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새로운 시작과 만남.」
2학년으로 진학하면서, 마땅히 반 배정도 새로이 이루어졌다. 한 학년이 올라가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어떤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될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설레기도 했다. 그들은 성장했다. 아리와 정혜는 같은 반이 되었고, 운 좋게 효진이도 같은 반이 되었지만, 정혜와 친한 지수는 아쉽게도 다른 반으로 배정되었고, 준혁과 세민이는 극적으로 같은 반이 될 수 있었다. 새로이 반 배정을 받은 친구들끼리 벌써 기 싸움이 시작된다. [누가 반에서 1등을 잡느냐]에 대한 치열한 신경전이었다. 여전히 에이스 포스를 유지하고 있는 효진이와 새로운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정혜는 이른바 중간 실력자들로부터 갖은 시기와 경계를 당해야만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 다시 미친듯한 공부모드에서 세민이와의 사랑모드로 변경될 줄 알았던 정혜는, 전교 2등이라는 초 상위 클래스의 등수를 경험한 이후, 그 짜릿함에 그 자리를 지켜내고 싶었던지 꾸준히 공부에 임했다. 그래서였던지 2등을 한 이후의 시험들에게서도 전교 5등 이내로 들면서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이대로 지속만 된다면, 그리고 수능 시험에서 대박을 치게 된다면, 명문대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새 학기가 시작되고, 신경전과 새로운 친구들 사귀기에 여념이 없던 터라 시간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1개월이 흐르게 된다. 그리고 1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에게서 슬퍼질 법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 1학기 중간고사 시험 일정이 잡혔다. 5월 1일에서 4일까지로 잡혔으니까 중간고사 시험공부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넋이 나간 듯, 이구동성으로 “아…”를 외친다. 반면, 효진이랑 정혜는 눈빛이 변한다. 다시 엄청난 공부모드로 다시 진화하려는 갑다. 시험은 3주하고도 5일 정도가 남았다. 반면, 다시 매의 눈으로 서서히 눈빛이 변하는 효진이와 정혜는 매의 눈을 넘어서서 호랑이 눈빛으로 변하더니 벌써부터(?) 시험공부에 돌입할 자세를 취한다. 선생님께서 구태여 확정된 시험범위를 확정지어 주시지 않더라도, 수업하는 책 내용을 4분의 1로 나누어 공부를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효진이랑 정혜에게로 집중된다. 아리 역시나 마찬가지로 효진이야 뭐 항상 그렇다 치지만, 너무나 바뀌어버린 정혜의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수학을 가르쳐준 지수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고 바랐던 정혜는, 그 바람을 실현시킨 채 또 다른 목표를 세우기에 이른다.
4월의 봄기운에 수업을 시작하는 1교시부터 조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리고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애틋한 눈동자가 반 전체에 메아리치듯 커져만 간다. 그 속에서 효진이와 정혜는 단연 돋보인다. 2학년으로 진학한 후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난 아리네 반 친구들이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조례시간을 틈타 정혜에게 “점심시간에 선생님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셨고, 그래서 정혜는 “네, 선생님.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갈게요.”라고 대답을 했었다. 정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것은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야 알 수 있는 일이렷다. 1교시는 국어시간이었다. 국어선생님께서는 1학년 때와 바뀌지 않은 그대로의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정혜를 보며 기뻐하셨다. 1학년 때 치룬 국어 시험은 정혜가 줄곧 1등을 했기 때문이었다. 준혁이도 국어를 잘했지만, 역시 엄청난 노력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서, 국어는 난이도가 더욱 높아졌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상황에서 얼핏 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급격히 올랐다. 아마도 예비 수험생으로서 수능 문제를 풀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서 그런가보다. 그래서 정혜도 힘들어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수업 도중에 누군가 문을 “쾅” 소리 나게 열고 들어선다. 반 아이들의 시선은 그 곳으로 향한다. 가방을 손에 든 채 인상을 찌그러트리고, 반항적인 눈빛으로, 쫙 달라붙는 교복을 입은 채 반으로 들어선다. 그러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들… 구경났냐? 뭘 쳐다보냐?! 어?!” 그 학생은 바로 정혜네 반에서 짱인 친구다. 이름은 세연이고, 키는 168cm 정도에 S라인 몸매를 가졌으며, 어릴 때부터 합기도로 다져진 몸이라, 중학교 때도 싸움 짱으로 등극했던 여학생이다. 선생님들께서도 이미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은 상태인지라 국어선생님께서도 별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만 조용히 하실 뿐이셨다. 그런데 세연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자리로 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정혜를 쏘아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왜 세진이는 정혜를 쏘아본 것일까. 세진이의 등장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교시가 끝이 난다. 쉬는 시간이 되자 정혜를 만나기 위해 어김없이 찾아오는 세민이다. 순간 세진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세진이는 세민이를 좋아했다. 그런데도 감히 자신의 앞에서 정혜와 세민이가 사귄다는 소식을 접해들었으니, 세진이에게는 정혜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세진이는 정혜에게로 다가서는 세민이의 앞쪽으로 뛰어오더니, 일부러 넘어지는 척한다. 넘어지면서 세진은 세민의 품에 안겨버린다. 그래서였는지 세민이도 중심을 못 잡고 같이 넘어지게 되었다. 세민이는 세진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세진이를 쳐다보며 이야기한다.
"세진아, 미안해. 어디 다친데 없지?" "응. 괜찮아. 오히려 세민이 네가 넘어지면서 무릎 땅에 부딪힌 것 같은데 괜찮아?" "응. 난 괜찮아. 네가 아플까봐 걱정이지." 세민이는 실수해버렸다. 정혜도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정혜 앞에서 다른 여자를 걱정하듯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의 정혜. "여보야. 방금 뭐라 그랬어?" "응? 뭘 뭐라 그래?" "걱정? 내 앞에서 지금 쟤를 걱정 한다 그랬어?", "나랑 부딪혀서 넘어졌잖아. 그래서 그러는 거지 뭘…" "흥. 좋아. 걱정한다 이거지? 그래, 어디 한 번 둘이 잘 해봐!" 정혜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나쁜 자식, 감히 내 앞에서 다른 여자애를 보고 걱정해?! 용서 못해!' 정혜랑 세민이도 드디어 질투에 의한 사랑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정혜의 반응에 놀란 세민이는 곧장 정혜가 있는 곳으로 뛰어온다. "여… 여보야! 왜 그래?! 이만한 일로 꼭 그렇게 화를 내어야 속이 시원해?" "뭐라고? 이만한 일? 너한텐 다른 여자 걱정하는 일이 이만한 일이라 표현할 만큼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아… 그런 뜻도, 말도 아닌 거 알잖아. 요즘 따라 정말 왜 그래?! 걔가 나랑 부딪혀서 넘어졌잖아. 그래서 괜찮은지 확인하고 다쳤을까봐 걱정된다고 그랬던 건데 그걸 꼭 그렇게 받아들여야만 해?!" "지금 네가 잘했어?! 난 아무리 누군가 나랑 부딪혀서 쓰러져도 그 자리에 네가 있었으면 걱정된단 말은 안했을 거야. 나쁜 자식." "야! 정혜야!! 너 정말 계속 그렇게 나올 거야?! 오호라, 화 안 풀겠다 이거지?!" "흥이다! 너 같으면 화 풀리겠냐?!"
"이제는 여보야 라는 애칭도 안 쓴다?! 헐, 그래 좋아.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좋아!! 너 마음대로 해!!!" 세민이도, 정혜도 사귀는 날이 오래되어져 가면 갈수록 사랑싸움이 잦아진다. '설마… 권태기라도 찾아온 건지.' 반면, 세민이는 그대로 다시 올라가 자신의 반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도 화가 사그라지지 않아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는지 책상을 주먹으로 '쾅'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리 친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자고 있던 규혁이가 신경질적으로 세민이에게 말한다. "야!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주먹으로 책상을 치냐?!" 세민이는 참으려하지만, 너무나도 화가 나있는지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규혁에게로 달려간다. "야. 김규혁…!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뭐! 시끄럽다잖아. 근데… 너 많이 컸다? 감히 내 앞에 달려와?…" 세민이는 그런 규혁이를 노려본다. "야. 너 지금 째려봤냐? 미쳤나 이게…!" 위협적으로 나오는 규혁이다. 그렇다. 어쩌다 보니 소개가 늦어졌는데, 이렇게 등장하는 김규혁은 키 177cm에, 스쿼시를 취미로 한 남학생으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오면서 1학년 때 자신의 반 짱을 주먹 한방으로 쓰러트리며 화려하게 강한 남자의 세계에 들어간 친구이다. 그런 자신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세민이를 손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조용히 화장실로 따라와라…" "싫은데? 내가 왜, 니 말을 들어야 되냐…?" 반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그때였다. "이 새끼가 진짜! 다른 애들한테 안 쪽팔리게 해주려 그랬더니, 안 되겠네…"라는 말과 함께 규혁이는 그 자리에서 세민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갑작스레 맞은 세민은 멈칫하는 듯 하다가, 규혁이에게 하이 킥을 날린다. 몸이 빠르고, 태권도로 다져진 세민의 다리 힘은 엄청났다. "휘익~ 퍼억!!" 그러더니 세민이의 말이 이어진다. "이 새끼가… 감히 주먹을 먼저 날려?! 야… 너 도랐냐?…" 엄청난 다리 힘으로 무장된 세민이에게 하이 킥을 정통으로 맞은 규혁이는 교실바닥으로 무참히 넘어진 채 세민이를 노려본다. 그래서 세민이는 더 화가 나버리고, 규혁이에게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퍽! 퍽! 퍼억!! 퍽!!" 이에 규혁 역시 지지 않고, 세민이에게 주먹을 퍼붓는다.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착한 줄로만 알았던 세민이가 규혁이를 상대로 싸울 줄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다 2교시가 시작하는 종소리가 들리자, 규혁이는 세민이에게 말한다. "야. 정세민… 옥상으로 올라가자…! 끝은 봐야지…?", "그래. 네가 감히 나한테 선빵을 때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좋아. 올라가자. 수업 방해하지 말고…!" 그렇게 둘은 옥상으로 올라간다. 구경 중의 제일은 동네 불구경이랑 싸움 구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둘의 싸움을 구경하려 친구들이 올라오려고 하자 규혁이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따라오는 놈 있으면… 죽는다.…!"
그렇게 둘만 옥상으로 올라가고, 규혁의 말이 무서웠던지 아무도 옥상 올라가려하질 않는다. 옥상에 도착한 규혁과 세민은 도착하자말자 한판 붙는다. "퍽! 퍽!! 퍽!!!" 한참동안 싸우던 그들은 둘 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듯 그 자리에 눕게 된다. 그 와중에도 세민이와 규혁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말한다. "야. 김규혁…! 너 그런 식으로 한번만 더 말했다간 그땐 죽을 줄 알아라.", "누가 할 소리를 지금 누가 하고 앉아있냐…! 너야말로 한번만 더 내가 자고 있을 때 시끄럽게 굴어라. 그땐 바로 때려버린다…?!", "너 이 새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 "넌 다른 줄 아냐?! 적당히 까불어라.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안 봐주면 니가 뭐 어쩔꺼냐…?!" 다시금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더니, 또 한판 신나게 싸운다. 얼마나 때리고, 맞길 반복했을까. 교복마저 여기저기 뜯기고, 머리 스타일도 수세미가 되었으며,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학생들의 싸움이라 보기 힘들만큼 서로 많이 다쳤다. 학창시절, 남자들의 세계는 이렇듯, 강한 자가 모든 우선권을 갖는 동물의 왕국과도 같은 것. 인간도 뭐 동물이니 전혀 이상한 뜻으로만 받아들일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던 규혁과 세민은 체력이 바닥났던지 그대로 쓰러진다. 한편, 그 사실을 알 리 없던 세민이의 반 담임선생님께서는 "규혁이랑 세민이 오늘 결석했나요?"라고 2교시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를 거셨고, 이에 담임선생님은 "아뇨? 왔었는데요?"라고 말씀드리면서, 사건은 더욱 커지게 된다. 2교시는 사회 과목으로 사회선생님께서는 직책이 인성부 부장인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무언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으셨는지,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셨다.
"혹시, 세민이랑 규혁이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선생님한테 솔직히 말해줘라." 그러자 뒤탈이 겁나서였는지 아이들은 머뭇거리고, 그에 눈치 빠른 선생님께서는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는 아이들에게 자율학습을 시키신 채, 화장실로 향하셨다. 혹시 화장실에서 싸움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보기 위함이셨다. 그러나 화장실에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 하시다가 문득 옥상이 떠오르셨는지,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아니나 다를까, 옥상 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그대로 옥상으로 뛰어올라 가셨다. 옥상에 들어서자 선생님의 눈에 쓰러져 있는 규혁이와 세민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서 놀라신 인성부장 선생님께서는 전화로 우선 양호부 선생님을 불러 응급처치를 하라고 해놓으시고는 119에 전화해 구급차를 불렀다. 피투성이였던지라, 우선 병원에서 치료부터 받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됐기 때문이셨다.
그렇게 119 구급대원들도 도착하고, 규혁이와 세민이를 업고 구급차에 올라 병원으로 즉시 이동했다. 얼핏 봐도 어디 한군데는 부러졌을 것 같았기에, 인성부장 선생님께서는 걱정이 되셨던지 일단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는 이랬다. 세민이는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오른손 검지가 부러져 있었고, 규혁이는 얼마나 세게 맞았던지 갈비뼈에 금이 가서 당분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진단이 나왔다. 역시 남자들의 싸움은 그냥 말로 끝나지는 않는다. 선생님의 눈빛이 흔들리셨다. 그렇게 학교에서 싸우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결국 싸워서 이 지경이 된 규혁이와 세민이에게 화가 나시기도 했지만, 또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다.]라는 옛말을 떠올리시며, 안쓰럽다는 듯, 둘을 찬찬히 들여다보신다. 일단 세민이야 손가락만 기부수를 하고, 불편은 하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 되니 그나마 괜찮았지만, 문제는 규혁이였다. 그래서 한숨을 연달아 내쉬던 선생님께서는 일단 무사히 규혁이가 입원을 했다고 담임선생님께 알렸고, 이런 말씀도 함께 나누셨다. "규혁이네 부모님께 이번 일을 말씀드려야 되는데 말입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보다 충격이 덜하실지… 담임선생님께서 규혁이 부모님께 전화하실 때, 신경 좀 써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직 싸운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십니까?", "네. 아직은 듣질 못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싸운 것이지, 세민이나 규혁이가 일방적으로 때리고 맞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나마 부모님께서 아이들은 싸우고 자라는 것이라 조금은 이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싸움을 초기에 끝내지 못한 것이 인성부장으로서 너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걔네 부모님들께는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창 크는 아이들이 치고 박고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십시오.", "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나마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부모님께서 걱정 많이 하시지 않도록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럼 저는 수업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통화한 후에 또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찾아뵙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듯했다. 물론 담임선생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3교시 수업이 없었으므로 규혁이 부모님께 곧바로 전화를 거셨다. 전화를 받으시는 규혁이 어머님.
"여보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규혁이네 어머님, 저는 규혁이네 반 담임입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모르는 번호라 안 받으려 했는데 큰일 날 뻔 했네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아, 네… 사실은… 규혁이 일로 전화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반에 세민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규혁이랑 세민이가 학교 옥상에서 싸우다가 조금 다쳤던지 지금 하늘 병원에 입원해있다고 합니다.", "네?! 그게 정말이에요?… 우리 규혁이가… 많이 다쳤나요?", "음… 아직 거기까지는 저도 파악하질 못했습니다. 당시 2교시였는데, 2교시가 인성부장선생님께서 담당하시는 사회시간이었고, 세민이랑 규혁이만 보이지 않아서 저한테 전화를 해주셨더라고요. 그래서 아닐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걱정이 되셨던지 화장실부터 가보셨다가, 옥상으로 가보았더니 둘 다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 그랬었군요. 하늘병원이라고 하셨죠? 바로 거기로 가보겠습니다.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감사하다뇨. 오히려 싸우기 전에 선생님으로서 말리지 못했던 부분이 죄송하기만 한걸요. 그럼 저도 수업 끝나고 하늘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이렇게 전화통화를 끝마쳤다. 이제 2학년이 시작되는 시점이거늘, 담임선생님은 세민이랑 규혁이가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심한 갈등을 겪진 않을지 걱정하셨다. 이렇게나 걱정을 하시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민이도, 규혁이도 언제 싸웠냐는 듯, 병원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민이가 깨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제야 자신이 하늘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다.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기 때문에, 왼손으로 휴대폰을 만졌다. 자신과 규혁이가 싸웠다는 소식을 들은 정혜가 걱정이 되었던지 7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겼고, 어머니께도 전화가 3통이나 와있었다. 그래서 일이 커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세민이는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본다. 갈비뼈 쪽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링거를 맞으며 잠들어있는 규혁이가 보였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물어뜯을 듯이 분한 감정으로 싸웠었는데, 그새 감정이 진정되었던지 세민이는 규혁이에게 미안해졌다. 규혁이랑 싸우게 되었던 원인도 자신이 분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기 때문이었던 터라, 당시에 그냥 미안하다고만 했어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미안한 감정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꼭 일어나면 사과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타이밍 절묘하게 규혁이가 일어났다. 고통스러운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세민이를 발견하고 곧이어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마음이 좀 나아졌냐?", "뭐? 무슨 마음이 나아졌는지 묻는 거냐?", "자식, 모른 체하기는… 야, 내가 1학년 때 너랑 친하지는 않았어도 널 모르는 건 아니었는데, 네가 화내는 거 처음 보고 놀랐다.", "아, 그랬냐. 아까는 내가 정혜랑 다퉈서 분한 마음에 그 불똥이 너한테로 튀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안하냐?", "미안하기는 얼어 죽을. 아직 덜 맞았냐?", "새끼, 성깔하고는…", "… 미안하다. 규혁아.", "어? 어… 나도 미안하다. 요즘 내가 너무 파이터의 기질이 흘러넘쳐가지고, 그래서 나도 시비거는 투로 말했던 거다.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 사과할게.", "짜식. 아니다. 갈비뼈 다친 것 같은데 안 아프냐?", "졸라 아프다. 새끼야. 때릴 거면 좀 살살 때리던가. 아 정통으로 때리데. 그것도 있는 힘껏.", "뭐 인마,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그리 심하게 다친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구먼. 뭘 그리 오버 하냐. 갈비뼈 몽땅 다 부러뜨려줄까?", "거 참. 숨 쉬기도 힘들다 인마. 그나저나 너 싸움 좀 하더라. 그저 착한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였어."
"이제 알았냐? 암튼 미안하게 됐다. 정말. 괜히 병원신세 지게 만들고. 다 낫고 나면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자. 맛있는 걸로 사줄게." "새끼, 양심은 있네. 알았다. 걱정마라. 엄청~ 비싼 건 안 먹을 테니까." 잠시 그들의 대화가 멈췄다. 그리고 세민이의 눈이 갑자기 아래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규혁이는 뭔 일인가 싶었던지 앞을 바라본다. 세민이네 어머니께서 와 계셨던 것이었다. 세민이네 아버지께서는 회사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그래서 우선 어머니만 오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세민이에게 다가가시더니 있는 힘껏 등짝을 때리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싸움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거니? 엄마는 너한테 굉장히 실망했다!" 그런데 여기서 세민이의 대답이 아주 삐딱했다. "네! 실망하시려면 실망하세요! 그런다고 해서 제가 겁먹을 줄 아세요?! 저한테 언제부터 관심가지셨다고 그러시는 건데요?! 학교에서 싸움이나 하냐고요? 봐요. 이번 일만 해도 그래요. 저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으시니까 제가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시잖아요!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 싸운 건데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입장이 뭐가 되요!"
그렇다. 세민이는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춘기가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인지라 자칫 잘못 건드리면 더 삐딱하게 나아간다. 세민이로부터 반항하는 투로 대답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너무 당황스러워하셨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어머니께서는 충격을 받으셨다. 그래서 잠시 바람 좀 쐬고 점심 때 다시 오겠다고 하시고는 댁으로 돌아가시고야 말았다. 세민이는 스스로도 너무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께 그렇게 반항적으로 말하게 될 줄도 몰랐고, 욱한 감정을 앞세워 정혜랑 다투게 될 줄도 몰랐으며, 또한 규혁이랑 싸워서 병원에 오게 될 줄도 몰랐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전화를 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세민이는 의외로 정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정혜는 수업 중이었다. 세민이에게 전화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평소 같았으면 전화를 끊고, 톡으로 수업 중이라고 알렸을 법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정혜는 선생님께 화장실 갔다 오겠다고 말씀드리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야 어떻게 된 거야? 싸웠다는 소문은 뭐고, 지금은 또 어딘데?", "여보야? 치. 여보라고 안 부르겠다며? 잘 먹고 잘 살라며? 그럴 때는 언제고…", "그럼 전화 끊어버릴까? 끊는다?!", "아니아니… 미안해. 나 규혁이랑 싸우게 됐는데 싸우다 쓰러져서 하늘병원에 지금 치료받으러 왔어.", "어휴… 자랑이다. 왜? 왜 싸웠어?", "아 몰라, 너 때문에 싸운 거야. 아까 그렇게 틱틱거리지만 않았어도 안 싸웠을걸!", "뭐? 틱틱?! 너 나중에 죽을 줄 알아. 세상에서 나를 제일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 해놓고 뭐? 틱틱? 좋아… 내가 틱틱이 뭔지 똑똑히 보여줄게.", "그러기만 해봐. 바로 이마에 파워땡콩 날아 간다.", "웃기시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주제에. 그래서… 아픈 데는 어때? 많이 다친 거야?", "아니, 나는 오른손 검지가 부러진 게 다인데, 규혁이가 좀 많이 다쳤어. 갈비뼈에 금이 갔데.", "헐… 일단 알았어! 지금 수업 중이라 화장실에 와서 받는 거야. 나 다시 수업 들으러 가야해. 쉬는 시간에 통화해.", "싫어. 전화 끊으면 너랑 나랑도 오늘로 끝인 줄 알아."
정혜는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 이제껏 한 번도 듣지 못했고, 듣기를 원치도 않았던 "끝인 줄 알아."라는 말이 자신의 남자 친구인 세민이의 입에서 나오다니… 그래서 말문이 막혀있던 정혜에게 세민이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여보야… 사랑해.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어.…" 정혜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나도… 정말 사랑해. 그리고 나도 아까 미안했어. 그런데… 나 여보한테 할 말이 생겼어. 앞으로는 끝인 줄 알라니, 헤어지자니 그런 말 다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여보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알겠지?", "응. 다시는 그런 말 안할게. 그리고 지금 수업 시간이니까 수업 끝나면 다시 전화할게. 수업시간인데도 전화받아줘서 정말 고마워." 이렇게 세민이와 정혜의 전화도 끝이 났다. 정혜는 다시 반으로 들어가 수업을 들었지만, 귓속에서 세민이가 했던 "끝인 줄 알아."라는 말이 계속해서 맴돌아서였는지 쉽사리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2학년의 생활은 거칠게 시작된다. 세민이도, 정혜도, 준혁이도, 아리도, 그리고 세민이랑 진하게 싸우면서 앞으로 더욱 친해지게 될 규혁이도 이렇게 새 학년을 시작하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부디 더는 그들이 험난하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