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닷바람, 끼룩대며 우는 갈매기 소리, 찰박대며 흘러가는 파도.
이 모든 것을 한 눈에 담으며,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장소는 배 위였으며, 그 중에서도 돛대가 가장 좋은 장소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이런! 그곳에서 뭐하는 거냐"
다름아닌 바이킹 족장의 딸, 아이런이었다.
"그냥 앉아서 쉬고 있어요!"
"위험하지 않게 때 되면 내려오거라!"
"네, 아빠!"
근육이 툭툭 불거진. 마초상의 족장 아빠 불스와는 달리, 아이런은 가히 여신급의 미모를 뽐냈다.
바다의 색깔을 고스란히 옮겨담은 색깔의 눈동자와, 물방울 같은 콧망울, 그리고 그 아래에 고인 도톰한 붉은 입술, 조개 속에 품어진 진주 같은 피부까지.
뿔 달린 모자로 덮힌 머리칼은 해질녘의 석양빛을 연상케 하는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심심하다...지금 어디쯤 가고 있지?"
한참 동안 돛대에 앉아 있어 심심했던 아이런은 주머니 속에서 나침반을 꺼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바다에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익혀야 할 감각은 다름 아닌 방향감각이었다.
현재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가 다른 어떠한 기술보다 우선시되야 하는 게 바이킹의 운명이었다.
"어?"
그저 심심풀이로 꺼내든 나침반은 지금 향하고 있는 남서쪽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즉,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의미였다.
아이런은 방향키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방향키를 잡고 있는 사람은 술꾼으로 유명한 하시 아저씨였다.
돛대 위에서 봐도 그가 휘청이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심각한 만취 상태였다.
"아저씨!"
아이런은 다급하게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하시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만취 상태. 그의 귀에는 본인의 흥얼거림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런이 내려가려고 하는 순간...
푸우우우
바닷물이 뭔가 크게 요동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폭풍처럼 어마어마한 물소리가 아이런의 고막을 강타했다.
그 자극에 옆을 돌아본 아이런의 시야에는 다름 아닌 바닷물로 이뤄진 토네이도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딱 봐도 저곳에 휩쓸렸다가는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잠겨 죽을 터였다.
"아빠, 아저씨 좀 말려봐요!"
아이런은 다급하게 아빠 불스를 불러봤지만, 그 또한 다른 일에 열중해 아이런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내려가기도 전에 먼저 토네이도에 휘말릴 것 같았다.
아이런은 서둘러 옆의 로프를 꽉 잡고는 돛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돛대를 내려가는 도중에, 앞을 보면 토네이도가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아 그녀는 정신을 잃는 줄 알았다.
돛대의 중간쯤 타고 내려왔을까...어느새 배는 토네이도 바로 직전으로 다가왔고, 아이런은 있는 힘껏 하시를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아이런의 말에 돛대 위를 올려다본 하시는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꺠달았다.
어느새 배는 토네이도 기둥 옆을 지나가기 직전이었다.
하시는 허둥대며 방향키를 돌렸지만, 그가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아이런!!"
순간, 계속해서 돌아가는 토네이도 속으로 아이런이 휩쓸려 들어갔다.
.
.
.
"꺄아악!"
토네이도는 아이런의 몸을 덮치고는 엄청난 속도로 돌려댔다.
돌려지는 와중에 바닷물은 계속해서 아이런의 몸 속으로 들어왔고, 아이런은 짜디짠 바닷물에 잠겨 눈도 못 뜬채 허우적대기 바빴다.
다급하게 손을 휘저어 잡히는 거 아무거나 잡으려고 해봐도, 잡히는 건 없고, 그나마 잡아봤자 그녀의 손을 찔러대는 날카로운 물체들로 금방 놓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바닷물 안에 같이 휩쓸린 물체들로 인해 아이런의 몸은 여기저기 멍이 들었다.
한참을 허우적대다, 결국 아이런은 뒷목을 강타한 나무 각목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는 그대로 토네이도 안에 갇혀 버렸다.
.
.
.
"...!"
통나무집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엘프족의 수장 바하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자신과 연동된 수정구슬이 갑자기 징징 요란하게 울려댔기 때문이었다.
바하란의 앞에 놓인 수정구슬은 갑자기 해안가의 풍경을 띄웠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해안가.
그러나, 수정구슬은 해안가의 한 지점을 확대하고, 그제서야 어떠한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체는...
"...인간?"
외부의 물체가 들어온 것도 놀라운데 그 물체가 심지어 인간이란다..
도대체 판슬랜드의 경계를 어떻게 했기에 인간이 들어오는지...
인간이 들어온 것은 5000년 전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랄!"
바하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애완새 랄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거대한 몸집의 화려한 새가 바하란의 앞에 나타나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아무리 애완새라고 해도, 별 일이 없으면 좀처럼 자신을 부르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주인이 이토록 다급하게 자신을 부른 이유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사태를 감지한 랄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랄의 기대에 맞춰 바하란은 명령을 내렸다.
"남서쪽 해안가. 그곳에서 수상한 인간이 발견됐다. 정신을 잃은 것 같으니 최대한 빨리 네 등에 태워 내게로 데려오도록.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워터엘프들도"
랄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세차게 날갯짓을 하며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렸다.
.
.
.
"제기랄...렌!"
한편, 남서쪽 바다에서는 3M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의 워터엘프들이 누군가를 처절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깝치지 말랬지?"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렌이었다.
최상위권의 능력을 가진 하이엘프 엄마와 인간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하프엘프.
보통 하프엘프들은 그냥 엘프들에게도 뒤지기 마련이지만, 렌은 달랐다.
궁술이면 궁술, 의술이면 의술 등 모든 학문에 대해 어느 정도의 깊이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 날 때부터 그의 몸에 탑재된 마력이었다.
엘프들 중의 최상위권인 하이엘프들의 능력조차 그의 능력 반의 반도 따라갈 수 없었다.
상대도 안 될 압도적인 능력의 차이로 그는 엘프들 사이에서 '왠만해선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은 놈'으로 통하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에게 죽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뽑은 신입 워터엘프들은 '역대급의 기골'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고 들어온 놈들이었다.
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해 싸움이 붙었다 하면 왠만하면 져본 적이 없다고 소문이 난 이들이라,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렌을 건드린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워터엘프 둘이서 서로 본인의 피지컬을 자랑하며 놀고 있었다.
서로 자신을 뽐내기에 바쁜 그들은 경계 태세를 느슨히 했고,그걸 바닷가를 지나가던 렌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상황이면, 그냥 넘어갔으나. 문제는 그들이 서로 붙느라 튀기는 물의 양이었다.
자신의 애완새를 타고 지나가던 렌에게 갑자기 엄청난 양의 물벼락이 쏟아졌고, 기분이 나빠진 렌이 바닷가를 돌아보니 덩치 큰 두 놈이 붙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이 잡친 렌은 앞뒤 재지 않고 두 놈의 장난에 끼어들었다.
"어이! 거기 덩어리들!"
그러자, 렌의 말에 두 워터엘프들은 서로 붙다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지금, 우리 말한 거냐?"
"여기 너네 말고 더 있어?"
두 워터엘프들의 목소리는 상당히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렌은 그저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너, 우리가 누군지는 알아?"
"덩치만 큰 두 덩어리들 아닌가? 뭐, 말이 더 필요해?"
순간, '덩어리'라는 말에 두 워터엘프들의 뚜껑이 열렸다.
"이 멸치 같은 놈의 자식이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두 워터엘프들이 바다에서 걸어나오려 하는 순간,
"쯧"
렌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손가락 끝에서 스파크가 튕기며 두 워터엘프 사이로 날아갔다.
갑자기 바닷속 바닥이 진흙처럼 변하며, 두 워터엘프들의 발이 푹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변했다.
"너네야말로 내가 누군지 몰라?"
"이익...네가 누군데! 멸치 같은 새끼가"
"왜, 기억 안 나? 너네 골목대장 시절에 한번쯤은 들어봤을 텐데?"
순간, 두 워터엘프들 뇌리 속에 찰나로 한 순간이 재생되었다.
[밖에 나가면 꼭 렌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렴.]
어린시절. 쐐기로 엮은 공으로 족구를 하려 밖으로 나갈 때쯤이면 그들의 엄마는 꼭 주의를 주곤 했다.
주의사항들이 여러개라 가끔씩 몇 개를 빼먹곤 했었지만, 딱 하나만큼은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렌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라.]
어린시절 그렇게 귀에 딱지가 들어앉도록 주의를 받았던 놈이 이놈이라니...
"이제야 기억나냐? 멍청한 놈들..."
"너, 우리가 여길 나가는 순간 네놈의 제삿날이라는 걸 명심해야 할 거야"
"일단 나와보던가 그럼."
[셋 다 그만!]
잔뜩 열불이 난 두 워터엘프들과 이미 꼭지가 돌아버린 렌의 대립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다름 아닌 바하란의 새, 랄이었다.
"오랜만이야, 랄?"
[닥쳐라, 렌. 어린 애들을 상대로 이게 뭐하는 짓이냐?]
"누가 늙은이 새 아니랄까봐 훈수는.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가 뭐야? 나 훼방 놓으려고?"
그러자, 랄은 대답 대신 등 위에 태운 인간을 내보였다.
"뭐야, 외부인 아니야?"
[네 생각이 맞다]
"외부인이 어떻게 여기를...."
아, 맞다. 저 두 덩어리들....뇌에 든 게 없지.
렌은 그제서야 깨닫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두 워터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뭐, 이 자식아!"
"니들, 경비가 뭔지는 알고 이거 지원한 거냐?"
"뭐?"
"외부인이 들어온 적 없는 판슬랜도에서 외부인이 들어왔어. 그것도 네놈 둘이 경비를 맡은 남서쪽 해안가에서."
"...."
"네놈들의 경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겠냐?"
[오랜만에 렌이 맞는 말을 하는군]
순간, 두 워터엘프들의 두 눈에 이글거림이 더 불타올랐다.
렌이 저러는 것도 열불 나는데 랄까지 거든다니...
경계 태세에 대해 할 말은 없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뭔가 분했다.
"하지만, 토네이도 기둥이 있으니 왠만하면 안 들어오지 않습니까...!"
"네놈들은 농땡이 칠려고 여기 지원했냐? 토네이도가 뭐 다 알아서 해준대?"
"닥쳐 넌!"
"뭐 이 자식들아?"
둘의 시건방진 말에 다시금 꼭지가 돌아버린 렌은 손바닥에 보랏빛 구(球)를 띄워 던질 태세를 갖추었다.
[셋 다 그만!]
그러나, 렌의 구는 끝까지 발사되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아무리 새라도 바하란의 애완동물인 이상. 바하란의 지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렌, 넌 아무리 화가 나도 마력은 되도록이면 쓰지 마라. 그리고 너네 둘은 따라오도록]
"하지만 렌이...!"
순간, 렌은 자신이 걸어놨던 마법을 랄이 못 본 새에 휘리릭 풀어버렸다.
[렌이 뭘 했나?]
"아, 아닙니다"
워터엘프들은 그대로 패잔병처럼 철벅거리며 바다를 나와 랄을 따랐다.
[너네 둘은 그대로 바하란의 집으로 가고, 렌. 너는]
"나는 우리 힌 타고 내 집으로 갈 건데?"
[아니, 넌 여기서 해안가를 지켜라. 얘네 둘이 없어서 해안가를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쟤네들의 업무를 왜 나한테 떠넘기는데?"
[네가 여기 있으니까]
렌은 반박하려 했지만, 바하란의 재촉을 들은 랄은 그 길로 워터엘프들을 이끌고 날아가 버렸다.
"제멋대로야. 하여튼 늙은이나, 그 새나"
.
.
.
"도대체 경비를 어떻게 한 거냐!"
한편, 바하란의 집으로 간 두 워터엘프들은 경비를 느슨히 했다는 이유로 지청구를 듣고 있었다.
"5000년만이다. 무려 5000년.네놈들이 얼마나 이례적인 사례인지 알겠느냐!"
순간, 두 워터엘프들의 눈빛이 오가더니, 둘이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모두 다 렌 때문입니다!"
"렌이라니?"
"렌 그 자식이 마력을 부려 저희의 경비를 느슨하게 만들었습니다. 랄 또한 저희와 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바하란은 랄을 쳐다봤고, 랄은 그렇긴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바하란의 얼굴에 핏줄이 서더니...
"당장 렌 그 자식을 데려오도록!"
처음으로 바하란이 극한의 분노를 표출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