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왜 자꾸 딴 델 봐! 질투하게
큰 체격의 경하가 뒤에 숨겨둔 할머니를 위해 그답지 않게 경호원과 기(氣) 싸움을 벌였다.
‘왜 이렇게 둔해!?’
뒤에 있던 또 다른 이는 그와 달리 답답함에 속 끓였다.
‘할머니, 제발……. 그냥 있어요.’
몇 번이나 그의 옷을 당겨도 아무 반응 없는 둔탱이에 할머니는 열불 터졌다.
참고, 또 참고.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할머니가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했다.
“경하 씨! 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뒤에서 들린 토라진 젊은 여자 목소리에 경하는 의아했다.
‘어, 목소리가… 달라졌다?’
경하는 경호원과 함께 뒤돌아서다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 몸으로 숨기고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곤 어디선가 나타났는지 젊은 여자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마법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그녀는 경하를 언제 봤다고, 팔짱을 낀 채 새초롬한 눈으로 흘겨봤다.
그러더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제껏 본적 없는 해사한 미소로 눈웃음을 날렸다.
일순간 경하는 그 눈빛에 빨려들었다.
그때처럼!
“자기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많이 보고 싶었는데. 왜 자꾸 딴 델 봐! 자꾸 그러니까, 질투 나잖아.”
“……!”
그를 언제 봤다고, 천연덕스럽게 다가온 손이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곤 가볍게 그의 어깨에 손 올린 그녀가 옷깃을 만지작대는데.
경하는 익숙지 않은 손길에 움찔했다.
그의 행동에도 옷깃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낸 그녀는 경호원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경호원과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
“저… 죄송한데, 자리 좀, 피해 주실래요? 저희 정말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이 사람이 많이, 바빠서 말이죠.”
그녀의 애교 섞인 푸념에 경호원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들을 멀뚱히 넋 놓고 보던 경호원은 문뜩 둘의 데이트를 방해한 것 같아 난처한 표정으로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도 없이, 두 분의 시간을 방해했네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급히 뒤돌아선 경호원의 얼굴이 빨개졌다.
‘와, TV에서 보던 연예인보다 훨씬 예쁘네. 쌩얼 같은데…. 둘이 참 잘 어울린다.’
뒤돌아가던 경호원은 자기 쪽으로 오던 경호원을 보고 멈추라며 손짓했다.
“이쪽은 안 봐도 돼. 내가 지금, 확인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다른 층을 찾아봐.”
그의 말에 동료들이 다른 층으로 달려갔다.
한편 경호원이 사라진 뒤, 두 사람에겐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경하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여전히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봐요, 이봐!”
‘뭐야, 왜 이래? 괜히 미안해지게. 무슨 사람이 이렇게 간이 작아?’
그녀가 고마움을 표현하려 몇 번을 불러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다.
뭐에 홀린 건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는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아무리 사람이 놀랬데도 이렇게까지 반응할 리가.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여자는 고민 끝에 바닥에 내려둔 흰색 배낭을 챙겼다.
그리곤 경하 곁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일순, 경하는 병원에 오기 전에 봤던 배낭을 보곤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은 주변으로 핏줄이 도드라지더니,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경하는 몹시도 기분이 상한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가 얼마나 갔을까?
그녀는 채 몇 발짝도 디디기 전에, 조금 전 이곳을 지나간 경호원이 다시 돌아오는 걸 봤다.
그녀의 미간이 찰나에 구겨졌다.
‘아, 왜 또!? 그냥 가면 의심할 텐데. 아, 진짜!’
다른 곳으로 가려던 그녀는 피할 곳이 없어 급히 경하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는 이제껏 그대로였다.
“미안해요! 잠시만 실례.”
근처로 오는 경호원을 본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매달리듯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이 향이었어. 라벤더 향!
은은한 향이 코끝에 스며들자 소율과의 만남을 왜 아직도 잊지 못했는지 기억이 났다.
그는 이 향이 좋았던 거였다.
그 소녀에게서 나는 라벤더 향이.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향이 그렇게 좋아 가끔 그 일이 떠올랐을 터였다.
그녀가 경호원이 지나가는지 쳐다보느라, 그의 품에서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 여잔 이소율이 아니다.’
경하는 소율을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싫었다.
학생답지 않게 젊은 여성들이 뿌릴 법한 향기가 났으니.
물론 그 향이 은은하다곤 해도 좋은 인상일 리가 만무했다. 만약 그녀가 학생이 아니었다면, 무슨 향수를 쓰는지 묻고 싶었다.
그녀와 부딪힌 아주 짧은 순식간이 그가 처음으로 향기에 취했던 때였다.
그러다 알았다.
향수 전문점에서도 그 향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중에 나온 향이 라벤더 향과 비슷한 건 있어도, 그녀의 그 향은 파는 것관 질적으로 달랐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여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강한 힘에 그와 눈이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 잠시만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조금만…. 경호원이 갈 때까지만. 제발….”
나직이 부탁하던 그녀는 긴장감에 더 세게 그를 안았다.
손에 힘을 푼 경하의 손이 뚝 떨어졌다.
경호원이 지나감과 동시에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던 팔을 풀려 했다.
하지만, 경하가 먼저 그녀를 밀어냈다.
“……!”
‘뭘 그렇게까지 밀어내?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보기보다 성질 엄청 더럽네. 여자면 다 좋아하는 거 아냐? 변태가 언제부터 여자를 가렸어?’
당황한 그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음, 실례 많았어요. 그럼.”
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던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디가 불편한지 큰 손이 닿았던 팔을 문지르며 갔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경하는 반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그곳에 멀뚱히 서 있었다.
*
라라라 라라 ♫
전화벨 울리는 소리에 정신없던 경하가 볼멘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서 선생님! 안 오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소리에 경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지금 갑니다.”
이제야 수술 스케줄이 생각난 경하는 급히 흉부외과로 뛰어갔다.
수술이 끝난 경하가 의국에 들어와 잠시 눈 감고 있다.
의자에 앉아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한 경하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병원 최고 꼭대기에 있는 하늘 정원에 올라온 경하는 어두운 낯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병원 근처를 구석구석 눈으로 훑던 그는 다른 병동 꼭대기에 있는 구조헬기 착륙장에서 시선을 멈췄다.
“……하-! 내 마음이 그거였어? 내가 아리에게서 걔를….”
땅이 꺼질 듯 뱉어내는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대체 뭣 때문에 저러고 있을까?
헬기착륙장을 한참 내려다보던 경하는 시선을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 대체 뭐가 있길래, 저리도 애달프게 바라볼까?
아무것도 없건만,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하늘을 보던 그의 눈빛은 애잔했더랬다.
*
저녁 9시, 빡빡한 수술 스케줄로 숨 돌릴 틈 없던 경하는 뒤늦은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온종일 울적한 기분이었던 경하는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대섰다.
그때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이 늦은 시간에 수술실만 있는 층에서 문이 열렸다.
‘내가 알기론 오늘 오후 7시 이후론 수술이 없는데. 응급 환자가 있었나?’
의아함에 문으로 들어오는 이를 그도 모르게 쳐다봤다.
철컥 드르륵
엘리베이터가 열린 틈으로 청소 도구를 실은 수레가 보였다.
곧이어 청소하시는 아줌마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상해. 청소를 지금까지 했다고? 그것도 수술실만 있는 층에서? 근무시간이 6시면 끝날 텐데.’
경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팔짱을 낀 채 아줌마를 살폈다.
그녀와 수레를 예리하게 하나하나 관찰하는데.
그의 눈에 오전에도 본 적 있는 흰색 배낭이 보였다.
‘어? 저 가방! 오전에 본 허리 굽은 할머니 거랑 똑같네. 디자인이랑 색깔까지. 그리고,… 그 여자도 저걸 사용했지.’
오늘 하루 참으로 역동적으로 보낸 그는 머릿속을 유영하는 그녀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청소부 아줌마를 보는 경하의 눈빛에 날이 섰다.
처음 본 이를 그렇게 보는 게 실례였으나 그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저 오늘 하루 모르는 여자에게 실컷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에 불쾌한 감정만 가득 찼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거울을 통해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아주 잠깐 시선이 맞부딪혔을까?
아줌마가 얼른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렇게 피했음에도 오롯이 쏟아지는 시선에 그녀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앞에 있던 아줌마가 은근슬쩍 자릴 이동했다.
그녀 입장에선 엄청 불쾌할 거였다.
저리 대놓고 사람을 이리저리 살피는 눈빛에 짜증 날 법도 하건만. 그녀는 그저 그를 외면하기만 했다.
이곳이 직장이 아니라 밖이었다면 분명 사람을 왜 그리 쳐다보냐며 따졌으리라.
이건 뭐 수사관이 용의자를 만났을 때나 봄직한 눈빛보다 더 날카로웠으니.
젊은 아가씨라면 뒤돌아서서 그의 뺨을 후려치고도 남았다.
아무 죄 없는 이가 그런 시선을 받는다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띵, 소리와 함께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다.
청소 아줌마는 서둘러 내리려 했다.
덜컥, 수레가 엘리베이터에 낀 걸 확인한 경하는 급히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아줌마가 경하에게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수레를 당겼다.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수레가 빠져나간 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기분이 묘했다.
문이 닫히는 사이로 보인 그녀의 미소가 왠지 낯익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줌마가 내린 층이 마음에 걸렸다.
5층, VIP 병실만 있는 이곳을 저녁에 청소한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다.
원래 층마다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처음 본 아줌마가 그것도 저녁에 청소한다고 5층에서 저리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의 수상한 점이 계속 떠올랐다.
무엇보다 여유 넘치는 맑은 미소와 휘어지는 눈꼬리가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드르륵드르륵
11층, 식당이 있는 곳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러나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층, VIP 병실만 있는 그곳에서 누군가 내렸다.
분명 늦은 식사를 하러 11층으로 가려던 그였으나 자석에 이끌리듯 그곳에 왔다.
꼬르륵꼬르륵
뱃속을 요동치는 허기진 소리에 경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미쳤나? 왜 또 이런 데 신경을 써! 내가 형사도 아니고, 경호원도 아닌데. 남이사 뭘 하든 무슨 상관인데!’
황당했다.
아줌마가 이 시간에 청소하든지 말든지 왜 신경 쓴단 말인가.
꼬르륵!
너무 오랫동안 굶었다.
하긴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으니.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면서 호기심에 이 짓거리를 하는 그가 기막혔다.
배꼽시계가 이렇게 울려도 그놈의 배낭 주인이 오전의 그녀가 아닐지 그게 더 궁금하니 말이다.
터벅터벅, 이경의 병실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VIP 병실은 맨 안쪽 호실부터 청소하게 되어있다.
이경의 병실은 VVIP 507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로 이경의 병실로 가니까 그곳에 청소 아줌마가 있다면 그녀는 청소하러 온 게 아니다.
이경에게 볼일이 있어 온 거지.
‘그 말은 곧 그 아줌마가 오전의 그녀라는 말이겠지.’
경하는 확인하고 싶었다.
‘내 추측대로 만약 아줌마가 여기 있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경에게 그녀가 네가 찾는 사람이라 해야 하는가?’
모르겠다, 그녀가 그곳에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아줌마가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507호 앞에 선 그는 긴장감에 입이 바짝 말랐다.
문을 열고 천천히 병실로 들어간 경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야,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이경은 예상치 못한 그의 방문에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그의 반색에도 경하는 시선을 돌려 아줌마를 찾았다.
그러더니 경하가 설핏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