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소래담이 제 몫의 유리병을 책가방에 넣었다. 단단히 긴장했던 흑도종 이해 시간을 지나고 몇 시간이 흘러 점심밥까지 먹고 나자 한소래담은 ‘매일 병을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귀찮은 일을 대신 맡아주며 시아랑에게 미안한 마음도 덜었으니 일석이조였다.
“오늘 마청학개론 휴강이래!”
“와아아!”
“아싸!”
뜻밖의 소식까지 겹치니 한소래담도 신이 났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주먹으로 책상을 가볍게 통통통 두드렸다. 탈주고 뭐고 학생에게 휴강이란 참으로 단비 같은 소식이다. 오늘 마지막 수업이었던 마청학개론이 휴강이라면 이번 5교시가 마지막 수업이었다.
“공격실습 수업! 떠나자! 세차장으로!”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책상을 뛰어다니는 채소한을 피해 한소래담이 유니폼을 꺼냈다. 조용한 화장실로 들어가니 이제야 조금 차분해진다.
“하아...”
한소래담은 한숨을 쉬면서도 바쁘게 손을 놀렸다. 흰색 반팔 위에 꽃무늬 저고리와 속치마를 입고 남색 허리치마까지 메자 영락없는 여자가 되었다. 한소래담은 화장실에서 나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짧은 머리를 매만졌다. 기껏 해야 목덜미까지밖에 오지 않는 머리는 아직도 어색하기만 했다.
“...이러다 늦겠다.”
한소래담이 얼른 바깥으로 나갔다.
“먼저 간다!”
몸에 쫙 달라붙는 누드톤 쉬폰 드레스를 입은 채소한이 그녀의 눈앞을 가로질렀다. 한소래담은 그가 발가벗고 있는 줄 알고 기절할 뻔했다.
‘오늘도 엄청난 패션이구나.’
다들 비슷한 심정인지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입을 떡 벌리고 채소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한솔이 너도 빨리 와, 체육관이래.”
채소한의 뒤를 쫓아가다 말고 혜달이 친절하게 말했다. 혜달도 노란색 세일러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한소래담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달이 대답하듯 싱긋 웃고 다시 채소한의 뒤를 쫓아 달렸다. 병이 깨지면 어쩌냐는 잔소리를 퍼부으면서.
살색과 노란색이 초록색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채소한은 이 변태 같은 술래잡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 뭐. 한 명이라도 재미있다면 좋은 거 아닐까. 차라리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나을 지도...’
한소래담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콕 찔렀다.
“힉.”
“무슨 생각해?”
이우비였다. 오늘 그의 복장은 금색 가발에 검은색 메이드복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핏도 잘 맞고 잘 어울린다.
‘어떻게 잘 어울릴 수가 있지?’
갸우뚱하는 한소래담의 옆을 시아랑이 스쳐지나갔다. 한소래담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러자 이우비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한소래담과 시아랑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시아랑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
“...이러다 늦겠다.”
“뭔데? 응?”
이우비가 한소래담의 옆에 착 달라붙어 끈덕지게 물었다. 한소래담은 아무 대답 하지 않고 냉랭한 얼굴로 앞만 보고 걸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채소한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쭉 뻗었다.
“나 꿈에서 저 모습 본 적 있어! 예지몽인가!”
“그럴 리가.”
백치미 넘치는 말에 냉정히 대꾸한 시아랑이 가만히 한소래담을 바라보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우비가 따라오는 것도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걸음이 느렸다.
‘저렇게 걸음이 느린데 지난번엔 나를 어떻게 따라잡았지? 주문을 배우기도 전이었는데.’
시아랑이 한소래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그새 기본주문을 까먹은 건 아니겠지? 오늘은 그걸 이용해 피구경기를 할 거야. 일단 복습.”
실습은 대체적으로 현직 마법소녀인 담임선생님이 맡고 있었다. 선생님은 지난 번 쪽지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던 시아랑을 앞으로 불렀다. 손 씨름을 하는 자세로 그의 팔을 잡고 무게 중심을 낮춘다.
“먼저 중심을 잃으면 지는 거야. 어떻게 할 거지? 날 이기려고 해 봐.”
“......”
시아랑은 조금 귀찮다는 듯 느리게 입을 열었다.
“흩날리는 바람꽃.”
주문을 마친 시아랑이 짧게 잡은 손을 꺾었다. 그 힘에 휙 밀려버리는 듯 하던 선생님이 시아랑의 미는 힘을 타고 서커스 단원처럼 제자리에서 덤블링을 했다. 그리고 빠르게 제 다리를 쓸며 중얼거린다.
“매얼음. 바람꽃.”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착지하자 선생님의 두 다리가 땅을 몇 센치 파고들었다.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내뱉었다.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단어만으로도 주문을 완성하고 심지어 두 개의 주문을 중첩해서 쓰다니, 현직 마법소녀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소래담은 다른 이유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 역시 주문 축약과 중첩은 가능했지만 ‘매얼음’을 저렇게 쓰는 것은 처음 보았다.
‘느리게 하는 주문을 ‘무게’로 이용 했어. 저런 방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이게 경험의 차이라는 건가?’
하지만 선생님은 시아랑에게 놀라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시아랑의 실력이 자신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막 마법을 배운 녀석이 저렇게 짧은 문장으로 주문을 완성시키다니.’
선생님은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잘 했...”
“가느다란 여우볕.”
시아랑의 목소리가 낮게 끝났다. 시아랑의 긴 머리카락(가발)이 흩날리며 빨간 치마 사이로 다리가 드러났다. 도발적인 노출 장면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시아랑이 몸을 숙이고 빠르게 다리를 거는 통에 선생님은 채신머리없이 놀라 훌쩍 제자리 뛰기를 해버렸다.
“...이제 됐다.”
“네.”
시아랑이 아무 일 없던 척 자세를 바로 했지만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시아랑이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선생님이 혀를 쯧 찼다.
‘어지간히 승부욕이 센 녀석이군.’
선생님은 다시 학생들을 향해 서서 간단히 정리해주었다.
“다 봤겠지? 공격할 때에는 힘을 증가시키는 주문인 ‘바람꽃’ 주문, 피할 때에는 민첩성을 증가시키는 주문인 ‘여우볕’ 주문을 쓰는 걸 중심으로 하면 돼.”
학생들이 기대감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때가 온 것이다. 실습에 나가게 되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도 있었고, 마법소녀나 마법소년 출신의 스타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학생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한소래담만 빼고.
‘어떻게 하면 조에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실력을 잘 숨길 수 있을까. 일단 마법은 최대한 쓰지 말고 아무 말이나 막 만들고 주문을 최대한 길게 읊어서... 으, 이 학교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게 많은 거야!’
한소래담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선생님의 설명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피구는 조별로 대결하고, 다섯 명이 모두 탈락하면 지는 거야. 얼굴에 맞는 건 무효로 할 테니 알아서 조심해.”
“네에!”
해맑게 대답한 채소한과 달리 한소래담의 간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한소래담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못 이겨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제일 먼저 할 조?”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이 조건을 붙였다.
“먼저 한 순서대로 기숙사로 보내주지.”
“저요!”
“저희요!”
“나! 나요! 나! 나!”
저마다 열성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건 채소한이었다. 애써 시선을 그쪽으로 주지 않아도 일단 채소한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
채소한이 벌떡 일어나자 선생님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저게 알몸이 아니라 살색 옷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래. 너희 조.”
“좋았어! 일어나, 일어나.”
채소한이 자신만만하게 한소래담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한소래담이 마음의 준비 같은 걸 할 시간은 전혀 없었다. 왠지 앞으로도 쭉 이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또 다른 조는?”
“.......”
이번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우비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선생님과 시아랑의 시범을 봤다면 그들 조의 상대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너희 조. 아까 손들었지? 나와.”
선생님이 누군가를 콕 찝었다. 그 근방에 앉아있던 애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궁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녀석은...’
혜달은 그 중 한명이 낯이 익다는 사실을 쉽사리 눈치 챘다. 지난번에 한소래담을 퇴출시키라고 말했던 학생이었다.
그들이 공을 들고 저들끼리 뭔가를 쑥덕거렸다. 혜달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거친 바람에 살랑거리며 꽃이 내려옵니다.”
상대가 먼저 공을 던졌다.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읊는 시간은 길었지만 일단 주문이 걸리고 나자 공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바로 앞에 있던 채소한을 넘어 한소래담에게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소래담은 고민했다. 주문이 길고 단어들이 제대로 유기되지 않아 주문의 위력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왕 맞을 거면 저렇게 안 아픈 거에 맞는 게 낫지 않을까?’
한소래담은 그대로 그 공을 맞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혜달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겨 한소래담은 혜달의 품안에 폭 쓰러졌다. 혜달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공을 던진 사람을 노려보았다.
‘내가 잡아당기지 않았더라면 한솔이 얼굴에 맞았을 거야.’
“뭐하는 거야?”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같은 조는 위험할 거라니까.”
혜달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해 줬던 남학생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닥을 구르는 공을 채소한이 주워들었다. 눈빛이 가라앉아 있는 모양이 심상찮았다. 공을 던졌던 남학생이 긴장한 듯 몸을 굳히며 두어 발 물러났다. 채소한이 뭐라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갑자기 이우비가 끼어들었다.
“내가 던져보고 싶은데. 괜찮아?”
“...응? 그래.”
채소한이 가볍게 공을 넘겼다. 이우비가 진지하게 눈을 내리깔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소녀가 변신하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팔과 다리를 슥 쓸어내린다.
“바람이 불어오는 창틀에 걸터앉아 꽃이 떨어지는 순간을 목도한 자는 그 아름다움에 취한다.”
“.......”
순간 체육관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한소래담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저건 일부러 저렇게 한 거다. 멋있어 보이려고. 그 와중에 ‘바람꽃’을 중심으로 모든 문장이 상성이 맞았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한소래담은 감탄했지만 다른 학생들은 아니었다. 시아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주문은 뭐지?”
“멋있지 않아?”
이우비가 상큼하게 웃었다. 채소한이 한 수 배웠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 사이에 이우비가 공을 던졌다. 겉멋만 들은 것 같은 주문임에도 불구하고 공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공은 여자 교복을 입은 학생의 팔을 맞고 바로 떨어졌다.
“아웃!”
선생님이 외쳤다. 혜달이 한소래담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내 등에 잘 붙어 있어.”
혜달이 한소래담을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에 양 갈래머리 모양 가발이 팔락거렸다.
‘세일러복만 아니었어도 참 멋있었을 텐데.’
한소래담이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