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일단 한우성 씨는 할 일이 더럽게도 없는 사람이다. 교수님은 얼마 남지 않은 기말에 대해 열정적인 토론을 진행하고 계셨다. 어쨌든 나는 애인과 헤어진 슬픈 다인이를 다독이다가 갑작스레 생각난 쓰레기 구 애인이 생각나 같이 진탕 밤을 새느라 중간을 거하게 말아먹었기 때문에 바닥으로 내리 꽂은 학점을 만회하려면 기말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잘 봐야만했다.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교수님의 모기 같은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와 쥐고 있는 펜을 따라 종이에 자박자박 적었다. 이번 기말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시험은 중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볼 거지만 중간 때 못 본 사람들이 많아서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의 수정은 있을 것이며 시험 시간은 한 시부터 두 시까지니까 늦지 않게 맞춰서 오라는 전형적인 말이었다. 이제 겨우 한 걸음 옮긴 계절의 첫 시작이었지만 초여름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 후덥지근했다. 중간 때 그렇게 울었던 다인이는 언제 싸우고 헤어졌냐는 듯 교수님 말은 귓등으로 흘린 채 헤헤 웃으며 애인과 신나는 연락을 하고 있었고 내 핸드폰은 불이라도 난 듯 주기적으로 화면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할 일이 많다면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노트에 적어 내려가던 글씨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나마 봐줄만하게 단정했던 글자가 힘에 눌려 점점 일그러져 결국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형상을 그렸고 뒤이어 꾸직, 소리를 내며 종이가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교수님이 에... 10분만 쉬고 이어서 하겠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신경질적으로 펜을 내려놨다. 그제서야 다인이가 내 존재의 눈치를 챈 듯 작게 어깨를 움찔했지만 개의치 않은 듯 다시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는 핸드폰에 전념했다. 옆에서 울리던 핸드폰은 이제 화면을 바꾸는 것조차 귀찮은지 아예 화면을 켜놓은 채 수없이 많은 문자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뜨는 문자들은 정말 쓸데없고 진부한 안부문자가 대부분이었다.
우성 씨
[유민 씨 바빠요?]
[아 요즘 대학교 시험기간이구나] 오후 3:51
[그럼 곧 종강하겠네요 그렇죠?] 오후 3:52
종강해도 당신을 만날 생각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지금 후회 안의 후회라는 굴레에 빠져 저 사람이 말하고 있는 얼마 남지 않은 행복한 종강을 두고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고, 멍청한 짓을 해서는 안 됐고, 그렇게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던 거였다. 이제 와서 지난 일에 후회를 해봤자 별반 달라질 것도 없고 이미 쌓인 스트레스에 질책이 더해져 가중되는 일밖에 없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머릿속에 위험감지 신호를 쌓는 거라고 다독였다. 나는 그냥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실기시험이고 뭐고 때려 치고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갔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날 늦잠을 자지 말았어야 했고 정연우보다 내가 늦게 화장실을 갔어야 했다. 이마를 쿵, 하고 책상에 박자 쉬는 시간이라 조용한 강의실에 내 멍청한 머리가 책상과 내는 효과음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그토록 기다리던 영화의 개봉이었다. 당장 개봉일이 있었지만 같이 보러가자던 연우에 며칠 뒤 있을 실기시험을 걱정하며 양심에 찔리지 않게 실기시험이라도 보고 가자고 제안했고, 안 그래도 말아먹은 중간을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조를 보자고 찰떡같이 약속했던 당일, 눈을 뜨니 이미 영화 시작 30분 전이었다. 이건 세수하고 옷가지를 주워 입고 바로 뛰쳐나가도 백퍼 지각이다. 이럴 때면 평소 승희 언니가 끌고 다니던 자가용이 간절해졌다. 사정사정을 해서 영화시간을 한 시간 후로 미루곤 알바 월급 일주일 전이라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내가 나갈 시간동안 카페에서 시간을 떼울 정연우를 위해 기프티콘을 전송했다. 약속장소로 가니 정연우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
“카드 줘.”
“뭐?”
“팝콘 사야지.”
야, 이 개새끼야 내가 기프티콘도 줬잖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한 시간이 넘게 늦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기에 다시 한 번 눈물을 머금고 군말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스낵바로 걸어가는 연우 뒤통수에 화장실 다녀올게 라는 말을 하고 돌아왔을 땐 내가 싫어하는 오리지널 팝콘이 한가득 통에 담겨있었다. 가득 차오르는 어이없음에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정연우는 팝콘과 콜라를 내 품 안에 안겨주었고 화장실로 유유히 들어가 버렸다. 소새끼 말새끼 개새끼 새끼란 새끼는 모조리 가져와 정연우 이름 뒤에 수식어로 붙였고 가득 찬 콜라와 팝콘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던 나는 화장실 옆 대기 테이블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안정적으로 두 손에 들린 콜라와 사이다를 내려놓고 팔 사이에 안쓰럽게 끼어있는 오리지널 팝콘을 올려놓으려고 하는 순간 급하게 나오느라 대충 주워 입었던 매끈한 빨간색 후드티에 팝콘 통이 미끄러져 그대로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 진짜 오늘 되는 일 하나도 없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모이는 걸 느끼며 재빨리 주저앉아 흩어진 팝콘 조각들을 통에 쓸어 담았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모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하늘로 사라지며 하는 대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나도 지금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네요. 이빨을 바득바득 갈았다. 팝콘의 절반쯤 쓸어 담았을까, 이젠 아무것도 부질없다고 느낄 때쯤 앞에 하나의 손이 나타나 같이 팝콘을 주워 담아줬다.
“아... 감사합니다.”
“아뇨, 뭘요... 헉.”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친절함에 예의상과 진실이 가득 담긴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도와주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넥타이핀에 명품 구두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걸 보면 어디 선자리라도 나왔나 싶을 만큼의 옷차림이었다. 약간 붉은 계열의 머리는 왁스로 넘겼고, 나를 보고 놀란 눈은 하늘과 친한 듯 위로 치솟아 있었다. 나를 보고 놀라? 이질적으로 갑자기 든 의구심에 내가 어디서 이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나, 얼마 전 졸업했던 모르는 선배였을까 아니면 어디 학교 동창인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고민하며 손으로는 기계적으로 팝콘을 통에 쓸어 담았다. 둘이 치우니 금방이라 더 이상 바닥에 남아있지 않은 팝콘에 더러워진 오리지널 팝콘을 버리고 카라멜 팝콘으로 다시 사야겠다, 정연우 돈으로. 라는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다 아직까지 도와준 장본인이 눈앞에 있는 걸 깨달았다. 무슨 멘트를 날릴까.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맞선 성공하시길 빌게요? 고민하다 그냥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 말문을 막고 내 눈 앞에 내밀어진 건 있는 알바 월급 탈탈 털어 바꾼 최신형 기종의 나와 색깔만 다른 핸드폰이었다.
“저, 번호 좀 주세요.”
여러분도 행복 하세요-! 아까 뒷말을 잇지 못했던 주인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우성 씨
[유민 씨]
[왜 읽고 씹으세요] 오후 5:12
열심히 학식을 씹고 있자 한동안 조용하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보통 읽고 답이 없으면 이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가 멍청이였다. 얼떨결에 홀린 듯 번호를 자판에 찍어주고 그 사람이 감사합니다, 연락드릴게요! 하고 밝은 모습으로 멀어져 가는 걸 보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뭐 해, 이미 늦었어. 그 상황에 정신이 팔려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보고 있던 중 머리에 와서 박힌 대사였다. 그 말을 곱씹으며 보는 둥 마는 둥 하느라 영화가 끝나고 떠들던 전원우에게 보지도 않았던 영화를 스포 당하는 기분이라 괜히 기분이 나빠 다 마신 콜라 컵만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렇게 며칠 연락이 오지 않아 그 사람도 착각을 했나보다, 나처럼 후회를 하나보다 생각을 했지만 이상하게 오늘 아침부터 어딘가에 꽂힌 사람마냥 저렇게 톡을 연속으로 보내는 게 아닌가. 기말에만 집중해도 모자를 판국에 골칫덩어리 하나가 더 생기니 머릿속이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히 거절하지 않고 번호를 건넨 내 잘못도 있으니 이렇게 무책임하게 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숟가락을 대차게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저기요]
[계속 씹은 건 죄송한데요 제가 그 날 너무 당황해서 번호를 드렸거든요]오후 5:16
[번호는 지워주시고 좋은 사람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힘내세요] 오후 5:17
좋아, 난 할 만큼 했어. 홀드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1이 사라진 카톡 방을 쳐다보며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렇게 바로바로 답장하더니 씹은 것 까지는 예상했어도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나보다. 앞에서 다인이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무렴 어때, 짜증났던 아까완 달리 다 끝났다는 후련함에 기말도 잘 칠 수 있을 거라는 무의미한 자신감이 생길 때였다. 핸드폰 화면엔 답장이 연달아서 왔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내 노력과는 달리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내가 얻은 건 핸드폰 너머 한우성 씨가 포기가 빠르지 않고 눈치가 없다는 두 번째 사실을 알아냈을 뿐이다. 자신 있게 들었던 숟가락에 3000원짜리 된장찌개가 다 담기기도 전에 다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우성 씨
[그럼 이건 필요 없으신 건가요?]
(사진)
[좋은 대학교 다니시더라구요^^] 오후 5:20
야, 이거 협박죄로 고소 못 하냐? 뜬금없는 내 질문에 법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던 예체능생 두 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한우성 씨가 보낸 건 다름 아닌 언제 떨어뜨렸을지 모를 내 학생증 사진이었다.
이 정도면 운도 지지리도 없는 거고 악연이라면 악연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내가 실수에 실수를 더하고 다시 실수를 포함해서 이루어진 악연. 정문 앞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을 보고 다시 그 악연이 이루어졌다는 걸 실감만 했을 뿐이다. 팝콘을 주워주고 희망고문을 했고 학생증을 가져다준다는 수고로움 세 개를 더 해서 다른 거 안 바랄 테니까 저녁 한 번만 같이 먹자는 거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어차피 알바비도 들어 왔겠다, 당장 오늘 만나자고 했는데 조금 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올 걸 그랬나보다. 운전석 앞에서 주변을 서성거리는 붉은 색의 머리를 보자 다시 한 번 지난날들의 후회가 밀려왔다. 어차피 이 생각의 종착점은 단순한 합리화 일 텐데 나는 실수를 한 이후로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렴 뭐 어쩌겠어, 합리화를 해서 마음을 진정시키든 받아들이지 못해 길길이 날뛰든 정해진 길은 하나밖에 없는 거다. 두리번거리던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사나운 인상이 순하게 풀어졌다. 이제 와서 안 사실 세 번째는 한우성 씨는 무표정과 웃을 때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거였다.
차에서는 새 차 냄새가 났다.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차 안은 음악과 옆 지나가는 도로 소리만 아니라면 숨 막힐 듯 조용했을 거다. 이쯤 되니 내가 먼저 차 바꾸신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제 어디가 좋으셔서 번호를 달라고 하셨어요? 몇 살이세요, 무슨 일을 하세요? 호구조사부터 간단한 질문까지 약 7개를 돌리며 어떤 말을 해야 나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질까 고민을 하던 중 손가락을 까닥이며 편안하게 운전을 하던 그가 입을 떼었다.
“저 차단하신 건 아니죠?”
“네?”
“아니, 그냥 너무 바쁘신 것 같길래.”
양심이 쿡쿡 마음을 찔렀다.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심 서운하다는 걸 돌려서 말하고 있음에 확신한 나는 어색함에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아니죠, 요즘 시험기간이라 바빠서... ...말끝을 흐렸지만 어쨌든 의미는 전달됐거니 싶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 할 수 있다 이유민, 오늘만 지나면 이런 어색함도 불편함도 다 끝이야. 강하게 나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대체 어디로 저녁을 먹으려고 가는 거지. 가만있어보자, 내가 실수한 게 있고, 받아야 할 것도 있으니 내가 저녁을 사는 건 맞을 텐데,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더라... ...
대충 봐도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경제 감각이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도착해서 내린 곳은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걸 먹으러 가자고 해야 하나. 입구에 서서 가만히 레스토랑 안쪽과 운전석에서 내리는 한우성 씨를 번갈아보며 쳐다보고 있으니 문을 닫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준다. 문득 생각난 한우성 씨에 대한 네 번째는, 웃을 때 어린 시절에 보던 방가방가 햄토리의 아따아따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이 겹쳐지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달고나 모양을 완성시키면 햄스터를 주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아, 곧 죽을 내 통장과 마음의 주마등인가? 괜히 이 사람 앞에서는 겸손해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뭐 어쩌겠어, 난 가난한 대학생인데. 다가오는 인영을 보고 이번에는 말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뭐 좋아하실지 몰라서 그냥 괜찮은 곳으로 예약했어요.”
“그, 저기. 제가...”
“식사는 제가 대접할게요. 솔직히 조금 애 같지만... 막무가내로 밀어 붙인 것도 있고.”
“아... ...”
한우성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연스럽게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갔다. 이거 말린 건가? 말린 건 아니고 어쨌든 해결 된 건 맞는데. 생각했던 스토리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어쩐지 짜둔 계획에 어긋나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대기 손님들이 줄다리기라도 하는 듯 길게 늘어져 있었고 우리를 본 —정확히 말하면 한우성 씨— 웨이터는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인사를 하며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해줬다. 이 도시에 이런 레스토랑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내가 앉아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나를 보며 웃는 말간 얼굴에 뻘줌해져 괜히 창밖을 보고 감탄하는 척 시선을 돌렸다. 하느님, 이런 상황에서는 제가 뭐라고 해야 하나요. 밥을 사준다는데 먼저 운이라도 띄어야 할까요? 그러기엔 제가 또 저 페이스에 말릴 것 같거든요... ...
“맞아, 학생증 먼저 드릴게요.”
“아,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물단지 거지같은 학생증을 건네받고 얌전히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야, 내가 너만 아니었어도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았어. 괜히 꼰대 같은 말을 학생증에게 내뱉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냐, 이왕 얻어먹으러 온 거 분위기 편하게 대화하고, 먹고 깔끔하게 끝내자. 계속 피하는 버릇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쳐주는 게 나았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한우성 씨는 올해 27살이었고, 자기 말로는 그냥 백화점의 꽤 높은 직급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뭐, 경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자세히 설명해도 어차피 몰랐을 것 같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막무가내고 사람을 놀리는 것만 빼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보였다. 약간의 호구조사와 상대 파악이 되자 한우성 씨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민 씨, 근데 번호 줬던 거... 정말 실수였어요?”
올 것이 왔구나. 입 안에서 신나게 씹던 고기를 삼키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네. 그때 너무 상황도 상황이고, 당황했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죄송해요.”
한우성 씨는 생각보다 그렇게 절망적인 표정을 짓거나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않고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끝인 것 같아요! 끝나가는 분위기에 먼저 미련 없이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테이블 옆에 내려뒀던 백팩을 맸다. 후식을 못 먹고 떠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맞아, 옛날에 그랬었지... 라는 추억거리는 생긴 셈이니 마음먹은 김에 한 번에 떠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식사 감사했어요. 다음에 더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랄게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한우성 씨는 고개를 까닥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당당하게 레스토랑을 나와서 내 세계로 돌아오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민서가 나 닮았다고 인형 뽑기에서 뽑아서 내 가방에 달아준 포켓몬스터 에나비 인형 고리가 테이블보에 걸려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우성 씨 정장에 먹다 남은 음식들이 다 쏟아지는 그런 종이 인형 같은 스토리는 내 계획에 눈곱만치도 없었다는 말이다. 이유민 이 멍청한 새끼야 뭐 이딴 실수를 또 하고 그래 니가 무슨 우당탕탕 코믹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야? 내내 유한 표정을 지었던 한우성 씨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진짜 망했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젠 정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제가 미친놈인 거 맞죠.
“아 미친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사람에게 죄송한 게 많은 걸까. 급히 옆에 있는 티슈를 집어 정장에 쏟아진 음식들을 털어냈다. 어떡하지, 이거 내가 세탁비를 드려야겠지? 하고 생각한 내 눈에 들어온 건 발렌시아가였다. 자세히 보니 넥타이는 에르메스였다. 그 중에는 내가 모르는 브랜드도 있었다. 명품 정장 세탁비는 얼마정도 하지? 순간적으로 멈춘 사고회로에 여러 가지 주마등이 스쳐가는 와중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한우성 씨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 상황에서 웃으시면 어떡해요. 미친 건 내가 아니라 한우성 씬가? 갑자기 터진 웃음보에 털던 손도 멈추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웃던 한우성 씨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비싼 옷에다가 먹다 남은 걸 다 쏟았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 괜찮을 리가 없는데.”
“대신 저랑 딱 다섯 번만 더 만나요.”
“예?”
옷 위에 널브러진 음식을 털어낸 한우성 씨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했다. 아니, 상황을 봐서는 장난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앞의 사람은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우성 씨는 여유롭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여기서 내가 알아낸 다섯 번째는,
“다섯 번만 데이트 하면 다 없던 일로 해줄게요. 이것도, 유민 씨가 거절하는 것도.”
한우성 씨는 상당히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거다.
*
그렇게 어이없는 계약 만남을 채결하고 나서부터는 별 다를 건 없었다. 만나서 데이트를 한다고는 했지만 딱히 나에게 뭘 강요하거나 부담스럽게 들이대지 않았고 그로 인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는 그냥 친구 만나러 간다 생각하고 편하게 대했다. 몰아치는 시험기간에는 굳이 연락을 귀찮게 하거나 약속을 잡지 않았고, 오히려 힘내라며 박카스든 학교 카페 기프티콘이든 만나서 사주지 못해 서운한 거 대신이라고 먹고 인증만 해달라고 했다. 우성 씨는 생각보다 유쾌했고, 감정도 풍부했으며, 좋아하는 것엔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첫인상이나 하나의 사건으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 등을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는 좋은 교훈을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종강 날 오랜만에 모여서 술이나 마시자는 애들의 성화에 아직 수업이 하나 남은 원우와 석민이를 기다리며 교내 카페에서 시간을 때웠다. 온 김에 저번에 받았던 기프티콘이나 써야겠다, 싶어서 블루레몬에이드를 들고 자리에 앉아 사진 하나를 찍어 밀려있던 카톡방을 내려 우성 씨 이름을 찾았다. 오늘 종강 했어요. 잘 마실게요. 키보드 자판을 꾹꾹 눌러 사진과 함께 야무지게 전송하고는 빨대로 음료를 한 모금 마시니 앞의 눈 네 개가 따갑다.
“뭐야, 이유민 만나는 사람 있어?”
“이거이거 심상치 않은데요.”
“둘 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예요.”
변다인 너는 하여튼 입이 방정이지. 얄밉지 않게 째려보고는 금세 답장이 온 핸드폰을 들었다. 헉 정말요? 그럼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으시면 만나실래요?? 햄스터가 신나서 쳇바퀴를 도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긍정의 대답을 전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자 승희 언니와 다인이가 카페 테이블을 박차고 속사포와 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방금 이유민 웃었어? 웃었지? 네, 언니. 제가 봤어요. 요즘 만나는 사람 있죠? 유민아, 나는 네가 하루 빨리 그 개자식을 잊고 행복하기를 바랐어... 언니는 이제 여한이 없다. 더 듣고 있어봤자 영양가도 뭣도 없는 말이기에 손사래를 치며 말 꼬리를 끊어버렸다. 만나는 사람은 무슨...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시선을 비틀며 내려온 핸드폰 액정에는 그럼 그때 봬요! (이모티콘) 하며 햄스터가 춤추고 있는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냥, 아는 사람. 이번 만남은 벌써 세 번째였다.
*
종강과 세 번째 만남 그 이후로도 시간은 흘렀고, 초여름이라 그냥 후덥지근했던 날씨는 끈적하게 녹아내려 아스팔트 바닥에 눌어붙어 지나간 추억이라는 글자만 남게 했다. 오늘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네 번째 만남이었다. 맨날 대충 입고 갔던 후드티를 집었다 다시 내려놓고는 셔츠를 꺼내들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그 이후로 왜 자꾸 그 말이 생각을 싸고도는지 모르겠다. 감아서 물이 툭툭 떨어지는 머리를 드라이기에 말리며 말리는 바람에 잡생각들이 모두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성 씨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가야지, 하고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저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기다리는 거야. 괜히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답답한 셔츠를 펄럭이다 제일 위 단추 하나를 풀었다. 주말의 영화관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우성 씨는 카라멜 팝콘통과 콜라 두 잔을 들고 오며 내게 콜라 한 잔을 건넸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 쪽은 항상 저보다 더 일찍 오시잖아요.”
“그래요? 좋아하는 사람보다 늦게 오면 예의가 아니죠.”
아, 또 그런다. 가끔 이렇게 훅 이런 멘트를 날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정색하며 우성 씨의 옆구리를 치고는 했다. 딱히 부담을 많이 가지는 선은 아니라 그렇게 싫다고 하지는 않아서 그런지 매번 이렇게 싫어하는 나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우성 씨는 이쯤이면 슬슬 됐을 것 같다며 영화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간 영화관 안은 컸지만 사람은 없었다. 뭐야, 내가 너무 일찍 와서 미리 들여보내 준 건가? 어영부영 눈치를 보며 우성 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영화관의 조명이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놀란 눈으로 옆을 바라보니 언제나 짓고 있던 웃음 그대로의 우성 씨는 어깨를 으쓱이며 팝콘통을 가운데로 옮겨줬다. 무슨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본 이벤트가 지금 내 상황에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의자에 등을 못 붙이고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갈피를 못 잡고 있자 우성 씨는 고개를 까닥이며 내 어깨를 가만히 등받이에 붙여주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편하게 영화 본다 생각하고 봐요. 이상한 거 안 해요.”
벙 쪄있는 나를 두고 우성 씨는 세상 편하게 다시 자리를 잡고 영화에 집중했다. 속삭였던 귓가가 괜히 화끈거려서 귓바퀴를 매만졌다. 영화관 안에는 나와 우성 씨 단 둘밖에 없었지만 내 귀에는 수많은 소리가 울렸다. 영사기가 조용히 돌아가는 소리,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대화와 그 배경음, 팝콘통에서 울리는 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 화면에서 들리는 듯한 선명한 심장소리까지. 끊임이 없는 그 소리가 나인지 그인지 단지 효과음일지 모를 그 간극의 사이에서 내게 들려온 건 엑스트라의 덤덤하게 소리치는 음성이었다.
—사랑하면...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거 어디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이죠.
나는 아직도 역부족이었다. 가끔 우성 씨가 장난이라고 던졌던 그 수없이 많은 대사들도, 약속시간보다 몇 시간이고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도, 매번 헤어질 때 오늘은 불편하지 않았나 물어봤던 것도, 계속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다녔던 것도, 웃었던 것도...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게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깨달게 된 건 너무 해로웠다. 몸 전체로 뻗어가는 물길이 골짜기처럼 졸졸 흐르다 댐이 터진 것 마냥 폭포처럼 흘러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이 사람이 딱 다섯 번만 만나자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섯 번의 만남 안에 꼬실 수 있으니까 그랬겠지...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어 주먹으로 옆에서 영화를 잘 보고 있던 우성 씨의 팔을 퍽 쳤다. 그러고선 고개를 손에 파묻었다. 옆에선 유민 씨?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망했다. 격앙된 사랑이 차오른다.
*
내가 좋아한다고 인정하자 여태 귀찮거나 아무 감정 없었던 연락 하나하나가 소중해졌다. 네 번째 만남의 끝은 사랑을 깨달은 나와는 달리 무미건조했다. 아직 한 번의 만남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성 씨는 마지막인 것처럼 굴었다. 그에 다급하고 초조해진 건 내 쪽이었다. 핸드폰 액정에 반사된 오후의 햇빛이 천장을 가득 채우곤 일렁였다. 그 이후로 우성 씨는 연락도 잘 되지 않았고 용기 내서 보낸 연락 몇 개는 금세 끊기곤 했다. 나 같아도 열심히 사랑을 퍼주고 정을 줬는데도 돌아오는 게 없으면 마음이 다 비어버려 시들해질 것 같았다. 물론 요즘 일이 바빠 연락이 잘 되지 않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이미 칼 같은 답장에 익숙해진 내가 다시 달팽이 같은 답장에 적응을 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일렁이는 햇빛을 눈으로 쫓는 내가 주인 기다리는 반려동물 같기도 하고 잡을 수 없는 걸 찾아 떠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여기서 모든 걸 다 접고 숨을 삼킨다면 또 언젠간 지나갈 일이다. 하지만 그 지나갈 일들은 지독하게도 지나갈 때까지 나를 붙잡고 끌어내리게 만들 거다. 카톡. 짧은 효과음이 울렸고 잔뜩 바람을 불어 빵빵한 풍선껌은 알바 오라는 사장님의 연락으로 인해 힘없이 얼굴 구석구석 짜증나게 달라붙었다. 손을 들어 덕지덕지 달라붙은 미련과 기대를 문질러냈다. 이렇게 누워만 있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이는 건 창 밖의 푸른 하늘이었다.
그렇게 며칠, 될락 말락 한 연락을 붙잡고 있자 잠자코 기다리던 성화가 들끓었다. 전하고 끝나든 아니든 마지막 만남을 두고 질질 끌어가며 희망고문 같은 걸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고정되어 수신만 하는 소통이란 없는 거라고 문학 수업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작열하는 태양 감촉을 불러들여 여름 나는 나뭇잎 큰 귀 꽂고 02시 20분 다이얼을 돌리는 화자를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우성 씨, 혹시 내일 시간 되시면 만나실래요? 핸드폰을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래요. 라는 답이 왔다. 마지막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가 셔츠 넘어 목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찾아 온 감정은 자장가마냥 여태 겪었던 연애의 부정적인 면들을 잠재웠고 꼭 이럴 때면 이상하게 이유 없는 자신감과 패배감이 번갈아가며 마음을 때리곤 했다. 조밀하고 발바닥 하나 겨우 내려놓을 수 있는 물길 사이로 비행기가 거꾸로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러니까, 한숨도 못 잤다. 괜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고, 그러자고 억지로 연락을 이어가기엔 때를 놓쳐 삐거덕거리는 관계만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팔 끝을 매만지다 고개를 드니 못 자서 일찍 나온 나보다 또 먼저 나와 웃으며 인사하는 우성 씨가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보다 늦게 나오면 예의가 아니죠. 전에 했던 그의 말이 떠올라 괜히 또 울컥했다. 지금도 처음과 같은 마음일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술은 본드로 붙여놓은 것 마냥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 구라다. 사람 마음은 갈대 같아서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고 부는 바람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렇게 기대하던 만남이었는데 다니는 내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모든 걸 지배한 것 같아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길게 늘어져 여태 개인적 부재를 다 삼키고 메꿔줬으면 좋겠는데 우성 씨는 평소와 같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는 말 뿐이었다. 새까만 밤 안에 갇혀있는 가로등만이 겨우 가는 길을 밝히고 있었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아... 여기예요. 집.”
“그래요? 생각보다 가깝네요.”
둘 사이에는 침묵이 돌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땅바닥에 시선을 흩뿌리다 우성 씨 얼굴을 쳐다봤다. 우성 씨는 골목길의 어둠을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기시감이 솟구쳤다. 우성 씨는 평소와 같지 않고... 분명, 어딘가...
“유민 씨, ...아. 자꾸 이래서...”
힘들어 보였는데. 말끝이 흐릿해지더니 우성 씨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쓰러졌다. 온 몸이 불덩이였다. 덥다고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릴 리가 없는데, 나름 배려한다고 스킨쉽은 물론 간단한 터치조차 안 해서 눈치 없는 내가 그냥 넘어간 탓이었다.
*
침대 옆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죽은 눈을 하고 여전히 옆에 있는 우성 씨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쓰러진 우성 씨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고이 모셔두고, 남아있던 해열제를 털어 먹이고, 물수건에 극세사 이불까지 목 끝까지 덮어주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순식간에 폭풍이 지나갔다. 그렇게 아프면 나중에 만나자고 하면 될 걸 굳이 만나러 와서 사람 걱정을 하게 만든다. 땀을 왜 그렇게 많이 흘리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답이 그냥, 더워서요. 라는 간단한 말을 믿어선 안됐었는데. 속으로 삼킨 미련은 속 훤히 아파 서늘했을 거다. 지금은 열이 좀 내렸겠지.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를 물수건을 화장실 앞으로 던져놓고 손을 이마에 가까이 댔다. 수장의 온도와 비슷한 느낌에 안도하며 손을 떼려던 그 때 우성 씨가 눈을 뜨곤 손목을 잡았다.
“아 씨, 깜짝이야. ...일어났어요?”
“유민씨 집이에요?”
그럼 제 집이지 여기가 어디겠어요. 잡힌 손목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우성 씨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가득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그러고는 이제야 눈치 챘는지 황급히 다시 함부로 손대서 미안하다며 잡은 손을 풀어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여름 햇살에 어딘가에 홀린 듯 이번엔 반대로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바라던 속눈썹, 눈커풀, 콧망울이 보이고 설움이 몸속에서 잔물결 친다.
“왜 아프다고 말 안 했어요? 아프면 아프다고, 나중에 만나자고 하면 될 일이잖아요.”
“유민 씨가 먼저 만나자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요.”
입술 끝까지 차오른 생동감은 한 번 터지고 나니 멈출 줄을 몰랐다.
“나중에 제가 만나자고 할 수도 있잖아요. 왜 사람 걱정시키고, 아 진짜 짜증나. 바쁜데다가 아팠으니까 연락도 자주 못 한 거 아냐. 나 혼자 걱정하고 아주 그냥 북치고 장구치고 소설 한 편 다 쓰고 영화까지 만들었네. 마지막이라서 재밌게 만나고 싶었는데, 나는, 그냥 아프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걸.”
북받친 감정은 입술을 넘어 눈물샘까지 장악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듣던 우성 씨는 거의 얼빠진 표정을 하고 듣다가 잡힌 팔을 끌어당겨 볼을 감싸더니 이마를 맞댄다. 줄줄을 넘어 이젠 거의 후두둑인 수준의 눈물이 앞을 가려 거의 코끝까지 다가온 우성 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건 확실히 보였다. 뭘 잘했다고, 웃어. 괜히 주먹을 쥐곤 팔뚝을 때렸다. 양 뺨을 감싼 온기가 눈가를 닦아냈다. 나는 이 상황이 쪽팔리고 서러워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우성 씨는 너무 당연한 듯이 태연하게 나를 빤히 쳐다봤다. 훌쩍거리는 소리만 들려 민망한 마음에 뭐라도 말을 하려던 그 때 우성 씨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대신에 다음에 만날 땐 안 그럴게.”
다음에 만날 땐? 얼빠진 내 표정이 선명했다.
“그거 무슨 뜻인데요.”
“뭐긴 뭐예요.”
이제 사귀는 거지. 들끓는 짧은 동안이었다. 이건 뭐 무드도 없고 감동도 없었지만 맞닿은 피부가 화끈거렸다. 그 말 외에는 모르겠다는 듯 눈빛을 주고받았다. 스스로에게 하는 부드러운 원망감과 심장부 깊은 곳에서 심장이 쿵짝 장단을 쳤다. 어느새 볼에서 떨어진 손은 스멀스멀 깍지를 완성해냈다. 다시 한 번 이마를 쿵, 하고 맞댄다. 눈부심이 표나게 두드러진다.
“뽀뽀해도 돼요?”
눈을 치켜뜨고 마주했다. 힘이 힘껏 실린 입꼬리가 자리를 찾아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구순 새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웃음이 다 가시기도 전에 잡힌 깍지에 힘을 실어 추진력을 받아 그대로 입술을 마주하고 뒤로 몸을 밀어냈다. 갑작스런 무게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부를 붙잡지 못한 이불이 풀썩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바닥에 붙어있던 발바닥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터질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공기 중에는 먼지 대신 파란색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완벽한 한여름의 시작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