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지검 검경 합수부 회의 테이블에 봉형사, 오형사등 수사관들이 앉아있었다. 오형사는 스마트폰으로 ‘윤주경 검사’ 관련 기사를 검색하는 중이다.
‘2003년 고양 연쇄 살인사건 범인 검거한 윤주경 검사.’
‘10년 전 미결로 끝난 동두천 살인사건 끝까지 추적, 범인 검거한 동부지검 윤주경 검사.’
‘미결사건 전문 해결사 윤주경 검사를 만나다.’
심드렁하게 기사를 검색하던 오형사가 아니꼽다는 듯 봉형사에게 말을 건넸다.
“영구 미제라고 불렸던 사건을 세 건이나 해결했다네요. 틈만 나면 검찰청 자료 보관실에 가서 수사기록 훑는 게 취미래요. 이럴 거면 경찰 되지, 뭐 하러 검사 하냐?
“모든 수사권 검찰한테 있다잖냐. 검찰 지시대로 경찰은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가 그 여자 신조래."
어느새 봉형사도 윤검사 관련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때 속은 게 아직도 분한지 오형사는 열을 올렸다.
“그랬다간 칼부림 날 걸요? 정과장님 절대 참고 계실 분 아니지.”
문이 열리고 주경과 사무관이 같이 들어왔다. 주경은 테이블에 앉자마자 신우부터 물었다.
“정신우 과장 아직 안 왔어?”
때마침 문이 열리고 커다란 박스를 든 신우가 들어 왔다. 박스 안에는 집 책장에 꽂혀있던 영보사 관련 파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주경이 물었다.
“그게 뭐죠?”
“영보사 사건 자료에요. 수년간 개인적으로 수집해 온 겁니다.”
“관심이 아주 많으셨군요.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죠.”
쾅- 책상에 박스를 내려놓은 신우는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사건 개요는 모두들 알고 있을 테니까 생략하고 이제부터 용의자 압축에 주력해야 할 때 같습니다.”
“생각하시는 수사방향이 있어요?”
도전적으로 던지는 주경의 질문에 신우가 대답했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복수를 할 만한 사람, 두 번째는 연관된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 자. 그렇죠?
“그렇죠.”
신우는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사진 속 인물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뭐죠?”
“당시 공장에 있던 영보사 신도들의 단체 사진이에요. 이중 55명이 사망했습니다. 총 62명중 55명. 즉 7명은 당시 집단 변사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 사건이 나기 전 이탈한 사람들이죠.”
“7명 중 두 명은 실종, 한 명은 다른 장소에서 변사체로 발굴되었으며 네 명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10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조창현으로 확인됐고, 남은 건 세 명 뿐이에요.”
“관건은 생존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말씀인가요?”
“찾아낼 필요 없어요. 한 명은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다니요?”
신우는 잠시 주저했다. 모두의 시선이 신우를 향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신우가 입을 열었다.
“그 생존자. 제 아버지에요.”
“네?”
주경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신우는 아버지와 통화 중이었다.
“저도 원치 않았는데, 뉴스 보셨겠지만 사건이 너무 커졌어요. 그 사건과 연관성도 확실해졌고요. 앞으로 피곤한 일 생길 거예요, 아버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몰랐어. 요새 한참 복분자 수확 철이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문득 아버지의 지친 목소리가 슬프게 느껴진 신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 괜찮겠어요?”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을 수 있으시죠?”
“그야... 20년도 더 지난 일이니 이젠 다 잊혀 졌겠지.”
“미안해요.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아냐. 아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기왕 맡은 일 열심히 해. 딴 생각 말고.”
휴대폰을 끊고 나서도 신우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도심의 네온사인과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왠지 요란하게 여겨졌다. 신우는 고목처럼 우뚝 선 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각, 아버지 정진홍은 시골집의 마루에 앉아 있었다. 알전구 하나 달랑 켜진 단출한 집에서 정진홍은 하늘에 뜬 달을 쓸쓸히 바라봤다. 탄식인 듯, 자조인 듯 그의 입에서 힘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달 주위로 구름이 스며들었다. 어느새 달은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주위는 어둠에 휩싸였다.
*
다음 날은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하행선 고속도로를 신우의 승용차가 달리고 있었다. 신우는 문득 조수석에 앉아 차창만 주시하는 주경을 바라봤다. 처음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쓸쓸함. 그런데 저 여자는 말만하면 돌변하는 것 같다. 그래도 신우는 왠지 이 적막을 깨고 싶었다.
“결국 뜻대로 됐군요 윤주경 검사님. 그렇게 수사에 관여하고 싶어 하더니.”
신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주경이 말했다.
“아직은 아니죠. 범인을 검거해야 뜻을 이룬 거니까.”
“윤검사님이야말로 무슨 이유 있어요? 왜 그렇게 미결 사건에 관심이 많죠?”
주경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저는 수사검사입니다. 올라온 사건 검토하고 공판이나 하는 그런 검사가 아니라 발로 뛰고 범인 잡는 수사검사. 전 검사도 일종의 수사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결사건은 경찰은 물론 검찰도 포기한 사건이에요. 무능력을 대표하는 구체적인 사례죠. 전 그것을 하나씩 없애고 싶었어요.”
신우는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명감이라... 그런 검사가 있긴 있었군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주경은 신우 얘기를 꺼냈다.
“근데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영보사와의 연관성을 알면서도 주저했던 이유..”
다소 심각해진 신우는 잠시 말이 없다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아버진 그 사건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어요. 다시 연루되시는 게 너무 싫었죠. 수사관 이전에 난 아들이에요.”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어느새 고속도로를 나간 승용차는 국도를 거쳐 굽이진 산길로 들어갔다. 승용차가 신우 어머니의 묘지를 지날 때 신우는 슬픈 표정으로 창밖의 비석을 말없이 지켜봤다.
*
정진홍의 외딴 집에 신우가 도착한 건 황혼이 다 됐을 때였다. 신우가 주경을 검사라며 소개해 주자 정진홍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려워했다.
“잘 오셨습니다 검사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시장하시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거 너무 누추해서 안으로 모시기가 좀...”
“저는 상관없어요. 괜찮으시면 그냥 마루에 앉을까요?”
“아유. 그러세요.. 네..”
정진홍은 마루로 가더니 서둘러 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순박함에 신우는 콧등이 시려왔다.
이제 정진홍의 증언을 들어야할 때가 왔다. 마루에 앉은 채 지그시 눈을 감은 정진홍은 회한에 잠긴 듯했다. 한참 뒤에야 정진홍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악몽을 떠올리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떠올려야겠죠? 그걸 들으러 이 먼 길을 오셨으니...”
주경이 간곡하게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사람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아버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구요.”
정진홍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많은 상념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정진홍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진홍에게 과거 영보사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겪지 못할 공포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