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
오랜만에 전기를 먹어서 그럴까. 아니면 예민해진 오감 때문일까. 부팅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철수는 어금니가 내려앉을 정도로 이를 꽉 악물고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문득 어제 본 여자가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죽었다. 그걸 볼 때는 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그저 신기했다. 그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바로 그 당사자, 바코더가 되었다.
돼 보니, 그녀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잘 차려입었던 그녀는, 나름대로 우아하고 비참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꿋꿋하게 끝을 맞이하려 애 쓴 흔적은,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한순간에 바스러져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서 치료 받아야 하지?”
바코드 현상이 처음 세상에 나타났을 때 세상은 난리가 났다. 그리고 정부기관부터 민간단체까지 ‘치료소’, ‘진료소’,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기관을 세워 문제 해결에 뛰어들었다. 철수는 그걸 떠올렸다.
“분명 그동안 연구한 자료가 있을 거야. 어쩌면 치료제가 이미 나왔는지 모르지.”
처음에는 하도 기이한 현상이라 관심도 가고 신경도 쓰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귀찮아지다 보니, 최근정보가 아예 없다. 마지막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한 정보는 몇 년 전이고, 바코더 사망률이 100%라는 것이었다.
철수는 급히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바코드’, ‘바코더’라는 검색어만 입력해도 연관검색어가 줄줄이 나온다. 검색 결과는 뉴스부터 연구 자료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연구기관이나 정부가 손 놓고 있지 않았을 거야. 세월이 갈수록 기술은 발전하잖아? 지금도 100% 다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돼지. 암.”
철수가 기대하는 건, 몇 년 전의 100%였던 사망률이 ‘지금’에는 100% 미만이라는 거다. 과학의 발전은 눈부시고 인류는 질병을 상대로 언제나 승리해 왔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부우우웅. 부우우웅’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폰이 울렸다.
난장판이 된 방바닥에서 깨진 접시를 치우니 폰이 나왔다. 초부장이다. TV위에 있는 시계는 어느새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가 끊기기 직전, 철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여보세요 라고 할 새도 없이.
“야!!”
귀 떨어질 듯한 고성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제야 철수의 머리 한 구석에서 찾아가야 할 물건과 평소 출근 시간이 떠올랐다.
평소 8시까지 출근한다. 본디 9시 출근이지만 대부분의 직원이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20분 전에 출근하는데다, 특히 자신은 과장으로 승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더 빨리 출근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지각이라기보다 평소 출근시간이 있는데, 그것보다 늦어서 전화를 한 것이다.
더구나 초부장은 출근시간과 상관없이 자기보다 늦게 나오면 안 된다는 꼰대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초부장은 ‘지 쪼대로’ 성질을 내고 있는 거다.
철수의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들었던 것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왜!!”
그리고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5초 정도 지났을까.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거기… 김과장 아닌가요? 김철수 과장이요.”
“맞는데?”
다시 5초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 새끼가 돌았나?”
“뭐라고? 이 새끼? 돌았냐? 넌 미쳤냐?”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전화를 건 초부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말을 이었다.
“야. 나 초부장이다. 애가 왜이래? 너 낮술 먹었냐?”
“또라인가. 낮술은 무슨 낮술? 아침부터 내가 무슨 술을 먹어?”
초부장은 또 말이 끊겼고, 이번에는 철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좀 전에 뭐라고 했냐? 돌았냐고?”
“여, 여보세요. 거기 김철수 과장 아닙니까.”
“맞는데? 나 김과장이야. 그리고 넌 초부장이고. 벌써 치매 들어왔냐? 왜 오락가락해? 솔직히 말해라. 낮술은 네가 먹은 거지? 새끼. 회사에서 술을 처 먹냐? 다 됐네. 이거.”
“………”
“여보세요?”
“너 회사 그만두고 싶냐? 새끼가 부장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철수의 미소가 짙어졌다. 풀리지 않았던 가슴속 응어리가 반은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내가 회사를 왜 그만둬? 네가 나 짜를 수 있냐? 짤려도 부당해고로 신고해서 다시 들어갈 거야.”
“이… 씨팔 새끼가…”
“뭐이. 개시팔 놈아. 네가 욕하니까 나도 욕하는 거야. 회사 가서 똑같이 해줄게. 덤비려면 덤벼. 쫄리면 회사 나가든가.”
“하… 이 새끼. 진짜 어처구니가…”
“뭐!! 이 시발새끼야!! 어디서 말끝마다 새끼야. 내가 네 새끼냐? 새끼라는 소리는 네 딸내미 앞에 가서 해!”
“야! 너 갑자기 왜 이러냐?!”
초부장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철수의 생각지도 못한 반응 때문이다.
“뭐? 갑자기? 같잖은 새끼가 부장 직함 하나 달았다고 애들한테 지랄을 하니, 나도 열 받는 거 아니야! 네가 회사에서 한발자국 벗어나면 뭐 되냐? 사장한테는 빌빌 기는 주제에.”
“뭐? 내가 언제 지랄을 했는데? 엉? 그리고 내가 언제 사장님한테 빌빌 기었어?!”
“하. 사람은 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철수는 한바탕 더 욕을 쏟아내며 분풀이를 하려다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초부장만 계속 잡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끊어. 똥 같은 새끼야.”
철수는 휴대폰을 침대위로 던져버리고, 화면에 보이는 한 사이트를 클릭했다.
‘한국 최고명성 병원’
거창한 이름과 다르게 건물은 뭔가 좀 아니다.
붉은 색 벽돌로 인테리어 한 외벽은 삭아서 군데군데 떨어졌고, 창문 모퉁이는 깨져서 테이프로 발라 놨다. 간판도 누렇게 변하고 삐뚤어 졌다. 과연 조명은 들어올까 싶다.
철수가 도심 외곽에 있는 이 병원을 찾아온 건 순전히 눈에 확 띄는 문구 때문이었다. ‘바코더 치료 가능 연구소’라는 글씨가 노트북 화면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막상 와보니 돌팔이 의사가 거주할 것 같다. 환자가 팔이 아파서 들어오면, 생니를 뽑아놓고 진료비를 바가지로 청구할 것 같은 뭐 그런 분위기 말이다.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건 아니지.”
유명 맛집도 파리 날아다니는 시장 구석에서 장사하지 않는가.
철수는 마음을 긍정적으로 고쳐먹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찾다가 아차 했다.
“1층이네. 간판을 2층에 달아놔서…”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휘휘 둘러보다 급한 마음에 빽 소리 질렀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꽤 컸나보다. 안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곧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 한명이 튀어나온다. 의사인 것 같은데 흰 가운도 입지 않고, 후줄근한 셔츠와 무릎아래까지 걷어 올린 바지, 때 묻은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철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뉘신지?”
“여기 바코드 현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철수의 다급한 목소리에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 손뼉을 쳤다.
“아하. 인터넷에 올린 광… 아니 프로필을 보고 찾아왔구먼. 잘 왔네.”
“네. 뭐. 어쨌든 바코드를 치료할 수 있나요?”
철수는 팔을 들어 바코드를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바닥에 시선을 두고 ‘그거 올린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있나, 수수료는 빠져나가고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기만 한다. 그러다 앞의 철수를 보고 퍼뜩 깬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래. 맞아. 그런데 여기는 가능성에 대한 연구소야.”
“가능성이요?”
“말 그대로 바코드를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
말이 좀 답답하다. 그리고 미심쩍다.
철수는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며 다시 힘주어 말했다.
“이 바코드를 지울 수 있나요?”
“그러니까 그 가능성을 시험하고 연구하는 곳이지.”
“…좋아요. 보시면 알겠지만, 전 바코더가 되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요. 가능성이든 뭐든 이걸 치료해 줘요.”
노인은 철수에게 다가와 바코드를 유심히 보았다.
똥줄 타는 철수와 다르게 노인의 표정과 행동은 느긋하기 짝이 없다.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완치는 장담 못해. 가능성은 계속 확보중이지만.”
“어쨌든 간에 좋습니다. 그 치료라는 걸 지금 당장 시도해 봐요.”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철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