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한 존재를 잡고 싶어. 흐르는 시간을 비집고 틀어서 뜯어낸 나란 괴물은, 기어이 나를 사랑해주었던 존재를 목격하고 탐욕스럽게 당신을 탐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렇게.
당신이라는 조건, 나를 사랑하던 당신의 조건. 나를 설레게 하는 이것이 내 시선은 물론이요, 존재하지 않던 내 마음마저 살게 했으니. 당신과 만날 수 있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당신이란 존재를 결단코 내 손안에서 보낼 수 없다.
언젠가 메마름과 갈증의 차이를 들은 적이 있다. 분명 당신에게서 들었을 테지. 이미 메말라버린 것은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노라고. 돌이킨 것은 그때의 푸름이 아닌 현재의 것이고 과거의 푸르름은 이미 죽어버렸노라고.
인간이 느끼는 메마름은 이것과 같아서. 한 방울 남아있지 않은 것과 같아서, 갈증도 느끼지 못하고 죽어간다고. 메말라간다면, 메말라버린다면 그 생명은 산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너의 말에 울었다. 감히 당신의 말에 반항하듯 울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나는 아직 메말라버리지 않았다고. 살아있다고.
웃었다.
당신이 웃으면서 말한다. 아니 말했었다.
갈증이 나는구나.
담담하다. -다행이다- 아니 담담했다. 나와 마주한 당신은 담담했다.
신호라고 한다. 죽지 않기 위해 물을 채워두려고 한다고. 남아 있는 물기가 메마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라고. 그러기 위해 우물을 파는 거라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물을 얻기 위해 땅을 파는 것처럼. 지하에 있는, 하다못해 고여 있는 물이라도 마시기 위해.
살고 싶으니까. 메말라버려 두 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죽음이 자신에게 들러붙지 않도록. 살고 싶으니까.
그러니 해보라고. 메마르기 전에 갈증을 계속 느낄 수 있도록, 물이 나지 않은 곳에서 나와 다른 우물을 팔 수 있도록. 나를 끊임없이 메마르게 하는, 그런 갈증을 일으키는 것을 여기와 여기에서 -
죽여.
-라고 했을 때.
나는,
…못해.
자신 없게 답하는 내가 당신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나는 너무도 어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너는 그런 나를 보며 속상하지도 않은지.
연습이 필요해.
그런 말을 했다.
갈증은 넘칠 때도 모자랄 때도 존재하지만, 무엇도 없는 곳에서 ‘갈증’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죽었으니까’라는 말을 덧붙이며, 웃는 네 얼굴이 유독 건조해 보였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겠지.
차차. 살아있는 것은 ‘갈증’을 느껴. 네가 지금 느끼는 갈증은, 마음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야.
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잠시 침묵하듯이 내 손을 잡은 손은 떨림이 없었다. 그런데도 가벼워서 나는 무심코 그 손을 힘줘 잡았다.
아아, 그건 아마… 본능이었을 거다.
그러니 종착지 없는 이 끝없는 갈증이 너를 끝내 앗아가기 전에, 널 메마르게 하려는 것을 반드시 죽여야 해.
그때 당신은 왜 내 머리와 가슴이 아닌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짚었을까. 당신이 죽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로소, 이제야, 홀로 묻는다.
네가 그것을 죽인다면, 더는 메마르지 않을 거야.
웃지 않았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다.
그때 바로 그것을 죽여 버리겠노라고 답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았으면, 또 다른 당신을 볼 수 없었으리라. 그래, 없었으리라.
그러면서도 후회가 되는 건, 당신의 –너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밀어내는 것부터 하자. 그것도 안 된다면… ….
흐려진다. 당신의 존재가 흐려진다.
감히 시간이라는 건방진 것이 내게서 당신을 빼앗으려 든다. 팔을 휘저어도 아래로 흐르는 것이 멈추진 않더라. 참으로 화가 났다. 처음이었다.
왜?
끓어오르는 가슴 속 무언가는 화였고, 차가운 바닥에 홀로 선 나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지우지 말라고 해도 지워진다. 없어지지 말라 해도 사라진다. 내 피부는, 그 감촉은, 그 바람은, 그 시간은, 이곳에 영원한데, 영원하여야 하는데. 잃었다. 잃어버렸다.
너를, 당신을 잃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아프잖아. 이렇게 아프다고 말해준 적 없잖아. 슬픈 거라며. 바람에 밀리는 공기가 나뭇잎을 때린다. 얇은 나뭇잎이 밀려나는 소리, 팔랑거리는 잎이 꿰어낸 듯한 나뭇가지 아래, 그 밑에, 네가 없다. 그림자 하나가 빈다. 그런데, 시간이 사라졌다.
잃어버렸노라 선언하는 바람이 귓가에서 재잘거린다. 잃었노라, 잃었노라. 고작 하나, 그림자 하나에 내 마음만 왜 이리 서늘해지나. 왜.
사실, 안 괜찮아. 나 사실….
풀잎이 재잘거리는 소리마저 태풍처럼 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든다. 진창에서 정신이 든 나는 벌써 숨구멍만 밖으로 내뱉은 채 입만 빠끔거리며, 그 사소한 것들을 돌이키며 죽어간다.
왜일까, 돌이키면 행복했던 모든 것이 나의 숨을 조이며 깊은 늪으로 잡아끄는 것은. 왜일까, 느꼈던 모든 것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너져.
전부 무너져라. 내 가슴을 쥐고 비트는 아픔처럼 모두 고통스러워해. 빠끔거리는 이 시간마저 함몰되어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 세상을,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미워할 테다. 전부, 내가 느낀 고통까지 비례해서, 전부, 모든 것에게 고통을 줄 거야.
이 끔찍한 것을 얹어주고 짊어주게 해 끊임없이 넘어뜨려 버릴 테다. 그러니까. 제발. 봐줘. 나 좀 봐줘. 이러면 안 된다고. 부디, 내게 와서 그렇다 해줘.
아아… 그래, 없지.
내 목소리, 들어준 넌 없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던 정도의, 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아, 어떻게 된 것인지 차분하게 생각할수록 치미는 이 감정은, 분노와 같아서 내 주위를 모조리 삼키고도 끊임없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바라?」
「바라는 것이 있지?」
인정하려 하면 할수록,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그 목소리는 나의 정신을 타고 올라가 땅 위로 흐르던 흐름을 찢고 꽃을 피웠다.
「불러줄까?」
「차차.」
「선택할래?」
「그가 보고 싶지?」
「그전에 저것을 그냥 둘 순 없을 거야.」
「그를 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감히 악마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하며 비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이 아가리는 네가 증오하던 –했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삼키고, 삼키고, 삼켜도 마침내는 허기가 멈추지 않아서, 허공에 떠다니던 소리마저 끊임없이 먹어 치웠다.
「차차.」
어떤 괴물이 잠든 너를 끝내 불러내어, 다시 너를 괴롭게 한 것은….
「이제 네가 죽일 차례야.」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저 사람.」
나 아파. 그러니까, 미워하더라도 좋으니, 어느 곳에서라도 존재해줘.
「죽여.」
이렇게 간절히 바랄게.
피…
어라? 마치 꿈을 꾼 듯싶었다. 또 다른 당신이 웃는다. 하지만 네가 아니지, 그 사실을 알아. 그 존재는 내가 원하는 것과 달랐다. 열병. 그래, 열병을 앓았다.
“원해?”
그가 웃으며 내게 말했고 나는 열병을 앓은 탓에 고개를 끄덕였다. 붉고 투명했던 그 눈동자는 붉고 선명한 눈동자로, 투박했으나 진실했던 끝말은 진실하나 안개와 같은 마침표로.
우주를 부유했던 붉은 별 하나가 내 시야를 온전히 가져가 버렸다.
“원해.”
핏빛보다 더욱 선명한 눈동자에 삼켜진 나의 온 신경이 한곳으로 향했다. 아마 그대와 같은 모습을 한 그의 눈동자에 홀려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해. 보고 싶어. 멀리서라도 좋으니, 있길 바라. 내가…, 내가….’
당신이 모르는 것 하나. 뒤늦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내 원념은 시간도 멈추게 하더라는 것을, 그런 것 따위를. 나는 그런 괴물이더라는 것을.
늦게나마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는 나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꽃」
흐르던 시간, 그 틈을 비집고 헤어 나온 나는 가늘어진 흐름 사이에 껴 있는 것들의 비명을 배경 삼아 밖으로, 너의 존재를 다시 한번 부르기 위해 밖으로.
「누굴 위해서냐고?」
괴물을 위해, 이기적인 나를 위해. 아, 이 참을 수 없는 갈증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구나.
「목말라.」
나는. 너라는 존재 이유를 위해, 무너졌었던, 무너진 세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리라. 혹한의 장미가 설원을 주고, 설원이 안식을 주어 이 괴물을 깨우는구나.
하얗게 터져 나오는 숨결 속에 눈을 뜬 백마가 비로소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