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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푸른 하늘 발 아래; 鱗
작가 : 동그라미네모선
작품등록일 : 2020.5.15

그의 존재는 악당이라는 말도 아깝다. 악당보다는 악마, 악마보단 포식자에 가까웠고. 그 포식 대상은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에 가까웠으니까.

 
1. 혈로(血路)/
작성일 : 20-10-09 15:04     조회 : 314     추천 : 0     분량 : 2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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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비헤일리스 공작의 저택이자, 성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모드나드 성에 검붉은 기사 단복을 입은 기사단이 자색의 빛과 함께 도착했다. 공작성과 그 맞은편에 있는 또 다른 저택 사이에 자리한 들판으로 정확히 발을 내디딘 이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800년은 족히 뿌리 내린 듯한 고목이 높다란 성벽처럼 두 저택을 동그랗게 감싼 풍경이 기사들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공작 성의 성벽치고는 상당히 허술해 보이는, 듬성듬성한 나무 몸통 사이로 아주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걸어 다니는 시민들이 보였다. 국경이 맞닿아 있는 성문 교역소와는 달리, 풍파 없는 한적한 도심 속 풍경에 경계 어린 기사들의 시선이 조금씩 풀어졌다.

  조금 전까지 제 숨을 조여오던 환족과 기록관의 살기에서 벗어난 것을 몸소 깨달은 기사들의 표정이 밝아지자, 이들 위에 자리하던 먹구름이 서서히 연해졌다. 그렇게 밝은 햇살 아래서 주위를 살피는 기사들 사이로 금빛 눈동자를 가진 리워드가 핌을 불렀다.

 

 “단장.”

 

 “왜.”

 

 “저 좀만 울어도 돼요?”

 

 “안 돼.”

 

 “미인의 눈물은 천 냥이라던데.”

 

 “내 눈도 소중해.”

 

  아껴둬. 넣어둬. 일 아직 안 끝났다.

 

 “단장… 어떻게 이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핌의 단호한 거절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리워드가 자신의 턱 밑을 손바닥으로 받쳐 보였다. 자신의 빼어난 외모를 잘 아는 사람답게, 리워드가 핌을 향해 잘빠진 턱선을 내보이자, 그것을 목격한 단장이 얼굴로 욕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

 

 “…차라리 말로 해요. 말로.”

 

  핌의 얼굴을 보던 그가 끝내 한쪽 입술을 삐쭉이며, 자신의 얼굴을 받쳤던 두 손을 내렸다. 냉정한 반응을 보인 핌에게서 등을 돌리며 툴툴대는 것과 달리, 그의 눈은 주위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차갑다니까, 우리 단장께서는….”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 흑발 아래 드리운 찬란한 눈동자가 하늘부터 땅의 끝까지 살폈으나, 그 눈에 위험한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공작과 성문 교역소 근처에서 지금도 대치하고 있을 기록관과 일족이 자신들을 쫓지 않아 다행이었다.

 

 ‘저거 또 병 도졌네.’

 

  능청 떠는 리워드에게 아예 시선도 주지 않던 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단장의 반응에 성문 교역소부터 공작 성인 수리성까지 따라온 하급 기사들이 리워드의 툴툴거림을 무시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는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으레 그렇듯 부단장인 리워드를 깔끔하게 무시한 기사단이 핌의 턱짓에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두 상관 중에서 제일 믿음직한 핌을 따라 자연히 움직인 결과였다.

  일제히 고개를 돌린 기사들의 시선에 붉은빛을 띠는 적갈색 성이 위용을 드러냈다. 수리성. 모름지기 나무 중엔 소나무가 으뜸이고, 성 중엔 공작 성이 으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무 공작’이라 애칭까지 있는 이 저택은 비헤일리스인에게 있어서 가장 친숙한 건물이리라.

 

 “가자.”

 

  핌의 구령에 기사단이 아이가 주변에 노출되지 않도록 진열을 유지하며 저택의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저택 주위를 감싸고 있던 고목이 그들을 반기기라도 하듯 수리성으로 가는 이들을 향해 바람 맞은 제 가지를 느리게 흔들었다.

 

 

 ***

 

 “어서오… 세요.”

 

 “공작께서 먼저 손님을 보내셨습니다.”

 

  공작의 저택에 기사단이 도착하자 미리 언질을 받지 못한 저택 고용인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기사단과 함께 갑작스레 저택을 방문한 인형은 이목구비조차 뚜렷하지 않은 형태로,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의 피 웅덩이 속에서 갓 태어난 돌연변이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저택으로 들어온 기사단을 맞이한 집사가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집사 못지않게 발걸음을 뒤로 물린 저택 고용인들로 즐비했다. 그런 고용인들의 반응을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집사와 마주한 핌이 그의 멍한 얼굴을 바로 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이 해ㄱ…”

 

 “아이입니다.”

 

 “…예?”

 

 “아이입니다.”

 

  ‘딱 봐도 그렇게 보이지요?’라는 핌의 표정에 집사인 토르의 안색이 어두워져서는 선뜻 수긍하지 못했다. 어두운 얼굴을 한 토르 어깨 위로 고개를 빠끔 내민 지키가 드물게도 반문하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작은 인형을 바라봤다.

 

 “아이요?”

 

  이게? 괴이한 형체의 인형을 향해 시선을 아래로 내린 그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설핏 스쳤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혹여나 싶은 의심이 그의 뇌리에 꽃을 피운 듯했다.

  그런 지키의 반문에 핌이 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자, 눈치를 보던 리리가 노골적으로 붉은 인형을 바라보고 있던 지키의 팔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높은 신장의 여자가 순순히 뒤로 딸려 들어왔다.

 

 “단장께서 그렇다잖아. 이리 와.”

 

 “잠, 자, 잠깐….”

 

  그런 그는 리리의 곤란한 얼굴을 그제야 알아챘는지, 자신의 앞에 있던 상사가 어서 결단을 내리길 얌전히 기다렸다.

 

 “일단.”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느낀 토르가 공작의 명 아래에 기사단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아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아이의 해괴한 모습이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작께서 받아주신 아이… 라고 하니, 저희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표정은 그래도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책임지는 위인인 것을 아는 핌이 밝은 얼굴로 집사를 향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얼굴에 무표정으로 돌아온 토르가 기사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오른편에 있던 남자를 향해 눈짓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요브.”

 

 “예.”

 

 “이분들을 저하의 집무실까지 안내 부탁합니다.”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집사의 부름에 공손히 앞으로 나온 고용인이 기사를 향해 반물색 머리칼을 숙여 보였다. 앞서 보인 미소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에 기사들도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예, 예. 감사합니다.”

 

  공작 직속의 상급 기사를 제외한 하급 기사들은 직무로 수리성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늘처럼 저택의 고용인에게 안내를 받는 것이 낯설어하는 티가 났다.

 

 “그럼 갑시다.”

 

 “예.”

 

  자신의 옆에 있던 붉은 인형에게서 시선을 뗀 핌이 자신을 집무실로 안내해 줄 요브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핌의 행동에 익숙하게 반응하며 몸을 돌린 요브가 단단한 석재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기사단을 이끌었다.

  요브가 기사들을 집무실로 안내하며 자리를 뜨자, 현관에서 기사단을 마중 나온 집사와 두 고용인, 그리고 붉고 작은 인형만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토르의 뒤에 있던 지키와 리리가 자신들에게 등을 보인 집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경험으로 보아 지금 토르의 표정은 낯선 이방인이 그리 달갑지 않은 듯했다. 그렇기에 그를 보는 두 사람의 눈망울에는 그가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는 궁금증이 은근히 들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토르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두 사람의 얼굴과 마주했다.

 

 “우선….”

 

  고개를 틀어 자신을 빤히 응시하던 지키와 리리를 정확히 쳐다본 토르가 빳빳하게 잘 다려진 옷깃을 연신 매만지며 입을 열자, 그와 마주하던 두 사람의 눈동자가 빤짝였다.

 

 “?”

 

 “우선?”

 

  자신의 말에 지키와 리리가 동시에 갸웃거리자, 목을 빳빳이 세운 토르가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 그의 시야 속에 붉은 액체로 뒤덮인 해괴한 모습의 인형이 들어왔다.

 

 “저하를 뵙기 전, 손님 단장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일단은 해볼게요.”

 

 ‘되려나?’

 

  집사의 어두운 금색 눈망울이 아이에게 향하자, 토르의 말에 일단은 긍정을 나타낸 두 사람이 붉은 인형을 슬쩍 바라봤다. 인형을 빤히 바라보던 지키는 그 희한한 모양새에 과연 그것이 될지 반신반의한 상태였다.

 

 “아이야 이리로 오련?”

 

 “손님. 욕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붉은 인형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님에 대한 예의를 나타냈다. 리리는 아이라는 말에 좀 더 친근한 말투를 골라 썼고, 지키는 평소처럼 손님을 대하듯 정중한 자세로 인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각기 다른 태도로 자신을 배려한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있던 붉은 인형이 그에 반응하듯 상체를 작게 움직였다. 여태 잠잠하던 인형이 자신에게 보인 반응을 처음 접한 두 사람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

 

 “…이쪽으로.”

 

  끈적끈적한 외형을 가진 인형의 움직임에 눈을 반짝인 지키가 제일 먼저 앞장서 욕장으로 아이를 안내했다. 그러자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인형이 움직였고, 그 뒤를 따라 조금 얼떨떨한 표정의 리리가 붉은 인형의 상태를 계속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모습도 모습이거니와 인형이 움직이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았기에 지키는 손님용으로 준비된 1층 욕장으로 손님을 안내했다. 그런 지키의 안내를 따라 피를 잔뜩 뒤집어쓴 인형이 양쪽 문이 환히 열린 욕장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욕장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인형을 안내한 두 사람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삼백여 명이 족히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에 자리한 지키와 리리는 훈훈한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중앙에서도 가만히 있는 아이를 향해 몸을 낮춰 앉았다. 그리고 어디 있는지 모를 아이의 눈을 대강 짐작하며 부지런히 말하며 대화를 시도했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말해야 해요?”

 

  어리다고 추측되는 손님이 차가운 것에 약한지, 더운 것에 약한지 전혀 정보가 없어서 물을 끼얹으려던 리리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 중에 으뜸이라는 수리성답게 욕장의 크기도 넓고 그 안에 든 물의 온도도 다양했다.

 

 “말하는 게 어려우면 손을 들어도 좋습니다.”

 

  리리의 말에 답 없는 인형을 빤히 바라보던 지키가 좀 전에 현관에서 아이의 보였던 움직임을 생각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자신들의 말에 반응한 적이 있으니, 혹여 어려움이 있으면 몸 어딘가를 움직여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거부의 뜻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한 지키가 욕탕 근처에 놓여 있던 투명한 바가지를 들어 따뜻한 물을 담았다. 그러고는 아직도 반응이 없는 손님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보다는 자신의 말에 대한 인형의 또 다른 반응은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잔뜩 들어 있었다.

 

 “붓습니다.”

 

  쪼르륵거리며 떨어지는 물에도 붉은 인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재차 떨어지는 물에도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손길을 얌전히 받을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대화를 시도했던 두 사람의 노력은 허무할 정도로 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물음에 대한 답은 질척한 표면을 닦아낼 때도 다시 바가지에 물을 채워 넣어 아래로 흘려보낼 때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적막을 견디던 리리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작은 인형의 얼굴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런 리리의 행동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지키의 표정이 곧 냉담해졌다.

 

 “…아이야, 내 말이 들리니?”

 

 “애당초 사람이 맞는지도 잘….”

 

  인계해준 핌의 말에 의하면 분명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현관에 있을 때 빼고는 인형의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산 사람을 대한다기보단, 형체는 있되 의지가 없는 인형을 마주한 감각이었다.

  아니, 인형보다는 식물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형체는 있으나 시선을 마주할 수도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것이, 동물보다는 식물에 가까웠다. 그런 인형을 두고 저마다 알아서 떠들고 있었으니, 뒤늦게 이러한 느낌이 든 지키의 눈에 허탈감이 잔뜩 배어 나와 있었다.

 

 ‘나무도 이 정도로 박박 닦으면 보통은 파이는데….’

 

  꿀렁꿀렁 붉게 흘러내리는 표면을 보며 뒷말을 삼킨 지키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부드러운 천의 물기를 짜내 붉은 표면을 착실하게 문질러 닦았다. 그런 지키의 표정을 보던 리리가 차마 힘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는지, 아랫입술을 약하게 물었다.

 

 “후….”

 

  쓱쓱 닦아 보았으나 인형의 겉모습은 여전했다. 겉모양에 전혀 변화가 없자 슬슬 부아가 치미는 것인지, 인형을 바라보는 지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리리는 그런 지키의 반응에 차마 안 된다거나, 표정을 풀라고 하거나 그런 오지랖은 부릴 수가 없었다.

  혹여나 끊임없이 흐르는 액체 때문에 안에 있는 아이가 숨을 못 쉬는 것은 아닐까 한, 두 사람이 바깥으로 갓 나온 피처럼 약한 비린내를 맡으며 손으로 직접 걷어보기도 하고, 욕장에 있는 도구를 이용하여 벗겨보기도 했는데, 좀처럼 안 되자 일정 수준의 액체를 분리하는 상급 마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해, 그들의 손을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붉은 액체가 더 빠른 속도로 흐르는 듯했다.

 

 ‘어째서일까….’

 

  성문 교역소에서 아이를 처음 발견했던 하급 기사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고 있던 두 사람의 앞에서 붉은 액체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아래로 하염없이 흐르지만, 그 아래에 맞닿은 바닥은 여전히 물이 흥건할 뿐이었다.

  지독하리만큼 인형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붉은 액체 위로 햇빛이 포개졌다. 저녁놀을 만나기 전 기울어진 태양 빛이 쏘아지자, 그 빛과 만난 인형의 붉은 표면이 보석처럼 빛났다. 번쩍. 순간적으로 빛나는 섬뜩한 피바다에 지키의 눈썹이 쓱 올라가며 꿈틀거렸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그가 자신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인형의 신장에 맞춰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곁에서 금세 멀어졌다.

 

 ‘아오 씨…!’

 

  지키가 멀어진 와중에도 바닥에 단단히 뿌리박은 나무처럼 단단히 서 있는 인형의 표면은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을 맞으며 계속 반짝였다. 그러자 그 진득하던 피를 뒤집어쓴 인형의 불가사의한 외관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 빛에 인형의 외관을 유심히 지켜보던 리리가 문지르던 천을 떼어냈다. 쉼 없이 반짝이는 것이, 그 표면에 구멍 하나 보이질 않아서 제법 섬뜩했다.

 

 “지키, 혹시 말이야….”

 

  진전이 없는 상황에 속으로 울화를 토해내던 지키의 뒤로 더욱 심각한 표정의 리리가 살며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지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리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지키의 뺨을 검지로 살짝 누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손가락을 앞으로 뻗었다.

 

 “이 아이는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리리의 긴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홀로 서 있는 붉은 인형이었다. 리리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린 지키의 연청색 눈동자에도 그 모습이 확실히 들어왔다. 빈틈없이 흐르는 붉은 액체가 햇살을 받으며 더욱 선명해지는 듯했다.

 

 “이렇게 피가 계속 흐르는 걸….”

 

 “후….”

 

  붉은 인형을 맨눈으로 확인한 지키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숨을 깊게 내쉬던 그의 어깨가 동시에 축 처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어라, 작은 인형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멍멍하더니 곧 입술을 세모나게 올려 –작은 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아니, 도대체 이 손님에게 둘러싸인 액체는 뭐야. 갓 나는 선지도 아니고 약하게 나는 이 핏덩이는 닦이지도 않고, 흐르는 것 같은데 바닥으로 흐르지도 않고…. 맨손도 안 돼, 마술도 안 돼. 그럼 뭐가 되는 거지? 허….”

 

 “…그럼, 그럼.”

 

  3시간 동안 아이의 붉은 표면에 대항(?)하여 힘든 사투를 벌인 지키가 두 손을 들었다. 두 발도 들어 보이려 했으나, 고용인의 체면을 생각해주는 동료의 만류에 겨우 정신이 돌아와 그것은 하지 않았다.

  오, 이처럼 놀랍도록 변화 없는 일이라니, 따분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했다. 무엇인지 몰라도 정말 대단한 물질이리라. 공작의 고용인치고 마술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없거늘, 이 알 수 없는 액체는 상급 술사의 마술에도 당당히 자리를 꿰찼다. 얼씨구.

 

 “들어가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지키의 억울한 탄식을 듣고 만 토르가 욕장 입구에서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훈훈한 증기 속으로 들어갔다. 3시간 동안이나 욕장에서 나오지 않기에 어떻게 된 일일까 싶었던 그는 지키의 탄식에 상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처음과 같이 해괴한 모습으로 반기는 작은 인형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무슨 방법이든 썼을 텐데… 그대로….’

 

  그의 차분한 시선에 지키의 침울한 등을 도닥거리던 리리가 토르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의 눈빛을 보니, 지금 상황에 관한 설명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현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상관의 지시가 필요했던 터라 리리는 의도가 다분한 물음을 그에게 건넸다.

 

 “토르…. 어떻게 할까요?”

 

  그 물음에 지키의 표정을 살피던 토르가 잠시 눈을 감았다. 깜깜한 시야 사이로 이벨리아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욕재계하고 있다는 자신의 말에 못 말린다는 듯이 미소 짓던 그가 이렇게 말했었다.

 

 ‘초대 백작의 저주는 징글징글하니. 용쓰지 마.’

 

  적당히 하는 게 편해. 반대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조금 볼품없이 마른 손가락을 이용해 새까만 밤과 같은 문을 톡 건드리자, 서서히 녹아내린 어둠 사이로 그 신형이 사라졌다. 그 당시 무슨 말인가 했더니,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짧은 회상을 마친 토르가 잘못을 시인했다.

 

 “여러분께 미안하군요. 제 고집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빨겠다. 토르는 자신의 고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씻기기 위해 부지런 떨던 지키와 리리의 손이 물에 계속 닿아 팅팅 부어 있었다. 3시간 동안 있었으니, 그렇게 변할 법도 했다.

 

 “손님께서도 계속 욕실에 계시기 힘들 테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음….”

 

  토르의 사과에 지키와 눈을 마주치며 깜짝이던 리리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드디어 욕장을 나가겠구나 싶은 안도와 아이가 숨을 고르게 쉬고 있긴 할까 하는 걱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리리의 옆으로는 막상 끝내라고 하니, 좀 더 해볼 걸 하는 아쉬움을 드러낸 지키가 은근히 눈치를 봤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토르가 수건을 들고 붉은 인형에게로 다가갔다.

 

 “두 분 얼굴이 붉어 걱정이군요.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하도록 하죠. 고생했습니다.”

 

  공작이 인정한 –초대 백작의 저주이자- 지워지지 않은 피를 열심히 씻겨내려 했던 리리와 지키를 향해 토르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그 미소에 잠시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 자신의 뺨을 만져보고는 순순히 욕실에서 나갔다.

 

 “…예.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좀만 쉬다 올게요.”

 

  어른의 다리로는 두세 걸음 정도, 그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토르는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인형을 보며 멈춰 섰다. 자신의 손에 들린 수건을 본 것인지, 물이 흥건히 남은 욕장 바닥을 걷던 인형이 그의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인형의 그런 움직임에 토르의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공작의 의지를 이은 기사 단장의 고집인 줄 알았더니, 이 해괴한 핏덩이 안에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은근한 증거들이 그의 눈에 보였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그가 다리를 굽히고 젖었을 것이라 판단되는 붉은 표면을 닦아보았다.

 

 ‘?’

 

  사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수건을 잡고 약하게 문지르던 토르가 물기가 배지 않은 그 표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분명 그 아래로 물이 흥건한 데, 인형에 닿은 수건의 작은 한 올 그 어느 것도 물에 젖어 축 늘어진 것 없이 빳빳했다.

  반짝반짝. 리리와 지키의 눈을 현혹하던 붉은 표면이 토르의 눈마저 빠뜨리게 하고 싶은지, 시간이 지나 더욱 비스듬히 늘어진 그림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것은 사람의 그림자일까 싶을 정도로 투명하고 붉었다.

  그 빛나는 광채에 토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깨진 둑에 물 붓는 사람처럼 허무하게 보이던 지키의 불만이 그의 뇌리에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한 그가 인형의 곁으로 좀 더 붙어서는 사근사근한 말투를 지어내어 물었다.

 

 “제 불찰로 3시간 동안 욕장에 계셨는데, 현기증이나 어지러움을 호소하지 않으시는군요. 혹시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역시나 인형은 말이 없었다. 애초에 사람처럼 몸을 가졌는지 확실하지도 않으니, ‘소리로는 반응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정확하리라. 사람과는 전혀 다른 외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람의 말뜻을 알아듣고 알아서 움직이는 것에 관한 위화감은 강한 괴리를 느끼게 했다.

  그 점이 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공물(人工物)처럼 편리했다. 그와 같은 결론을 임시로 내린 토르의 시선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존재 자체가 주는 위화감을 파악하는 것과 별개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 공작께 가야겠어.’

 

  그는 혹여나 하고 공간주머니에 준비해 놓은 어린이용 옷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작은 손님이 옷을 입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가슴팍에 넣은 주머니에서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걸음을 옮기는 토르를 따라 작은 인형이 움직였다.

 

 “공작께 안내하겠습니다.”

 

  성큼 걷는 토르의 걸음에, 더 바쁘게 따라오는 듯한 인형이 욕장 입구에 있는 탈의실을 거쳐서 복도로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인형을 확인한 토르가 복도를 나와 중앙 계단의 뒤에 있는 승강기로 향했다. 토르가 먼저 들어와 그곳에 타자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승강기에 몸을 실은 인형이 1층에서 4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이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 따위는 전혀 없는 모습에 토르의 안색이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미묘하게 굳어갔다. 흙으로 만든 내부와 달리 번들거리는 나무로 만든 승강기가 드디어 목적지인 4층에 도달했다.

 

 “내리시면 됩니다.”

 

  부드럽게 접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먼저 밖으로 나온 토르가 인형을 바라봤다. 그가 따로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나왔을 테지만, 이미 이런 행동이 몸에 밴 그는 습관적으로 인형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안쪽으로 접힌 승강기 문 한쪽을 잡았다.

 

 “이쪽으로.”

 

  토르가 붉은 인형과 함께 공작의 전용 서재가 있는 동관 4층 복도로 들어서자, 그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고용인의 시선이 붉은 인형에게로 내리쏘아졌다. 토르의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작은 인형을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인형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지의 것에 관한 심한 경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집사가 굳이 승강기를 이용한 이유였다. 불필요한 충돌은 되도록 피하되, 공작이 직접 정한 보호 대상임을 고용인의 눈에 새길 필요가 있었다. 그중에는 경계보다는 낯선 이에 대한 호기심도 더러 있었는데, 이런 시선을 받은 인형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복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서재 근처까지 다다른 토르가 걸음을 멈췄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 주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토르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이던 인형도 멈추자 그 앞으로 거대하리만치 높은 검은 벽이 보였다. 들어가는 문부터 압도적인 크기로 방문자를 누르려는 기세가 공작 서재의 수문장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서 있는 인형을 향해 잠시간 시선을 주던 토르가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왔다. 제 신장의 몇 배나 되는 문의 크기를 아랑곳하지 않은 토르가 그 위로 손을 올려 두드리자 그 소리가 넓게 울렸다.

 

 “공작,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집사의 두드림이 성벽과 같은 두꺼운 문을 통과한 것인지, 그 안에서 높낮이가 균일한 공작의 목소리가 당장 들려왔다. 그 목소리 곁에는 여러 명이 내는 듯한, 조금 부산스러운 잡음도 섞여 있었다.

 

 “들어오세요.”

 

 “…건은, 아….”

 

 “발표를….”

 

  서재 안에 있던 공작의 허락과 함께 토르의 앞에 있던 문의 검은 배경 속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고리가 떠올랐다. 그 고리는 곧 여러 갈래로 분해되어 아래로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문 전면을 가득히 채운 바늘잎나무가 되었다.

  오색 빛깔의 촘촘한 잎이 수놓아진 단단한 줄기가 영롱하게 반짝이며 자신의 앞에 선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하듯이 제 몸을 휘었다. 익숙한 이를 거쳐 그 옆에 있는 붉은 형체를 향한 줄기가 잠시간 멈추더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방금… 멈췄는데.’

 

  제 몸속의 줄기가 돌아온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거대한 나무가 조금의 티끌도 남기지 않고 금세 사라졌다. 그 영롱한 빛을 삼킨 어둠이 마침내 반으로 갈리며 방문자를 반겼다.

 

 ‘찜찜하군.’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진 나무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던 토르가 가늘어진 눈초리에 힘을 빼며, 순간적으로 들던 의문을 지워냈다. 손님을 먼저 공작께 데려다주는 임무가 있었으니, 그 우선순위에 맞게 행동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뒤를 향해 짧게 시선을 준 그가 현재 집무실로 쓰이는 공작의 서재에 발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세 공간으로 나누어진 응접실에 공작이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안쪽에서 소곤소곤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 마나 기사들과의 면담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붉은 인형을 향해 다시 몸을 돌린 그가 상황을 대강 설명한 뒤, 좀 더 기다려야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런 뒤에 인형의 곁으로 의자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을 옆에 두고도 앉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토르가 작은 인형을 향해 다시 말을 덧붙였다. 맹목적일 만큼 우직한 자세에 그의 신경이 그만, 그에게 쏠린 것이다.

 

 “앞으로 좀 더 들어가시면 저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가운 그의 인상과는 다른 은근한 오지랖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사와 면담하기 바쁜 공작이라 해도 그 장소에 아이가 등장한다면, 그곳에 관심을 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장담을 했으니, 필히 그의 시선을 끌리라.

  은연중에 그러한 속뜻을 내비친 토르가 붉은 인형을 지나쳤다. 그가 복도로 나오자, 지금까지 열려 있었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토르의 목소리를 기억하는지, 한쪽 공간이 탁 트여 있는 응접실에서 덩그러니 남은 인형이 그 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안쪽으로 계속 움직이자, 공간을 나누는 듯한 양쪽의 장막과 그 밑으로 같은 용도로 보이는 굵은 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그어진 굵은 선은 오색이었는데, 아이가 다가오자 좀 더 선명한 색을 띠었다. 어쩐지 섬뜩한 그 확연한 변화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인형이 그 경계선을 향해 바짝 다가가 그곳을 지나가려 할 때쯤이었다.

 

 “저런….”

 

  그 맹목적인 움직임에 깊은 탄식이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물가에 내놓은 자식을 걱정하는 이의 마음처럼 애잔하기 짝이 없었다. 그 탄식이 아이의 뒤에서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인형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 알아차렸다면 위협이라고 느꼈을, 언제 왔었는지도 모를, 인기척이 작은 인형에 바투 붙었다. 어느새 인형의 뒤에 자리한 이의 목소리는 매우 안타까움을 가득 안은 감정이 듬뿍 들어서서는, 그것이 곧 넘치려 했다.

 

 “나라면 지금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텐데 말이다.”

 

  꼬마야. 그렇게 부르는 소리에 몽실몽실하다 못해 두루뭉술한 아이의 발이 멈췄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발아래로 굵은 선이, 그 사이로는 실내조명에 아래로 드리운 붉은 그림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꼬마야.

 

  그 소리에 멈춘 아이의 발아래 자리한 굵은 오색선에서 다채로운 빛깔의 무수한 바늘이 두루뭉술한 발을 잡아먹을 듯이 솟구쳐 올랐던 것이 그대로 굳었다. 그 굳었던 가시 줄기는 제 몸을 넘어서는 붉은 그림자가 사라지자 날카로운 결정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그 경계로 되돌아갔다.

  경계, 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던 아이의 발이 뒤로 향했다. 자신을 향해 목소리를 낸 이의 바람을 들어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잘 알아듣는구나.”

 

  아이를 꼬마라고 지칭한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바닥에 도로 붙는 붉은 발을 본 그의 감정이 만족이란 것을 단번에 느낄 만큼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그리고는 슬며시 물러나 온몸이 붉은 핏덩이 같은 아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붉게 흐르는 핏속에 감춰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듯 고개 숙인 그의 비단과도 같은 머릿결이 아이의 앞에서 용의 수염처럼 사르르 흘러내렸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은빛 호수처럼 반짝이자, 그 반사광에 눈이 부신 것인지 붉은 인형의 상체가 살짝 흔들렸다.

 

 허허.

 

  조금이라도 섬뜩할 법한 모습에도 웃음을 보인 그의 매끄러운 입매 위로 오뚝한 콧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오뚝 솟은 콧대 위로 살며시 모습을 보인 하얀 비단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어, 그 눈매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인지, 그의 눈을 가린 하얀 비단의 매듭이 바람에 나부꼈다. 단단히 잠긴 실내에서 그의 주위로만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는 하얀 옷자락은 기사단과 대치하던 환족의 시원스러운 옷맵시와 상당히 유사했다.

  빛을 등지고서도 밝게 빛나는 은백색 머리칼, 그 아래로 하얗게 채워진 여백의 옷감이 그와 퍽 어울렸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겹겹이 겹쳐 입은 백색의 옷자락이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소매의 구름 모양 자수가 드러났다.

  살갗 하나 드러내지 않은 붉은 아이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게 눈을 가려버린 그의 얼굴이 제법 가까워졌다. 또 하나의 눈을 가진 듯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옆에서 들어오는 석양빛에 희미해졌다.

 

 “그래.”

 

  그곳에서 아이와 마주한 그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향했다. 옅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확인하듯 고개를 기울인 그가 얌전한 아이의 정수리를 가볍게 도닥였다.

 

 “잘 돌아왔구나. 꼬마야.”

 

  긴 방황 끝에 들풀에 내려앉은 나비를 위로하는, 그런 포근한 손길이었다. 거리낌 없이 자신을 도닥거리는 그 손길에, 붉게 물든 아이의 팔이 위로 올라갔다. 여태 보지 못했던 적극인 표현이었다.

  붉게 물든 팔이 그의 하얀 손목에 닿자마자 백옥 같은 그 피부에 무언가가 금세 아로새겨졌다. 그는 아이가 자신에게 새긴 것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제 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

 

  그가 일어서자 아이의 정수리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던 하얀 손목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소매에 가려졌다. 바닥에 내려앉던 옷자락이 올라가고 아이와 마주하던 그의 은발이 붉은 표면을 스쳐 지났다.

  아이와 마주하기 위해 숙였던 몸을 세운 그의 신장은 응접실로 급히 다가오는 이벨리아보다 컸다. 그런 그를 향해 성큼 다가온 이벨리아는 조금 뜻밖이라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세 개로 나뉜 공간 중에 가장 안쪽에 자리한 회의실에서 기사단과 회의를 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반사적으로 아이가 있는 곳을 향했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대상이 서재에 쉬이 들어온 것에 당혹을 금치 못하던 그가 아이와 함께 있는 이를 확인하자 안도하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알 수 없는 목적에 응접실에 들어선 공작의 얼굴에 방문자를 향한 경계가 드러났다. 그런 이벨리아를 향해 얼굴을 돌린 그가 무엇을 대답할까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음….”

 

  황혼마저 지우지 못한 순백의 인형과 마주하던 이벨리아는 성문 부근에서 핌과 대치하던 카제하의 반응을 기억하고 단숨에 아이의 곁에 섰다. 자신과 아이의 사이를 파고드는 이벨리아를 피해 뒤로 좀 더 물러선 그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저주받은 피가 궁금하여서?”

 

  의뭉스러운 웃음을 보인 그가 아이의 재롱을 보는 노인처럼 푸슬푸슬 웃었다. 이벨리아는 자신의 말에 대한 답변인 듯 아닌 듯한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웬만큼 일족을 파악하던 이벨리아도 여태 그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한 적은 드물었었다.

  의중을 알 수 없어 잔뜩 긴장한 이벨리아와 마주하던 그가 천연스럽게 자신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은 공작의 일방적인 행보로 울분 터뜨리는 일족의 화풀이를…”

 

 “…!”

 

  순간이었다. 그가 꺼낸 단어의 나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벨리아가 움찔하며 고개를 더 들어 보이자, 어느새 붉은 인형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싱긋 웃었다.

 

 “대신하기 위하여?”

 

  시원스럽게 입매를 휜 그가 긴장으로 어깨가 굳은 이벨리아와 아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한량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옮기는 것일 뿐, 그는 아이에게 손을 뻗거나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이벨리아가 속으로 안도했다. 그가 진정 아이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자신이 막아서기도 전에 이 붉은 인형은 조각조각 났을 테니까. 그는 그저 놀리기에 한창인 노인네이리라.

 

 “…진정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그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이벨리아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이벨리아의 물음에 느긋이 발을 놀리던 그가 아이를 향해 턱을 살짝 내렸다. 그러고는 작은 인형을 향해 허리를 조금 숙이더니, 호기심 박사처럼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울였다.

 

 “듣던 대로 상당히 재미난 모습이구나.”

 

  동서남북, 빠짐없이 옮겨 가며 아이를 돌아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이벨리아의 눈망울에 잠시 그늘이 졌다. 그의 말을 통해 일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저조한 기분이 들었던 이벨리아는 아이를 살피던 이의 높은 목소리에 금세 시선을 돌렸다.

 

 “…흠?”

 

 “한?”

 

  큰 신장을 가진 탓에 아이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힌 그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항상 사근사근 건네던 그의 목소리가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은 드문 일인지라 이벨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어.”

 

  먼 곳에서 등불 든 자의 얼굴을 확인한 문지기처럼 아랫입술에 힘이 빠진 한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머리칼과 같은 은빛 눈썹이 아래로 살짝 쳐지자, 그 미려한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이기도 했다.

 

 ‘…시간?’

 

  그 표정은 찰나에 지나갔으나, 그것을 그냥 지나칠 이벨리아가 아니었기에 그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붉은 인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한 모습의 –정체불명의- 아이가 자리했을 뿐이었다.

 

 ‘어떤 시간.’

 

  무엇을 위한, 어떠한 시간. 그런 고민 따위가 기저에 깔린 이벨리아의 눈망울이 옆에서 들어오는 노을빛에 빠르게 침식됐다. 붉게 물든 공작의 시선이 붉고 작은 인형에게서 하얗고 큰 인형으로 옮겨졌다.

  그 의문스러운 눈초리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 하얀 인형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일어날 때까지 아이를 보던 그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노을을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턱을 부드러이 아래로 당겼다.

 

 “일족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때가 되면 풀릴 테니.”

 

  짧게 말을 마친 그가 내렸던 턱을 다시 올리며 공작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읍하자, 잠시간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벨리아도 급히 같은 자세를 취했다.

 

 “…예. 감사합니다.”

 

  다시 날을 잡아 일족과 대면하려 했던 이벨리아에게는 희소식이니, 우선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가 구태여 일을 도맡았다는 것에는, 그에게 어떠한 확신이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그 점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이벨리아의 태도는 진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공작의 시선 속에 든 인형의 하얀 옷자락이 황혼에도 지지 않고 고유의 색을 머금으며 빛났다. 그 옷자락은 내려가는 주인의 팔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며 나풀거렸다. 이벨리아가 그 구김 없는 선을 따라 시선을 들자 하얀 천으로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보였다. 중노인으로 보인 그의 귓등 안쪽으로 걸려 있던 귀고리의 끝에 매듭지어진 두 개의 천이 나긋이 나부꼈다.

  작은 새의 날갯짓과 같은 소리가 제 귓가에 들리는 것이 신기했던 것인지. 여태껏 미동 없던 아이의 붉은 고개가 잔잔한 파동을 따라갔다.

 

 「바람」

 

  두 개의 천이 교차하며 나부끼는, 아주 사소한, 그 소리에 아이의 뭉툭한 발이 하얗게 빛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아이의 발이 향한 곳에는 잔잔한 바다의 표면처럼 희게 빛나는 윤슬과도 같은 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인사말을 건네더니, 이내 두 사람의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음에 봄세.”

 

 “예. 다음에….”

 

  하얗게 빛나던 한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의 등장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공작의 어깨서 힘이 빠졌다. 급작스러웠던 등장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에 그가 속으로 안도하자, 그 옆에 있던 아이의 고개가 살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미세한 차이를 바로 알아차린 이벨리아는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이 다음에 보자고 하셨으니,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아이의 머리로 보이는 곳이 갸울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는 듯해 이벨리아는 설명은 더 없다는 뜻으로 괜히 헛기침했다.

 

 “그 정도는 내가 보장하마.”

 

  서투르게나마 했던 그의 위로가 통한 것인지, 이벨리아를 향한 아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벨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이제 실질적인 질문을 하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인형의 머리 부분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입에 익어버린 딱딱한 말투에 비해 아이에게 향하는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이벨리아는 좀 전에 아이가 보인 행동에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을 못 한다고 하던데, 수화를 할 수 있거나 소통할 수 있는 물건이 있나?”

 

  아이를 향한 그의 눈망울이 올곧았다. 한의 등장으로 아이의 몸짓이 더욱 확실해진 것을 느낀 이벨리아는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피로 덮여 작은 인형의 눈도 마주하지 못한 공작은 침묵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짐작하건대 자신 앞에 있는 아이는 말할 수 없는 상태거나 이곳에서 자주 쓰이는 언어가 아닌 다른 소통 방법을 써야 하는 듯했다. 낯선 이들을 경계하기 바빠 아이가 대답하지 않는다는 추측을 하긴 했었으나, 기사단을 비롯하여 자신을 인도하는 이의 말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알고 머릿속에서 바로 지웠다.

 

 “언어는 무엇을 쓰지? 서대륙의 음성 언어 중 어떤 것들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적중률이 높은 그의 예측을 증명하듯 연달아 들리는 그의 물음에 아이의 고개가 왼쪽으로 살짝 갸울였다.

 

 “이 그림으로 무언가 전할 것이 있나? 이것이 아니면 색을 구분하거나 하는 것은 어떻지? 그러면….”

 

  그 모습에 눈을 깜짝인 그가 아이에게 점묘화, 지두화, 풍경화, 유화 등등 다양한 그림을 어떤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더니 그 반응이 미미하자, 다른 주머니에서 금속 재질의 고리를 꺼내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이 소리는 들리나?”

 

  자신의 손바닥만 한 금속성 고리를 아이에게 보여준 그는 그것에 힘을 불어넣어 낮은음부터 자신도 듣기 힘든 음역의 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아이는 그 소리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알고 있는 글이나 책 같은 것을 알려줘도 좋아. 단어 같은 것도 괜찮다.”

 

  뜻밖의 난관이었다. 분명 반응하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확신했던 그는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 아이에 관한 정보를 알아야 하는 입장에선, 무엇이라도 해보지 않고는 못 배겼기 때문이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비헤일리스와 인접해 있던 지역과 제국의 밖에 있는 국가의 말을 혼용해서 써보아도 아이의 반응이 여전했다.

 

 “곤란하게 됐어. 이렇….”

 

 ‘이렇게 다양한 말을 듣는데?’

 

  그 반응에 어떡한다 싶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방금도 외국어와 혼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다양한 언어를 혼용하기 좋아하던 자신의 버릇이 튀어나온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당황했다.

  환족이 자리 잡은 뒤, 서대륙은 말소리의 뜻이 통하게 되었다. 즉, 나라나 지역 간의 언어 차이가 심한 지역일지라도 소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어떤 국가에서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든 그 의미가 통하게 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런 영향은 서대륙과 중간대륙을 가로지른 에슈탄트 숲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하고, 반대로 그곳과 먼 곳에서는 영향이 적었다.

 

 ‘내가 말한 것은 그냥 외국어였을 텐데, 그것도 2개 국어가 혼용된….’

 

  다만 에슈탄트 숲에서 가장 가까운 비헤일리스에서도 예외가 있는데, 환족의 피에 영향을 받은 이벨리아와 비슷한 그 후손들은 환족에 관한 –언어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이 앞에서 이벨리아가 꺼낸 말은 각기 다른 문화로 이뤄진, 각기 다른 뜻의 다른 발음의 단어와 문법이 들어 있던 이국어(異國語)나 다름이 없었다.

 

 ‘어째서 알아듣는 모양새였던 거지?’

 

  자신을 오랫동안 봐왔던 친우조차 기겁하던, 그의 버릇에 알아듣는 것처럼 고갯짓하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옆에 자리한 탁자에 놓인 종이를 가져와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좀 전에 썼던 언어의 문법을 비헤일리스식으로 바꾼 뒤에 문장의 요소를 각기 다른 나라의 말로 치환시켜 놓고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보여 아이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나간 자의 이름, 궁금하다면 자리에서 뒤로 한 번 물러나 내가 부를 때까지 가만히 있어.」

 

  그가 쓴 문장을 마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움직였다. 그가 적은 문장대로 아이가 뒤로 물러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듯이 상체를 들었다. 아이의 움직임에 자신의 짐작이 옳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벨리아가 얼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환훤오다.”

 

  이름을 알려준 이벨리아가 아이를 향해 다시 종이를 들어 보였다. 이번에는 서대륙 동부에 있는 비헤일리스와는 대척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벨기움의 문법을 가져와 비헤일리스 단어들을 요소로 집어넣었다. 그가 반려와 자주 쓰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쓰는 속도는 더할 나위 없이 빨랐다.

 

 「나와 계속 있길 원한다면 앞으로 한걸음 다가와.」

 

  아이의 눈과 정확히 맞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이는 이벨리아가 보여주는 문장 족족을 전부 이해한 것처럼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이것도?’

 

  자신의 문장을 이해한 것처럼 앞으로 나오는 아이의 반응에 이벨리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가 어느 정도의 –문장, 단어, 문법 등등- 수준까지 이해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그는 갖고 있던 종이 뭉치를 하나 넘겨 여러 가지 문장을 썼다. 이번엔 혼용된 말이 아니라 각국의 언어가 온전히 들어있는 문장을 짤막하게 이어 자신에 관한 설명을 이었다. 그 뒤에는 현재 아이가 처한 상황을 서술했다.

 

 「나는 이벨리아스티아 만 비헤일리스 공작. 비헤일리스를 통치하는 명백한 귀족이며, 그 중 모드나드에 직접 관여한다. 이 성은 공작으로 선출된 이가 기거하는 곳으로, 으뜸이라는 뜻을 가져 수리성이라고들 한다.

  너를 이곳으로 인도한 이들은 내 직할인 모드나드 상급 기사단이다. 이들과 성문 광장에서 대치했던 이들은 사법부인 챠하트의 기록관, 그리고 그 옆에 있었던 이들은 너와 조금 전까지 마주하던 한과 같은 환족이다. 현재 환족은 너의 외관에 몹시 분개하고 있다. 그것이 너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일이라 판단해 내가 이곳으로 데려왔다.

  네가 그것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은 일족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사항이다. 환족이 영면을 맞이하기 전 누군가에게 살해된다면, 그렇게 한 사람을 향해 반드시 그 표식이 붙는다. 그 모습이 지금 너와 같다.

  환족의 대표인 카제하가 확신했으니, 일족에게 있어 너의 처지는 과히 불리하다. 그러니 나에게 반드시 협조하여, 오해가 있다면 그들을 설득할 만한 증거와 증언으로 채집할 수 있게 도왔으면 한다.

  방금 상황으로 볼 때, 이 글을 이해하였으리라 본다. 그러나 내가 능력이 부족해 너와 대화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 그전까지는 이 성에서 지내며 쉬어라.」

 

  마지막으로 자기 생각을 전한 이벨리아가 들고 아이를 향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비헤일리스에서 으뜸이라 칭송받는 그도 일족에게 있어서는 햇병아리나 다름없었기에 무엇보다 당사자인 아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여 선택한 방법이었다.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 탁상에 놓은 이벨리아가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릴 때쯤이었다. 그의 행적을 은근히 좇던 붉은 인형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

 

  붉은 인형이 그의 바로 앞에 다가오더니 그의 다리를 툭 쳤다. 아니, 쳤다기보다는 발걸음을 옮기려던 이벨리아와 가볍게 부딪힌 것이 맞으리라. 자신의 다리와 부딪혀 휘청거리는 인형을 재빨리 잡은 이벨리아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

 

  깊게 내쉬던 그의 한숨이, 자신에게 기대는 인형의 모습에 끊겼다. 엉성하게 앉아 있던 그가 주저앉으며 자신을 잡고 있던 팔을 거두자, 살짝 기우뚱거리던 작은 인형이 그의 품에 들어갔다. 아마도 등을 내보이고 자신의 무릎에 앉았으리라.

  예상치 못한 훤오의 협조에 이어 얼굴도 확인 못 한 인형의 신뢰까지 여러모로 그를 얼떨하게 했다.

 

 ‘뭘 믿고.’

 

 “…이리 순진하게 굴까.”

 

  제 품에 얌전히 들어온 아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려던 그의 손이 멈췄다. 이상한 아이. 그 단어가 주는 추억이, 더는 붉은 인형과 거리를 좁힐 수 없게 했다.

 

 “사람을… 전부 믿진 말렴.”

 

  아가야. 자신의 품에 들어온 아이를 빤히 보던 이벨리아가 한참을 침묵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인형은 황혼이 지는 창가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갸울였다. 마치 이해할 수 없다는 몸짓이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네 보호자가 누군지는 다음에 알아보도록 하마.”

 

  피곤하군. 아이를 받치지 않은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공작의 입술이 희미하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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