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조심하세요. 어머니.’
마침표의 여운이 감돈다. 청청하고 고운 눈이 눈 녹듯 사그라들어 마침내 사라지는 것을 이벨리아는 잡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수정을 세밀하게 깎아 장식한 듯한 웅장한 장미 정원이 퇴색의 기운을 조금 음울하게 뽐내고 있을 뿐.
보석이기에 빛나고 빛이 들기에 빛난다. 그 무엇도 아닌 장미밭에 덩그러니 남은 여인이 지나간 시간을 붙잡지 못해 미련하게 굴었다.
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여인의 시선을 잡아끈다. 저것은 무엇일까. 감히 공작의 정원에 들어온 것은 무척이나 붉고 강렬한 빛을 뿜었다. 그 빛에 홀린 듯 수정으로 이뤄진 가시덤불을 뚫고 공작의 긴 팔이 그것에 닿을 즘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그와 동시에 여인은 제 정원을 붉게 물들이던 것을 마침내 잡아끌었다.
“…공작.”
보좌관의 부름에 여인이 상념에서 깼다. 가시에 닿은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아프지 않아 남의 것이겠거니 했는데, 의복을 뚫고 자잘한 생채기가 붉게 번진 채였다. 놀란 보좌관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니, 그제야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손이 보였다.
그 손에 들려 있는 붉은 장미가 금방이라도 공작의 손을 집어삼킬 듯이 쉼 없이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수정으로 이뤄진 장미 속에 갇힌 붉은 피를 보던 공작의 뇌리에 그것의 지칭이 깊이 박혔다.
「멸문의 장미」
수정으로 피어나는 장미가 붉게 변하는 것을 두고 그렇게 부른다. 피어난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기도 하여라. 공작의 손에 들린 꽃에서 시선을 돌린 보좌관이 애써 평정을 찾았다. 공작의 상처를 돌보기에 앞서 다급한 안건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를, 선점하셔야 합니다.”
무엇에게서. 그렇게 묻는 공작의 손에서 –가시가 남은 줄기와 연결된- 장미를 빼낸 보좌관이 자신이 갖고 있던 손수건을 이용하여 상처를 지혈했다. 공작의 명성에 비하면 자잘한 상처 따위긴 해도, 그것이 어디서 난 상처인지 안 이상은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령과 연결된 성문 교역소에서 챠하트, 환족, 그리고 기사단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기사단이 보호하고 있는 한 아이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마술을 사용해도 지워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고 챠하트와 화… 저하!”
보좌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광을 번뜩인 공작이 정원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공작의 잔상처럼 남은 짙은 향이 붉게 피어올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원에 홀로 남은 보좌관이 자신의 손에서 붉게 차오른 장미를 어찌하지도 못한 채 황급히 공작의 뒤를 따랐다.
“기, 기다려주십시오! 저하!”
***
푸른 804년 4월. 황성이 있는 수도를 거쳐 비헤일리스로 넘어가던 길목을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세 무리의 신경전으로 피안바스토 제국의 –명목상 속국이자- 중추인 비헤일리스의 성문 안팎이, 이례적인 상황에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이른 봄 무렵, 잘 정리된 도로와 도로 주변 인도를 걷던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곳으로 쏠렸다.
“불가합니다.”
“핌 단장. 솔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단장. 잘 생각하시오.”
보기 드문 세 무리의 신경전에 호기심이 든 사람들이 성문 길목으로 몰려들었다. ‘열린 요새’답게 투명한 비헤일리스 성벽 너머로 서로를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그들의 신경전이 성 밖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그만큼 어느 것 하나 모난 것, 덜 된 것 없이 지어진 집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투명한 성벽은 제국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어서인지 국방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빤히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수도 성벽을 관리하는 모드나드 기사단은 갑작스러운 두 집단의 등장에 당황했으나,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기록관께서 모드나드 기사단의 일에 관여하실 수 있는 것은 수사와 재판에 관한 일입니다.”
검붉은 단복과 하얀 비단으로 만들어진 크라바트를 차고서 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꼿꼿이 선 여인이 기사단 맨 앞에서 다가오려는 이들을 막아섰다. 막아서는 그의 가슴에 가시덤불이 배경인 장미 배지(badge)가 반짝였다. 그 뒤로 여인과 같은 복장에 왼쪽 가슴에 배지를 단 기사들이 견제 세력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상대를 경계했다.
“그 일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비키시지요.”
“비킬 수 없습니다.”
기사 단장의 단호한 거절에 아랑곳하지 않은 검은 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장이 이미 여러 차례 거절했음에도 그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검은 바탕에 하얀 허리띠를 맨 관복이 인상적인 무리는 일관된 시선으로 여전히 검붉은 단복 너머에 존재하는 인형을 바라보는 듯했다.
“챠하트 기록관 대표로서 모드나드 기사 단장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기사 단장과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앤디가 짙은 녹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앞장선 앤디처럼 그 뒤에 있는 기록관들도 무표정했으나, 그 눈빛만은 끝까지 표적을 추적하는 하이에나처럼 기사단에 둘러싸인 인형을 응시했다.
비헤일리스 공작 직속인 모드나드 기사단의 앞을 감히 가로막은 이들은 제국 내에서도 공신력 있는 -독립된 심판 기구- 챠하트에서 종사하는 기록관으로, 그 긍지와 자부심이 실로 대단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챠하트에서 받은 내용을 짧게 설명한 이들이 본인들이야말로 기사단 뒤에 있는 존재를 데려갈 수 있음을 열심히 피력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의 보호는 챠하트에서 맡아야 합니다.”
“무슨 소리! 이는 환족의 일이오.”
차분한 앤디의 주장에 또 다른 무리의 목소리가 성문 근처에서 벼락처럼 내리 떨어졌다. 그 노호에 무언가 우려하는 듯한 시민이 자리에 있기 두려워하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불안한 시민이 보이지 않은 것인지, 하얀 도포 자락을 거칠게 휘날린 한 인형이 기사단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거센 바람에 휘날린 비단 도포가 분노하는 그의 눈동자처럼 기사단을 향해 번뜩였다.
“그러니 단장은 더는 지체 말고 우리에게 그자를 넘기시오.”
기록관과 같이 기사단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은 ‘환족’. 학의 무리와 같은 이들은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소매 달린 옷을 여러 겹 입으며, 그 위로 비단이나 수로 문양을 놓은 도포를 걸친 차림이었다. 그 하얀 의복과 어울리는 백자와 같은 하얀 피부에 어두운 머리칼을 지녔으며, 용모 또한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그 수많은 명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힘’으로, 이들은 그들만이 펼치던 마술과 그에 상응하는 힘에 관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데 이것이 좀 과했는지, 제국에서는 이들과 국민이 겨루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한 일도 있었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날카로운 눈으로 기사단을 훑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있는 곳을 정확히 꿰뚫어 본 그가 굳은 얼굴로 단장에게 가볍게 경고했다.
“그것을 넘기라고 했소.”
그 무심한 말에, 곤란한 기색 없이 두 무리를 상대하던 기사 단장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자신의 등 뒤에 있던 작은 인형을 어떻게 보는지 너무도 뻔한 그의 언행이 단장의 심기를 분명 거슬렀기 때문이리라.
“두 분께선 아이를 데려갈 권한이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굳은 얼굴로 맞은편의 무리를 향해 뜻을 전한 기사 단장이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그런 단장의 반응에 행간을 읽은 부단장이 눈치껏 그 뒤로 바짝 붙었다.
자기 뜻을 눈치챈 리워드가 보호를 위해 아이의 옆에 서자, 그 기척을 느낀 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완만히 해결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아이는 제국의 수도와 모드나드를 연결 짓는 비헤일리스 성문 교역소로 걸어왔습니다. 두 분께서 서로 관여할 일이라 하십니다만,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은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관할지에서 수사권이 부여됨으로 부득이한 경우로 인정되지 않는 한 모드나드의 주인인 비헤일리스 공작께 먼저 이 일을 보고해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챠하트와 환족은 이를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핌의 의견에 황혼을 집어삼킨 듯한 일족의 짙은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듯한 기사단의 기척을 읽은 카제하가 인자한 인상과 달리 버석하게 메마른 시선으로 한쪽 눈썹을 높이 올렸다.
“단장의 고견은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나, 이 일은 일족에서도 속히 다투는 일일세.”
평소와 달리 조급해 보이는 카제하의 시선을 읽은 핌이 턱에 힘을 줬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과 바로 마주한 그의 머릿속에는 결말을 알고 타는 기차 안의 풍경이란 이렇게 위태한 것일까 하는 생각 따위로 물들던 참이었다.
“거듭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그 거절에 동공까지 자색으로 물든 일족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자하던 그들의 변화에 아이를 둘러싼 기사단을 비롯해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불편한 긴장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을 태어나 처음 본 사람이 대부분인지라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것은 기사단과 기록관도 마찬가지였는지, 고스란히 상대에게 노출된 그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 상황에서, 일족의 분노에 반응하듯 기이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세 무리를 둘러쌌다.
“공작의 직속이라고 한들, 주제넘지 마시게.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환족의 일이라고 내 분명히 말했네.
노골적인 카제하의 기세에 기사단이 주춤하는 듯 보이자, 아이를 환족에게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든 앤디와 기록관들이 일족을 견제하며 동시에 기사단을 압박했다. 전투적인 싸움은 몰라도 –비헤일리스에서- 상대를 ‘억압’하는 것에 있어서는, 챠하트에 소속된 기록관만큼 숙련된 자들도 없었다.
“단장. 더 무리 마시고 우리에게 사건을 넘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적 없는 아이에 대한 판단은 솔께서 결정하시게 될 겁니다. 에롭트의 후작에게 이번 일이 보고되면, 공작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게 되니,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
대범한 일족의 압박과 달리, 발끝부터 저리게 만드는 기록관의 압박에 시달린 기사단이 입술을 꽉 물었다. 단장의 지시가 따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맨몸으로 그들의 압박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단장인 핌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은 섣부른 판단으로 마술을 이용한 방어에 나서면, 상대방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 줄 거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세 무리 모두 성문 근처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서로 힘을 겨루는 것을 자중하는 듯했으나, 핌에게 아이를 요구하는 이들의 눈빛에 흉흉한 목적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이들에게 기사가 기사 원칙을 무시하며 순순히 아이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챠하트를 거쳐 전달되어도…”
“다른 이가 관여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소이다.”
그런 세 무리의 신경전을 지켜본 시민들이 심상치 않은 기류에 더 멀리 물러났다. 오늘과 같은 일이 예삿일이 아니거니와 지금 서로 대립하고 있는 자들은 비헤일리스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손꼽는 자들로 이뤄진 집단이었으니, 뒤로 물러선 시민들의 행동은 바람직한 생존 본능이리라.
다만, 어마어마한 구름 관중 속에서 투명한 장미를 손에 든 사람들이 주요 세력들이 성문 길목 한복판에서 대치한 상황에 쩔쩔매며,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수시로 놓았다 놨다 반복했다. 이들의 주변은 이미 깨진 장미 조각이 자잘하게 흩어져 길가에서 반짝였다.
투명한 장미 혹은 이미 장미를 깨트린 이들은 마치 이상한 상황을 감지하고 신호탄을 보낸 사람처럼 성문 근처를 서성였다. 이들은 또 다른 누군가가 오지 않을까 하며, 중간중간 주위를 살폈다.
“이건 일족의 일이라 하였소.”
그러거나 말거나 기사 단장인 핌의 뒤에 서 있는 작은 인형은 멀거니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초연한 것인지, 어떤지 모를 이 인형은 붉게 흐르는 액체에 윤곽이 흐려져서 그 이목구비가 도통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 아이의 흐린 윤곽도 기사단이 단장 곁으로 바짝 붙으면서 더는 보이지 않았다. 부단장의 눈짓에 그 주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진했던 기사들이 두 무리의 표적이 된 아이의 곁으로 다가와 경계를 강화했다.
“단장. 더 말하지 않겠소. 아이를 내놓으시오.”
“이는 챠하트의 관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단장, 솔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 저하께는 우리가 아이와 대화한 이후에 상세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뚝심이 아닌 핌의 반응에 일족이 단호한 입장을 표하자, 다급해진 기록관이 회유책을 꺼내 들었다. 지금 이렇게 길게 끌어봤자 공작이 이곳으로 오게 되면 비등비등한 세 무리 중 기사단에 그의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우선으로 결정권을 쥐게 되는 건 공작의 직속인 모드나드 기사단이니,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 합리적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기사단과 대치한 지 수십 분이 시간이 흐른 지금, 기록관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위기에 처한 셈이었다. 셈에 밝은 그들이었기에 상황 파악이 빨랐던 앤디가 핌을 채근했다.
“핌 단장.”
그 채근에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다른 두 무리 또한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확신한 부단장이 핌을 살며시 불렀다.
“단장.”
그 부름에 기사단 제일 앞에 서 있던 핌이 그를 향해 돌아보지는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준비해.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칼을 좀 짧게 자를 걸 그랬다. 리워드에게 만일의 준비를 기하란 신호를 보낸 핌이 대치하고 있는 기사 중 자신이 가장 긴 머리칼을 갖고 있다는 것 뒤늦게 깨닫고는 속으로 한탄했다.
‘머리채 잡히면 어떻게 하지...?’
자신보다 월등한 –혹은 대등한- 상대와 맞붙을 때는 긴 머리칼만큼 독이 되는 것도 없었다. 땋아서 묶은 머리이긴 하다만, 핌에게 있어 그 사실이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기록관도 기사단만큼 제압 능력이 좋은데다 협동심이 좋았고, 오늘 드물게 노한 모습을 보여준 환족은 보통의 인간과는 그 차이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과연 머리칼이 남아날까?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 모두 진심이어서, 핌은 현실적인 걱정에 마음이 기울었다. 항상, 언제나 사소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나’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카제하와 앤디의 시선을 겉으로 거뜬히 받아치던 핌이 자신의 시끄러운 마음속을 다잡았다. -제국의 내놓으라 하는 실력자들도 두려워하는- 환족의 능력이 있으니, 상념에 깊이 잠겨 있는 것 또한 금기였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이들에게 언제 읽힐지도 모를 일이니, 신선과 같은 차림의 카제하를 마주 본 핌이 생각을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했다.
‘머리칼 자르자.’
여기서 살아남으면!
자신의 가슴께 근처까지 내려온 머리칼을 보며 핌이 굳게 다짐했다. 공작처럼 짧은 머리가 되리라. 싸울 때 머리칼이 흩날리는 게 멋있긴 하다만, 여기서 그런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싸울 수 있는 건 -아마 비현실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환족이 아니고선 힘든 일이었다.
전쟁에서 머리채를 잡히면 모가지가 잘리는 게 당연하다. 요즘 태평해서 한참 잊고 있던 상식을 되짚어본 핌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근무지가 꽤 태평하긴 했다. 여러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사소한 마찰은 종종 있었지만, -여태 잘 지내던 두 사람이- 오늘처럼 쌍으로 덤벼들 줄은 몰랐다. 특히나 법적으로도 금지된 환족과 겨루기는 자살과 다름없으므로, -일족의 대표인- 카제하의 앞에 선 핌은 애써 초조함을 속으로 삼켰다.
‘이제 강행 돌파밖엔 없나…’
핌의 짧은 끄덕임에 침묵으로 수긍한 기사단이 언제든 검을 빼 들 수 있도록, 팔로 자신의 허리를 살짝 감싼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대치하고 있는 환족과 기록관에 대한 경계는 착실히 유지했다.
핌의 예상처럼 기사단과 마주한 환족과 기록관이 무력의 기운을 감지하고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어느 때나 발도할 수 있게 손을 허리춤에 둔 기사와 양손을 살짝 앞으로 든 기록관, 그리고 그들을 차분한 시선으로 여전히 노려보는 환족까지 세 무리의 주위로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신을 두고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세 무리 속에서 붉은 액체로 뭉쳐진 아이의 상체가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그때였다. 세 갈래로 나뉘어 대치하던 이들 사이로 익숙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균열의 틈을 파고들었다.
“핌.”
정점에 자리한 이의 위엄 서린 목소리가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목 중앙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등장하자 숨 막힐 정도로 흉흉한 기운을 내뿜던 두 무리의 기세가 한 번에 꺾였다. 특히 앞장서서 각기 이견을 보이던 세 사람이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저마다 다른 속내를 드러내며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예를 표했다.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이가 흉흉한 기운이 감도는 삼각형 속으로 단숨에 들어오자, 기사단과 대치하고 있던 기록관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 있던 일족은 공경의 의미로 그를 향해 두 손바닥을 포개어 읍했다.
“…저하.”
고대하던 공작의 등장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핌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두 무리 앞에서 한없이 ‘대치해야 하나, 아니면 돌파해야 하나’를 고민했던 핌이 이벨리아의 등장에 속으로 환영의 깃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저하, 살려줘요!’
그런 핌의 방정맞은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단장을 본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런 공작의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던 탓에 핌은 그에게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기사 단장인 그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엔 환족이란 존재는 상당히 거대했다.
그러던 터에 등장한 공작이었으니, 핌은 알맞은 시기에 나타난 이벨리아에게 속으로 감읍할 따름이었다.
‘아이는….’
공작의 입장에서도 핌의 대처가 미흡한 점은 없었기에 그를 꾸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이 팽팽한 삼각형 구도를 만든 원인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급한 것도 한몫했다. 이벨리아는 한시라도 빨리 이 분란의 원인이 된 ‘아이’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이윽고 공작의 시선이 멈췄다. 우람한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인형을 발견한 것인지, 그의 시선이 유독에 한곳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
“저하!”
공작이 두 세력의 기세를 등장만으로 확 꺾어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그의 보좌관이 정적이 감도는 거리서 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급한 얼굴로 거리에 도착한 그는 자신을 좇는 시선을 무시하며, 기사단과 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공작에게 곧장 다가갔다.
“아직 무리하시면…!”
흘러내린 은발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국경의 안쪽에서 바깥쪽까지 먼 거리를 단번에 이동한 공작의 안색을 정신없이 살핀 보좌관이 버럭 화를 내려다 그만두었다.
공작에 이어 갑작스럽게 광장에 등장한 자신의 존재가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그 시선을 의식한 그가 기사단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이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됩니다.”
공작의 안색이 더 나빠지지 않은 것에 안도한 보좌관이 뒤늦게 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공작에 대한 야속한 마음을 애써 숨긴 그가 오묘한 눈동자를 보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절대안정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보좌관의 말에 작은 인형에게 향했던 공작의 시선이 걱정을 한가득 집어삼킨 주홍빛 눈동자로 향했다. 그렇게 야속함을 삼킨 보좌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여인의 시선이 점점 또렷해지며, 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알다마다.”
알다마다. 그렇게 대답한 그의 시선이 여지없이 붉은 인형에게 향했다.
***
“공작께서… 오셨군요.”
‘벌써 오실 줄은….’
예상치 못한 이벨리아의 등장으로 -모드나드 기사단, 챠하트 기록관, 환족- 세 무리를 비롯한 시민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예전보다는 조금 야위었으나, 기골이 장대한 그는 사람들의 눈에 곧잘 띄었다. 그런 공작은 평소 즐겨 입는 단정한 셔츠, 바지를 입은 단정한 차림에 쌀쌀한 모드나드 날씨의 봄을 대비한 얇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비헤일리스에서 나라님이나 다름없는 공작의 등장에 시민들이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의 눈을 비볐다. 모드나드를 떠들썩하게 한 실종 사건 이후, 은둔한 공작 대신 그의 보좌관이 대부분의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비췄기 때문이었다.
“진짜… 공작님?”
일촉즉발의 상황을 등장만으로 와해시킨 공작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라움과 예상치 못한 인물을 향한 반가움이 교차했다.
“진짜인가 본데?”
“얼마 만에 나오신 건지….”
“많이 야위셨는데도 위엄은 예전과 똑같으시군.”
“그런데…”
다만,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망토 속에서 이따금 모습을 드러낸 피투성이 손이, 공작을 향해 반가워하던 시민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그 무수한 시선 속에는 작은 생채기에서 나오는 피로 뻘겋게 물든 손수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손이 왜 저러시지?”
에슈탄트 숲에 사는 환족 다음으로 튼튼하기로 유명한 이벨리아였다. 그 손에 난 생채기가 지혈된 줄 알았더니, 그 사이 손수건을 뻘겋게 물들이고야 말았다. 아래로 흐르는 피를 더는 잡아주지 못한 손수건 아래로 흐른 피가 땅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신체 조건이 좋은 비헤일리스인답게 멀리 떨어진 공작의 손까지 확인한 사람이 저마다 놀라며, 공작의 손에서 떨어지는 피를 심각하게 바라봤다. 그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그 모습은 명성이 자자한 비헤일리스 공작다운 면모라기엔 위태로워 보였다. 당황한 시민이 공작을 위태롭게 만든 이유를 찾기 위해 그 주위를 훑기 시작했다. 그중 눈치가 빨랐던 몇몇이 공작의 뒤를 급하게 쫓아왔던 보좌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작이 얼마나 강한지 가장 잘 알고 있을 그가 이렇게나 급하게 찾아왔다는 것은 필히 무슨 연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보좌관을 살피던 시민이 답을 찾았는지 크게 움찔거렸다.
“저건 멸문의….”
보좌관에게 시선을 돌린 이들의 시야에 산 채로 뜯긴 심장과 같은 붉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들은 매끄러운 표면이 반짝이는 것을 맨눈으로 확인하고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는 듯이 손으로 급하게 입을 가렸다.
‘멸문의 장미!’
보좌관의 손에서 마치 눈물 떨구듯이 새빨간 피를 뚝뚝 흘리는 꽃을 본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작은 바람에 너울거리는 망토 사이로 너덜너덜해진 공작의 셔츠가 사람들 눈에 언뜻 들어왔다.
망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난 공작의 셔츠와 손이 엉망인 이유를 알게 된 자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옆에서 그것을 알아챈 기록관 또한 보좌관의 손에 들린 것을 눈치채면서 그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멸문의 꽃이라….’
덩달아 자신들을 향해 등지고 있던 보좌관조차 관심 없던 카제하가 기사단에 고정했던 시선을 내려 정확히 보좌관의 왼손을 바라봤다. 가시가 남은 장미 모양의 수정 안에 가득 들어찬 피가 쉼 없이 밖으로 흐르는 것을 확인한 일족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절묘하군.”
절묘해. 보좌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붉은 핏줄기를 본 카제하가 옅은 탄식을 뱉었다.
‘분위기가….’
환족의 반응을 비롯하여 대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첸이 마침내 자신의 손에 들린 꽃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작의 뒤를 황급히 쫓느라 정신없이 들고 온 장미로 인해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졌음을 깨달은 그가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자마자, 그의 귓가에 차분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첸.”
“예, 저하.”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공작을 향해 대답한 첸이 그 말뜻을 알아채고 손아귀에 있던 장미를 빠르게 지웠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지운 것처럼,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의 손에는 꽃은커녕 그 안에서 흐르던 선명한 핏방울도 자리에서 남아 있지 않았다.
보좌관의 손에서 피 흘리는 장미가 사라지자, 그것을 은근히 지켜보던 공작이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너덜너덜해진 그의 상의와 아물지 않은 자잘한 상처가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해졌다.
“저거 설마….”
“아니어야 하는데….”
그러나 깔끔해진 공작과 보좌관의 모습을 본 시민의 표정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좋아지지 않았다. 어떤 원리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수정 재질이 바깥으로 피를 흘려보내는 것을 본 목격자의 입매가 텁텁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멈췄다.
“이번에 또 그렇게 되면….”
이런 이들에게 공작이 직접 나서서 실은 그냥 생겨난 것이니, 이것은 멸문의 장미이나 걱정하지 말라고 설명해주었더라도 그들의 얼굴이 좋아질 리는 없다. 그만큼 상황이 기가 막히게, 피의 향연이었으니까 말이다.
첸은 꽃이 사라진 뒤로도 표정에서 두려움을 지우지 못한 관중을 살피면서, 앞으로 자신이 설명할 때 보일 청중의 얼굴이겠거니 하고 눈에 새겼다.
여기서 ‘멸문의 장미’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말 그대로 어느 한 가문이 사라지는 것을 예고하는 징표로, 실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전 그것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나타났었다. 그 시기가 어찌나 절묘하던지 ‘죽음의 문’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였다.
시민의 표정이 좋지 않자, 상황을 바로 정리하기로 한 이벨리아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를 내며 보좌관을 향해 명령했다.
“두 분의 이견을 조율해서 내게 전달해 주게. 저자는 비헤일리스의 주인인 내가 보호하지.”
“예.”
공작에게 하달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첸이 경계심 높은 두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첸의 시야로 하얀 의복을 입은 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공작의 의중을 빠르게 알아챈 카제하가 급히 말문을 열었다.
“이벨…. 너도 이 일이 일족의 일이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한동안 말 없던 그가 이벨리아를 달래듯 부드럽게 입을 열었으나, 정작 그 시선을 받은 이벨리아는 아이라고 생각되는 작은 인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를 불렀다. 그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카제하의 귓전을 울렸다.
“카제하.”
일족의 대표로 나섰던 카제하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의 불안한 얼굴이 잠시 가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을 부르는 이벨리아의 눈빛을 빤히 바라보던 그의 뇌리에 문뜩 어떠한 예감 하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가 마주하지 못한 여인의 눈동자에 붉은 인형이 또렷이 빛나는 것이, 어떠한 예감의 확신과도 같았다.
“이제, 일족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그가 아는 이벨리아스티아 만 비헤일리스는 물욕이 없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보다는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만족하는 편이니,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직성이었다.
그래, 그런 직성이었다. 딸이 실종된 이후로 그 성질이 약해지긴 했으나 본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는 카제하 뿐만이 아니라 일족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벨리아를 바라보는 일족의 눈빛이 불안하게 일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설마하니, 설마인가 하니….
“너….”
그래도 설마, 일족이 중히 여기는 ‘지워지지 않은 피’에 관한 인물을 가로채리라고. 그렇게 여겼던 그들의 표정이 놀람을 넘어 경악에 도달했다. 이벨리아를 보고 놀라는 카제하의 뒤로 다른 이 또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벨리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가 판단하기에, 이 자에겐 보호가 우선돼야 합니다. 심문도, 조사도 그 이후에 행해져야 할 사항입니다.”
“그, 그런!”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한 일임을 알지 않느냐, 이벨!”
“예. 알다마다요.”
자신의 단호한 반응에 카제하를 비롯한 일족이 당황한 사이, 그가 핌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적절히 읽어 낸 핌이 자신과 마주하고 있던 이벨리아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명인데.
이벨리아와 눈빛을 교환하던 핌의 얼굴이 빠르게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꾸러기처럼 미소 짓자, 빛으로 만들어진 짙은 자줏빛 창이 땅을 뚫고 나와 기사단을 둥글게 감쌌다. 모여 있던 기사단을 감싼 창이 나팔꽃처럼 안으로 말려 들어가자, 그 안에 있던 기사단이 자줏빛과 함께 사라졌다.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감싸여 사라진 기사단을 본 시민이 그 속도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상급 술사를 능가하는 점묘술사의 이동술을 오랜만에 본 것에 대한 신비함이 그 감탄에 절로 묻어 있었다.
그러나 해 지는 저녁놀 나팔꽃처럼 우수수 넘어가는 날렵한 창의 행렬에 감탄하는 시민과는 달리, 기사단과 아이가 함께 사라진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던 환족과 기록관의 분위기는 한없이 살벌했다.
“공작!”
“공작 저하!”
엄청난 원망이 담긴 외침에 기사단이 서 있던 곳에 머물러 있던 공작의 시선이 마침내 움직였다.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린 이벨리아의 시야에 흉흉한 기세의 두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를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의 열렬하다 못해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이벨리아가 다소 창백한 얼굴로 그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우선.”
챠하트의 기록관과 환족, 두 무리를 천천히 번갈아 가며 시선을 두자, 모두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자연스럽게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일은 모드나드에서 일어난 일. 따라서 비헤일리스 공작인, 나 이벨리아스티아가 총괄합니다. 자세한 것은 우리 보좌관을 통해 의견을 전달해주십시오. 이 일을 여러분의 지혜를 빌려 해결하고 싶다는 점을 부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동공마저 보라색으로 물든 일족과는 달리 혼혈인 공작의 까만 동공이 상대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공작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잠시 빠졌던 환족과 기록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소. 공작. 그리 아시오.”
“…챠하트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눈과 직접 마주하던 카제하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며 그의 뜻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부정적인 말에 혼미한 상태에서 두 번째로 빠져나온 앤디가 신속하게 판단해 기관의 상황을 대변했다.
“솔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니까요.”
두 사람이 단시간에 혼미한 상태서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공작이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일이 단순한 영역 싸움이 아닌 것을 진작 알고 있던 그는 두 사람의 반응에 함부로 반대하거나 긍정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보호하는 것에 확고히 입장을 나타냈고, 그 뜻을 번복할 의지가 없으니 이 소란을 종식 시킨 뒤에 따로 시간을 두고 논의하는 것이 백번 나았다. 애초에 이번 일은 모드나드를 직접 다스리고 있는 자신의 직할이었으니, 그들에게 자신이 책임질 일이라고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이벨리아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그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첸이 두 무리 앞으로 나섰다. 이벨리아의 말에 노여움이 서린 환족과 자신의 힘이 닿지 않아 이를 해결할 수 없음에 분노하는 기록관에게 다가간 그가 사근사근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모드나드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명색의 비헤일리스 통솔자이신 공작께서 제일 늦게 아시면 체면이 서지 않지요.”
카제하와 앤디에게 다가간 그가 거리를 서서히 좁히자, 첸의 은근한 압박이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명백히 관할 지역의 행정을 무시한 처사임을 그들에게 미리 경고한 그는 마저 말을 이었다. 노여움과 분노의 근원인 화가 그들의 얼굴에서 슬슬 빠져갔기 때문이다.
“우선 저희 측에서 먼저 알아보고 그 정보를 두 기관에 제일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귀한 인재이신 여러분께서 그런 수고를 구태여 하실 필요 없이 우리에게 맡겨주시고 기다려주신다면, 원하는 바나 궁금하신 것을 단독으로 따로 물을 수 있도록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떠신지요. 첸의 맑은 눈동자가 탐탁지 않아 하던 두 사람의 얼굴을 차례대로 훑었다. 그 시선에 화기가 빠진 두 사람이 보좌관의 꼬임에 침음했다. 자신들의 무례를 덮어주고 오히려 단독으로 아이와 만날 기회를 주겠다는 제안은 그들에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득일지 고민을 거듭하는 통에 두 사람의 시선이 첸의 옆에 있던 이벨리아에게로 향했다. 이벨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며, 그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이른바 있는 자의 여유, 정도나 될 법한 그런 즐거움이었다.
그 미소에 비해 카제하와 앤디의 눈언저리에 그늘이 졌다. 이번 일이 이벨리아의 뜻대로 이뤄질 것이란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실패와 성공이었다.
‘허어. 놀아났군그래.’
“흠….”
‘하…. 솔께 사실대로 말할까.’
“후….”
솔이 없는 상황에서 공작과 대적하는 것에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앤디와 기록관이 눈에 띄게 주춤거렸다. 그 옆에 선 환족은 뭔가를 가늠하는 듯이 자색 비단과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뵙지요.”
두 무리의 주춤하는 기색을 확신한 이벨리아가 맞은편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며 유유히 사라졌다. 기사단을 이동술로 이동시켰을 때와는 달리, 있던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사라지기 전 그와 눈빛을 주고받던 첸이 이벨리아의 뜻을 이어받아 선두에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서로 협조하여 원하는 바를 해결하는 것이 이로울 듯싶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제가 공작께 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 무리가 대치한 지 십여 분이 채 되지 않았건만, 성문 길목으로 모인 구름 관중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비헤일리스 공작 직속인 모드나드 기사단, 국가 사법기관인 챠하트의 기록관, 피안바스토 제국의 -타칭- 개국공신인 환족이 성문 광장에서 아주 대놓고 으르렁거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셋 중 누구의 처지에서 보아도 길게 끌어 좋을 리 없었다. 자칫하면 내분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공작의 태도가 상당히 단호했지만, 그래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니 조심해서 나쁜 것은 없지 않을까.
“일단은,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부러 한숨을 쉰 첸이 두 무리를 향해 눈치를 줬다. 그러자 공작의 태도에 가장 못마땅해하던 카제하가 주홍빛 시선을 따라 주위의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대로 하지.”
자신의 영향력을 알고 비헤일리스 정무에 특별히 관여하지 않았던 환족이 ‘당신의 파급력이 오래 갈 거다’란 의미가 넌지시 담긴 첸의 말에 한발 물러섰다. 그런 환족의 반응에 기록관 대표인 앤디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솔에 대한 명령만이 전부였을 뿐, 명분이 강하지 않았던 기록관은 협상의 의지가 있는 상대방에게 원하는 바를 얻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처신에 일가견 있는 앤디가 자신의 뒤에 있는 동료를 바라보자, 동료 또한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일치였다.
둥글게 만 손바닥을 엄지로 살살 긁던 보좌관이 환족과 기록관 모두 자신의 제안에 수긍하자 정중한 자세로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가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이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