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때?"
성큼성큼 걸어와, 확 들어온다.
그리고, 지금. 아이런의 눈 앞에는 렌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저기요, 장난치지 말구요"
"장난 아닌데?"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
한순간에 분위기는 줄다리기처럼 팽팽해졌다.
"..."
"왜? 네 말마따나 그렇게 미안하면 같이 자는 게 맞지"
위험하다...
얼굴이 밀착된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의 얼굴에 담긴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동안은 잘 보지 못했던 짙은 초록색의 눈동자부터, 새하얀 피부, 이마를 가린 곱슬거리는 머리.
그리고 지금 위험한 말을 내뱉는 저 입술까지.
조각해 놓은 듯한 그의 얼굴은 심지어 달빛으로 인해 분위기가 배가 되었다.
"그래도...이런 제안은 당황스럽잖아요"
당황한 그녀의 태도가 웃겼는지, 한순간에 차가워 보이던 얼굴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터지는 웃음보.
퍽-
장난인 걸 깨달은 아이런은 곧장 베개로 렌의 옆얼굴을 가격했다.
그러나, 렌의 웃음은 쉽게 그치질 않았다.
"그만 웃으라구요! 오밤중에 장난 치니까 좋아요?"
"좋은데? 그러게 장난을 누가 그렇게 진지하게 받으래?"
베개로 맞아도 좋단다...
그런데 그거에 설레는 난 뭐지?
"오늘 너무 고생했나..."
"뭐라고?"
"이제 그만 웃고 올라가시죠? 나도 좀 자게"
"왜, 이제 미안한 마음은 없어졌어?"
"네, 미안한 마음은 이제 싹 사라지고 피곤함만 남았네요. 진짜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아이런은 나뭇잎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누워 버렸다.
아이런이 그렇게 나오자, 렌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천장 위로 올라가 잠들 준비를 한다.
"잘 자. 내일은 좀 성깔 죽이고"
"..."
대답 없는 그녀의 태도에도 렌은 아랑곳 않고 잠을 청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렌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나, 피곤하다고 먼저 돌아누운 아이런은 이상하게 잠들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원인 모르게 심장이 마구 쿵쾅댔기 때문이다.
결국, 잠들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아이런은 심장 부근에 손을 대 보았다.
심장은 아까보다 더한 속도로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뭐야, 나 왜 설레?"
이유라도 알면 괜찮을 텐데 심장이 이유 없이 뛰고 있었다.
.
.
.
다음날 아침.
"하암..."
여느 아침과 다를 바 없이 렌은 상쾌하게 일어나 천장 위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노동 아닌 노동을 해야 하는데, 이유 없이 몸이 가뿐했다.
가뿐한 몸을 이끌고 침대로 가보니...
"으으..."
정작 노동을 시킬 사람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침대 위에 아직까지 누워 있었다.
진짜 피곤했나봐. 나뭇잎 이불까지 걷어차고 잘 정도로...
"어이, 일어나봐. 오늘도 배 만들어야지"
"흐으....추워..."
"...!!"
깨우려는데 상태가 이상했다.
입술을 파래지고, 몸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인간의 온도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는 알 방도가 없었으나, 문제가 생긴 건 분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생기가 넘치던 사람이, 오늘은 병든 닭마냥 축축 늘어지는 걸 보니...
"이봐, 정신 차려 봐. 어디 아픈 거야?"
"모르겠어요...그냥...못 일어나겠어요..."
이 정도면 무슨 문제가 생긴건데...
렌은 나무 찬장을 뒤져 약초와 수액을 섞은 액체를 찾아냈다.
별의별 좋은 걸 다 때려 부어서 엘프가 걸린 거의 모든 병은 왠만하면 이 약물로 치료가 가능했다.
그러나, 엘프 사이에서만 통하던 약물이라 사람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고 봐야 하는 법. 이대로 놔뒀다가는 더 아플 것 같았다.
"이봐, 잠깐만 일어나봐."
렌은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아이런을 억지로 안아 일으켰다.
몸을 가눌 힘도 없는지 그녀의 몸은 온전히 그가 지탱해야만 했다.
그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하고, 한 팔로 그녀의 상체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약물이 담긴 공병을 마개를 따고, 그녀의 입으로 살짝 흘려 보냈다.
다행히 삼킬 힘은 있는지 입 안으로 들어가는 액체를 한 모금씩 잘 삼켜냈다.
공병이 전부 비워질 때쯤, 아이런의 정신은 이제 완전히 깨어났다.
눈을 뜨고 상대랑 대화할 수 있는 수준까진 도달했으나, 아직까지 몸을 의지대로 움직이기에는 너무 아팠다.
"으윽..."
억지로라도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반동을 이용해 일어나니 순간 머리가 어찔했다.
결국 아이런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못 일어나겠으면 오늘은 누워 있어"
그런 그녀의 상태를 보자, 렌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약초에 능한 만큼, 병의 상태에도 능한 그였다.
다행히 사람과 엘프의 상태가 거의 비슷한지 그녀의 상태가 엘프가 감기 걸렸을 때와 똑같았다.
그게 심각하게 걸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괜찮아요? 배 만들어서 나 빨리 쫓아내야 하는 거 아닌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아이런.
아픈 상태에서도 렌의 처지를 배려해주는 그녀의 모습이 렌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번도 닿아본 적 없는 팔 안쪽 살갗이 닿은 것처럼, 낯설고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러게 너 빨리 쫓아내야 하는데..."
낯선 그 느낌을 빨리 떨쳐내려 렌은 오히려 능글맞게 받아쳤다.
그러나, 이죽거리는 렌의 태도에도 아이런의 입가에는 호선이 죽 그어졌다.
그리고, 그어진 호선 사이로 웃음소리가 조금씩 킥킥대며 비집고 나왔다.
"뭐야, 왜 웃어?"
"그냥...그쪽이 뭔가 재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이렇게 아픈 상황에 걱정을 해줬으면 더 심각하게 느껴졌을 텐데 평소대로 장난치잖아요. 내가 심각해지지 않도록"
"널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저한테는 위안이 됐네요"
고마워요. 라며 웃는 아이런.
순간, 그녀의 미소가 렌의 눈을 투과해 뇌리에 박혔다.
초승달 모양으로 접힌 바다를 담고 있는 눈.
한껏 올라가 동글동글 모양이 귀여워진 광대뼈.
벌어진 입술과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재미있는 음성.
그리고, 서로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게 렌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는지, 심장까지 타고 내려가 조금씩 뛰게 했다.
"그쪽은 괜찮아요?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는데?"
얼굴이 붉어진 줄도 모르고 있던 렌한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 많이 더운가?"
"토마토라고 알아요? 지금 되게 그거 닮았는데..."
토마토든 마토마든 그건 지금 중요치 않았다.
문제는 그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얼굴이 빨개졌다는 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그리 완벽주의 성향은 아니었으나, 얼굴이 붉어졌다는 걸 들킨 건 왠지 좀 민망해지는 상황이었다.
"마토마? 그건 뭐지?"
그래서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민망해지지 않게끔...
"토마토요. 그거 가끔씩 먹어봤어요"
"...음식이야?"
"네, 근데 되게 빨개요.물감 칠한 것마냥"
"빨갛다고?"
"네. 그래서 얼굴 빨간 사람을 보면 보통 토마토 같다며 놀려대요"
"내 얼굴색 얘기는 그만하지?"
"어제는 그쪽이 나 갖고 장난쳤잖아요. 이제는 내가 장난 좀 쳐 보려구요"
이죽거리며 웃는 저 얼굴이 왠지 얄미우면서도 두근거렸다.
상황만 봐서는 얄미운데, 그러면서 동시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두 가지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렌의 머리를 제멋대로 조종했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생각을 떨쳐 내려 렌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에요? 어디 가요?"
"잠깐 산책 좀. 자고 있어. 금방 올게"
"알았어요"
집 밖을 나가려는 시늉을 하자, 금세 눈꺼풀이 닫힌 아이런.
렌은 못 본 체 하며 집 밖으로 나갔다.
.
.
.
"이제야 가네. 지긋지긋한 새끼."
한편, 집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카센은 렌이 나가자마자 집 가까이 접근했다.
어젯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기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납치해오는 것. 그리고 그 기술을 전수받는 것.
하이엘프가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쪽팔렸지만, 엘프가 아니기에 기밀유지만 잘 하면 될 것 같았다.
집에 나 있는 창을 통해 보니, 심지어 자고 있었다.
와...오늘 나 신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건가?
속으로 쾌재를 부른 카센은 조심스레 집 안으로 접근했다.
집 자체가 드워프들이 지어준 통나무 집이라 상당히 삐걱거리는 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소리가 안 나게 주의 해야 했기에 카센은 최대한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한 발짝씩, 소리가 나나 안 나나 먼저 바닥에 살짝 비벼보고는 튼튼히 고정되어 있는 바닥이다 싶으면 그제서야 한 발짝 내딛었다.
그렇게 온갖 주의를 기울여 침대에 도착한 그.
주의를 기울인 보람이 있는지, 문에서 침대까지 오는 중에 아이런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카센은 옳다구나 하며 가져온 망태기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누에고치로부터 얻은 실로 촘촘히 짠 고가의 망태기였다.
게다가 솜씨 좋은 장인 드워프에게 맡겨 수면 가루까지 뿌려 그의 계획에 맞게 제작했다.
망태기를 꺼내든 카센은 입구를 잡고는 아이런의 몸에 단번에 씌웠다.
수면 가루가 정말 꼼꼼히 뿌려진 건지 어떠한 반항도 없이 가만히 망태기 안에 들어왔다.
완벽하게 계획에 성공한 카센은 그 길로 줄행랑을 쳐 렌의 집에서 바쁘게 벗어났다.
.
.
.
"...내가 왜 이러지 힌?"
[뭐가?]
"아까 그 애랑 대화를 나눌 때 낯선 느낌이 들었어...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느낌"
[무슨 소리야 그게?]
"모르겠어...그냥...그냥 이상했어"
이유도 모르게 웃는 모습이 예뻐 보였어.
"한 번도 다른 이한테 심장이 반응한 적 없는데 이상하게 웃는 모습에 반응했어"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런데 지금 난 너무 멀쩡해"
어제의 막노동을 다시 하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네 상태는 나도 모르겠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 몸인데 나도 모르겠어"
[다른 이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반응이 오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너 툭하면 엘프들이 너 하프엘프라며 신분 갖고 비아냥대서 나랑만 놀았잖아]
"왜 남 아픈 곳을 찔러대"
[그게 아니라, 나랑만 놀고 그 시절 이후로 한 번도 다른 이와 접촉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그런가? 일리는 있는데"
[이제 좀 다른 이랑 관계를 맺어봐. 그럼 그런 반응도 없어질 거야]
"...좀 더 적극적으로 부딪혀보라는 말이군.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건 그렇고, 너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내 낮잠 시간이 다가오는 건 알고 있어?]
"알았어. 그만 돌아가자"
렌은 힌의 등 위로 올라탔다.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렌은 그저 집에 돌아간다는 생각 뿐이었다.
.
.
.
"나 왔..."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에 렌은 몸을 흠칫 떨었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이런 류의 공기는 전혀 못 느꼈다.
무언가 어긋난 걸 알아챈 렌은 곧바로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
아이런이 누워 있어야 할 침대가 비어 있었다.
이불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뭐야...어디 갔어?"
렌은 사태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도망갔나?"
그 몸으로 도망가는 건 불가능 했다.
"숨어 있나?"
그러나, 집 안에 숨을 곳이라고는 벽장 뿐이다. 그리고 찾아보니 거기에 없었다.
렌은 어떻게든 단서를 찾으려 집안 전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단서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렌이 침대에 드러누운 순간...!
"...!!"
수면 가루 특유의 냄새가 났다.
라벤더의 향과 유사해 많은 엘프들이 속아 넘어가는 그 냄새.
침대에 일절 뿌리지 않던 라벤더 액체가 갑자기 날아왔을 리는 없고, 답은 수면 가루 하나였다.
수면 가루 냄새라면 아이런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놈이 납치해 간 거야"
렌은 자신도 모르게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곧바로 납치해간 범인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수면 가루는 위험한 가루로 분류됐기 때문에 엘프 시장에서 몰래 유통되고 있었다.
그리고, 유통자는 단 하나.
바로 드워프들이었다.
"...드워프 놈들에게 명단 좀 내놓으라 해야겠군"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는 렌의 모습은 가히 살인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