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누구도 남자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창현과 동식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강민호는 최용현과 통화 중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자신들끼리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남자는 빠른 속도로 오른편의 빌라촌 골목의 초입부를 향해 다다르고 있었다.
동식과 그림자의 앞으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던 창현의 눈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현은 곧장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갑자기 뛰어나간 창현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동식의 눈에도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기 저 남자! 잡아요!”
대원들은 동식의 외침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동식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 대원들은 동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현과 남자는 이미 골목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동식은 덜컥 겁이 났다. 꿈에서 분명 창현이 칼에 찔려 죽어가던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식이 서 있던 곳부터 남자와 창현이 사라져버린 모퉁이까지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수백 킬로는 떨어진 곳에 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마음은 강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파수꾼이 부상을 당해서는 안 됐다. 더구나 창현의 보고대로라면 부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파수꾼은 나라의 중요한 자산이자 웬만한 군대 한 개 대대 정도는 파수꾼 하나와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쩌면 한 개의 대대보다도 더 강할지도 몰랐다.
창현은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남자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이 뜸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마치 창현을 유혹이라도 하는 듯했다. 창현은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됐는지 다시한번 생각했다. 꿈에서 고급 빌라들이 모여 있는 곳 어딘가 주차장에서 칼에 찔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창현은 황급히 주변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지금 남자는 꿈에서 보았던 곳과는 많이 다른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일반적인 원룸이 모여 있는 어딘가 쯤 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상관없었다. 창현이 꿨던 꿈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걷는 이 길은 창현의 다른 선택지에 따른 현재일 뿐이니까.
드디어 남자가 어느 원룸 앞에 멈춰 섰다. 좌우로 주차공간이 있었고, 그 중앙에 현관이 있었다. 현관은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해 번쩍이는 금칠을 해 두었는데 그 중앙에 도어락이 달려있었다.
남자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창현은 지금이 아니면 남자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남자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창현은 곧장 어깨로 남자를 들이받았다. ‘억’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남자는 옆으로 넘어져 버렸다. 창현은 곧장 남자의 팔을 꺾어 등을 찍어 눌러 압박했다. 남자의 입에서는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강민호가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고 뒤이어 동식과 타격대가 도착했다. 동식은 창현을 보자마자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형!”
강민호는 제압당해있는 남자보다 창현의 안위를 먼저 살폈다. 창현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긴 한숨과 함께 제압당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거칠게 욕설을 퍼부어대며 버둥거렸지만, 뒤이어 나타난 NSR 차량에 태워져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강민호는 창현에게 말했다.
“왜 제 명령을 따르지 않으신 겁니까.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창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동식 먼저 끼어들었다.
“우리도 웬만한 훈련은 다 받았거든요? 우리 형이 저런 사람 하나 제압 못 할 줄 아세요? 지금 사람을 뭐로 보고.”
아마도 아까의 복수를 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창현은 이번에도 동식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라도 쫓지 않았으면 놓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최대한 조심한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창현의 태도에 강민호는 잠시 화를 삭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남자는 곧 그림자와의 관계를 밝혀낼 겁니다.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대표님이 연락주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요란하게 강민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휴대폰 액정에는 ‘대표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화를 받은 강민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이내 황급히 전화를 끊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상치 않은 강민호의 표정에 창현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림자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놈들 손에 놀아난 듯싶습니다.”
“예? 그게 무슨..”
“지금 수원 공단 쪽에서 화재가 일어났답니다. 그런데 그게 그림자의 소행이라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동식의 외침에 강민호는 말했다.
“CCTV에는 그림자 일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찍혔다고 합니다.”
창현과 동식, 강민호가 이야기하고 있는 앞으로 검은색 SUV가 다가와 멈췄다. 강민호는 조수석에 오르며 말했다.
“두 분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시라는 대표님의 명령입니다.”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파수꾼이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쪽은 그쪽 담당이 있습니다. 두 분은 담당 구역을 지키셔야지요. 어서 돌아가십시오.”
말을 끝으로 강민호가 탄 SUV 운전석에는 붉은색 조명과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멀어졌다. 창현은 멀어지는 SUV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 동식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가자 형. 여기 있어 봐야 우리가 할 게 없잖아.”
*****
창현과 동식은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창현의 마음은 너무나도 착잡했다. 그에 반해 동식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저 자신의 구역에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집에 도착하여 동식은 창현에게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졸랐으나 창현은 거절하고 방에 틀어박혀 생각에 빠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검은 옷의 남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림자가 매수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의 일원이라는 말인가. 파수꾼이란 꿈으로 미래를 보는 능력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저들에게는 어떤 다른 능력이 있기에 이리도 쉽게 같은 파수꾼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걸까. 알려지지 않은 혹은 NSR에서 알려주지 않은 다른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계속 이런 식이라면 과연 파수꾼이 쓸모가 있을까. NSR은 과연 저들의 만행을 막을 수는 있는 것일까.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러던 창현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혼자서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신호음이 들렸고 잠시 뒤 수화기 너머에서 걱정스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씨 무사해서 다행이요. 창현씨가 보고한 것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그림자의 그림자도 못 봤으니까요.”
창현의 의기소침한 대답에 조윤선 박사 역시 조금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지금 수원 공단에 화재 때문에 이쪽은 난리에요. 거의 4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났다던데 더 이상 피해가 늘지 않기를 바라야겠죠.”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