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시험기간의 달달한 사랑이란 이런 걸까?」
조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계속 정혜는 엎드려 자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입장하셨다. 그래도 너무 지쳤던지 일어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그런 정혜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다. 인성부장 선생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설명 들으셨던 담임선생님께서는 이런 말까지 함께 들었다. “담임선생님, 그런 벌을 이겨내는 정혜를 보면서 오히려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처음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뭐하는 행동인가 싶은 마음에 화가 나서 벌을 주게 된 것이지만, 그걸 받아내는 과정에서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는 말이 계속 반복적으로 나왔을 법도 한데, 정혜는 그러지 않더라고요. 여자애치고는 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놀랬어요.” 그 말씀을 들은 담임선생님도 놀랬다. 비록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껴안고 그랬던 것은 잘못 되었다 할 수 있지만, 정혜와 세민이 입장에서는 서로 사귀는 사이고, 또 정문에 인성부장 선생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 알고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담임선생님께서는 정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셨다. 그런데 인성부장 선생님께서는 더 할 말이 있으신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아, 그리고 정혜가 엎드려뻗쳐 있던 도중에 일어나서 저한테로 다가오더니 지금은 시험기간이라 공부해야 하는데 이해해주시면 안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제가 미안해지기까지 했었어요. 이번에 정혜 아무래도 성적이 잘 나올 것 같습니다. 단순히 체벌을 면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면 또 모를까. 그 말을 하는 정혜에게서 진심이 느껴져서 더욱 놀랬던 것 같아요. 오늘 아마 하루 종일 정혜 힘들 겁니다.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시고, 오히려 격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확실히 정혜는 달라진 것 같았다. 단순히 시험기간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학창시절에 공부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하는 어른들도 간혹 계시지만, 담임선생님 입장은 달랐다. 학생들에게도 그 시절에만 느껴볼 수 있는 로맨스가 있기 마련이고, 그걸 막을 권리는 없다. 단지, 너무 연애에 치중한 나머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하거나, 혹은 성적이 곤두박질친다거나 했을 경우가 되면, 조언을 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셨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일명 [깨어있는 시각]으로 불리는 선생님이셨기에 정혜와 세민이가 사귀는 것을 오히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공부에도 열심히 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그러한 정혜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릇 성적은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오르는 성적을 경험한 그 본인은 더 성적을 올려보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기 때문에, 이번에 만약 정혜의 성적이 평균 등급 1등급 정도라도 오를 수만 있다면, 오히려 정혜에게는 더 좋은 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을 것만 같아서, 선생님께서는 내심 많이 기쁘기도 하셨다. 그래서 조례를 하는 대신 전달사항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혜를 대신 상담실로 부르셨다. 힘든 모습으로 상담실로 내려온 정혜에게 선생님이 웃으시며 물어보셨다. “정혜야~ 힘들겠구나?”라고. 그러자 정혜는 이렇게 대답해드렸다. “선생님, 실망시켜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그 대답을 듣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속으로 ‘네, 선생님. 아침에 걸려가지고 힘들었어요.’라고 응석부리듯이 대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죄송하다는 말을 해주는 정혜에게 놀라움을 감추지를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응? 정혜야, 뭘 잘못했는데? 그건 네가 잘못한 일이 아니야.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해. 학창시절에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볼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 애정이 더 깊어져서 교문 앞에서 로맨스 있게 포옹을 해볼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선생님은 오늘 정혜에게 뭐라 하려고 상담실 오라고 한 거 아냐~ 혹시라도 오해했다면 오해 풀고, 이 선생님은 그냥 정혜랑 이야기하고 싶었고, 오히려 네가 선생님 입장에서는 대단하게 생각이 되어서 놀라워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데?” 그 말씀을 경청하며 들은 정혜는 보통 선생님과는 다른 분위기와 말씀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말씀드렸다. “네? 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면 감사해요. 그런데 아침에는 학교라는 곳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도 잘못한 것은 맞는 것이었고, 또 주위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도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죄송하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린 거예요.”
그러자 정혜의 대답을 들으신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기특하네.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서 촉이 좀 빨라. 준혁이랑 아리도 사귀는 거 맞지?” 정혜는 놀랬다. 자기네들한테도 비밀연애로 사귀지 않는 척했던 사실을 선생님께서는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혜는 허탈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웃음꽃 활짝 핀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네… 하하하, 선생님. 어떻게 아셨어요? 애들 아무도 모를 텐데… 비밀로 해주세요. 그리고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러자 선생님은 “응? 어떤 점이 그렇게 보이는데?”라고 물어보셨다. 그러자 정혜는 “보통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은 다들 공부나 하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오늘 제가 벌을 받았고, 그 사실을 분명히 선생님께서도 들으셨을 것이라 생각해서 ‘혼내시려고 상담실로 부르시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사귀는 것을 좋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셔서 그 점이 어른들과는 다른 부분인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랬구나. 그 말은 충분히 선생님도 공감하는 말이야. 그런데 좀 전에도 말했듯이 너희도 학생이긴 하지만,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그걸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 사회를 이끌어가는 어른들도 학창시절에 다들 공부만 한 것 같아? 아니야. 물론 공부만 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다들 짝사랑했던 남자 혹은 여자가 한두 명 정도는 있을 걸? 그런데 어른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느냐 하면 살아보니까 학창시절에는 학생의 본분이 공부인 만큼, 공부만 열심히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러는 거야. 정혜는 아직 이해를 못할 부분이야.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 그리고 이 선생님도 학창시절에 다른 학교에 너무 잘생긴 애가 있어서 줄곧 따라다녔다가 사귀긴 했는데 너무 나쁜 남자라서 헤어지자고 했던 적도 있는데 뭘.”
정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내내, 많은 공감이 갔던지 많이 웃기도 하면서도 나쁜 남자를 만나서 고생했다는 말씀을 들을 때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혜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 그러셨구나. 하필 만나도 나쁜 남자를 만나셔가지고 제 마음이 다 아파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부분들이 맞는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한 번씩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냈다가 서로 사귀었던 추억을 이야기해버리고, 서로 다투시고, 그러실 때도 여러 번 있으셨거든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도 활짝 웃으시더니 이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셨다. “그치? 어른들도 다 그럴 때가 있었다니까. 그나저나 정혜야. 이젠 좀 어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나니까 힘든 건 좀 괜찮아졌어?”
그랬다. 선생님께서는 인성부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정혜에게 뭔가 힘을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힘을 낼 수 있는 보약 같은 것은 당장에 구할 수가 없으니, 같이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하면서 웃게 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웃다보면 힘이 생기고, 서로 마음을 터놓다 보면 더 큰 힘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 정혜는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네 선생님, 많이 괜찮아졌어요. 선생님 덕분에 이제 다시 공부할 힘도 생긴 것 같아요. 오리걸음하고 팔굽혀펴기 했던 것이 너무 힘들어서, 솔직히 3, 4교시까지는 엎드려 자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니 힘든 것도 거의 사라졌어요.” 그러고는 1교시가 시작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선생님께서는 어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다시 반으로 돌아왔다.
교실로 돌아간 정혜는 기지개를 한번 펴더니 1교시 수업을 준비했다. 1교시는 기술가정 시간이다. 기술가정을 두고 [기가]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기가 시간에 오늘은 수행평가를 치루겠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재료를 나눠주셨다. 바느질 하는 방법에 대해 실제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올바르게 하는 것인지를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이번 수행평가는 20점 만점짜리로 10점짜리인 필기검사보다 더 중요했다. 반 번호 1번인 학생부터 시작되었다. 정혜는 16번이었고, 에이스 효진이는 23번이었다.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16번인 정혜가 수행평가를 시행하기까지는 15명이라는 여유가 있었고, 정혜는 기술가정 책을 보며 신속하게 다시 한 번 틀리게 알고 있는 것은 없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13번인 다혜는 휘갑치기 방법에서 너무 많이 틀린 나머지 0점을 받았다. 그래서 더욱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통 자기 앞 번호인 애가 잘하면 왠지 부담스러움이 더 심해진다. 솔직히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다행이 내 앞 번호인 애들이 잘하지 않았던 친구들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지만, 정혜는 어떨까.
드디어 15번의 차례가 되었다. 15번인 라연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솜씨가 일품이었다. 선생님도 놀라워할 정도로 정교하고도 섬세하게 바느질 방법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20점 만점을 받았다. 이구동성으로 “오…”하는 소리와 더불어 16번이 호명되고, 모든 관심은 정혜에게로 쏠렸다. 겨울에 세민이에게 목도리를 떠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쪽으로 많이 했기 때문에 정혜는 선생님께서 해보라고 하셨던 방법도 잘해냈을 뿐더러 정혜만이 펼쳐 보일 수 있는 휘황찬란한 기술로 15번에 이어 두 번째 만점자가 되었다.
정혜는 스타트가 좋았다. 1교시부터 기분 좋게 수행평가 만점을 받은 정혜는 더욱 신나게 수업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기술가정 과목은 필기도 완벽하게 되어 있으니 이제, 시험만 잘 친다면 충분히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은 것이다. 그러한 정혜의 뒤를 이어 17번… 18번… 19번 계속해서 불려나갔다. 20번은 보현이다. 보현이는 사실 반에서 32명 중에 32등을 하는 친구다. 그래서였는지 휘갑치기를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당당히 감침질을 했다. 너무도 당당하게 했기 때문에, 순간 선생님도 저 것이 휘갑치기로 착각할 정도였다. 당연히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0점!!”
보현이는 부끄러운지 조용히 자기네 자리로 돌아가서 앉더니 고개를 숙였다. 웃던 아이들도 미안했던지 보연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제 차례가 지나고 드디어 효진이 차례가 되었다. 에이스라는 타이틀답게 선생님께서도 다른 학생들에게는 2가지 정도 시켜보고 점수를 주셨는데, 효진이에게는 무려 4가지를 시험하셨다. 그런데 신들린 것처럼 4가지를 완벽하게 해보였고, 선생님은 기뻐하시면서 “세 번째 만점!”을 외치셨다. 효진이 이후에 한 친구들은 효진이의 놀라운 실력에 다들 소극적이 되었던지 실수를 많이 했고, 그 중에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던 친구가 16점이었다.
이렇게 수행평가가 끝이 났다. 그래서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다. 선생님께서는 자율학습을 시키셨다. 다시 재료를 걷고, 정리를 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반장에게 말씀하셨다. “수업 끝나고 나면 반장은, 필기 검사할 테니까 걷어서 교무실 선생님 자리에 올려놓아 줘.”라고. 그래서 필기마저 똑바로 되어 있지 않았던 친구들은 허겁지겁 필기를 하기 시작했고, 평소에 필기를 똑바로 해두었던 효진이와 정혜, 반장 등은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반장은 공책을 걷어서 선생님 자리로 이동했고, 정혜는 문득 세민이가 보고 싶었다.
세민이에게 자랑할 ‘기술가정 수행평가 만점’이라는 자랑거리도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치자마자 반장에게 공책을 전달하고. 슬금슬금 세민이 반으로 향했다. 아침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이미 전교생이 세민이와 정혜가 사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며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정혜가 세민이네 반으로 다가오자, 어떤 친구는 세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민아, 네 여보 왔다.” 본의 아니게 공식 커플이 되어버린 세민이와 정혜는 오히려 더 좋은 여건으로 서로 커플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민이는 자신의 반으로 온 정혜를 발견한 세민이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정혜에게 갔다. 그리고는 정혜에게 말했다.
“여보야~ 어쩐 일이야?” 그 말을 듣고야 만 친구들은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세민이랑 정혜를 바라보지만, 정혜는 오히려 학교를 대표하는 공식 커플이 된 것만 같아 그렇게 말하는 남자 친구 세민이가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응? 나 당연히 우리 사랑하는 여보야 보러왔지~” 세민이는 말했다. "아 그랬구나! 점심시간만 보자더니… 치‥"라고. 그들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나 있잖아~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었다?", "응? 무슨 일 있었는데 그래?", "우리 반에 기술가정 수행평가 만점자가 총 세 명인데~ 그 중에 나도 있지롱~", "아 정말? 좋겠네. 여보는 이번 시험 정말 잘 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마워, 사랑해", "그럼 오늘 학교마치고 잠시라도 데이트할까? 어때?", "음… 좋아! 대신 1시간 동안 만이다!", "오! 정말? 알았어. 오늘은 웬일이래?", "기분 좋은 날이니까~ 그럼 저녁에 카페가자. 학교 근처에 분위기 좋은 카페 알아", "응! 알았어! 꼭~ 저녁에 봐! 마치고 내가 바로 달려갈게", "응~ 그럼 나 우리 반에서 기다린다? 마치고 바로 와! 안 오면 죽어! 알았지?!", "응!! 당연하지. 그때 봐~ 그럼 쉬는 시간 끝나 가는데 가서 다음 과목 준비해~", "응! 나, 갈게!! 있다 봐!"
이 대화를 끝으로 정혜는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정혜가 가고난 후 세민이네 반에서는 모두 싸늘한 표정으로 닭살 돋았다는 듯이, 팔을 뻑뻑 긁었다. 뒤이어, 세민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세민이네 반 반장인 규민이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야. 여기가 사랑방이냐?" 그러자 규민이 옆에 앉아 있던 세현이도 말했다. "너희가 그 유명한 견우와 직녀냐?" 그러자 세민이가 대답했다. "아니? 아닌데? 무슨 말이냐?"라고. 그러니 세현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견우와 직녀지. 그 정도면. 교문에서 서로 뛰어가서 그대로 서로한테 안길 정도면… 넌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그 말이 웃겼던지 세민이도 웃었다. 웃으면서 묻는다. "뭐. 내가 왜? 왜 죄인인데?"라고. "솔로들의 가슴에 피멍을 남겼잖아. 모른 척하냐?"라고 세현이가 맞받아친다. 어이가 없는지 세민이는 웃으면서 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가 앉은 뒤 2교시 교과서를 꺼내고 수업준비를 한다.
정혜도 마찬가지로 애정행각을 펼치다가 공부모드로 다시 전환했다. 2교시는 영어 시간이다. 영어시간에도 회화로 수행평가를 치른다고 했다. 영어에는 나름 자신 있던 정혜는 수행평가를 위해서 전략적으로 효진이랑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효진이를 쳐다봤더니, 효진이도 정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효진이도 정혜를 선택한 것 같았다. 효진이 입장에서도 정혜가 영어를 잘하니까 같이 수행평가 점수를 잘 받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기도 했으니, 누가 나쁘다 할 것 없이 쌤쌤이였던 것이다. 영어선생님께서는 기술ㆍ가정 선생님과 달리 먼저 할 학생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먼저 하는 사람에게는 가산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였다. 정혜와 효진이는 손을 번쩍 들었다. 영어선생님께서도 살짝 당황하시긴 하셨지만,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래서 앞으로 나가서 미션을 기다렸다. 선생님께서는 여행에 관련된 주제를 주셨다. 여행에 관해 어떤 회화라도 좋으니 시작하라고 하셨다. 정혜는 유창한 영어 솜씨를 뽐내기라도 하듯 시작했다. 발음이 좋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에 효진이도 지지 않고, 독학으로 얻은 영어 실력을 유창하게 드러냈다. 단어마다 임팩트 있게 발음할 곳은 임팩트 있게, 부드럽게 발음할 곳은 부드럽게 발음하면서 강약조절까지 정확히 했다. 여기저기서 "오…"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선생님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1팀당 1분만하기로 했던 수행평가를 3분이나 시킬 만큼 정혜와 효진이의 대화에 흠뻑 취하셨다. 정혜와 효진이의 영어 회화가 끝나고, 반 친구들은 "오…"에서 "와…"로 감탄사가 바뀌었다. 자연스레 박수가 흘러나왔다. "영어는 듣기와 말하기가 아주 중요하다"하여 수행평가 만점이 무려 30점이었다. 숨죽인 채 결과를 기다렸다. "정혜와 효진이 30점!" 정혜와 효진이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효진이는 항상 받던 점수라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는 듯 했지만, 정혜는 영어에서 줄곧 만점을 놓쳐 왔으니, 그저 짜릿할 뿐이었다. 이제 영어 과목 역시나 지필평가만 잘 치면 등급이 오르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효진이는 내심 불안했다. 요즘 너무 열심히 하는 정혜에게 1등자리를 뺏기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드나보다. 그렇다면, 정혜는 1등자리를 탐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정혜는 평균등급이 오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어떤 누군가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연한 효진이의 그릇된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정혜와 효진이의 뒤를 이어 누구 한 팀 선뜻 수행평가를 하겠다고 나서질 못했다. 그만큼 잘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도 난감함을 표하셨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누군가 하니 의외의 친구들이었다. 국사를 좋아하는 '국사 트리오'였던 것이다.
매번 수업 시간 때마다 졸던 아이들이, 발표를 빨리 하겠다고 해서 선생님도 당황하셨지만, 그래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수락하셨다. 그런데 회화를 노래로 표현했다. 팝송으로 대화하듯 이야기 나누었던 것이다. 국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노래도 상당히 잘했다. 팝송으로 주고받듯 이야기를 나누는 그 트리오에게 선생님께서는 28점을 주셨다. 지난 시험 때는 16점을 받았던 것에 비해 무려 12점을 더 받은 것이다. 그녀들은 감격하면서 서로를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국사 트리오를 끝으로 더 이상은 수행평가를 받으려는 학생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다음 시간으로 넘어가버리면 최고 점수가 20점이 된다. 즉, 아주 잘해도 10점을 잃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한 주 동안 연습해서 20점이라도 받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지 반 친구들은 결국 아무도 발표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싸늘한 표정으로 반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영어선생님께서는 갑자기 시험에 관련한 힌트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셨고, 그래서 웬 떡인가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답은 1번에서 5번 사이에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예상치 못한 일침을 당한 아이들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선생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사실 선생님께서도 정말 힌트를 주려고 하셨다. 그런데 비록 수행평가라고는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렵다고 다음 시간으로 미루는 모습을 보면서, 주고자 하셨던 마음이 바뀌셨던 것이다. 2교시도 이렇게 끝난다. 반 친구들은 시무룩하게 책상만 보고 앉아있지만, 그 반면 정혜와 효진, 국사 트리오 이렇게 4명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들보다 고득점을 얻어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고, 매점으로 내려가 소규모의 파티를 벌인다. 그 시각, 세민이도 배가 출출한지 매점으로 달려갔다. 3, 4교시가 담당 선생님의 교육 출장으로 인해 자율학습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더 활짝 웃으면서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에서 소규모 파티를 하던 정혜와 딱 마주친 세민이는 놀라는 척하더니 정혜를 향해 윙크를 날린다. 정혜는 그 윙크에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은 연기를 펼친다. 역시 커플이 되면 닮아 가는가보다. 그러나 갑자기 쓰러지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는 정혜를 보며, ‘뭐야 저건’이라는 표정으로 정혜를 바라보던 친구들은 정혜 앞에 세민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시작인가보다.’라고 생각하여, 슬그머니 재밌게 놀라며 자리를 피해주기까지 했다.
그 덕(?)에 또 한 번 같이 있을 수 있게 된 세민이랑 정혜는 탁자 위에 걸터앉아 빵을 하나 씩 먹으면서 사랑을 속삭였다. 세민이는 정혜에게 말했다. “여보야~ 지금도 웃고 있네? 오늘따라 좋은 일이 되게 많은가보다?” 그러자 정혜가 대답한다. “웅~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기네. 나 영어 수행평가도 만점 받았지롱!”라고. 세민이는 너무나도 기쁜 표정으로 정혜에게 대답했다. “와! 정말? 기술가정도 만점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오… 이번 시험 왠지 느낌이 좋아!” 정혜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세민이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여보야~ 오늘 마치고 1시간에서 2시간으로 데이트 시간 늘여줄게! 기분 좋아서 그래.” 그 말을 듣고 다른 어떤 말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아진 세민이다. 그래서 세민이도 정혜에게 귓속말로 대답했다. “2시간 동안 여보를 아주 달콤하게 만들어줄게.” 그렇게 말하는 세민이가 싫지 않았던지 정혜는 세민이를 보며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행복함을 표한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벌써 3교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잠잠했던 파도도 밀물과 썰물에 따라 움직여지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위치도 최고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기술ㆍ가정 시간과 영어 시간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3교시에도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수업에 집중하려는 찰나, 아리에게서 한통의 톡이 날아왔다. "정혜야~"라는 톡이었다. 정혜는 바로 답장을 했다. "응? 아리야. 무슨 일 있어?" 그러자 아리가 톡을 보냈다. 톡은 꽤 길게 주고받았다. "갑자기 팔도 욱신욱신 거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도 우울하고 그래서 톡 해본거야…", "아 그랬구나.… 많이 아프겠다. 빨리 낫게 해달라고 내가 밤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왜 더 아픈 건지 모르겠어.", “밤에 기도도 해주고 정말 고마워~ 뭐 아직까지 나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보지 뭐~”,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오늘 당장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지! 그래야 빨리 낫지 바보야!”, “알았어! 그렇게 생각할게. 시험 기간이라 공부하느라 고생 많을 텐데… 힘내고! 주말에 병문안 한 번 와~ 보고 싶어~", "응!! 꼭 한번 들를게. 그러니까 아리 너도, 꼭 빨리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생활하기다! 알았지?”, “알았어. 꼭 그렇게 할게. 고마워~!” 이렇게 톡이 끝났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가족 및 지인들과 연락이 닿질 않으니 휴대폰을 선생님께 맡기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던 정혜였기 때문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3교시가 시작되고, 선생님이 들어오시어 수업을 시작하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혜는 갑자기 아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걱정이 많이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도 우울하고…”라고 했던 아리와의 톡 내용이 왠지 꼭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걱정되게 만드는 이유였다. 공책 필기검사를 할 것이기 때문에 필기를 하면서도, 온통 머릿속은 신기하리만치 아리를 걱정하기만 했다.
그래서 정혜는 생각한다. 학교 마치고, 세민이랑 같이 아리 병원부터 들려야겠다고 말이다. 세민이가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아리를 먼저 보아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칠판에 적혀 있는 내용을 다 필기해놓고, 눈치를 보며 몰래 세민이에게 톡을 보냈다. “여보야. 우리 오늘 학교 마치고, 아리한테 먼저 갔다가 나와서 놀면 안 될까?”라고. 그러자 곧 세민이에게서 답장이 왔다. “응? 왜? 아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또 다시, 정혜는 몰래 톡을 보낸다. “음…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은 안하는데 왠지 느낌이 불안해서 그래… 미안해. 간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내가 이래가지고… 속상하지?” 그러나 세민이는 속상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치고 2시간이라고 했지만 아리네 병원에 갔다가 나오면 그건 시간에서 제외한다고 해야지. 그러면 더 오래볼 수 있겠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계산이 정리되었을 때쯤, 정혜에게 답장을 보낸다. “아니? 난 우리 여보랑 함께 라면 어딜 가도 행복해. 괜찮아. 나도 준혁이 상태 궁금하고 하니까 먼저 거기부터 가자.”라고.
그렇게 말해주는 세민이가 더욱 고마워지는 정혜는 바로 답장을 했다. “응! 정말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세민이도 답장을 한다. “나도 사랑해. 그리고 오늘 학교 마치고 데이트하자고 해줘서 고마워.” 정혜와 세민이는 서로를 생각하며, 얼굴에 예쁜 미소를 띠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달달한 톡 덕분인지 3교시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행히 수행평가도 치루지 않았다. 종소리와 함께 3교시가 끝나고, 정혜는 기분 좋게 4교시를 준비할 수 있었다. 4교시는 수학이다. 지수한테 수학을 배운 이후 틈틈이 집에서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해왔던 정혜라서 그런지 교과서에 실려 있는 문제들을 한 문제도 빠짐없이 다 풀어 교과서에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왠지 4교시에는 수행평가를 칠 것만 같다. 자칫 수학을 쉽게 보았다가는 크나큰 변수로 작용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동안, 다시 한 번 교과서에 나와 있는 문제들을 풀어보면서, 철저히 대비했다. 정혜가 열심히 수학 공부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지수는 그런 정혜가 기특하게 보였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수학 책은 문제 풀이로 인해 점점 헌책이 되어가도, 그 속에서 얻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행복으로 정혜에게 다가갔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저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한다면, 세상의 그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정혜는 아는 것 같아보였다. 그리고 정혜가 했던 노력은 4교시에 크나큰 빛을 발휘한다. 쉬는 시간이 끝나 4교시가 시작되고, 정혜의 예감대로 수학시간에는 수행평가를 실시하는 동시에 필기검사도 실시하고, 교과서에 실려 있는 문제를 얼마만큼, 그리고 정학하게 풀어보았는가에 대해서 동시에 수행평가 항목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총점은 30점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은 친구들은 혼비백산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칠판에 하셨던 필기내용이야 다들 어느 정도 이상은 정리를 잘해두었을지 몰라도, 교과서에 나와 있는 문제들을 교과서에다가 열심히 풀어본 친구들은 몇 안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혜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었던 지수마저 교과서는 깨끗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수행평가를 시작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금 책상 위에는 수학 교과서랑 수학공책만 두고 나머지 것들은 다 가방 안으로 넣을 수 있도록 한다. 필기도구도 마찬가지다.” 그 말씀에 울상을 짓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열심히 필기하고, 교과서에 나와 있는 문제들을 열심히 풀었던 몇몇 친구들은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엄중하게 평가가 시작되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교실을 한 바퀴 도시면서 냉정하게 점수를 매기셨다. 깨끗한 책을 자랑하던 아이들이 많아 인상을 찌푸리시던 도중, 정혜의 책을 보시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빽빽하게 풀어놓은 모습을 보시더니 선생님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활짝 꽃피었고, 정혜의 공책필기 상태까지 보시고는 더 활짝 웃으셨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30점 만점에 30점!”이라고 말씀하셨고, 아이들은 또 다시 “오…”라는 감탄사를 보내왔다. 이로써, 정혜는 세 과목의 수행평가를 모두 만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했던 정혜였다. 그러나 정혜에게 수학을 알려주었던 지수는 21점을 받았다. 그래서 상황 상 크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당연히 만점 받을 줄 알았던 효진이도 28점을 받았다. 공책 필기 상태는 깔끔할지 몰라도 수학책에는 그다지 필기를 해놓지 않았던 효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효진이는 만점을 받은 정혜를 질투했다. ‘이렇게 다시 효진이랑 멀어지는 건가.’ 싶어서 걱정까지 되었던 정혜는 효진이에게 “미안해… 효진아.”라고 쓴 쪽지를 건넸다. 효진이는 “괜찮아.”라고 써서 정혜에게 다시 보냈는데 그러나 효진이 표정은 썩 밝지 않았기에 더 염려스러워지는 정혜다.
한편, 책과 공책 검사를 끝내신 선생님께서는 칠판에 10문제 정도를 적으시더니 “수행평가 20점 미만자들을 최대 20점까지 받을 수 있도록 구원해주겠다.”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래서 10점대 아이들의 고군분투가 이어졌고, 팽팽한 대결이 이어졌다. 반에서 5등 안에 든다는 친구 현정이는 하필 오늘, 수학 공책을 집에 두고 학교로 온 비운의 그녀였기에, 기본점수 10점만을 얻은 상태였고, 그래서 적어도 20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칠판에 적혀 있는 문제들 중 8문제를 다 풀어냈다. 1문제 당 1점씩이라 생각했던지 전부 다 풀어버리겠다는 기세로 이어가던 현정이를 말리듯, 선생님은 당황하시며 현정이에게 20점으로 올려주었고, 그로 인해 남은 문제가 2문제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라 나머지 친구들은 안타깝게도 점수에 크게 변동이 없었다.
4교시가 끝난 직후 현정이는,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집으로 뛰어가 수학 공책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수학선생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선생님, 늦게 가져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집에서 들고 오지 않았던 제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수업 마치자마자 집에 가서 들고 왔습니다. 한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는 현정이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셨고, 그 자리에서 현정이의 공책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더니 27점으로 끌어올려주셨다. 30점을 받길 바랐던 현정이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함께 하셨다.
“현정아, 어떤 상황이 되었든 결국에 가져오지 않은 게 결과가 되는 거야.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수행평가는 결국 수행평가일 뿐, 지필평가를 잘 쳐야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란다.” 그래서 현정이는 27점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외치며, 인사를 드리고 다시 반으로 올라갔다. 점심시간이다. 친구들은 대부분 밥을 먹으러 급식소로 갔는지 교실에는 효진이랑 정혜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정이는 효진이랑 정혜에게 다가가 말했다. “효진아, 정혜야,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그래서 효진이와 정혜는 처음에는 밥을 먹지 않으려 했지만, 현정이가 같이 가자고 하고 그래서, 급식소로 향했다. 오늘의 식단은 고기반찬이다. 그래서였던지 정혜도, 효진이도, 현정이도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점심을 다 먹고 교실로 올라가지 않았다. 매점에 들려 커피 3개를 사서 먹으며, 공부로 과열되었던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신기하게도 하늘에는 무지개가 떴다. 비오는 날 태양이 떴을 때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이 무지개이거늘, 비가 오지 않았던 오늘 무지개가 뜬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지개는 아름다웠다.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원형을 그리는 무지개였다.
무지개는 그녀들을 보며 웃는 듯했다. 마음이라도 편해지길 바라는 것 같은 모습으로, 무지개는 그녀들 앞으로 점점 다가갔다. 오색 빛깔의 아름다운 무지개는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힘들지? 조금만 참아봐. 꼭 좋은 일이 생길거야.’라고 말이다. 그런 무지개의 배려 덕에 조금 더 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들의 점심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5, 6교시는 제 2외국어 시간이다. 정혜는 이 시간이 굉장히 싫었다. 어떻게 보면 수학보다 더 싫은 과목이었다. 일본어시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영어는 많이 접해서 그런지 쉬운데 일본어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이 그 이유였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먼저 다 외워야 단어가 이해가 되고, 문장이 이해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얼마나 외우기 싫은지 적어도 난 그 마음 이해한다. 우리학교도 제 2외국어가 일본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이 아니라 할지라도, 열심히 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분명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어 수행평가는 누가 생각해도 일본어 회화로 정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정혜는 두려웠다. 일본어를 정말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일본어 수행평가를 보겠어요. 여러 분들의 일본어 회화실력이 어떤지를 체크해보겠어요. 20점 만점이니까 다들 최선을 다해 연습해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정혜는 일본어는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래서 흥미가 없는 듯 정혜는 세민이에게 톡을 보냈다. “일본어 시간인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망했어. 나”라고. 그 시각 잠시 졸고 있었던 세민이는 진동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혜에게 곧바로 답장을 해주었다. “으이그~ 일본어 못해?… 나 일본어는 자신있지롱~” 그러자 정혜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자 친구가 일본어를 잘한다면, 누구보다 마음 편하게 다 물어볼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세민이에게 웃으며 톡을 보낸다. “아 정말?! 오. 그럼 나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 여자 친구를 구제해준다는 마음으로…”라고. 그러자 세민이는 심오한 표정으로 정혜에게 답장을 날렸다. “음~ 나한테 하는 거 봐서…”
정혜는 그런 세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응! 알았쪄. 우리 여보양~ 오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쓸데없이 애교만 늘었다. 세민이는 정혜의 톡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시험기간이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일본어회화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는 세민이는, 일본어를 마치 준혁이가 국어 다루듯이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정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알았어. 기대할게. 앞으로 여보가 나한테 어떻게 할지도 기대할게.” 그러자 칼 같이 답이 날아온다. “응! 기대해도 좋아 여보야.” 일본어 하나로 세민이와 정혜는 더욱 더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5, 6교시가 끝나갈 때쯤 날씨는 더욱 변덕을 부렸다. 갑작스레 검은 구름들이 몰려오더니 세차게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소나기라고 생각했지만, 소나기가 아니었다. 6교시까지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발목을 붙잡을 만큼 많이 내리고 오래도록 내렸다. 그 상황은 정혜와 세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혀 비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둘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선뜻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정혜는 아리가 기다릴 것을 생각하며 걱정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는 듯, 세차게 들이붓고 있었다. 정혜는 점심시간에 보았던 무지개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그때 깨달았다. ‘아… 무지개가 비가 온다는 뜻이었구나.’라고. 이렇듯 학생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빗줄기가 조금이나마 약해졌을 때, 그때다 싶었던지 모두들 교복 마이로 책가방과 머리를 가린 채 뛰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흙이 사방으로 튀겨지고, 가렸던 교복 마이 위로 빗물이 촉촉이 젖어들었을 때쯤, 그 속에서 함께 뛰던 정혜와 세민이는 택시를 발견하고 바로 택시를 탔다. 그리고는 택시기사 아저씨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아저씨, 하늘 병원으로 빨리 좀 가주세요.” 그렇게 세민과 정혜는 하늘 병원으로 향한다. 다시금 빗줄기가 거세진다. 천둥과 번개까지 치기 시작했다. 번쩍번쩍 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혜는 아리를 더욱 걱정했다. 꼭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비로써 알려주는 것 같아 더욱 속은 타들어갔다. 과연, 아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하루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전에 유난히 더워서였던지 시원한 빗줄기로 세상의 열을 식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는 멈출 줄 모르고, 우산 없이 뛰어가는 반 친구들의 모습이 백미러를 통해 비춰진다. 그런데 비를 맞고 집으로 뛰어가면서도 표정은 다들 하나같이 웃고 있다. 오히려 비 맞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택시가 병원으로 들어선다. ‘과연, 아리는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내리는 정혜와 세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부디 아리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