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7. 그가 왜 내 옆에서 자!?
소율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경하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아버지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그답지 않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인석은 경하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조급할 텐데. 내게 할 말도 있는 거 같고. 그래도 꽤 잘 참고 있네.’
“너, 뭐하냐, 치료 안 하고?”
“……예?”
“뭐하냐고!? 빨리 치료 안 해? 환자가 기절했는데 의사라는 놈이 멍청하게 그러고 있냐!”
‘……!?
“빨리 치료하라니까! 어서! 내가 지켜볼 테니까. 오더를 내려라.”
경하는 혼란스러워 제 귀를 의심했다.
말릴 땐 언제고 갑자기 그에게 치료하라니.
하루 사이에 이렇게 말을 바꿀 사람이 뭣 하러 그리 명했는지 묻고 싶었다.
‘본인이 오더 내리겠다 하시고선. 갑자기 왜 저러시지?’
“김 간호사! 타이레놀 IV 400mg, 얼음주머니 갖다 주세요. 빨리요!”
“네.”
정신없이 소율에 대한 응급처치가 이뤄졌다.
어느 정도 급한 불을 끈 경하는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아버지! 직접 오더 내리실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셨어요?”
“그거야, 내가 와 있어야 다른 사람들 뒷말이 안 나오지. 너는 네가 다른 과 환자에게 직접 오더 내리면서 이런 생각은 안 해 봤냐?”
뒤늦게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은 경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웃어?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경하는 무안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다. 근데, 너는 흉부외과 환자는 진료 안 해?”
“진료 시간이나 수술 있으면 당연히 가죠. 지금은 잠깐 시간이 나서 들렀습니다.”
‘시간이 나서 들르긴!! 거짓말도 통할 놈에게 해야 속아주지. 수술 들어가면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놈이 이러고 있어!’
“근데, 너는 이 환자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게 신경 써? 아무 사이 아니라며!”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경하는 그간의 일을 생각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이게 신경 쓰는 게 아니라고! 너 잠깐 쉬는 시간에 잠자야지. 흉부외과가 얼마나 바쁜데.”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서 그리 다클서클이 내려왔냐? 어서 가서 쉬어라. 정 걱정되면 간병인 붙이면 되니까.”
“간병인을 환자가 안 부르는데 저희가 부를 수 있나요?”
“야, 인마! 환자가 정신이 없는데 간병인을 어떻게 신청해! 그리고, 너 이미 이 환자에게 과잉 진료했잖아! VVIP 병실도 주면서 간병인 붙이는 게 뭐가 대수야? 네가 이 환자에게 진료비 다 받아 낼 거야? 이제 와서 간병인 비용이 아깝든? 왜, 이 애비가 대신 내주련?”
인석은 아들의 오버하는 행동에 속이 부글부글했다.
아리를 잊은 것까진 좋은데
아무리 아가씨가 예쁘다고 한들 아들만 할 리가 있나.
제 몸 상하는 줄 모르고, 간호하느라 피곤에 절은 녀석의 ‘괜찮다’는 말에 인석은 가슴이 시렸다.
아주 잠시 인석은 소율이 아무 짓도 안 했건만, 미웠다.
단지 아들이 그녀를 간호하느라 몸이 축났다는 이유만으로.
아픈 사람이 뭔 죄라고, 이런 마음 먹나 싶어 인석은 부족한 저를 탓하다가 괜히 아들놈에게 언성을 높였다.
경하는 그가 생각해도 과하다 싶어 머쓱해서 쓰게 웃었다.
“웃어, 지금 이게 웃을 일이냐!? 하긴. 남들이 웃겠다. 지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을 VVIP 병실에 입원시키는 놈이 어디 있냐?. 미친놈!”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미친놈이라뇨. 그건, 이미 다 끝난 일이잖아요.”
“끝나긴 뭐가 끝나? 너 하는 행동이 그렇잖아. 계속 소율 씨 들여다보느라 쉬지도 못하고.”
“아버지도 참, 안 쉬고 어떻게 수술하러 가요? 잠깐 시간 날 때 들렀습니다. VIP 병실도 남아도는데, 여기 잠깐 쓰면 어때서요.”
“이놈이 그게 무슨 논리야? VIP 병실 남는다고, 지나가는 환자를 여기 다 입원시킬 거냐!?”
“아뇨, 그건… 아니죠.”
“거봐. 너 이 사람에게 관심 있으니까 그렇지.”
“……관심요?”
“그래, 관심. 너 있잖아! 이 애비에게 못할 말이 뭐가 있어.”
“예, 아주 쪼금… 있습니다.”
경하는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본심에 허탈했다.
“쪼금?”
인석은 조금이란 말에 한쪽 눈썹을 삐뚜름히 올려 되물었다.
“예, 예, 쪼금보다 더 많이요.”
이미 아비에게 들킨 거 어쩌겠는가.
마지 못 해 인정하려니 경하는 죽을 맛이었다.
“짜식! 진작 그렇게 인정할 것이지. 그래, 소율 씨 나이는 몇이냐?”
“아마, 25 정도 되었을 겁니다.”
“아마? 아직, 그것도 몰라? 너, 설마, 소율 씨와 시작도 못 했냐?”
꽉 다문 입술을 떼지도 못하는 아들이 못마땅해 인석이 얼굴을 찌푸려졌다.
“소율 씨 의식이 잠깐 돌아왔다며. 그때 신상 정보 적었어야지. 멍청하긴! 괜히 헛물켜고 돈만 쓴 거 아냐?”
“……!”
“못난 놈. 인물값도 못 하는 찌질한 놈! 네가 저런 놈을 위해 아까운 내 돈을 날리고 있었어. 오늘 병원비 결제해라. 네 카드로.”
인석은 어디서 끙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입술 안쪽을 꽉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대답, 안 하냐?”
“예, 제 카드로, 결제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결제해. 알았냐?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문제는 철저히 해야 한다. 아, 소율 씨 일어나면 환자 신상 정보 적어달라 하고. 아까처럼 멍청하게 있지 말고. 알았냐?
‘아, 맞다. 소율 씨에 대해 하나도 모르네.’
경하는 오늘 아버지께 ‘멍청이’,‘찌질이’란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이런 녀석을 봤나! 환자는 다들 신상 정보 적는데…. 그걸 못 알아내. 그걸 알아야, 지가 연락해서 대시하지. 어휴, 저 머저리!’
인석은 아들의 답답함에 속으로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병실을 나가려다 인석은 아들에게 퉁명스레 덧붙였다.
“아, 오늘 중으로 보호자 불러라. 저렇게 계속 기절하는데, 보호자를 불러야 할 거 아냐!”
“…….”
“왜 싫어? 그럼, 간병인 부치던가. 안 나가냐?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들을 쉬게 하려던 인석은 나갈 생각이 없는 아들을 못마땅한 듯 몰아붙였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해야지. 지금, 간호하고 있어!? 그 고급인력으로 잘 하는 짓이다!”
“간호한 적 없습니다. 그냥 한 번씩 들여다봤지.”
“간호 안 했다고? 내가 김 간호사에게 들은 게 있는데…!”
“……!”
경하는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동안 진료에 최선을 다해 왔으나 소율이 입원한 뒤, 시간 날 때마다 그녀 병실로 온 것 또한 사실이라.
그러고 보니 잠도 여기서 잤더랬다.
그녀 옆에서 밤새도록 간호하다 의자에서 잔 게 벌써 며칠째였다.
“서경하! 의사는 환자가 우선이다. 연애도 좋지만, 적당히 챙겨. 소율 씨는 보호자에게 맡기고 쉴 땐 쉬어라. 그러다 네가 실수하면 환자만 죽는 거 아니냐!”
“……! 예. 소율 씨 깨어나면 보호자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깨어나기 전에는? 아, 됐다. 내일부턴 간병인 꼭, 붙여라. 너 그러다 네가 먼저 쓰러진다. 아니면, 너 여기 발도 못 디디게 할 테니까.”
“……간병인 부를게요.”
‘어이구, 저 미친놈! 내가 아파도 저리 간호하진 않을 거면서! 벌써 저 난리야. 저러다 진짜 사귀면 어쩌려고.’
잠시 어른답지 않은 생각을 한 게 무안했던 인석은 무심한 척 지나가듯 말했다.
“아이가 참 예쁘구나. 아리도 그렇더니.”
“…….”
경하는 인석의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인석의 입에서 다시 한번 ‘아리’가 언급되었으나 그는 전혀 몰랐다.
‘저 얼굴이 그렇게 예쁜가? 그런 생각, 전혀 못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소율을 본 경하는 눈처럼 맑은 피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도 봤지만, 얼굴이 참 조화로웠다.
허나 다른 이들 또한 그러려니 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중에 병실을 나온 그가 다른 환자와 여자들을 본 뒤에야 아버지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는 깨달았다.
당시엔 그저 그녀의 맑은 피부가 좋았을 뿐. 아무 생각 없더랬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경하는 세상을 담은 듯한 푸른 눈을 떠올리곤 설핏 웃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청안(靑眼)이 좋은데. 그리고, 그 향기가.’
이제 큰일 났다.
그도 모르게 그녀 생각하면 실실 웃고 있으니.
저러다 그녀에게 차이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건 왜일까?
‘안 돼. 너무 앞서 가지마. 지금은 환자로 대하자. 환자로. 관심 없는 척. 환자로 대하는 거야.’
환자로 대한다면서 눈은 침상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 녀석, 이제 아리는 완전히 잊었네. 벌써 두 번이나 아리 얘기했는데 전혀 모르게.’
병실을 나온 인석은 아들에게 만족스런 대답을 얻은 듯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
인석이 병실을 나가자 경하는 급히 간호사 대기실로 갔다.
차트를 확인하던 그는 어쩐 일인지 인상을 구겼다.
‘아직, 염증 수치가 높네.’
급히 차트에 ‘Amcillin IV(편도선염, 폐렴 등에 투여하는 페니실린계 항균 정맥 주사제) q6hr 4g/day’를 기록하곤 김 간호사를 찾는데.
그녀가 나오자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경하가 부탁했다.
“김 간호사님! 소율 씨에게 Amcillin IV 6시간마다 1g씩 주사해주시고, 수시로 발진이나 기타 증상이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평소처럼 대답하던 김 간호사는 경하의 어두운 표정에 다소 긴장했다.
주사제를 챙기는 그녀의 손이 여상스럽지 않게 느렸다.
‘서 선생님 표정이 왜 저렇지? 설마… 아니겠지.’
한편 소율의 병실로 돌아온 경하가 다소 편안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얼마 뒤 김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와 주사를 투여할 동안 짧은 침묵이 흘렀다.
볼일을 끝낸 김 간호사가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 간호사님, 원장님껜 제가 여기 자주 온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원장님께서 너무 걱정하셔서 말이죠.”
“……! 네.”
‘원장님이 그새 얘기했구나. 에고, 내가 못 살아. 진짜! 대체 왜 얘기한 사람을 언급해선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대? 내가 다시는 원장님께 말하나 봐라.’
고참인 그녀에게 주사를 놓아달라 할 때부터 기분이 싸하더니. 바로 이거였다.
병실을 나온 김 간호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넓은 병실에 둘만 있게 된 경하.
말로는 간호하는 게 아니라면서 그는 식사도 걸렀다.
수시로 염증 수치를 체크하고 열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었다.
‘이제 한 시름 덜었다. 염증 수치도 곧 떨어질 거고. 근데, 수사관을 두고 왜 자기가 직접 잠입하지? 위험하게. 대체 그런 분장을 어떻게 하는 거야?’
*
그로부터 이틀 뒤, 의식을 차린 소율은 희한한 광경에 눈이 커졌다.
낯선 남자가 옆에서 졸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대체 자기가 뭐라고 그녀 옆에 있는지.
소율은 묻고 싶었다.
‘뭐, 뭐야! 왜 이 사람이 여기 있어? 보호자도 아닌 그가 왜 내 옆에 있는데!?’
그것도 저리 불편한 자세로 왜 여기 있냐고!
환자 옆 의자에 앉아 침대에 턱을 괴곤 잠자고 있는 경하가 소율은 어처구니없었다.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소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는 사람을 깨우려니 아닌 것 같아 그대로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던 소율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피하려 했다.
“아…으으!”
너무 한쪽으로 잤나?
쥐가 나서 몸을 돌릴 수 없었다. 망했다.
그는 하필 그녀 베게 근처에서 턱을 괴고 있는데.
이대로 있기엔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린 탓에 소율은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몰랐다.
턱을 괴고 있던 얼굴이 조금씩 아래로 기울어지면서 닿을 듯 다가오는 얼굴에 소율의 뺨이 점점 달아올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답지 않게 기분이 묘했다.
변태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다가오는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소율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했다.
소리가 너무 컸을까?
눈 감고 있던 경하가 살며시 눈을 떠 소율을 쳐다봤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