 신나하는 목소리 같았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며 대답했다.
- 그냥 다요. 처음부터.
“음, 그러니까 27살이 됐을 때 여기 올 생각을 했어요. 제 친구들은 이미 다 떠났었지만 저는 우리나라가 좋았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 아, 잠깐만요.
손사래를 치는 내 손 너머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나는 그의 증상을 들으러 온 거지 인생 드라마를 감상하러 온 게 아니다. 그런 건 내가 듣고 싶지도 들을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주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해주자 그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 놈들한테 잡혀간 거에 대해서 말씀해달라는 것 같은데, 사실 많이는 말씀 못 드려요. 놈들에 대한 기억이 솔직히 거의 없기도 하고, 그걸 떠올리려고 하면 자꾸 관자놀이가 쑤셔요 -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 그래도 듣고 싶으시다면 얘기해드릴께요. 언제부터 제가 잡혀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현장에서 잘리고, 며칠을 월세방에서만 보냈거든요. 거기에도 적혀 있나 보네요?”
- 예, 적혀 있어요. 새 장비로 인한 문제……라고 돼있네요, 맞나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짤리기 한 달 전쯤 공장에 새로 장비하나가 들어왔는데 이게 써먹기가 힘들더라구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사장님께 너무 불편한 것 같다고 말씀 좀 드렸더니, 바로 자르더라고요. 남들보다 제 생산량이 월등히 적다고, 회사에 저 같은 게으른 놈은 필요 없으니 백수 짓은 우리나라로 돌아가서 하라나요. 장비가 손에 안 익으니 생산량이 낮은 거 아닌가요?”
- 그렇군요. 부당한 거 같으면 신고해도 됐을 텐데 왜 안 하셨죠?
"솔직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물어보고 싶어도 주변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없었고 물어봐도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고보니 서류 내용에 적혀 있었다. 직장에서도 집 주변에서도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가 누군가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고 기록돼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폭력성이 쉽게 터지는 법이지.
“어쨌건 그 후로 며칠 동안 집에만 틀어박혔어요. 저 하나 없어진다고 뭐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했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요. 덕분에 계속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어요.”
- 술로 말씀이세요?
내 물음에 남자는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계속했다.
“예, 맞아요, 술. 낮에는 자고 밤에는 마시고. 잠, 술, 잠, 술.”
- 그럼 언제 잡힌 건지 기억나지 않겠군요.
“뭐,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그렇죠. 하지만 그 표현은 좀 적절하지 않네요.”
- 어떤 점이요? 기억나지 않는다는 부분이요?
“그러니까 아마 선생님은 지금 제가 술에 쩔어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여기시는 거잖아요, 맞죠? 제 말이 틀립니까?”
맞는 말이다. 정확히는 그 술 때문에 망상에 쩐 거라고 여기는 게 내 생각이지만. 일단 조심스레 수긍의 표시를 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사실 그게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시는군요. 그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겁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기억이 사라진 거니까요. 지금 저한테 남아있는 기억들, 간신히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남은 것과 기억하는 건 엄연히 다르죠. 없어진 그 일주일(맞나요? 사실 느낌으론 몇 분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치 기억 중에 놈들이 미처 지우지 못한 게 남아있는 거죠. 어떻게 아냐고요? 그야 느낌이 전혀 다르니까요. 씹할 숙취랑 달라요. 꿈이랑도 다르죠. 몽롱한 것 같지만 분명 생생하다는 사실이 느껴져요. 필름 끊기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 훨씬 인공적입니다. 누가 분명 부자연스럽게 직접 뇌 속을 건드린 게 느껴지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연스러운 것 같은 모순된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아, 그거랑 같아요. 전신마취가 아닌 일반 마취를 했을 때 느낌이요. 국부 마취라고 하나? 일부는 아무것도 못 느끼지만, 일부는 여전히 느낄 수 있어서 생기는 느낌. 그 양 사이의 괴리감이 미칠 듯이 느껴져요. 지금 바로 이순간에도! - 여기서 소릴 지르는 바람에 잠깐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 흥분해서 죄송해요. 아무튼 술에 떡이 되는 거랑은 비교도 안 돼죠.”
- 알았어요. 일단 진정하세요. 전 당신 말 믿어요.
“역시 선생님은 다르군요. 인정해주실 줄 알았어요.”
까무잡잡한 손이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축축한 감촉에 불쾌감이 들었다.
- 알았으니까, 납치됐을 때 그 남은 기억이란 걸 가르쳐 주시겠어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맨 먼저 기억나는 건 줄이에요. 줄이라기보단 벨트가 적당하겠네요. 어찌됐건 특이한 벨트였는데 분명 겉보기에도 그렇고 감촉도 금속성의 단단한 고체인데도 힘을 주면 밧줄마냥 조금 움직이더라구요.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묶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변 구조도……,음, 솔직히 이건 좀 설명드리기 힘들군요.”
- 설명하기 힘드시면 넘어가셔도 됩니다.
“아 괜찮아요. 그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니까. 음, 구조 자체는 제 집 방이랑 거의 똑같았어요. 예, 저도 무슨 생각하시는 줄 알아요. 하지만 색이 달랐죠. 방이랑 똑같아도 운통 회색 천지였어요. 아까 말씀드린 줄이랑 같은 색이었죠. 밋밋한 회색. 물론 사실 이것도 정확한 설명은 못 돼요. 회색 천지였다가 제 방 모습이었다가, 아무튼 끊임없이 바뀌어서 말이죠. 실제로 그 공간이 그렇게 바뀐 건지 그냥 제 기억이 자꾸 집이랑 헛갈리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젠장, 설명해놓고도 무슨 소린지 더 꼬이는 것 같은데……. 아, 그래도 확실히 저희 집은 아니에요. 거긴 살아있었으니까.”
- 무슨 얘기죠?
“움직였거든요, 사방이. 그, 생물이 숨 쉬는 것처럼요. 온 벽과 천장, 바닥이 (아, 바닥은 사실 안 보였어요, 그래도 뭐랄까, 알 수 있었죠) 꿈틀거렸어요. 분명 줄처럼 단단한 질감일 것 같은데 잘도 움직이더라니깐요. 오히려 줄보다 더 활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하긴 살아있으니까 당연한 건가. 아, 거짓말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시각적으로 확인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에요. 어색하게 베낀 허접한 모조품처럼 이질적인 기분이 든 건 맞지만 분명 생물 특유의 체취와 온기가 느껴졌죠. 그건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해요. 아무것도 못한 채 놈들이 제 몸을 가지고 노는 매 순간마다 느껴졌거든요.
그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역겨운 눈깔들. 간디랑 루터 킹이랑 그 밖에 다양한 사람들이 관음증 환자 같은 표정으로 절 응시했어요. 희미하지만 제 몸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생각들만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구역질이 나거든요.”
- 간디?
“아, 놈들 얘기에요. 뭔진 몰라도(아마 저희를 기만하게 위해서겠죠) 다들 사람의 모습으로 있었어요. 하지만 건물 구조 때 말씀드린 것처럼 기억이 엉망이 되어서 놈들의 모습이 또렷한 형태로는 머리에 안 남아있어요. 간디, 루터 킹, 링컨, 다니엘 파나야(저희 필리핀의 유명한 배우에요, 아 모르시는군요)……. 아무튼 다양한 얼굴들이 절 관찰했어요. 어쩌면 여럿이 아니라 한 명이고 그 얼굴이 계속 바뀌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최종적인 건 아무것도 모르지만 놈들이 절 가지고 논 건 확실해요. 절 가지고 노는 동안 계속 웃어댔으니까. 뭐랄까, 어렸을 때 본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과장된 웃음이었어요. 왜 꼭 삼류 악당들 웃을 때 나는 소리 있잖아요? 크하하하, 하는 식으로……, 아시겠어요? 그래서 이를 드러낸 꼬라지가 하나 같이 광기 그 자체였죠.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아요.”
-대체 어떤 식으로 놀았다는 건가요?
“그건 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 알 수 있어요. 놈들은 절 기만하고 비웃었어요.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 굉장히 힘드셨겠어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오실 수 있었죠?
“제가 빠져나온 게 아니에요. 놈들이 볼 일 끝나고 그냥 버린 거지. 가지고 노는 게 질린 건지, 아니면 더 알아볼 게 없던 건지 아무튼 정신을 차리니 집이었어요. 밖에서는 문 두들기는 소리랑 주인아주머니 고함이 들렸어요. 아마 소리 때문에 깬 거겠죠. 몸을 일으키려는데 두통 대문에 잘 안되더군요. 약간 메스꺼운 것 같기도 해서 쉬고 싶었지만 주인아주머니가 난리니 별 수 있나요? 집요한 거 빼면 시체인 여자니까요. 끙끙거리며 문을 여니 주인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아, 장담하는데 제가 아파 보여서 놀란 건 아니에요. 그냥 자기가 그렇게 불렀는데도 오랫동안 반응 한 번 보이지 않은 게 가증스러웠던 거죠. 아니나 다를까, 입 냄새 풀풀 풍기면서 빨리 돈 가져와라 아니면 방 빼라, 왜 이렇게 냄새 나냐 하는 예의 잔소리가 행해졌죠. 평소에 있던 일이니까 크게 낙담하진 않았어요. 일주일 동안 얼굴 안 비치면 될 줄 알았냐고 소리쳤을 땐 좀 놀라긴 했지만. 제가 일주일동안 사라진 게 아니라 아줌마가 그 동안 계속해서 절 독촉한 점이요. 아무튼 오늘도 넘어가기 위해 저는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근데요, 선생님 그 순간 전 알게 됐어요. 고개 숙이면서 아줌마 표정을 봤거든요. 놈들이었어요. 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놈들이랑 완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고요. 아마 아줌마도, 아니 그 외계인 쌍년도 그렇게 변장한 뒤 저처럼 가지고 놀 실험체를 찾고 있었을 거에요. 어쩌면 그 쌍년이 절 납치한 걸지도 모르죠.
제가 끝냈어야 했어요. 아니 지금도 끝내야 해요. 놈들은 제가 완전히 기억 못 할 줄 알았겠지만 다행이 전 기억이 남았죠. 저 같은 사람이 더 나와선 안 돼요. 저희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죠. 놈들한테 저희를 가지고 놀 권리 같은 건 없어요.
저는 아줌, 아니 그 쌍년한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서둘러 개년을 해치울 무기를 찾는데 구석에 장도리가 보이더군요. 잽싸게 들고 문 밖으로 튀어나가니 아직 그 년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아마 제가 돈을 가지러 갔다고 생각했나봐요. 그년한텐 안됐지만, 당연히 아니었죠. 맨 처음 제 장도리를 보더니 어색한 표정을 짓더군요. 공포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뭐 곧 그렇게 됐지만. 그 년이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을 땐 이미 장도리가 머리 위로 날아들 때였죠. 잔소리 칠 땐 언제고, 그거 한 대 맞더니 볼링핀마냥 픽하고 쓰러졌습니다.”
남자는 손을 세웠다 눕히며 상황을 묘사했다.
“근데 아직 숨이 붙어서 생선마냥 퍼덕거리길래 한 대 더 갈겼더니 잠잠해지더군요. 썩을 년. 상대를 잘 봐가며 했어야지.”
- 시체는 처리하지 않았더군요. 왜 그랬죠?
“외계인이니까요. 그래서 시체를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거든요. 물론 알아보지 못해서 제가 여기 있는 거지만. 왜 다들 그걸 못 알아보는 거죠? 누가 봐도 뻔히 알만할 텐데…….”
- 그 이후엔 뭘 하셨나요?
“집을 나섰죠. 그 년이 그렇게 얼굴을 감춘 걸 생각하니 제 주변에 그런 놈들이 얼마나 될 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나선지 10분도 안 돼서 다른 패거릴 만났죠. 세 놈이었어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근처 고등학교 것 같더라구요. 처음엔 놈들인 줄 몰랐는데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멍청한 새끼들, 가만히 있었다면 안 뒈졌을텐데. 아 글쎄 가는데 ‘씨발 병신 새끼’라고 고함을 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저에게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게 한 말이 맞았어요. 솔직히 이쯤되면 익숙해져서 말입니다. 평소라면 아무 말 없이 넘어갔지만 그 날은 달랐어요. 제가 대꾸했거든요.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세 놈 다 ‘한쿡말 할 쭐 알라요’하면서 킥킥대더군요. 그 웃음. 또 그 가증스런 웃음이었어요. 자연스레 손에 힘을 꽉 주고 놈들에게 다가갔어요. 주인년이랑 똑같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솔직히 그년보다 더 했죠. 한 놈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 웃어댔거든요. 쓰러진 놈 옆에 있던 녀석이 표정을 바꾸자마자 다시 장도리를 휘둘렀어요. 망설임조차 없어졌죠. 오히려 흥분됐죠. 혐오스런 바퀴벌레를 때려잡을 때 느껴지는 감각 같은 겁니다. 긴장된 와중에 잠깐 그 찰나 번쩍이는 기분이죠. 죄송해요, 얘기가 샜네요."
-아, 괜찮아요.
역겨운 놈.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놈은 제일 역겨웠어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아 있는 걸 가까이서 가니 금방 지린내가 진동하더라구요. 놈이 정말로 바지에 지린 겁니다. 눈물 콧물 질질 싸대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참 코미디가 따로 없더군요. 역겹기도 하고요. 당연히 한 반에 보내줬습니다.”
- 아무 느낌도 없었나요?
“무슨 말씀이시죠?”
- 그 친구들은 아직 학생이었어요. 성인도 안 된 그냥 애들이란 뜻이에요. 그런 애들…….
“선생님은 벌레를 죽일 때도 그렇게 감상적이세요? 이 모기는 임산부인데 죽여야 하다니, 저 바퀴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벌레였는데…… 엉엉.”
그가 과장되게 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놈들은 저희랑 달라요. 아니 애초에 저쪽에서 먼저 저희를 장난감 취급했는데 저희가 뭐가 아쉬워서 동정해야 합니까?”
- 그래서 사장을 죽인 건가요? 그렇게 대해서?
내 질문에 남자가 흠칫한 것이 보였다. 그러나 곧 다시 냉소적인 조소를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근데 선생님은 여전히 제 말을 못 믿고 계시는 거 같네요. 아마 지금도 제가 해고돼서 사장을 죽였다고 생각하시고 있겠죠. 그거라면 죄송하지만 한참 잘 못 짚었어요. 그 새낄 죽인 건 그 놈도 한통속이라서지, 그깟 쪼잔한 이유가 아니란 말이에요. 학생으로 위장한 세 놈을 죄다 죽이고 났더니 정말 누가 그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생각났습니다. 제가 봐달라고 애원했을 때 사장의 웃음이요. 그 개새끼는 절 비웃었죠. 그 자식이 앉아있던 높다란 의자만큼 거만한 웃음이었어요. 그 때는 그 웃음의 본질에 대해 잘 몰랐어요. 이 나라 땅에 발을 들여놨을 때마다 다들 절 보면서 그런 식으로 웃고 했었으니까. 큰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알게 됐고 그래서 심판한 것뿐입니다. 그게 뭐가 나쁘죠?”
- 당신 기분이 어떤 지는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사장 그 개새끼랑 똑같은 말씀하시네요. 피 묻은 장도리를 코앞에서 들이미니까 곧 바로 그렇게 대답했죠. 그 인간 평소에 어땠는지 알아요. 눈도 저랑 제대로 안 마주치고 무조건 부를 때는 이름이 아니라 이봐에요. 근데 그 때는 어땠는지 알아요? 그 때만큼은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절 쳐다봤어요. 평소엔 붙이지도 않는 ‘씨’니 ‘사장’이니 하면서요. ‘내가 미안해, 잘못했네. 하지만 살인은 안 돼.’ 참 내, 지랄은. 사람도 아니면서 뭘 살인살인 구시렁 대는 건지. 그런 식으로 얘기해줬더니 얼굴에서 핏기가 금방 사라지더라구요. 아마 제가 비밀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장도리를 들어올리니 사장이 소리를 지르더군요. 비명과는 달랐어요. 거의 발악이었죠. 놈들도 살고 싶은 건 우리랑 똑같은 것 같아요. 머리에 박힌 장도리를 뽑아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죠. 뭐, 동정은 그래도 안 들지만.”
- 그런가요.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온 경찰에게 순순히 항복했더군요. 왜 그랬죠?
“그 사람들은 인간이었으니까요. 절 비웃지 않았어요.”
- 흠, 그래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로 얻어낼 수 있는 건 여기까지로군. 이제 끝낼 시간이다.
- 이제 됐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끝난 건가요? 선생님, 전 어떤 것 같나요? 저 괜찮은 거죠? 믿어주시는 거죠?
- 예, 믿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남자가 눈물을 흘렸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내가 더 감사할 일이지.
- 아, 그러고 보니 뭐 묻는 걸 깜빡했네요.
“예, 뭔데요?”
- 아까 소 얘기 하셨잖아요?
“소요?”
- 가축이 일부만 잘려서 발견됐다는 얘기요. 아까 하셨잖아요.
“아, 그렇죠. 근데 갑자기 그건 왜……. ”
- 혹시 납치되고 돌아온 뒤에 뭐 먹은 적 있었어요? 한 번이라도 배고팠던 적이랑요?
“배고팠던 적…….”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그리고 혹시 그 놈들 비웃을 때 이러지 않던가요?
나는 입꼬리를 기분 좋게 끌어 올렸다.
- 이런 식으로.
그 순간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축축한 손의 감촉이 목 주변에 느껴졌다.
“이 개 같은 새끼! 감히 날 속이려 들어! 난 다 알아!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그를 제지할 때까지 아니 제지한 후에도 그는 연신 ‘죽어’라고 외쳐대며 난동을 부렸다.
축축해진 목을 어루만지며 마지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 보이자 나는 한 번 더 웃었다. 예상대로 그가 더욱 난동을 부렸으나 간호사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실험체 #&@^%&에 대한 회담 기록은 여기까지다. 향후 뇌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시설을 마련하여 해부 실시 후 보고 및 기록하도록 한다.
약 40년 전에 발생했던, 우리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발각될지도 모르는 실수를 또 다시 일으킨 점에 대해서 실험 관련자에게 그에 합당할 처벌을 내리길 요구한다. 더군다나 실험체가 실험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점(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을지라도)을 감안한다면 이번 사건의 심각성은 묵과해선 안 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실험체 소재 선별에 주의를 기울여 같은 실수를 일으키지 말길 바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향후 실험에는 실험이 끝난 뒤에도 시간을 들여 실험체에게 어떤 이상이 있는지를 상세히 관찰할 것을 당부하는 바이다.
또 가축들이 설치면 곤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