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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하.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시지요.”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인 미하엘 브리텐슈를 본 백작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만큼 불안감을 가진 것이 분명하리라.
그 점을 숨긴 미하엘의 모습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레인의 상태가 나빴다면 그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을 정도로. 그만큼 보좌관의 태도는 아주 사소한 틈을 보이었다.
‘초조한가.’
여유로운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허점을 드러낸 미하엘을 바라보던 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을 따라 중앙에 자리 잡은 그림자는 점점 몸을 부풀리더니, 래피어에 피를 모조리 토해낸 창백한 주검들을 삼켰다.
해의 기울기에 따라 느릿하게 고개를 기우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검은 형태 속으로 창백한 인형들이 화선지에 스미는 먹처럼 흡수되었다. 그 주검들 주위에 있던 피는 어느 순간에 사라졌었다.
가히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도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미하엘의 불안을 꿰뚫어 본 레인이었다.
“보좌관.”
“예.”
투명한 눈망울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며 레인에게 눈을 맞춘 미하엘이 기계적으로 양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드디어 그 과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지 싶었던 그는 뜬금없이 느껴지는 발밑의 작은 기척에 시선을 내렸다.
‘...?’
제 귀를 쫑긋거리는 하얀 짐승이 어느새 자신의 발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짐승은 눈치를 보듯이 커다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이내 미하엘을 흘긋 바라보곤 커다란 침대가 놓인 벽면을 훌쩍 통과해 금세 사라져버렸다.
‘뭔가 이상한데….’
웬만해선 눈치 안 보는 그가 미리 자리를 피하는 게 수상했던 미하엘의 눈초리가 살짝 갸울었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레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나 죽어.”
“하….”
대차게 간결하고 효과적이어라. 해사하기까지 한 미소에 긴장감을 놓지 못한 미하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몇 번을 봐도 레인의 미소가 달라지지 않자, 벌어졌던 미하엘의 입가가 서서히 다물렸다.
‘네가 왜 죽어.’
중앙 조명에 산산이 조각난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본 미하엘의 표정이 묘하게 싸늘했다. 그 검은 갈래꽃은 환해진 조명 탓에 그 끝이 희미해져 있었다.
“유리잔 앞에서 했던 말과는 상당히 다르군요. 저하.”
독을 마시고 했던 말과는 의미가 상반된 대답에 미하엘이 따지듯 물었다. 백마가 맞출 과녁이 뭔지 알기도 전에 정신부터 차려야겠다.
그런 미하엘의 심중을 읽은 듯한 레인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다르다니. 입을 조심하셔야지요.”
“죽는 것과 안 죽는 것은 다른 말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안 죽는데, 죽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엄연히 달랐다. 전자는 공식적인 발표, 후자는 실제 상황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대수롭지 않은 주제를 꺼낸 사람처럼 태연한 레인의 표정에 미하엘의 미소가 비틀렸다. 통보하는 사람이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일지 몰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선 너무나 급작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의 통보에 관해 재고라도 해보라는 의미로 말을 건넸더니, 오히려 저 확신을 키운 모양새가 되었다.
“이빌린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그래서 보냈잖습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미하엘을 본 레인이 싱긋 웃었다. 검회색 속눈썹이 그의 마음을 골려주듯이 얄밉게도 팔랑거렸다. 그 꿍꿍이속을 듣게 된 미하엘의 표정이 찰나에 서늘해졌다가 도로 돌아왔다.
“전하의 말은…,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된 듯합니다.”
한순간 비죽 웃던 그가 화사한 얼굴로 물었다. 영민한 이빌린과 달리 그를 헤아리는 것에 시간이 필요한 미하엘이 자초지종을 물었다. 분명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죽는 것’과 ‘안 죽는 것’ 사이에 어떠한 과정들이 있을 것이다.
제 말을 들어보려는 미하엘에게서 시선을 돌린 레인이 제자리를 찾은 투명한 가락지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조만간 가출합니다.”
“…예고 사망에 이어서, 이번엔 예고 가출입니까?”
레인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미하엘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해괴한 독에 중독되어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빛의 입자가 점점 속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몸이었다.
그런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랬다가… 자신이 도움 줄 수 없는 곳에서 쓰러지면…?
“얼마 동안…, 아니 얼마간 출타하십니까?”
그러면 너를 잃은 나는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다급한 마음에 말을 더듬는 미하엘을 지켜본 레인이 천천히 눈을 깜짝이며 답했다.
“15일간. 황성에서 그렇게 명령이 올 겁니다.”
“그 말씀은….”
유일무이한 비헤일리스 백작을 또 다른 세력이 압박한다는 얘기. 그 전과는 정적의 화력이 다르다는, 예측 아닌 예측이었다. 그것이 ‘죽는 것’과 ‘안 죽는 것’에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도 포함하여서.
“그러니 가출인 겁니다.”
굳이 부스럼을 긁어 크게 만든 책임도 있으니, 시류를 따라 허리를 굽히는 시늉 정도야 능히 가능하다. 물론 이렇게 용과 엮이게 됐으니, 기왕 궁금해하던 것도 겸사겸사 알아볼 속셈도 있었다.
태연한 레인의 속내와 달리, 잠시 굳어 있던 미하엘의 표정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렇게 강압적인 명령이라면 쉬운 곳은 아닐 텐데…. 저하께서는 그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압니다.”
“….”
초조하게 입을 여는 미하엘의 손바닥 안으로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흔들림 없는 새벽빛 눈동자에 불안에 떨던 녹금색 눈망울이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다만, 그의 곁으로 다가온 백마의 그림자가 달빛에도 기울지 않았다. 여전히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갈래꽃이 백마의 발밑에 새겨져 있었다.
“그럼 제가 같이 가는 것으로 타협을….”
“저 혼자 갑니다.”
혼자. 황성에서부터 쫓아올 것들이 있으니, 사실 혼자는 아니겠지만…. 그 주위에 제 사람이 있다면 벌어질 곤란한 일이 벌써 눈에 선했다.
충돌하면 할수록 이목이 쏠릴 테니, 그들의 표적인 자신이 가능한 한 멀어져야 이로웠다.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안 되겠습니까? 어쩐지 애절하게 들리는 소리에 레인이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제 미모를 써먹는 건 이미 습관이 되어서인지,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에슈스탄.”
「검은 숲」
“용…이로군요.”
레인의 뒤로 푸른 갈고리달이 번들거렸다. 그 서늘한 빛깔에 미하엘의 입가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신의 추측에 레인이 반박하지 않자, 그 점에 확신을 얻게 된 미하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예측한 게 틀리길 바랄 뿐이었다.
“그 배은망덕한 새끼가 오늘 일에 관한 해명을 위해 마법사들과 용을 엮으려 하는 거야….”
용이라니…. 드래곤과 마찰을 일으켜서 좋은 것 없는 판국에 용의 비위를 거스르겠다고 하는 그 무식함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개뼈다귀 같은 인성인지. 백마라 불리는 레인슐레이츠만을 믿어도 너무 믿는 것 아닌가.
‘독을 먹인 장본인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백마의 이름을 빌려 쓰는 주제에 감히 내 주군을 사지에 몰아넣어? 베풀어준 은혜를 원수로 갚더라도 정도는 지켰어야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던 미하엘이 크게 한숨을 쉬며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러자 조명에 비친 금발이 화려한 빛깔을 뽐내며 단단한 손마디에서 흘러내렸다.
“그 해명을 위해 당신은 숲으로 갈 테고….”
이마저도 레인의 반박이 없으니, 자신의 예측이 얼추 사실이란 얘기다. 그것이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니라 해도….
“저하께서… 말씀하신 보름 이후에도 소식이 없다면, 에임파를 보내겠습니다.”
휘영청 떠오른 달빛에 그의 머리칼이 윤슬처럼 빛났다. 늦저녁이 지난 밤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을 이곳만큼이나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원형이 발코니에서 보였다.
그 월광 아래 미하엘과 마주한 레인의 머리칼 또한 검회색으로 변하더니, 그 밑으로 드러난 한 쌍의 눈동자가 각기 다른 채도로 빛났다. 그런 레인의 얼굴을 습관적으로 살피던 녹금색 눈망울이 잠시 아래로 떨어졌다.
“어느 정도는 저하를 탓할 명목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래.”
단단한 손마디 일부를 감쌌던 서늘한 감촉이 사라졌다. 미하엘에게서 한 걸음 멀어진 레인이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하얀 손수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함께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다른 이를 보내는 그의 참을성이 갸륵하다는 칭찬과 그가 생각하고 있는 별도의 속셈을 묵인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고갯짓에 미련이 남은 듯한 미하엘이 운을 떼자, 레인이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카울로스는….”
“카울로스는 절차대로 행수가 전권을 받을 것이고, 행정상 문제가 있는 경우엔 제리에게 자문하면 됩니다.”
“그러겠습니다.”
레인의 대답에 미하엘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 긍정에 보좌관을 향해 싱긋 웃은 백작이 몸을 돌리자, 책상 바로 뒤에 놓여 있는 장식용 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빌린이 만든 가짜 배경이 무너지기 전부터 용케 모습을 드러낸 활은, 그것을 보고 있는 레인의 신장과 거의 맞먹는 정도였다. 특히 고산을 활보하는 야크 뿔처럼 휘어 있는 활대는 일정한 간격으로 꼬아져 있어서 양쪽의 고리에 걸린 시위가 더욱더 팽팽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위압감을 풍겼다.
「포고!」
「포고!」
「하는 거지?!」
흑갈색 활대를 응시한 레인의 곁으로 낌새를 챈 푸른 입매가 바삐 모여들었다. 푸른 조각달 속에서 팔을 든 백작의 손안에 판판한 얼음 기둥 같은 것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더니 주인의 허리춤까지 오는 활대가 되었다.
살아있는 유리처럼 주인의 의지대로 활대가 된 투명한 몸체 끝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방울방울 모인 조명 빛을 따라 빛났다.
「살을 보내서 깜짝 놀라게 해주자!」
「잠자는 용을 놀라게 해주는 거야!」
킬킬거리는 푸른 입매들이 흑갈색의 활대 주위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검은 활대 중심에서 원형의 균열이 생기더니, 그 균열이 점점 벌어지며 어둑한 테두리의 통로가 드러났다. 그 통로의 입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는데, 그 어두운 빛깔 너머로 보이는 것은 빽빽하리만치 우거진 수풀이었다.
먼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이파리의 연주가 끊이지 않을 만큼, 검은 숲이었다. 요요한 눈망울이 그 속을 꿰뚫듯이 어둑한 통로를 응시하자 장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미하엘은 푸른 갈고리달 무리 속에 서 있는 레인을 보며,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로 날렵한 무언가를 제 손에 소환했다. 이 정적이 깨지면 응당 자신이 건네줘야 할 물건이기 때문이다.
“살.”
보좌관의 손바닥만 하게 커진 균열에서 눈을 떼지 않던 레인이 뒤로 손을 뻗었다. 그 부름에 백작의 동개(筒箇:화살 꽂이)를 자처한 보좌관이 백마를 향해 날렵한 촉이 박힌 살을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나 반짝이는 빛이 제법 길었다.
그렇게 던져진 화살을 잡아챈 백마가 능숙한 손길로 그것을 곧장 시위에 걸었다.
「집궁執弓」
흑요석으로 만든 예리한 촉, 하얗고 늘씬한 금속성 대, 맑은 이슬이 얼어붙은 것을 연상케 하는 백금으로 이뤄진 깃, 백색의 휘장이 새겨진 검은 오늬가 백마의 손아귀에서 엄숙하게 사명을 기다렸다.
“검은 숲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선전하는 사람은, 아마 저하뿐이실 겁니다.”
암흑성처럼 빛나는 원형을 향해 당겨진 시위를 보던 미하엘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천상의 지존이라 알려진 용에게 ‘나 쳐들어갑니다’라고 대놓고 예고하는 그의 행보는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온갖 술수를 이용해 고난을 타파할 수 있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굳이 사지로 들어가는 그 –말도 안 되게 정직한- 취미는 미하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필요한 행보였다.
“그럼.”
엄숙한 시간을 방해한 보좌관의 무례를 눈감아 준 그가 오늬를 더욱 당겨 시위를 팽팽하게 유지했다. 선사(善射)의 팔꿈치가 밖으로 밀리는 만큼 그 앞을 차지한 균열이 장식용 활대를 덮을 정도로 벌어졌다.
더 당기면 끊어질 듯, 아슬아슬 당겨진 시위를 곁에 두며 입꼬리를 올린 그가 한쪽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온 감각이 원형 너머에 있는 숲속으로 향했다.
드넓은 평야를 거쳐 숲을 겨눈 선사의 숨이 죽고, 숲을 비추는 검은 원형 너머로 바람에 잔잔히 쓰러지는 청청한 수풀 소리가 들려왔다. 에슈스탄, 바로 그 숲을 향한 촉이 번들거렸다.
“백마는 어둠도 들쑤시고 싶어 하는 미친 괴물이거든.”
예리한 활촉의 주인답게 첨예한 날을 가득히 안고 있는 안광이 번뜩였다. 선사의 눈에 빛이 들어온 그 순간, 귀가 찢어질 듯한 파열음과 함께 시위에 걸렸던 오늬가 사라졌다.
제국 국경의 반이 넘는 거리를 압축한 통로를 재빠르게 통과한 깃이 하얀 잔상을 남기자, 숨죽이던 푸른 아가리가 도가니처럼 들끓었다.
「명命!」
「명命!」
「중중中中!」
「관貫!」
「관貫!」
「중중中中!」
「가시오! 좌궁左弓!」
「오시오! 우궁右弓!」
암흑성 고리와 같은 통로를 금세 빠져나간 깃이 너른 들판을 반으로 가르며 검은 숲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뒤따라오는 소리를 등지며, 홀로 숲으로 들어간 백색 빛줄기가 정교하게 수풀을 지나쳤다.
여린 풀잎 하나 해치지 않고, 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짙푸른 산등성이로 향하던 깃이 암녹색 빛깔에 휩싸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멈추고 말았다. 짙푸른 산등성이 앞에서 그것을 저지한 이의 목소리가 산중에 울렸다.
“오, 오백 년 만에 도전자…!”
자신의 손에 들린 화살을 살피던 그의 밝은 눈동자가 호박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바람결에 산들거리는 머리칼처럼 윤기 있는 눈망울에 깃 다음으로 보이는 오늬의 작은 무늬가 비치자, 그가 놀란 사람처럼 뒤늦게 입을 열었다.
“…가 백마.”
말할까? 찬연하게 빛나는 눈망울 속 깊은 세로 동공이 머뭇거림을 안고 푸른 잎사귀에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