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것이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닐인 듯한 것이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그녀의 콧구멍과 입속으로 말려들어갔다. 곧이어 발목에서 파고드는 통증 때문에 그녀는 거친 호흡 와중에도 신음을 흘려야 했다.
"아, 일어났네."
밝은, 그리고 명랑한 남자의 목소리. 그녀가 아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 숨쉬기 힘들지? 미안해. 비닐봉지 벗겨줄 테니까 비명은 지르면 안 돼."
바로 머리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새하얀 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순간의 고통이 지나고 그녀가 겨우 눈을 뜨게 됐을 때 새로운 고통이 그녀를 찾아왔다.
"어?"
의자에 묶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힘을 주어봤지만, 군데군데 녹이 슨 철제 의자만 삐걱거릴 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잠깐동안 그녀는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녀의 온몸에 묻어있는 검붉은 핏자국을 보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에헤이, 소리 지르면 안 된다니까."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좀 전에 빛에 눈을 쬔 것처럼 눈앞에 별이 보였다. 화끈거리는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미안. 울지마. 그냥 내가 우는 소리에 좀 예민하거든.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그렇게 울지마.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건데 여기서 네가 아무리 소리 지른다 해도 여기, 방음이 좋아가지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괜히 목 아프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돼."
그의 말대로였다. 콘크리트로 가득 찬 회색 방에는 천장에 무미건조하게 걸려 있는 알전구 하나가 다였다. 창문 조차도 없는 말 그대로 밀실. 환기되지 않는 탁한 기운이 다시금 스며들어 기분이 나빠졌다.
"다, 당신 뭐야? 뭔데 나한테 그래?"
"글쎄, 왜 그럴까?"
그림자가 그녀 앞에 의자를 끌고 왔다.
"한 번 맞춰봐. 왜 그럴까?"
그녀는 자신 앞에서 남자가 마주 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꽤 큰 키와 준수한 외모, 비싸 보이는 옷.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꽤나 호감 갈 얼굴이었다.
"왜 나야?"
"하필?"
남자가 들고 있던 페트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왜 하필 나야?"
그가 미소 지었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어떻게 매번 반응이 다 똑같은 걸까?"
"매번?"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 매번. 어른이든 애든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아."
그는 페트병을 들고 물을 그대로 마셨다.
"마실래? 싫어? 뭐 그럼 됐고. 있잖아, 어제 뭐했어?"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에 동아리 사람들과 술을 마셨었다. 치킨을 먹고, 노래방을 가고, 그리고 또.... 대충 기억나는 듯 했지만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겨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 숙취 때문에 많이 기억하기는 힘들겠지. 솔직히 나도 네가 어제 뭘 했는지는 몰라. 관심도 없고. 그래도 봤겠지. 이거 말이야."
남자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신문지 냄새와 함께 '엽기 살인마, 또다시 택배'라는 헤드라인이 한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E.Q.라는 이름으로 누군가가 계속해서 택배를 보냈다. 대상은 피해자들의 유가족들. 택배의 내용물은 손가락이나 눈 같은 피해자의 신체 부위와 피해자의 사진들, 그리고 쪽지 한 장이었다.
'언제 돌아올 지 몰라 걱정하시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죽었으니까.'
"당신이었어?"
"와, 이건 예상외 반응인데? 보통은 살려달라고 비는데. 하하."
"미친 놈."
휴대폰에서 기사를 읽었을 때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런 미친 놈은 죽어야 한다고.
"좋아, 괜찮은 반응이야. 그나저나 무슨 생각했어? 이거 읽었을 때?"
"무슨 생각했냐고? 너 같은 미친 놈은 그냥 쳐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지. 왜? 멋있다고 생각할 줄 알았냐?"
남자가 능글맞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
그렇게 친구와 한바탕 욕을 했다. 속시원하게. 웃고, 그리고... 그리고...
"술 마시러 갔겠지? 아니면 미팅을 했다거나. 뭐 그냥 집에 갔을 수도 있고. 일단 넌 피해자는 아니었으니까. 너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겠지. 일단 넌 아닐 꺼라고."
남자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다시 물어보자. 왜 너일까?"
그는 잠깐동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멀뚱히 쳐다보다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정답은 뭐, 간단하지. 딱히 이유는 없어.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음, 운이지."
"미친 새끼."
"그거 말고는 따로 할 말 없어? 솔직히 맞잖아."
"대체 뭐가 맞다는 건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나냐고! 이 미친 새끼야!"
"그럼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다른 사람은 된다는 거지?"
"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잖아. 이게 참 이상해. 사람 생명은 다 똑같다고 하면서 왜 다른 사람은 되고 왜 나는 안 된다는 걸까? 응? 왜 대답이 없어?"
"닥쳐! 그렇게 철학적이면 애초에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말했잖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냥 운이라니까. 어쩌다보니까 그 사람들이 걸린 거지."
그가 다시 물을 마셨다.
"물론 그래도 화가 나겠지. 그 확률이란 게 보통 엄청나게 적은 거니까. 참,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야. 사람들은 정말 작은 확률인데 걸리면 '1/50이나 되는데 대체 왜 내가 걸린 거야.'하면서 열을 내잖아, 욕하고. 그런데 1/50이면 50명 중에 한 명은 걸릴 수도 있다는 거잖아. 뒤집어서 말하면 자신이 그 한 명이 안 될 확률이 100%가 아니란 거니까 사실 걸려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흠... 너무 헛소리 같나?"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가."
그녀의 독기 어린 말에 남자는 더더욱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기분 나빴다. 어서 여길 나가야 한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서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밀실처럼 보여도 분명 여기 들어왔다는 것은 입구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때 그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른편 벽에 무언가가 보였다. 작은 홈. 마치 문고리 같은 둥그런 홈이 벽에 파여 있었다. 그걸 발견하고 나니 사람 크기 정도의 직사각형이 홈이 그제야 보였다. 확실하다. 저기가 탈출구다.
"이봐, 내 말 듣고 있어."
남자의 갑작스런 질문에 움찔했지만 태연스레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가 그걸 왜 들어야 하는데?"
"아 화난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잖아."
"어쨌건 계속해서 이짓거리 하는데 경찰이 아직도 널 못찾을 리가 없어. 벌써 몇 건째지?"
"네가 13번째. 뭔가 있어보이는 숫자지?"
"웃기지마. 그렇게까지 했는데 경찰이 널 놓칠리가 없어."
"그러니까 넌 나갈 수 있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아쉽지만 불가능해. 여긴 말이야, 내가..."
남자는 다시 물을 마시더니 천장을 보면서 뭐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가 들떠서 장광설을 늘여놓는 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에 남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였을까. 밧줄이 부쩍 느슨해졌다는 것을 그녀는 대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자는 다리에는 밧줄을 묶지 않았다. 미칠 듯이 다리가 아파 걸을 수나 있을 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팔만 의자에서 빼낸다면 신체는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경찰 측에서는..."
조금만 더.
"거의 불가능한..."
조금만 더. 손목을 파고드는 통증을 이로 악물어가며 그녀는 더욱 힘을 줬다. 밧줄이 훨씬 느슨해져갔다.
"혹시라도 다른 생각 중이라면..."
됐다. 충분히 빼낼 수 있을 정도로 밧줄이 느슨해졌다.
"야."
"어, 왜?"
그녀의 부름에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나 죽일거지?"
"흠, 혹시라도 날 원망하고 있다면-"
"원망 안 해. 어차피 다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냥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도 말이야 죽기 전에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소원?"
남자가 재밌다는 듯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안아줘."
"뭐?"
"안아 달라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람 체온을 느껴보고 싶어."
"하, 처음 만났는데 너도 참..."
남자는 정말로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 선물이야."
살과 살이 맞닿았는데도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팔뚝을 타고 올라갔다. 뱀이 타고 올라오는 듯한 역겨움.
그러나 그녀는 소름을 떨쳐내고 곧바로 의자에서 손을 빼냈다. 양손을 남자의 등에 올리고서 녀석의 귀를 물었다.
"으아아악!"
남자가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렀다. 고통에 몸에 힘이 빠진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바로 남자를 밀쳐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목이 아프지만 일단 절더라도 여기서 나가야 해. 그녀는 서둘러 몸에 묶인 나머지 밧줄을 풀어내고서, 고통을 담아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추락하듯 바닥에 널부러졌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그것과는 달랐다. 훨씬 이상한 것이었다. 고통이 느껴지는데 발바닥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있다고 느껴지는데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발을 돌아봤다. 또 다시 비명이 그녀의 입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피범벅이 된 그녀의 다리 끝에는, 있어야 할 발이 더 이상 달려있지 않았다.
"아, 그거라면 따로 보관해뒀어."
어느새 회복했는지 남자가 물린 귀를 어루만지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걱정마. 나중에 너희 부모님께 확실히 보내줄께."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반항. 그러나 살아남으려는 발악이 훨씬 더 적절했다. 공포로 물든 무의미한 발버둥.
"경찰이 널 죽일 거야, 이 미친 새끼야. 나는... 나는..."
"나는 안 죽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난 아닐거라고. 나만은 아닐거라고."
남자가 셔츠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네가 주인공이라면야 그렇겠지. 근데 아쉬운 건, 이 세상에 주인공 같은 게 없다는 거야. 다들 평등하니까."
메스가 남자의 셔츠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언젠가는 내가 잡힐지도 몰라. 경찰일수도 있고, 너 같이 내 사냥감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누가 됐건..."
그의 메스가 누렇게 빛난다.
"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