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첫 번째 소식입니다. 지난 달 아침 9시 경에 음주 운전을 하던 트럭 운전사 한모씨가 부녀가 탄 차를 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트럭운전사 한모씨는 그 자리에서 사망, 그리고 안타깝게도 승용차에 타고 있던 안모양도 어린나이에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버지 안모씨는 가까스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만 상당히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어제 밤,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식입니다. 그는 현재 서울의 한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으며 조만간 퇴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당시 사고 현장이 매우 처참해서 음주 운전의 처벌을 강화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케이크를 먹고 있던 아영과 설거지를 하고 있던 현수가 거의 동시에 하던 일을 멈추고 TV속 뉴스 보도에 귀를 기울였다. 거의 죽어가던 안석연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는 이야기. 분명 어젯밤 그들이 행한 일이다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에 타고 있던 부녀, 그리고 딸은 현장에서 즉사. 하지만 현수와 아영은 분명 안석연의 딸을 보았다. 병원에서 엎드린 채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그의 곁에 머무르던 ‘하나 밖에’없을 터인 그의 딸을 말이다.
“아영아, 저 사람 딸이 두 명이었었나?”
“아뇨, 제가 알기로는 안석연 씨 가족관계는 딸 하나 뿐 이에요. 현수 씨도 병원에서 차트 기록 보셨을 텐데요.”
아영의 말대로 진료 기록을 열람했을 때, 비록 그는 자세히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족관계에서 딸 하나만 기록 되어있는 건 똑똑히 보았었다.
“그럼 그 애는 누구였지? 지인 딸이었나? 하긴 친딸이라기에는 너무 안 닮았었지 참.”
──────────“왜 제가 아빠 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스스로 납득하며 하던 일을 하려던 찰나 그의 귀에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꽂혔다. 살짝 높은 톤의 낭랑한 목소리. 아영이 낸 목소리라기에는 너무나 앳된 목소리였다.
“아영아, 방금 네가 말한 거야?”
“아뇨? 현수 씨가 낸 거 아니었어요?”
“아니 나한테 성대모사 같은 재주는 없거든?”
“그럼 대체 누가…”
TV를 보던 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현수도 하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주위를 살폈다. 그 때, 현관 쪽에 있는 LED등의 불이 갑자기 켜졌다. 그리고 현수와 아영은 주황색의 희미한 빛 아래에 서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윤기가 흐를 정도의 금빛을 머금고 있는 컬이 들어간 풍성한 머릿결. 거기에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이 맑고 깊은 벽안을 가진 소녀.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아직 어린 나이라 그런지 잡티하나 없이 깨끗하다. 거기에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은 그 소녀의 귀여움을 몇 배로 증폭시켜 주었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탓에 유난히 빛나 보인다.
분명 어딜 가도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법한 귀여운 아이. 그런 여자아이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 현수의 현관에서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뾰로통한 표정으로 서 있다. 소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둘은 잠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현수가 그 적막을 깨고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넌 분명… 아, 아니 그것보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문은 잠겨 있었을 텐데?”
“그전에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드려야겠죠? 언니랑 오빠, 제 아빠를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이름은 릴리·글로리아, 전생에는 아빠의 딸이었고 지금은 ‘신의 전달자’. 흔히 천사라고 부르는 존재죠.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천사… 라고?”
“네!”
소녀, 아니 리아가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현수는 믿을 수 없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앞에 있는 현상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깨우쳐주고 있다. 애초에 신의 대리자가 있는 마당에 이제 와서 저런 존재가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진 않았던 것이다.
“부탁이 있어요! 이건 언니랑 오빠의 역할이기도 해요. 저랑 아빠가 겪은 사고는 단순한 음주 운전 사고가 아니에요! 인과율에 어긋날 정도로 누군가가 고의로 일으킨 사건. 그래서 저희 아빠를 되살린 거죠? 안 그래요? 대리자 언니.”
“…맞아요. 리아의 말 대로에요. 누군가 고의로 일으킨 사고. 그랬기에 전 안석연 씨를 살린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이 아마 제가 여기에서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겠지요.”
“아영이 넌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아뇨? 전혀 몰랐는데요? 이 애가 나왔을 때는 진심으로 놀랐다니까요. 그냥 뭐랄까~ 감이죠 감. 하하”
“감으로 여기 머물 생각이었냐… 후~ 아무튼 리아라고 했지? 일단 들어와. 안에서 자세히 이야기 하자.”
현수의 말에 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집으로 들어왔다. 하얀 원피스에 맨발인 채로 들어온 소녀. 날개만 안 보이지 영락없는 천사의 모습이다. 현수는 그리 생각하며 리아를 거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현수는 부엌에서 빠르게 설거지를 차와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거실로 향했다.
“자, 간식 좀 먹으면서 얘기 하자.”
그러자 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저 같은 전달자나 아영 언니 같은 대리자는 딱히 잠을 자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요.”
“으응? 아영이는 잠도 잘 자고 먹기도 엄청 먹던데? 아까는 배고프다고 쓰러지기 까지 했고.”
“그래요? 언니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건가요? 언니는… 으웁?!”
“그래도 뭘 먹어야 힘이 나죠! 안 그래요? 리아도 좀 먹어봐! 얼마나 맛있는데!”
아영이 접시 위의 과자를 손으로 한 움큼 쥐어 리아의 입에 쑤셔 넣고는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현수는 지금까지 그런 아영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흘겨봤지만 이내 다시 본제로 되돌아와 리아에게 물었다.
“근데 신의 전달자라는 게 무슨 말이야? 넌 또 어떻게 그렇게 된 거고… 죽은 게 아니었던 거야?”
그러자 간신히 입속의 과자를 다 삼킨 리아가 옆에 있던 녹차를 꼴깍꼴깍 들이키고는 그의 질문에 답했다.
“신이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 하나 밖에 없어요. 하지만 혼자서 세상을 다스리기에는 너무 버거웠죠. 그래서 신은 자신의 임무를 분담해 줄 인재를 고용했어요. 인과율을 조정해주는 대리자, 그런 대리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전달자, 그리고 인과율에 따라 심판을 내리는 심판자 같이 말이에요. 저는 그 때 죽을 운명이 아니었대요. 비록 입양되었지만 안수아라는 이름으로 아빠와 계속 살 운명이었죠. 하지만 저는 죽어버렸고, 이를 불쌍히 여긴 신이 저를 전달자로서 환생시켜 준 거에요. 다행히 목숨이 붙어있던 아빠는 대리자를 통해서 치료한 거고요. 그래도 다행이죠. 보통 죽을 운명이 아닌데 죽으면 귀신이란 존재가 되어 떠돌아 다녀야 하거든요.”
“정리하자면 넌 원래 안수아였고, 너도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었는데 누군가의 고의로 인해 죽었다는 거구나. 그리고 너는 우리가 그 인과율을 무너트리려는 범죄자를 막아 달라고 하는 거고. 그게 아영이의 역할이라는 거지?”
“맞아요. 저희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절 구원해 주셨으니까요…”
“근데 전달자가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전달자는 정말 불행하게 살다 간 아이에게 아주 낮은 확률로 부여되는 직책. 그렇다면 당신은…….”
잠자코 듣고 있었던 아영이 과자를 한 입에 쏙 넣으며 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리아는 잠시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건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 해 드릴게요. 아직은 좀…….”
“…좋아요. 신도 생각이 있어서 당신을 전달자로 뽑은 거겠죠.”
이에 아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눈길을 피했다. 이윽고 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았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 돼서 실체화를 하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거든요.”
말을 끝내자마자 리아의 모습이 흐릿해 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현수는 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리아의 모습을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별로 안 놀라시네요?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미 졸도했을 걸요?”
“졸도 할 것까지야… 그리고 신이랑 그 대리자도 존재하는데 오히려 천사가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그나저나 진짜 아무 것도 몰랐던 모양이네, 너 사실 대리자 아니지?”
“아! 아니거든요! 저, 전 신이 아니라 그저 대리자일 뿐이라니까요! 흥.”
아영이 마지막 남은 과자를 입에 쏙 넣으며 한쪽 볼을 다람쥐처럼 부풀렸다.
“타살이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
─────아침, 서울 사랑 병원.
아침부터 중환자 실 미닫이문이 덜컥 하고 열리며 선글라스를 낀 강경현이 호쾌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아마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욕을 한바가지 먹을 정도로 큰 소리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어 개인 실처럼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그리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안 팀장님~! 잘 지냈셨습니까아! 하하하하! 어... 어라? 안 팀장님??”
“어어. 강경현이. 아침부터 신났구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하하, 저야 뭐 항상 이렇죠. 근데 지금 왜 사복을 입고 있으신지...?”
검은 긴 바지에 린넨 재질의 베이지색 셔츠. 아직 수염을 깎지 않아 몰골은 좀 지저분해 보이지만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서는 이제 병자의 모습이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아니아니! 그제만 해도 다 죽어가던 양반이 무슨 벌써 복귀를 하려고 하는 겁니까? 당장 일주일은 더 쉬어도 모자를 판에!”
“더 쉬기는 무슨! 병원에서 이제 완치되었다는데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그리고 나 아직 엄청 젊어. 이렇게 골골 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아, 여기 단추 좀 잠가 주겠나?”
석연의 부탁에 경현은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그의 셔츠 단추를 잠가주며 아까 와는 달리 패기가 빠진 목소리로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피로도 누적되어있고, 왼팔도…….”
“왼팔은 어차피 가망이 없어. 이렇게 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보다 잘 들어 강 경위. 내가 겪은 교통사고, 그건 그냥 사고가 아니었어. 그 자식이 마음먹고 내 딸을 죽인 거라고.”
“네에?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넥타이 까지 묶어준 경현이 뒤로 물러나 그의 병실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말 그대로다. 이건 고의로 낸 사고야. 누군가 나를 죽이려 했다고. 결론 적으로는 우리 수아만… 후우~ 가버렸지만.”
석연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무겁게 말했다. 이에 반박하듯 경현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며 그에게 물었다.
“하, 하지만! 뉴스에서도 당시 운전자의 혈중 알코올 측정농도도 0.2%로 만취상태였고, 모든 정황이 음주 운전 사고라고 했는걸요?”
“신기하게도 몸이 회복 되니 당시 상황도 또렷이 떠오르더군. 내 기억 상으로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트럭 운전자…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어. 내가 경찰 생활 하면서 많이 봐 왔는데 그건 술에 취한 사람의 눈이 아니었어. 살인자 혹은 약에 절은 사람의 눈이었지. 분명 캐보면 뭔가 더 있을 거다. 어쩌면 내가 조사하고 있는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지.”
“그 사건이라면… 팀장님이 사고 전 날까지 끌고 가시던…?”
“뭐, 나한테 원한을 가질 법한 범죄자야 많겠지만 정황상 느낌이 좀 쎄~ 하다는 거지. 아무튼 그런 거니까. 아직은 따로 말하고 다니진 말고. 당장 출근하도록 하지. 좀 태워주지 않겠나? 강 경위도 출근해야지?”
“엑, 저 오늘 월차 냈…….”
“출근. 할 거지?”
“넵, 팀장님…….”
석연이 그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듯 웃는 얼굴로 저음의 목소리로 그를 압박했다. 결국 멋쩍게 웃으며 석연의 말에 동의 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