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비밀이라는 게 뭔데?
이젠 20년이나 지났으니 해봐."
" 그래. 이젠 해도 되겠지.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그들의 자손들도 누릴 걸 다 누렸고
피눈물 흘린 자들 또한 다 흙으로 돌아갔으니"
" 그들의 자손이라니?"
" 어. 그 죽은 사람들의 자손."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귀남은 꿈속을 걷듯 눈을 감고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꿈에서 만난 그들이 가장 처음 한 말은
내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한 짓이다 이었어."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아들들?
본인들의 자식들을 말하는 거야?"
" 어 그렇게 말했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한 소리.
정확하게 그렇게 말했어.
내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뭣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거라고."
"무슨 짓을 했던 건데?"
' 누군가의 그릇되고 비뚤어진 종교적 이념 때문에
한 마을이 몰살이 됐어.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노파부터 부녀자 아이들까지 다 죽임을 당했어."
귀남은 그날의 꿈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 대체 그렇게 잔인한 일을 누가 시킨 거야?"
" 그 마을에 살았던,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사람들
부모와 자식들의 죽음을 보고도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았던
미치광이가 된 사람들."
" 말도 안 돼.
그러면 그 사람들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한 거야?"
" 그렇지"
" 이게 말이 되냐?
자신들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 형제를 죽인다는 게?"
인간들을 결집시키는데 종교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하나의 신은 인간들이 만든 결정체다.
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모여 힘을 키우고
개인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
세상을 흔들 만한 힘을 가진 것이 그들의 신이고 종교다.
단, 그것을 인류를 위한 매우 유익한
의도로 그 힘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잘못 된 신을 만들었고
흐트러진 정신으로 그 힘을 키웠고
무엇보다 힘을 악용했다.
" 그들은 짐승이 아니었어.
단지 뭔가에 완전히 깊게 빠져든 상태였던 거지.
늪에 빠진 거지.
선과 악이라는 늪에.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전부 악이라는 그릇된 생각의 늪에.
발버둥 치면 칠수록 깊이 빠지고 말았지."
" 정말 화가 난다.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나였으면 억울해서 그 자손들 대대로
씨를 말렸을 텐데."
"그래서 우리가 아직 미숙한 거야.
죽음을 죽음으로 갚으려 하니까."
" 아니 너라면 가만있겠냐?
죽어서라도 괴롭혀야지.
근데, 그 사람들은 왜 너한테 전하지 말라고 한갓야?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말이야."
" 말했잖아. 그 피를 묻힌 사람들이
그들의 아들들 이었다니까.
그렇게 죽었어도 자식들은 지키고 싶었던 거지.
터지고 찢기는 죽임을 당하고
묻히지도 못하고 그 나무에 매달리면서도
자식들이 잘 살길 바랐던 거지."
" 아니 그게 무슨.
이게 말이 되냐?"
" 그래서 우리가 아직 부모가 못 되는 거야."
" 이해가 되면서도 너무 답답하다.
수십 년을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가지가지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게."
" 그들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더 한 고통도 참아 냈을 거야."
" 정말 지독하다.
지독한 사랑이다.
그래서 넌 그들의 비밀을 지키기로 한 거야?"
" 비밀은 지키고 내가 해야 할 도리를 했지. "
" 도리?
뭘 했는데?"
" 삽질."
"삽질?"
" 그래. 너랑 매일 했던 삽질."
" 야 그러면 그게?"
" 맞아. 우리가 발견했던 그 뼈들."
동일은 한방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수십 구의 뼈를 발견했지만
그때 귀남의 신신당부로
부대에 말하지 않고 조금씩 꺼내서
양지 바른 곳에 묻었기 때문이었다.
" 난 그것도 모르고.
그때 네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어.
부대에 당연히 알리고 수습하고 원인과 결과를
밝혀야 하는데 말이야."
" 비밀은 지켜 드리고 싶었으니까.
그땐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
" 그러면 그 뼈를 발견한 것도
꿈에서 그 사람들이 알려준 거야?"
" 그렇지."
" 야. 정말 말이 안 나온다.
그때 우리 맨날 쉬는 시간마다
그 땡볕에서 삽질한다고
미친 놈 소리 들었는데."
" 그래도 삽질은 늘었잖아.
선임들도 삽질을 연습까지 한다고
기특하게 생각했고."
" 왜 말 안했냐?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 네가 이런 일들을 알았으면
입 다물고 있었겠냐? "
" 참나.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도 모르고 삽질을 했으니."
" 의미? 그런 거 찾지 마라.
그냥 때론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 철들었네?"
" 야. 너 이제 가라.
피곤해 죽겠다."
" 나 진짜 혼자 못 갈 것 같은데?"
귀남은 20년 전 그 때가 떠올랐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때의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했다.
"너 우리가 다시 스물한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똑같이 비밀을 지킬 거야?"
귀남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말했다.
" 그날로 돌아간다면
1분 만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비밀에 묻어 두지 않을 거야."
" 그럴 줄 알았다.
그거 부대에 알렸으면 포상은 물론이고
삽질도 안하고 편했을 텐데."
" 아니 포상 같은 건 필요 없어."
" 근데 왜 비밀을 안 지킨다는 거야?"
" 내가 그들로부터 지킨 비밀 때문에
그 늪이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거든.
차라리 그때 전부 다 불살라야 했어."
" 그건 무슨 소리야?"
" 그땐 막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막을 수 없어.
그 세력이 너무 커졌으니까."
" 그 세력?
그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갔던
종교가 아직도 있다는 소리야?"
" 네 말대로 씨를 말려야 했어.
아무 쓸모도 없는 종자들.
신이 되려고 하는 자들.
이제 더 이상 돌이 킬 수 없어.
그 세력이 너무 커져 버렸어."
'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너 앞으로 입조심 해야겠다."
" 내가?"
"응.
어떻게든 네 입을 열려고 할 건데
죽을힘을 다해서 입을 닫아야 해"
" 누가?
누가 내 입을 열려고 하는데?
내가 뭘 아는데?
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뭐든."
" 나한테 뭐가 보이는 거야?"
"어. 이상해.
잡귀들이 너에게 왜 이렇게 붙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 왜지? 나 데리고 가려는 거 아냐?
아직 장도 못 갔는데
이렇게 일찍 죽고 싶지 않은데."
" 오버하지 마.
그냥 잡귀야."
귀남은 보았다.
아주 추악한 이를 드러내고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고
동일을 맴도는 잡귀들을.
" 왜 나를 목표로 잡았지?"
" 네가 목표가 아니야.
그들의 목표는 나야."
" 너를 목표로 하는 이유가 뭘까?"
" 이 지긋지긋한 능력 때문이지.
그들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둘 다가와
어느새 사무실에 가득 찼다.
귀남은 그때 깨달았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 근데 넌 왜 이걸 하는 거야?"
" 뭘?"
" 방송일.
사실 피곤하잖아.
특히 우리 부서.
세상이 진짜 어떻게 되려고
맨날 사건 사고가 나는지......."
" 야. 우리 PD야. 사명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우리가 발로 뛰어서 국민들의 알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했던 거 기억 안나?"
" 사명은 무슨
라디오 PD 하려고 했던 놈이."
" 나 참 그건 또 기억하냐?"
" 너 맨날 라디오 부스에 앉아서 가요나 틀어 주면서
돈 벌고 싶다고 그랬잖아."
" 그러면 나 여기 왜 있는 거냐?"
" 너 진짜를 말해 봐."
" 뭘?"
" 갑자기 보도국으로 바꾼 이유."
" 뭐 내가 가고 싶어서 가냐?
회사가 까라면 까는 거지."
동일은 뭔가를 알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
" 너 보도국 지원한 거 내가 알고 있는데?"
" 뒤지거나 까무러치거나 둘 중 하난데
처음에는 그냥 뒤질려고 했는데 억울해서.
까무러칠 때까지 해보고 뒤지기로 했다. "
" 너 무슨 일 꾸미고 있는 거구나?"
귀남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뗬다.
" 장 부장이랑 연관있는 거야?"
"……."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거 하지 마라."
"왜?"
"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어. "
" 그래서 그 사람은 질 수 밖에 없어.
가진 것이 많으니까.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평생을 살 것처럼
경계하고 의심을 풀지 않아.
그것들을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잃을 것이 없어. 그래서 더
용감해지고 때론 당돌할 수 있지."
" 그래서 전쟁이라도 하려고?"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런 거 안 배웠어?"
" 참 피곤하게 산다."
" 그래. 피곤하니까 얼른 가.
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잖아."
" 말 참 못됐게 한다."
" 조심해서 가라. 잡귀들 조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