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9.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라벤더 향의 그녀는 이경을 한번 올려다보곤 자지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어찌나 격렬하게 그의 손을 거부하는지 이경은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쑥 빠졌다.
“……!?”
품에서 벗어난 그녀는 뭔가 말할 듯 입만 달싹거리더니.
어딘가 불편한지 잔뜩 인상을 쓰곤 고개만 푹 숙이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이경은 기분이 묘했다.
이제껏 이런 여자가 있었던가?
그의 품에 들어온 여자들이 얼마나 그를 좋아했는데.
저리 온몸으로 싫은 티 팍팍 내며 도망치듯 달아날 수가.
‘뭐야, 뭘 저렇게까지 정색하고 가? 내가 뭘 어쨌다고!’
와, 정말 기분이 뭐 같네. 사람이 부축해줬으면 적어도 고맙단 말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리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고 가다니.
마음 같아선 목을 똑, 부러뜨리고도 남았다.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겨선 하는 행동은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뭐지 저 여자? 꼴은 저래도 향수는 뿌린다? 하, 웃기는 여자네. 이거 대체 어디 거야? 라벤더 향이 이렇게 좋았나?’
손에 남은 향이 있을까 싶어 코로 가져간 이경이 향을 슬며시 맡아봤다.
그리고는 뒤돌아가는 여자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쫓고 있다.
생각에 빠진 듯 무심히 입술을 만지던 그가 간호사 대기실로 발길을 돌렸다.
대기실에 다다를 때쯤, 라벤더 향의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 봤다.
‘……?’
뭘 찾는 걸까?
연신 도리반대는 눈길 끝에 보인 바닷빛을 띠는 저 눈.
이경은 왜 그 눈이 그를 찾는 듯한 착각이 들까?
저런 눈으로 앞에 있는 이를 쳐다보는데.
이경은 의사 가운을 입은 경하가 부러웠다.
라벤더 향의 그녀와 뭔가 얘기하던 경하는 링거 거치대를 끌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에 맞춰 총총거리며 쫓는 그녀가 어쩜 저리 귀여운지.
꼭 꼬리 치는 강아지 같아 이경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얼마간 뒤따르던 그녀의 발걸음이 힘겹게 느껴지자 그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렇게, 510호로 다시 사라졌다.
아주 잠깐 눈앞에 반짝 나타났던 그 요상한 여자는 마법처럼 펑! 해버렸다.
병실로 돌아온 이경은 헛된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를 꾹꾹 눌러도 사라지지 않는 두통에 이경은 의아했다.
‘갑자기 왜 이리 마음이 헛헛하지?’
뭔가 텅 빈 것 같은 마음에 넓은 병실이 외로워 보였다.
생전 이런 일 없었건만.
공허한 마음에 밖으로 나온 이경은 무작정 야외 정원을 향해 걸었다.
열심히 걸어가던 이경은 정원에 도착하기 직전 510호 앞에 걸음을 멈췄다.
바로 코앞이 목적지인데, 그는 그곳을 지나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의 발목을 잡는지.
이경은 510호 병실 앞을 떠날 줄 몰랐다.
하릴없이 있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저러는지.
멀거니 있던 그는 병실 앞 환자 이름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뭐지?’
환자 이름이 없었다.
당황한 이경은 간호사실로 거의 뛰어가다시피 걸었다.
그리곤 510호 환자에 대해 물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예, 이경 씨! 오늘 식사는 괜찮았나요? 특별히 신경 좀 써 달라 했는데.”
“네, 덕분에 오늘 잘 먹었습니다. 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예.”
“510호 환자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죄송해요. 환자분에 대한 정보는 드릴 수 없습니다. 환자 신상에 대한 건 담당 의사에게만 공개되거든요.”
조금 전만 해도 상냥하게 웃던 간호사가 난처해했다.
“……! 혹시 510호 담당 의사가 서경하입니까?”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걸 못 알아내다니! 아, 맞다. 여기가 그랬지.’
화가 나도 화낼 수 없었다.
일부러 이런 곳을 찾아왔던 그가 아닌가.
근데, 막상 본인이 이런 일을 당하자 어처구니없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SG 그룹의 차기 대표가 이런 대접을 받으니 기분이 그야말로 엿 같았다.
감히 병원 내규라며 알려주지 않는 간호사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정 간호사! 네가 감히 나를… 엿 먹였어! 그래, 기억해 두지. 내가 너를 두고두고….’
병실을 왔다 갔다 하던 이경은 지석에게 510호 환자에 대해 알아오라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일주일이 지나도 그녀에 대한 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경하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경하야! 친구로서 좀 부탁하자. 510호 환자 이름이 뭐야? 병실 앞에 이름이 없더라.”
‘쟤가 왜 소율 씨에 대한 걸 묻지?’
“그건 알려줄 수 없어. 개인 신상 정보라. 이게 우리 병원의 특징이잖아. 왜? 510호 환자에게 관심 있어?”
‘관심…, 내가?’
“아니, 그건 아니고. 이름 정도야 알아도 상관없지 않나? 대한민국에 같은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야 그렇지. 근데, 이름만 알아서 뭐하게? 관심 꺼라. 그 사람은 너 같은 스타일 싫어하니까.”
“……! 내가 뭘 어때서! 그 여자가 날 싫어할지 좋아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안 그래!?”
이경은 순간 욱해서 경하에게 사납게 따져 물었다.
왠지 경계하는 듯한 경하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래놓곤 ‘아, 안 되지. 경하를 달래야지.’하며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건, 넌 몰라도 돼. 어쨌든 510호 환자에게 접근하지 마.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뭐! 말해. 왜 말하다 말아?”
“묻지 마. 나는 환자 신상에 대해 말 안 해.”
“야, 그럼, 이것만 대답해봐. 왜 내 병실엔 ‘김*경’이란 표시가 있는데 510호엔 그것조차 없지?”
경하에게 정보를 얻으려던 탓에 이경은 능숙하게 노기를 숨겼다.
“그건… 환자가 특별히 요청했으니까. 너처럼 말야.”
‘미안하다, 이경아! 그녀에 대한 건 숨기는 게 맞아. 환자가 병원에서조차 불편하면 되겠냐? 너도 모르는 게 낫고.’
경하는 거짓 정보를 주긴 싫어 내규를 운운하며 대답을 피했다.
계속된 질문에 없는 이유를 대자니 식은땀이 났다.
불안함을 감추려 경하는 평소보다 더 이경과 보이지 않는 벽을 뒀다.
경하가 하는 말은 예전과 같았으나 그의 성격상 분명 거부감이 들 법한데.
이경은 대충 넘어갔다.
‘뭐지, 나보다 더 부잔가? 그럴 리가. 혹시 정치가의 딸, 아니면… 숨겨둔 애첩? 아,… 아냐. 정말 그렇다면 머리 꼴이 그렇진 않지. 그리고 정말 숨기고 싶다면 나처럼 경호원을 병실 앞에 뒀을 거야. 아예 접근 못 하게.’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이경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경하가 그녀를 보호하느라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는걸.
그런 까닭에 이경이 저리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게 오히려 더 조마조마했다.
‘뭘 또 저렇게 생각하지?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괜히 불안하게.’
“더 묻지 마. 할 말 없으니까.”
“네가 언제 대답했냐!? 대답도 안 했으면서. 뭘 묻지 말래! 누가 들으면 다 가르쳐 준 줄 알겠다.”
더 물을 생각도 없었지만.
미리 선 긋는 경하의 말에 이경은 다소 불퉁스레 쏘아붙였다.
이경은 감정을 억누르고 조곤조곤 타이르던 태도를 순식간에 바꿨다.
하긴 많이 참았다.
돌아오는 말이 저리 딱딱한데도.
다른 친구들 같으면 벌써 그가 싫은 내색하고도 남았으리라.
“네가 아무리 물어도 나는 대답 안 한다. 환자에 대한 정보는 유출하지 않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서 너도 여기 있는 거고. 아냐?”
‘저 녀석은 매사가 다 FM이지. 명색이 친군데, 융통성이라곤 없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하긴, 저 녀석에게 내가 친구이긴 한가?’
이경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도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이 병원을 찾은 거니까.
단지 오늘따라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인간이 많아 문제였지. 전엔 전혀 문제없었다.
그딴 병원 내규를 누가 그리 지킨다고. 저 녀석 빼고.
이경은 기분이 상해 입술을 비틀었다.
‘뭐지? 그 여자! 뭐 때문에 그렇게 자기를 꽁꽁, 숨겨?’
*
이경아! 알려고 하지 마라. 너 알면 다친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뒤, 이경의 병실 건너, 건너, 그 옆에 있던 소율은 하루라도 빨리 병실을 벗어날 궁리만 했다.
그래서 빨리 서류 작성하라는 말에 싫어도 작성했는데.
눈앞에 있는 사내는 초점 없는 눈으로 넋 놓고 있다.
경하의 추궁에 그녀 역시 정신없었건만.
소율은 사내의 절망 어린 눈빛이 그녀 탓이라 외면하기 힘들었다.
‘뭐야 저 표정? 후-! 빨리 퇴원해야지. 저 사람에게 거짓말하기 너무 힘들다.’
“선생님,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네, 뭐.”
“서 선생님, 저, 내일 퇴원시켜 주세요.”
“퇴원 결정은 의사가 결정하지 환자가 하는 게 아닙니다. 다음 주까지 치료 잘 받으세요. 아직 퇴원은 무리니까.”
그녀의 재촉에 정신 차린 경하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지.
자긴 바쁘다며 퇴원시켜달라고선 그대로 쓰러져 놓고.
어리석게도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럼, 병실이라도 옮겨 주세요. 공무원 월급으로 이 병실료를 감당할 수 없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병실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진료비도.”
“어떻게 그래요? 병원비를 내야 퇴원이 될 텐데.”
소율의 말에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앞에 있는 사내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그녀에게 말했다.
병원비는 신경 쓰지 말라고.
병원에서 입원한 환자에게 병실료와 진료비를 안 받겠다니.
언제부터 병원이 자선단체였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으려니 속이 뒤틀렸다.
이 사람이 잠이 부족해서 드디어 돌았나?
돌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비는 꼭 내야 했다.
그녀는 공무원이 아닌가.
이 많은 병원비를 안 줬다간 김영란법에 걸려 철컹철컹!
윽! 안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소율은 잔뜩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심문하는 투로 따지듯 물었다.
“저… 혹시 제게 부탁할 일 있어요?”
“……! 부탁이라니. 그런 거 없습니다.”
“아니면, 그쪽이 왜 내 병원비를 신경 쓰죠? 무슨 상관이라고!”
“그건…….”
그녀의 다그침에 경하는 뭐라 할지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면 분명 미친놈 취급할 것 같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제가 올해 검사로 부임할 때, 선배 검사가 모르는 사람에게 절대, 선물 같은 거 받지 말라고 했죠. 특히 병원이나, 경영인, 정치가들과는 식사도 하지 말라던데. 그 사람들 대다수가 뒤가 구리다더군요.”
“……!”
“왜요? 병원 직원이 사고라도 쳤나요? 제게 뭐 부탁하려는 거라면 꿈도 꾸지 마세요! 아는 즉시 처벌할 테니까.”
눈에 잔뜩 힘을 준 소율은 불신 가득한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그녀의 으름장에 경하의 얼굴이 다소 풀렸다.
“소율 씨 얘길 들으니 세금 잘 내야겠습니다. 이렇게 바른 생각하는 검사가 있게. 죄지었으면 당연히 벌 받아야죠. 뇌물로 피하는 게 아니라. 저 그렇게 썩은 사고하는 사람 아닙니다.”
“음, 누가 서 선생님이 꼭 그렇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어쨌든 병원비는 내가 낼 거니까. 병실이나 옮겨줘요! 아니면 퇴원시키던가.”
“불편하면 병실은 그대로 쓰고, 치료비만 받죠. 이번 일은 내가 착각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오해한 건, 미안합니다. 물론 아직, 내 생각은 변함없지만.”
경하는 수상한 눈길을 굳이 거두지 않은 채 사과했다.
‘나는 아직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리려는 듯.
*
당당하게 사과하고 나왔건만 입안이 몹시도 썼다.
경하는 소율이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 한 뒤, 병실에 가길 꺼렸다.
그녀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달리하기로 했으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가진 채 계속하긴 힘들었다.
그가 보기엔 분명 그녀인데 아니라니 맥이 빠진달까.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경하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쭉 상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하나, 하나 뜯어봤다.
‘정말 아니라고!? 근데 어떻게 그렇게 똑같아? 외모, 이름뿐만 아니라, 그 향기까지.’
늘 숨기기 바쁜 그녀를 신경 쓰기 시작한 이후 계속되는 이런 실랑이가 그는 왜 싫지 않은지.
그에게 이런 이상한 취미가 있었는지 그는 처음 알았다.
까도 까도 베일에 싸인 사람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재미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사실 그녀가 실제 그가 아는 이소율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첨단 과학시대에 그 쉬운 ‘유전자 검사’가 있지 않은가.
이건우 과장님을 찾아 그녀의 머리카락과 검사를 의뢰하면 되겠지.
‘아, 벌써 8년이지. 이미 이 과장님은 만기 출소하셨겠구나.’
자신의 휴식 공간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경하는 갑자기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럼, 이제 남은 방법은 그녀에 대해 뒷조사하는 거.
그날 그는, 평생 찾을 일 없을 곳 같은 곳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흥신소죠?”
- …….
“사람을 찾는데요. 2012년 당시 목동에 있는 진*여고 고1 이소율 학생을 찾습니다. 이소율 씨가 현재 어떻게 사는지. 그 가족들, 주소까지 알려 주시면 됩니다. 아, 이왕이면 2012년 3월 이후부터 지금까지 소율 씨 주변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포함해서요.”
- …….
“네, 금액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통화를 끊은 경하의 얼굴 가득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이소율!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드네. 하, 내가 이런 곳에 전화를 다 하고. 원래 이럴 생각 없었는데 말야.’
경하가 달라졌다.
늘 FM을 고집해 온 그가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