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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첫사랑
작가 : 예빈
작품등록일 : 2019.10.11

 
-2-
작성일 : 19-10-11 18:29     조회 : 230     추천 : 0     분량 : 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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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런 핑크빛 세상을 만끽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옆에서 윤수아가 말을 걸어왔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을 때리는 내가 어디 아픈 줄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제야 윤수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에게는 아주 덤덤하지만, 윤수아에겐 파격적일 이야기를 꺼내었다.

 “윤 쌤.”

 “어, 왜.”

 “나, 사랑에 빠졌나 봐.”

 

 

 - 2 -

 

 

  그 일이 있었는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일이 바빠서 연락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사실 내가 부끄러움에 우물쭈물 해하다 연락을 못 했던 것이 더 컸다. 연락을 먼저 하는 것도 문제인데 한 뒤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가 더 문제였다. 안녕하세요, FT대병원 정형외과 의사 신혜빈입니다? 아니면 안녕하세요, 연락하라고 해서 연락드립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모솔 인생을 살아온 내가 이런 걸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사람들은 이런 걸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고, 또 잘하는 것일까. 내 인생 최고의 의문이었다.

  나는 책상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30분째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얻은 쉬는 타임이라 다행이지, 일이 많았으면 감히 꿈도 못 꿀 시간 낭비였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쉬는 타임도 생겼겠다, 오늘은 무조건 그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실제로 연락을 기다리는지,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안달이 나서 안되겠다.

 “아, 몰라! 해보는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이내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보물 1호인 것처럼 소중하게 품고 다녔던 명함을 꺼내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침이 꼴깍하고 삼켜진다. 지금 내가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꽤나 길어지는 통화음에 마음이 더 초조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팀의 팀장인 만큼 바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마음이 급한 것이 영 이상했다. 혹시 기다리다 지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만 혼자 착각한 걸까? 그 사람은 애초부터 나를 안 기다렸는데…. 그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안 좋은 생각이들이 차지하긴 했다만….

  나 자신의 호들갑에 실망하려던 그때, 긴 시간 동안 울리던 통화음에서 달칵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나는 핸드폰을 귀로 바짝 가져다 댔다. 그 사람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정말, 이도영씨가.

 —예, 회장 경호팀 팀장 이도영입니다.

  공식적인 말투인 듯 내가 들었던 목소리보단 딱딱했지만 변함없는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것 하나에 방금까지 했던 나쁜 생각들이 눈 녹듯이 녹으면서 가만히 있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어떡해. 받았어. 정말 그 사람이 받았다고! 속으로 남모를 쾌재를 부르며 실실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다. 하지만 연신 올라가는 광대는 아무리 내리려고 노력해도 내려지지 않고 더더욱 올라가기만 했다.

  이런 게 사랑에 빠진 기분이구나. 처음 느껴 보는 이 감정이 새로웠다. 그리고, 나쁘지 않았다.

 —여보세요?

  오랜 시간 동안 상대가 말이 없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가 다시 되물었다. 그 말에 번뜩하고 정신을 차렸다. 왜 이러니, 신혜빈. 정신 차려. 그의 앞에선 유난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것도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되는 일종의 증상일까. 그렇다면 몇 번이고 겪어도 좋다만.

  또다시 이상한 세계로 빠질 뻔했던 것을 간신히 붙잡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라도 떨리는 이 마음이 그에게 전해질까 조마조마했다.

 “아, 저…. 그…. 병원에서 부딪혔던 사람인데요..“

  아, 망했다. 조심스럽게는 무슨, 누가 봐도 ‘나 떨고 있어요~’ 라고 말하고 있는 내 목소리에 나는 망했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게다가 말을 더듬기는 왜 더듬어. 직감적으로 망했음을 느낀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연습하던 조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 한심해졌다. 결국 이렇게 말할 거면서 왜 걱정을 하고, 멘트는 왜 연습을 했대. 당장이라도 바보 같은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비웃음일 리는 없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것이 비웃음으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 신혜빈 망했어. 진짜 어떡해. 그가 나를 바보같이 볼 것 같아 마음만 같아서는 전화를 끊고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 이렇게 큰 내가 들어갈 쥐구멍은 없겠지만.

 그런데 그때,

 —네, 신혜빈 선생님.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내 이름이 나오자 잠시 머리를 맞은 듯 멍했다. 그러다 잠시 후, 하늘을 붕 뜨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그것만으로도 방금까지 이불킥을 하고 싶었던 창피함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름 하나 부르는데 이렇게 멋있을 필요가 있나? 애초에 내 이름 석 자가 저렇게 달콤하게 들리던 때가 있었을까. 아마 처음이지 싶다.

  내가 행복에 젖어들고 있을 때쯤, 또다시 아무 대답이 없는 나에 의아했는지 이번에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제야 연락 주시네요.

 “네?”

 —연락, 기다렸는데.

  고맙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그가 시무룩한 듯 말하자 나는 냉큼 “아니에요!“ 라고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이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나 싶어 냉큼 다시 앉긴 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말 고마웠다. 나였으면 한참을 걸렸을 일이 그가 도와주면서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끝났으니까. 게다가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을 그렇게 선뜻 돕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고마움보단 내 사심이 크긴 했지만, 그가 고맙지 않다는 것은 정말 하늘에 맹세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수치스러운 건 어쩔 수 없어 또 혼잣말로 망했다며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전화 너머로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듣는 사람마저 웃게 만드는, 그런 맑은 웃음이었다.

 —알았어요. 믿을게요.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순간 환해지면서 동시에 달아오름을 느꼈다. 믿을게요라니, 말도 어쩜 저렇게 설레게 잘하나 몰라. 아무래도 이도영이란 사람은 신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 세상에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모든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매력을 느낄 수 없지 않을까?

  심각한 고민이 계속되자 이제는 자꾸 이상한 세계로 빠져버리는 나에게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체념을 한 건지 익숙하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언제 만나요, 우린

  “네?

 —나 만나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아, 그건 맞는데….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이내 말을 삼켰다. 차마 내 입으로 전달하기엔 부끄러웠다. 아마 내가 모솔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부끄러움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어쩌겠어? 부끄러운걸. 만나자고 대놓고 말하면 사심 있는 게 너무 티가 나잖아. 물론 지금까지 내가 한 행동에서 눈치를 챘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한편으론 솔직하게 말하고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근 일주일을 이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나. 마음만 같아서는 내 부끄러움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 우리 만나요! ”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심정이었다. 이걸 그가 알아차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만.

 —마침 병원 로비인데….

  나올래요?

  때마침 아주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이 말은, 지금 만나자는 뜻이 맞겠지? 그나저나 병원 로비라니. 그가 병원에 올 일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었던가? 사실 마주친 적은 한 번밖에 되지 않아 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첫인상으로 예상컨대 병원에 자주 올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아주 건강한 사람인 것 같았다는 얘기다.

  그럼 경우의 수는, 단 하나. 나를 보러 왔다. 갑자기 겨우 진정되었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이번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이 아주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빨간 것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벌써 병원 로비라는 그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기다리질 못하겠다.

  나는 대충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를 알아보는 몇몇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인사를 하는 듯했지만 그게 지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달렸던 것 같다. 학창시절 체육 수행평가 때도 이렇게 열심히 달린 적은 없었다. 평소 저질체력인지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것 같았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뛰었다. 바로 저기, 로비에 서있는 한 남자를 향해.

 “이도영 씨!”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내 눈앞의 사람만 자신을 보면 되는 거지. 다행히도 내 소리를 들었는지 —사실 안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만—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정갈한 정장에 왁스로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상태였다. 정말 변함없이 잘생긴 모습.

  그 모습에 새삼 한 번 더 반한 나는 방금까지 뛰었던 것도 잊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를 만나러 복도를 달릴 때는 숨이 그렇게 가쁘더니 지금은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몸이 한껏 가벼워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의 앞에 빠른 속도로 도착하자, 그는 숨을 고르는 날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뛰어왔어요?”

 “기, 기다리실까 봐..”

 “그냥 천천히 오지 그랬어요. 뛰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 이런 다정한 사람….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다정하게 걱정하는 그의 모습 뒤로 다시 후광이 펼쳐지며 이젠 천사의 날개가 보일 것만 같았다. 생긴 건 병원장 뺨치게 까칠하고 차가울 것 같은데 성격은 완전 대천사가 강림한 듯했다.

  전 정말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넘어지지도 않았고요. 요즘 세상에 드물게 다정한 이도영씨를 보니 자동적으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며 괜찮다는 말을 건네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았으니까. 사실 방금까지만 해도 숨이 차서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것마저 그를 보니 말끔하게 다 잊혀버렸다. 이래서 사랑이 위대한 것이다. 없던 힘과 체력도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으니까.

 “우선 나갈까요? 여긴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것 같은데.”

  시선? 그의 말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 내 시야에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 심지어 병원을 찾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와 그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다시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이번엔 설렘이 만든 부끄러움이 아니라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으로. 하긴, 그렇게 큰 소리로 이도영씨를 불렀는데 시선 집중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빠르게 그의 옷자락을 잡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더는 그 시선을 견딜 뻔뻔함이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원을 나오니 차가운 겨울 공기가 피부에 와닿으며 얼굴의 열이 식는 것 같았다. 이제야 좀 살겠네. 나 자신이 언제 이렇게 무모한 사람이 되었는가 싶었다. 윤수아가 알면 한참을 놀려대겠지? 그놈 성격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동료에게 시달릴 앞으로의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신혜빈 선생님?”

  그였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이끌려 나왔는데도 놀랍도록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저번에는 내가 뭐만 하면 놀라던 그 귀여움이 어디 가고 이렇게 차분함만 남아있대? 뭐 사람이 이렇게 매력이 여러 가지지? 눈에 제대로 콩깍지가 낀 것인지 이제 그가 뭐만 해도 다 하나의 매력으로 보였다. 이 추운 날씨에 정장에 코트 차림인 것도 내가 느끼는 매력 중 하나였고.

  그래도 이 날씨에 코트는 너무 추워 보여 가까운 카페로 가자고 했다. 의사 가운만 입고 뛰쳐나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나한테도 좋은 거니까. 그가 아무 반박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내가 평소에 자주 가던 카페로 발을 옮겼다. 사람이 자주 찾지 않아 조용한 곳이어서 그와 앉아 얘기를 나누기에도 적합할 듯했다. 카페까지의 거리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는데도 그가 옆에서 같이 걸으니 왠지 모르게 길이 짧게 느껴졌다. 이야기를 나눈 것도, 같이 한 것도 없이 그저 나란히 걷기만 하는데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는 것만 같았다.

 “아,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제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한참이 지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사실 그를 처음 본 날에도 들었던 의문이었다. 내 기억 상 그와 나는 마주친 적이 없어 그날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나와 달리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즉 일주일 간 그가 보고 싶단 생각과 함께 한 궁금증 중 하나였다.

  한껏 진지하게 묻는 나를 보며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 왜 웃지? 그런데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어떻게 입 가리고 웃는 게 저렇게 화보 같을 수 있지. 윤수아가 저려면 좀 때리고 싶던데. 그만 생각하면 자꾸 빠져버리는 이상한 세계로 잠시 들어갈 뻔했는데 그의 말소리에 겨우 빠져나왔다.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들어가고 싶단 생각이 들긴 했다만.

 “여기?”

  그가 가리킨 것은 내 의사 가운 왼쪽에 위치한 작은 이름표였다. FT대병원 정형외과 소속 의사 신혜빈. 아, 바보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현타가 왔다. 얼굴이 타오르면서 붉어지는 것은 덤.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인가. 이름표에 떡하니 나와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바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냐고! 아, 여기 있네. 신혜빈, 사랑에 빠지더니 쌓아온 지식이 다 날아갔나 봐. 진짜 쥐구멍이 있으면 거기로 숨고 싶다..

  차마 이런 바보 같은 꼴을 이도영씨한테 보이기는 싫어서 얼굴을 돌린 채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풋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 남자는 또 왜 웃어. 그렇게 웃어도 잘생기긴 했는데 그러면 내가 창피해서 죽을 것 같잖아. 그는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눈에 작게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말했다.

 “귀엽네요, 신혜빈 선생님.”

  귀엽네요, 신혜빈 선생님. 귀엽네요, 신혜빈…. 귀엽네요…. 귀엽….

  그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귀엽다래! 저 잘생긴 사람이 나보고 귀엽다고 했다고! 세상 사람들이 이걸 다 알아줬으면 좋겠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그에 하마터면 길거리에서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귀엽다는 말, 놀리는 건 줄 알고 싫어했는데 그에게 듣는 거라면 평생 들어도 좋을 듯했다. 내가 이렇게 편파적인 사람인가 싶지만, 뭐 어떤가. 상대가 그인걸.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카페에 도착해서도 싱글벙글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일에 치여 피곤한 상태로 거의 기어 들어오다시피 했을 텐데 그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그런 피로가 싹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내 이런 모습에 사장님도 낯설었는지 “혜빈 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라고 물었다. 당장이라도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꾹 참고 “그렇게 보여요?” 라고 대답하곤 주문을 했다. 사람이 몇 없어 빨리 나온 음료까지 받아 자리에 앉으니 제법 여유가 생겼는지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참 모난 구석 하나 없이 잘났다.

 “음, 혜빈 씨라고 불러도 돼요?”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에 헛기침을 한 번 뱉은 그가 내게 물었다. 혜빈 씨? 별것 아닌 호칭인데도 뭔가 낯간지러운게 기분이 좋아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영 씨가 부탁하는데 뭔들 안 들어주겠어요. 지금 심정이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물었어도 올라가는 입꼬리와 머릿속의 한 부분을 차지한 혜빈 씨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허락을 하자 그도 웃으면서 “혜빈 씨도 저 편하게 불러주세요.” 라고 말했다. 편하게라면, 도영 씨?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이도영 씨라고 부르는 것도 떨려죽겠는데. 하지만 뭔가 기대하는 눈치로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 차마 거절하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밝아진 표정을 보자 괜히 내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아 나 또한 그를 따라 환히 웃었다.

 “저기….”

 “저기 말고, 도영 씨.”

 “… 도영 씨.”

  이제 서로 통성명도 되었겠다 —사실 나만 통성명이 안되었던 걸 수도?—, 용기 내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편하게 부르란 소릴 듣긴 했지만 부끄러워서 괜히 다르게 불렀더니, 도영 씨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호칭을 고쳐주는 걸 보면. 그의 표정을 본 나는 바로 저기를 도영씨라고 정정했다. 은근히 이런 고집이 있구나. 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그에게 물어볼 것은 근 일주일 간 했던 수많은 고민 중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물론 이름을 아는 것도 궁금했는데 그건 창피하니까 넘어가자. 내가 진짜 궁금했던 것은, 그가 왜 나한테 선뜻 명함을 줬는가—였다. 그가 대가를 바라고 나를 도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그와 함께 10분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대가를 바랐다고 한다 해도 그가 내게 부탁할 것이 있긴 할까? 무료 진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나한테 바랄 것은 없었다. 그럼 대체 이유가 뭘까. 무슨 생각으로 내게 연락처를 준 거지?

 “왜 저한테 연락처 주신 거예요?”

  말해놓고 조금 후회했다. 평소 말주변이 없는 것이 여기서 티가 났다. 좀 더 돌려 말하는 법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쉽게도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나한테 친구가 많길 했나, 뭘 했나. 공부만 주구장창 해온 나는 이런 사교적인 것에 많이 약했다. 그래도 딱히 내가 그것을 고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삶을 살면서 그것이 내 발목을 잡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이런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을 싫어하는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좀 많이 싫었다. 이런 직설적인 질문에 그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봐도 비디오였다.

  나는 재빠르게 말을 얼버무리며 당황한 그를 향해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은 저질러 볼 일이었다.

 “아, 절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도 없고, 거의 초면이었는데….”

  변명이라고 늘어놓긴 했지만 반은 내 진심이었다. 원래 사람들은 다 이러나 싶었는데 내 이 좁은 인간관계에서도 초면에 번호를 선뜻 주고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나야 도영 씨한테 호감이라도 있지, 그에게 나는 낑낑거리면서 서류더미를 옮기던 키 작은 의사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닌가, 설마 이것도 내 착각일까.

  이쯤 되면 내 숨겨진 버릇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가 싶을 정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그는 손으로 턱을 괴며 나를 바라봤다. 뭐, 뭐야. 왜 저런 잘생긴 얼굴로 날 봐? 안 그래도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겠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얼굴을 봐버리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단 말이야.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영 씨는 여전한 눈빛과 표정으로 말했다.

 “ 제가 혜빈 씨한테 관심이 있어서요. ”

  네..? 반사적으로 물음이 튀어나갈 뻔했다. 지금 저 사람이 뭐라고 말한 거지? 나한테 관심이 생겼다고? 왜? 어째서? 무슨 일로? 아니,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작스럽게 들은 폭탄선언에 정신이 혼미했다. 관심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설레고 좋은 일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관심이 생길 요소가 나에게는 없는 듯했다. 나는 나 자신의 객관화가 아주 잘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성격도 더럽고, 키도 작고, 가진 거라곤 의사라는 타이틀뿐인데 그마저도 온종일 수술과 치료, 업무에 치여살아가고 있는 나한테서 대체 어떤 매력을 느낀 거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의문에 이젠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의 매력이 뭔지. 내가 모르는 마성의 매력이 나한테 존재하는 것일까? 아, 아니면 내 매력이 아니라 다른 뭐 공적인 이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던 찰나.

 “제가 신혜빈 선생님께 관심이 생겨서요.”

 “…….”

 “공적인 게 아니라, 사적으로.”

  이젠 이 남자, 완벽함을 넘어 신의 경지로 가고 있다. 독심술도 가능한 건가. 그나저나 공적인 게 아니라 사적인 관심이라면, 내가 아는 선에서 그런 관심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연락처를 주며 연락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주는 관심이라면 이게 아닐 리 없다.

  이제까지도 많이 얼굴을 붉힌 것 같은데 이번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급속하게, 이전과 달리 엄청난 온도로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 이런 멘트가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하마터면 카페 테이블에 얼굴을 박을 뻔했는데. 물론 지금 이 감정이 싫지는 않다면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당황보단 내 머리와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이 설렘이 너무나도 커져서 감당하기 힘들다.

  겨우겨우 정신을 붙잡으려 고군분투하는 게 재미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도 콩깍지가 끼어 이런 내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오늘 내내 보여주던 그 설렘 가득한 웃음을 다시 입에 걸었다. 아니, 턱 괸 채 그 표정으로 나를 보지 말란 말이에요.. 설레서 죽으면 책임질 건가요..

 “오늘은 여기까지.”

 “네?”

 “같이 더 있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서요. 일하다 나온 터라.”

  그가 정신을 못 차리는 날 보며 건네었던 말이다. 그제야 나는 내 손목에 자리 잡고 있던 시계를 볼 수 있었다. 병원에서 뛰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1시간이 지나있었다. 시간 주제에 뭐 이렇게 빨리 가고 그러는 거야. 이런 때면 눈치 있게 좀 천천히 가야 되는 것 아니야? 평소 일할 때는 거북이 기어가듯 천천히 가던 시간을 원망하며 나는 허망한 눈으로 도영 씨를 봤다. 이미 벗어두었던 코트까지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야속하게도 더 있다가란 말도 할 수 없게 잘생겼었다.

  일하다 나온 거라니까 이보다 더한 시간을 붙잡고 있는 것은 민폐임을 알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야 나에게 호감이 있단 사실을 알아냈는데 이렇게 보내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싫었다.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고, 너 많은 그의 표정을 보고 싶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그도 마찬가지겠지.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사적으로.

 “이번엔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아….”

 “또 봐요, 혜빈 씨.”

  이런 내 아쉬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낸 그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건네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또다시 보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군더더기 없는 발걸음으로 카페를 나서는 도영 씨를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혜빈 얼빠 다 됐네. 이런 상황에서도 잘생긴 모습만 보이는 것만 보면.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내 시선이 더 이상 그의 뒷모습에 닿지 않게 될 즈음, 나는 아까 전에는 그토록 부르기 부끄러워했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부끄럽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 하니까.

 “또 봐요, 도영 씨..”

  그것은 모솔 외길 인생 사상 처음이었던, 내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작가의 말
 

 오늘도 파이팅(◍•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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