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서 나가 주세요.
위험합니다."
관리소 직원들의 말을 듣고서야 귀남은 물러났다.
" 그러면 그 소리는 뭐지?
나를 지키려고 한 건가?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것이지.
갑자기 마음 바뀌어서 살리려는 건 뭐야?"
지하에서 다시 올라오니 기자들이
또 기웃기웃 하고 있었다.
귀남은 아까 자신을 몰라봤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방송국 샤워실에서 불난 거나 찍어 가라.
오늘 특종 하나 잡았네. "
그렇게 샤워장을 빠져나오는데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귀남을 찍는 카메라였다.
" 아씨 아까는 몰라보더니 어떻게 안 거야?"
불 때문에 소방차와 구급차까지 오는 바람에
방송국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귀남을 에워싸고 길을 막았다.
" 신 귀남 PD 맞죠?
어제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신 후보자랑 무슨 관계입니까?"
" 왜 생방송 중에 그런 일을 하신 거죠?"
"누군가의 지침이 있었던 겁니까?"
기자들은 귀남을 세우고 온갖 질문들을 퍼부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 별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지나가겠습니다."
귀남은 온 힘을 다해 겨우 빠져나왔다.
" 아씨 뭐지?
얼굴 다 팔렸나?"
귀남은 번뜩 샤워실에서 만났던
장 부장이 떠올랐다.
"장 부장 개새끼
나가면서 다 까발렸구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발걸음을 재촉해 사무실로 향했다.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지친 귀남은 사무실 소파에 또 누워
물기가 흥건한 몸을 닦았다.
" 씻고 왔냐?"
" 네 차장님."
" 씻은 거 맞아?
꾀죄죄하냐?"
" 네. 아니 그냥 빨리 씻었어요."
" 왜? 뜨거운 물로 싹 씻고 오지."
" 불이 나서요."
" 야 불이 나도 씻을 건 씻어야지. 뭐!
불났다고? 무슨 불? 샤워실에!"
" 네.
저 삐뽀삐뽀 소리 안 들려요?"
밖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 야 난 또 어디 불난 줄 알았더니
방송국에 불이 난 거였어?
대피해야 되는 거 아니냐?"
" 아니에요. 다 꺼졌어요."
" 넌 괜찮은 거야?"
" 네."
" 참 별일이다.
내가 입사한 지 30년 넘었는데
처음이다. 처음.
샤워실에 불난 거."
" 그러게요."
" 너 좀 놀랐나 보다?
인마. 그러니까 선배 놀리더니
벌 받은 거 아냐.
사필귀정이다."
윤 차장은 장난스럽게 귀남을 쳐다봤다.
"그러게요.
사필귀정.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인생이 이럴까요."
" 뭔 또 자학이냐.
불날 수 있는 거지.
괜찮으면 됐다."
귀남은 생각에 잠겼다.
불이 나기 전 그 소리가 떠올랐다.
" 누구였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왜 샤워실에에 쇠사슬이 감겨 있었던 거지?
그 안에 있었던 사람은 나뿐인데
분명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했고
또 분명 누군가가 나를 구하려 한 것이 맞는데.......
귀남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의도적으로 해할 목적이 있었다.
"아. CCTV!
맞아! 내가 들어가기 전에
누가 거기 들어갔는지 알면 되잖아!"
귀남은 CCTV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지하로 달려갔다.
" 너 또 어디 가냐!"
" 관리 사무소에요!"
귀남은 2층 관리실로 가서 샤워실로 향하는
CCTV를 요청했다.
하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 아니 왜 안 된다는 거예요?"
" CCTV는 어떤 사유가 있어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 오늘 불이 났고 전 죽을 뻔했어요.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었다고요.
제가 조금만 늦었어도 전 죽었을 겁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유가 있을 수 있나요?"
" 죄송해요. 곤란합니다.
제 권한으로 함부로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방법이 있긴 한데 경찰에 요청하셔서 경찰관과 같이
보는 건 가능합니다."
" 아니 뭐가 그리 복잡해요.
전 여기 직원이고 제가 사고를 당할 뻔했고
누군가 고의로 저를 해할 목적이 다분했기 때문에
단지 그 사람을 찾고 싶은 건데요."
"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이해해 주세요.
다른 직원들도 찍혀 있을 수 있고
방송국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특히나 오늘 기자들도 많아서
함부로 보여줬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이해 바랍니다."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했지만
관리 책임자의 말을 듣고 수긍했다.
" 알겠습니다.
뭐 경찰까지 부를 건 아니에요.
수고하십시오."
대체 누가 꾸민 일일까.
귀남을 정말 살해할 목적이 있었던 것일까?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원한을 살만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 회사에서 나를 죽이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귀남은 그 와중에 장 부장이 점심 전까지
써오라고 하던 반성문이 떠올랐다.
사무실로 다시 올라가 책상에 앉았다.
" CCTV 확인했어?"
" 아뇨."
" 왜?
그거 확인하러 간 거 아냐?"
" 기밀이래요. 방송국 기밀."
" 방송국 기밀이라고?"
" 네 절대로 보여줄 수 없데요.
경찰관 대동하래요."
" 야 됐다.
뭐 다치지도 않았는데.
귀남은 윤 차장을 째려봤다.
" 알겠다.
너 근데 일주일 푹 쉬라니까
또 뭐하냐?"
" 반성문이요."
" 반성문? 누가 반성문을 쓰래.
또 사고 쳤냐?"
" 그거요. 방송사고 친 거요."
" 그거 이미 경위서 쓰고
징계위원회까지 열렸는데
무슨 반성문을 또 쓰래?"
" 장 부장이 쓰래요."
" 아 그래?"
장 부장이라는 말에 윤차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 장 부장 겁나요?"
" 겁은 무슨."
" 역시 짬밥에서 밀리니까.
겁도 나겠죠.
이래서 대한민국이 안 되는 겁니다.
선배들이 못하면 후배들이
큰 소리 좀 낼 수 있는 거지."
" 야 그런 거 아냐 인마.
이상하게 장 부장은 그냥 싫어.
그냥 이상하게 오싹해.
눈깔이 뱀처럼 생겼잖아."
" 귀신 붙어서 그래요."
귀남은 반성문을 쓰며 말했다.
" 너 한번만 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면 죽는다."
" 알겠어요.
아 근데 진짜 뭐라고 쓰죠?
귀신이 시켰다고 할까요?"
귀남의 장난에 윤 차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 그냥 솔직하게 써. 담백하게."
" 담백하게요?"
" 지금 장 부장이 너한테 그거 쓰라는 의도가 뭐겠냐?"
" 자기 매형 때문에요?"
" 그래.
그냥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솔직하게 써.
결국 신 후보자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한 건
아무 의미 없다.
그냥 보신 것처럼 방송사고 일 뿐이다.
당연히 우리는 부장님의 매형인
추 후보자님이 당선되길 바란다.
어차피 지금 추세라면 압승이다.
뭐 이런 식으로 잘 구슬려 보란 말이다."
윤 차장은 장 부장과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 뱀 같은 사람이 그걸 믿어 줄까요?"
" 넌 그 뱀 같은 사람이랑 왜 그렇게
대립하려고 하는 거냐?"
" 알겠어요.
그냥 솔직하게 써야겠네요."
" 그래. "
귀남은 반성문을 다 쓰고
보도국 맨 끝에 위치한
장 부장 사무실로 가서 노크했다.
" 들어와."
" 부장님. 반성문 써 왔습니다."
" 그래. 줘 봐"
장 부장은 귀남이 쓴 반성문을
눈을 내리깔고 훑어 나갔다.
" 너 솔직하게 쓴 거 맞지?"
" 그럼요."
귀남은 장 부장의 방을 훑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온갖 책들로 가득한 책장.
고급스럽게 보이는 소파.
장 부장은 7층에서 가장 큰 사무실을
혼자서 쓰고 있었다.
" 아무 의미 없었다?"
" 네. 정말입니다."
" 믿어도 되나?"
" 네 믿으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다신 사고 안치겠습니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 부장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귀남은 속이 미식 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갈라서 새들이 뇌를 쪼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왔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린 것같이 아팠다.
" 그럼 저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 잠깐만 기다려 봐."
장 부장은 책상에 앉아서
나가려는 귀남을 막았다.
귀남은 극심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
" 자, 진정하자. 진정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귀남은 마음을 다잡고
숨을 참고 눈을 감았다.
" 너 정체가 뭐야?"
장 부장은 귀남을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했다.
"……."
"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
" 네?"
귀남은 누군가 짓밟는 듯 고통스러웠다.
꾸역꾸역 참으며 답했다.
" 네가 나를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궁금하면 알려주려고."
"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궁금한 게 많으면 꼭 사단이 나더라고.
앞으로도 나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길 바란다."
귀남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 나가봐"
귀남은 겨우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참았던 숨을 뱉었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 생각보다 강력해.
이정도 힘이라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귀남은 겨우 몸을 일으켜 사무실로 돌아왔다.
윤 차장은 그런 귀남을 보고 놀랐다.
" 야 너 괜찮냐?
신 PD? 귀남아!"
" 네. 괜찮습니다.
잠깐 어지러워서요."
" 뭐야? 무슨 일이야?"
" 아니에요. 그냥 좀 메스껍고 어지럽네요."
" 넌 장 부장 방에만 가면 그러더라."
"모르겠어요. 이상하게 거기만 가면 숨이 막혀서."
물을 떠서 귀남의 자리로 갖다 주는 윤 차장.
" 야 냉수 마셔라.
그리고 오늘 일찍 퇴근해.
일주일 동안 휴가 줄 테니까
쉬고 와."
" 네? 왜요?"
" 너 지금까지 휴가도 없이 고생했잖아.
특별 휴가 요청해서 허락받았으니까
어디든 갔다 와."
" 아니 지금 밑에 기자들 깔려서 집에도 못 가는데.
그냥 여기 있을게요. 갈 데도 없어요."
" 기자들 오늘 다 철수할 거야.
각 방송사, 신문사에 요청했어.
철수하기로 합의했어. "
" 아 그래요?
그래도 이제 선거 진짜 얼마 안 남아서
바쁠 텐데."
" 걱정하지 마.
개편되면서 쉬는 애들이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정 갈 곳 없으면 시골집에라도 갔다 오든지."
" 뭐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감사히 쉬다 오겠습니다."
귀남은 특별 휴가가 아니라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라는
특별 귀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 차장이 더는 곤란해지지 않도록
그 말을 듣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