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린! 빵들고 뛰어다니지 말래도!"
릴리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빵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원을 신나게 뛰던 아벨린이 앞의 누군가와 부딪혀서 크게 나뒹굴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고
오늘은 식사때 빵이 많이 남아서
일상적이지만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완벽한 하루라는 건 없구나.
"루이스 대공님, 괜찮으십니까!"
옆의 늙은 집사가 당황하며 루이스에게 손수건을 황급히 건네었다.
앞을 보지 않고 뛰었던 내 실수긴 하지만 크게 뒹굴어 넘어진 건 자신인데 늙은집사의 눈에는 난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루이스는 손수건으로 앞섬을 털어내고는 넘어져있는 아벨린을 내려다보았다.
불쾌감이 강하게 서려있는 눈을 마주치자 아벨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아까 빵을 들고뛰지 말라는 릴리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니다 오늘 그 루이스 대공이 온다는 사실을 까먹었다는게 제일 큰 잘못이겠지
내가 살고 있는 브란티아 제국은 자원이 풍부하고 무역상 좋은 위치에 있어서 삼대 제국 중 최강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손에 꼽을만한 건 다른 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한 군사력, 그 전쟁에서 승전보를 매번 울리는 일등공신이 바로 내 앞에 서있는
루이스 대공이다.
전장에서 자비도 없는 차가운 모습이 얼음 같다며 얼음귀라고 불린다던데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둥그런 눈매의 반짝이는 용모를 가진 분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셰이앤 영애는 하녀 교육을 잘 안 시키는 거 같군"
짝-
얼음귀 소문이 맞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일순간 뺨에 알싸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아벨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는 공작가에 실수했을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맞추고 있으라고 배웠나?"
"죄송합니다."
일개 하녀 따위가 존엄하신 몸에 빵가루 조금 묻힌 게 그렇게 아니꼬웠나 보다.
욱씬거리는 뺨때문에 울컥 눈물이 올라올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나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 기분은 말 그대로 최악,
저 멀리서 발을 동동 굴리며 지켜보고 있는 릴리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움과 서러움이 더욱 커졌다.
"무슨 소란이죠? 루이스 대공"
셰이앤이 햇빛이 눈이 부신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햇빛을 받으니 안 그래도 셰이앤의 창백한 피부가 더욱더 창백해 보였다.
"셰이앤 영애, 아무 일도 아닙니다. 소란스럽게 했나 보군요."
셰이앤이 고개를 돌려 아벨린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아벨린이 급하게 뺨을 슥슥 문질렀지만, 성인 남성에게 맞은 뺨의 붓기가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리는 만무했다.
"제 하녀 뺨이 왜 부어올랐는지요?"
셰이앤의 말이 끝 마치기 무섭게 풀 죽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셰이앤의 손에 입을 맞추는 루이스의 모습을 보니
이 남자가 방금 전에 자신을 그리도 불쾌한 표정으로 무시하던 그 남자가 맞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루이스는 다정한 눈빛으로 셰이앤을 바라보고 있었다.
"셰이앤 영애 죄송합니다.
저 하녀가 실수를 하였는데 버릇이 없는듯해 보여 교육 차원에서..."
"저 하녀의 주인은 저입니다. 실수를 하여 벌한다면
그 또한 제가 할 일이죠. 그리고 여기는 로베르트 공작가, 저희 집인 건 아실 텐데요. 루이스 대공?"
싱긋 웃으며 셰이앤이 말하자 루이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셰이앤이 에둘러 좋게 말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보자면
'왜 남의 집에 와서 우리 집 애를 때려? 여기가 네 집이냐?' 라는 뜻이 물씬 풍기기에 아벨린은 통쾌함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영애, 제가 실수했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상하신 거 같으니 다음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아벨린을 지나쳐 저택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면서 루이스의 혀 차는 소리를 들은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거까지 신경 쓸 정도로 가벼운 기분이 아니었다.
셰이앤이 다가와서 아벨린의 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내 약혼자때문에 얼굴에 흉이 지겠구나."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루이스 대공님과 안좋아지신거 아닌가요? 약혼자이신데... 죄송합니다"
루이스에게 부딫힌건 솔직히 전혀 죄송하지 않지만
나로 인해서 착한 아가씨가 약혼자에게 쓴소리를 뱉게 한게 죄송했다.
어릴적부터 보아왔던 아가씨라서 그런지 셰이앤에게는 하녀와 아가씨의 주종관계 그 이상으로 친구 같기도, 혹은 가족간의 유대감 같은...설명 못할 따뜻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루이스 대공은 아마 내가 니 편을 들어 토라진거일 뿐일테지, 저래봬도 아이 같으신 성미를 가진 분이란다. 이번일은 루이스 대공의 잘못이니 미안해 하지 않아도돼. 그렇지만 다음번에도 빵을 들고 뛰어다니면 나한테 혼날줄알아 아벨린!"
뛰지말라며 당부하는 셰이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루이스 대공이 아이 같다는 이야기에 표정관리를 하기 어려웠다.
아이? 저 루이스 대공이 아이같다고?!
외적으로는 둥그런 눈매에 오목조목한 얼굴이라 얼핏 봤을땐 그렇게 보일순 있겠지만 조금 전의 눈빛과 말투는 얼음귀 그 자체였다.
얼마나 우리 아가씨에게 여우 마냥 내숭을 부려온건지 소름이 돋았다.
한바탕 난리 뒤에 방 안으로 들어가니 릴리가 조심스레 약통을 들고 다가왔다.
아까 루이스에게 뺨 맞을 때 못 도와준 게 내심 미안했는지
앞에서 우물쭈물 대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시큰해졌다.
같은 하녀 신분에 공작, 그것도 얼음귀로 유명한 루이스 공작에게 친구가 맞은 걸 어찌 끼어들어 화낼 수 있을까
전혀 릴리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닐 텐데도 릴리의 속이 많이 상해 보였다.
"아벨린 뺨 괜찮아? 미안해 말려주지 못해서"
"아냐 릴리, 내가 말 안 듣고 뛰어다닌 잘못이야"
아벨린의 부어오른 뺨에 약을 다 바른 릴리가 침대에 몸을 바르게 뉘었다.
창밖을 보니 낮의 좋았던 날씨가 거짓말이었던 거 마냥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일 자고 일어나서도 약 꼭 발라야 해"
릴리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신신당부 했다.
"알겠어 난 책 조금 보다가 잘게 먼저자"
"무슨 책?"
"응 그냥 소설책이야"
"하녀가 책읽는걸 좋아한다니...
하녀중에서도 글 읽을줄 아는 애는 아벨린 너밖에 없을거야."
오물대며 말하던 릴리는 이내 고르게 숨소리를 내며 단잠이 들었다.
릴리가 잠에 든걸 확인 한뒤 머리 위 작은 등불을 키고 침대 밑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었다.
[공작 영애의 구원자]
예전에 무슨 책을 보냐고 묻는 릴리에게 부끄러워서 얼버무렸지만
사실 아벨린은 로맨스 소설 책을 읽는게 취미였다.
처음엔 상점가에 심부름을 갔다가 그곳에서 사랑을 연기하는 남여 둘의 연극을 본게 계기였다.
그 연극이 본래 소설속 이야기를 연기한거 라는걸 듣고 그 뒤로 글을 배워 로맨스 소설들을 모조리 섭렵하는중이다.
마법책도 철학책도 아닌 로맨스 소설을 읽을려고 글을 배웠다니...
부끄러워서 어디 말할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붉은 바탕의 두꺼운 책을 넘기니 빼곡하게 쓰여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소설은 공작 영애인 병약한 여주인공 시점에서 전개되는
매우 평범한 이야기였다.
출생부터 병약한 아가씨로 태어나서 평범하게 공작가 영애의 생활을 하며 착하게 자란 여주인공에게 남자주인공이 첫눈에 반한이야기, 그들의 약혼,
그런 뻔하고 평범한 내용이 지금까지 로맨스 소설만 주구장창 읽어왔던 아벨린에게 재미 있을리가 없었다.
'역시 자주 가던 책방에서 책을 삿어야 됐는데...'
엊그제 낡은 옷을 입은 행상의 권유에 마지 못해서 산 책이니 기대감도 크게 없었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소설책들 중에서 제일 평범하고 자극없는 이야기에 하품이 나왔다.
이복형제 끼리 한 영애를 두고 싸우는 이야기도 있고 눈 떠보니 다른 세계라는 그런 자극적인 소재의 책들도 넘쳐나는 데 일상적인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은 이책이 재밋을리가 있나
흔한 삼류소설 같은 지루함에 책을 접으려던 찰나,
뭔가 이상한점이 느껴졌다.
방금 슬쩍 읽은 책의 내용이 오늘 있었던 일과 거의 일치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여주인공의 성격과 책속 이야기의 내용들이
마치 셰이앤 아가씨 이야기인것 같았다.
남자주인공의 이름은 안나오고 '그'로만 나왔지만
이야기상 책에서 말하는 '그'는 약혼자인 루이스겠지
우연인가? 우연이라 치기에 뭔가 찝찝했다.
"이게 뭐야?"
책을 쥐어잡고 급히 넘겨도 오늘 있었던 일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 뒤로는 온통 백지 뿐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이 책이 여기서 끊긴다고?'
불과 몇분전까지 이 책에 지루함을 느낀 자신이 신기했다.
백지인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다보니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고
이전의 백지인 페이지가 무색하게 마지막장은 빼곡하게 긴글들이 쓰여있었다
기대감반, 호기심반으로 책의 마지막장을 읽은 아벨린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공작 영애는 약혼자에게 독살을 당한다.
죽어가면서 얼마나 분에 찻는지 그녀의 주먹 쥔 손에는 손톱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고 눈동자에 실핏줄이 얇게 서있었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그녀의 시체는 절벽에 떠밀려 버려졌고 그날 내린 매서운 폭우로 시체의 행방은 알수없게 돼었다.
소중한 영애를 잃은 공작 부부는 슬픔으로 실성해버려 미치광이가 되버린다.
부부는 침을 흘리며 길거리를 배회하다 어느밤에 술에 취한 무리에게 돌팔매질을 맞아 죽어버리지만 노숙자 미치광이가 죽은걸 신경쓰는 사람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공작가의 시종들은 여러곳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나
몇년뒤 왕가의 명령으로 모조리 잡혀오게된다
마녀의 부하들이라는 죄목으로 공작가의 시종들은 모두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하게 된다.
마녀나 마녀부하의 머리카락을 가지고있으면 오래살수있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돈건지 광장의 수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잘린 머리의 머리카락을 가위나 손으로 뜯어갔다.
해가 저문뒤 얼굴이 밟히고 찢겨 누군지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상한 머리들만 휑한 광장 바닥을 뒹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