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노력은 사랑도, 공부도 쟁취한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무서운 눈빛으로 병원으로 들어서는 준혁이네 어머니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진다. 백수미 간호사와의 통화 내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신 준혁이 어머니께서는 백수미 간호사부터 만나러 로비로 가신다. 그리고는 백수미 간호사를 불러달라고 말씀하신다. 준혁이 어머니의 표정은 한 마리의 야생 사자와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호출에 백수미 간호사는 1층 로비로 내려왔고, 휴게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눈다.
“간호사님, 어제 그 통화 속의 이야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설명해주세요.”, “아, 네. 약봉지를 전달하러 준혁이랑 아리가 있는 병실로 들어갔는데, 준혁이랑 아리가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준혁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라도 잘못 본 것은 아니시겠죠?”, “네 어머님. 제 시력은 양쪽 눈 다 1.5입니다.” 말문이 막히셨는지 준혁이 어머니께서는 허탈한 표정으로 잠시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셨다.
준혁이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하면 보수적으로 살아오신 분께서 학생들이 사귀는 것도 못 마땅한데 거기다 그 사귄다는 애가 자신의 아들인 준혁이고, 그도 모자라 아리랑 키스를 했다는 것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잠시 넋을 놓은 듯이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알겠다고 말씀하시며 준혁이에게로 가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오신 줄은 꿈에도 모르던 준혁과 아리는 어느새 두려움을 잊고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화가 끊기고, 둘의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졌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엔 어머니께서 서 계셨다. 무서운 표정으로 준혁이를 노려보셨다. 그리고는 준혁과 아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셨다. “백수미 간호사가 나한테 하는 말이 사실이니?” 이제 더 이상은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느낀 준혁이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네… 그런데 아리는 하지 말라 그랬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키스한 거예요. 아리는 아무 잘못 없으니 저를 혼내세요.”
그 말을 듣는 어머니께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은 자신의 아들이 저렇게 말하니까 배신감마저 드시는지 준혁이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그걸 엄마한테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리고는 1시간 동안의 호통이 이어지셨다. “남우세스럽게 병원에서 그것도 학생 신분인 너희 둘이 키스를 해?!”라는 말씀부터 폭발적으로 수많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셨다. 잘못을 한 것은 맞았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또 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1시간 정도 계속 호통을 치시더니 그제야 분이 좀 풀리셨는지 호통을 멈추셨다. 그런 어머니의 옆으로 백수미 간호사가 준혁이를 쳐다보며 혓바닥으로 ‘메롱’이라 하며 지나쳐간다. 준혁이는 정상적으로 다 낫아 퇴원하는 날까지 백수미 간호사를 괴롭히겠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른다. 그나마 그래도 호통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다. 만약 아버지께서 아셨다면, 어머니보다 2배 이상은 보수적이시기 때문에 맞고 쫓겨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준혁이네 어머니께서는 아리에게도 한 말씀 하셨다. “아리야! 물론 우리 아들이 나를 닮아 잘 생기고, 매너도 좋고, 마음씨가 착해서 너도 키스가 하고 싶어졌겠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우리 준혁이를 탐내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아리도 이쯤 되니 기가 막혔다. 아리에게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해왔던 것은 준혁인데 그런 준혁에게는 하지 않으셨던 말씀을 자신에게 하시니까 말이다. 그래도 아리는 어른의 말씀이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씀을 끝마치시자 “죄송합니다. 준혁이 어머니”라고 예의 있게 말씀드리고 그 상황을 끝내었다.
준혁이네 어머니께서는 한바탕 호통을 치시더니 힘드셨는지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하시고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셨다. 준혁이는 아리에게 미안했다. 또, 어머니께 섭섭했다. 아리에게 미안했던 이유는, 어머니께 혼나게 했기 때문이고, 어머니께 섭섭함을 가지게 된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리에게 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혁이는 아리에게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야 미안해… 화 많이 났지?” 그러자 아리는 준혁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머니께서 화 많이 나신 것 같아서 빨리 화 푸실 수 있도록 가만히 있었던 거야. 이제 저녁때 오신다니까 잘 끝났잖아?” 준혁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아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럼 연기를 펼친 거야?” 그러자 아리의 말을 듣고 함께 웃는다. “응!”
아리도 사실 이런 마음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전혀 틀리시지는 않았다. 자신이 먼저 준혁이를 좋아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고백은 준혁이가 했지만, 만약 그 때 준혁이가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이 먼저 준혁이에게 고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맞는 말씀이시네. 이렇게 우리 둘 사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셨으니까 이제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사귀어도 괜찮겠다.’ 이렇게 보면 아리도 굉장히 똑똑했다.
“죄송합니다. 준혁이 어머니”라는 말 한마디로 어머니의 호통이 끝날 수 있도록 상황을 종결시켰고, 어머니께서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하시며 댁으로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보면 둘만의 시간을 원했던 아리의 바람대로 이루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한바탕 전쟁을 치룬 준혁과 아리는 서로를 향해 바라보며 지쳤던 마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점심시간에 열심히 국어 시험범위에 대한 효정이의 요점 설명을 듣던 정혜는, 점차 국어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설명을 들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과목은 아니었지만, 설명을 듣기 전과 비교를 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이제부터 더 이해를 잘하고, 못하고는 오로지 정혜가 어떠한 노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다.
점심시간동안 효진이로부터 들었던 설명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되면 반드시 복습할 것이라 다짐한 아리는 그제야 효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샀던 빵과 우유를 효진이에게 선물했다. 효진이는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세민이가 사준 카스테라 빵과 바나나 우유를 꺼내며 같이 먹자고 말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15분 더 남았던 터라 빵을 먹기엔 교실이 답답하다고 느꼈던지 정혜는 운동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먹자고 했다. 그랬더니 알겠다며 같이 운동장으로 따라나서는 효진이다. 운동장에서 머리를 식히며 맛있게 빵을 먹는 효진이와 정혜는 별 다른 말없이 주변을 감상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는 남학생들과 피구를 하는 여학생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허락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감상에 젖는다. 점심시간을 즐기며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는 정혜지만, 대를 위하여 소를 포기하는 심정으로 성적을 위해 놀기를 포기한다. 남은 점심시간마저 지나가고, 5교시가 시작되었다. 또 다시 공부하기 위해 교과서와 공책을 꺼내들던 그때, 카톡 음이 울리면서 한통의 톡이 날아왔다. "악!"이라는 외마디의 톡이었다.
세민이가 보냈다. 그래서 세민이에게 답을 했다. "여보야~ 무슨 일 있어?"라고. 그러자 세민이로부터 답이 날아왔다. "여보가 보고 싶어서 프로필 사진 클릭하긴 했는데… 너무 예뻐서 숨이 턱 막혔어." 어쩜 말을 해도 저렇게 예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정혜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얼굴에 향기로운 미소를 띠며 답장을 했다. "안되겠다. 우리… 6교시 마치고 잠시 보자. 여보야 보고 싶어서 도저히 안 되겠어. 나…" 그러자 세민이도 온화한 미소를 띤다. 준혁과 아리 못지않게 세민이랑 정혜도 닭살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5교시가 시작되고 정혜는 사회 교과서를, 세민이는 세계사 교과서를 준비했다. 산업혁명에 이어 계속해서 수업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마다 재미없는 선생님들은 1명 혹은 2명씩 있기 마련이다. 딱 사회가 그러한 선생님이었다. 집중하라고 말씀하시긴 하시는데, 솔직히 좀 재미도 있어야 하거늘 재미가 없는 상태로 반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졸리기만 했다. 특히나 점심시간 다음인, 5교시는 점심을 먹고 난 이후라 무진장 잠이 올 때이거늘 그 5교시를 수면실로 만드는 사회 선생님이시다. 정혜는 졸지 않았다. 효진이는 이따금씩 정혜를 쳐다보곤 했었는데, 그 이유는 정혜가 말하길 "내가 졸고 있거나 그러면 지우개라도 던져서 깨워주길 바란다."라는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철옹성 같은 효진이마저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의 사회 시간이라 졸음을 애써 참는 듯했는데, 정혜가 정말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졸다 못해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32명의 총원 중 30명에 이르자, 사회선생님께서는 끝까지 살아남은(?) 효진이와 정혜에게 수업태도 우수를 명분삼아 수행평가 +1점 씩 혜택을 주었다. 1점, 1점이 아주 중요한 이때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버틴 공로로 1점을 얻었으니 그 소식을 듣고 놀라 깨어난 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사회 선생님께서는 '권선징악'이라는 사자성어를 아주 좋아하셨다. 그래서 좋은 수업태도를 보여준 정혜와 효진이에게는 [+1점]을 준 반면,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오늘 수업 내용을 A4용지 1장당 1번씩 총 10번을 써서 내일 오전 8시 50분까지 반장이 걷어서 교무실 선생님 자리 위에 올려놓으라는 벌을 내렸다. 이에 반 아이들은 넋이 반쯤 나간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양 반의 5교시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다. 5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마지막 6교시가 체육인 세민이네 반은 바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축구공 하나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체육 선생님께서는 시험범위를 지정해주기 위해 교실에서 수업을 할 예정이셨으니, 운동장으로 나가 이미 축구를 시작하려고 팀을 정하고 있었던 아이들은 다시 반으로 부랴부랴 올라가야 했다.
반면, 정혜네 반은 6교시가 없었는데, 시험 칠 때까지 자율학습을 시키고, 담임선생님께서 감독을 하기로 해주셨다. 그래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자율학습이 시작되었다. 정혜는 효진이가 알려줬던 국어과목에 대한 이해방법을 토대로 복습하기 시작했다. 효진이에게 설명을 들어서 그런지 확실히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효진이도 그때 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효진이의 책을 보니 필기가 빽빽하게 되어 있었다. 쉴틈 없이 공부하는 정혜에게 담임선생님께서 잠시 국어책을 들고 상담실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신다. 무엇 때문일까. 상담실로 이동한 선생님과 정혜는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혜야, 국어를 이해하는 부분이 어려운가 보네?”, “네? 네 선생님. 사실 좀 어려워요.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야할지 그 부분이 어려워요.”, “아 그래? 그러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할까? 국어 보기보다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정혜 너 정도의 집중력이면 금방 해결될 수 있을 거야.” 정혜는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국어 어려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셨어요?”. “아~ 국어 선생님께 들었어. 요즘 따라 네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관심을 많이 가지신 모양이야. 정혜는 문단을 이해하는 부분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을 먼저 이해가 편하도록 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고 귀띔해주셨거든. 그래서 알게 된 거야.”, “아… 그랬었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교시 끝나고 자율 학습시간에 어디로 가 있으면 될까요?”, “음… 우리학교 도서관에는 3학년들 수능 시험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으니까, 그 옆에 보면 문학 상담실이라고 있거든. 거기로 올래? 아! 저녁은 먹지 말고. 선생님이 짬뽕 시켜줄게. 저녁은 선생님이랑 같이 먹자.”,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나중에 봬요.”, “응 그러자. 공부 열심히 해! 파이팅이야!” 다시 반으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하는 정혜다. 그런 정혜를 지켜보는 담임선생님은 ‘사람도 바뀌려고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차이가 나네.’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 정신을 차린 정혜에게 때로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가며, 꼭 정혜가 3학년에 되었을 때 자기가 원하는 학과와 학교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6교시가 모두 끝이 났다. 세민이네 반도 시험범위에 대한 말씀을 듣고, 너무 범위가 넓다고 불평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친구도 있었다. 세민이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쪽이니 성적도 원하는 만큼 나올 것이리라. 세민이는 집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한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을 때 세민이는 6교시 마치고 보자는 정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혜네 반 앞 복도로 달려가 정혜를 기다린다.
정혜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보자마자 그대로 애교를 부리며 그에게로 안겼다. “여보야~~” 그러자 세민이 왈 “응? 왜 이렇게 몸에 힘이 없어?” 정혜는 대답한다. “공부하느라 진을 다 빼서 그래. 진 다 뺀 거, 우리 여보가 다시 채워주면 안 될까?” 이에 어떤 방법이 좋을까 생각하던 세민이는 정혜의 눈에 살짝 키스를 한다. 그에 녹아내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정혜는 부끄러운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침착하게 하려 노력했다. 세민이는 정혜를 보며 윙크하며 말했다. “여보야~ 오늘은 같이 집으로 돌아갈까?” 그러나 담임선생님과의 약속도 있고,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숙명도 있는 터라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참아내어야만 했다. 그래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세민이에게 말한다.
“여보야~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공부도 해야 하고, 담임선생님이랑 같이 국어 공부를 하기로 했거든… 그래서 학교에 남아야 할 것 같아. 하… 미안해.” 사랑하는 남자를 전쟁터로 내보내는 것 같은 슬픔에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효진이가 말한다. “아주 드라마를 찍어라, 찍어.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 그래서 아주 심오한 표정으로 효진이를 쳐다보는 정혜 대신 세민이가 효진이에게 말했다. “응! 나 전쟁에 참가해. 우리 여보랑 같이 집에 못 가는 것만 해도, 나한테는 전쟁터로 나가는 느낌이거든.” 그 말을 듣고, 정혜는 분명 느끼한 말인데도 콩깍지가 제대로 씐 덕에 아름다운 말로 들리나 보다. 휘청거리는 효진이와는 다르게 눈마저 사랑표로 변한 채 세민이를 쳐다보는 정혜. 그리고는 세민이에게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여보랑 같이 집에 가지 못하는 비극은 내게 여보를 전쟁터로 내보내는 비극과 같아…” 도저히 닭살스러워 더 이상은 못 보겠던지 효진이는 정혜의 등을 손으로 감싼 후 세민이의 품에서 떨어트려놓은 후, 담임선생님과의 약속 시간에 늦어서 되겠느냐며 빨리 가라고 재촉한다. 쫓기듯 담임선생님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한 정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담임선생님과 국어선생님께서 같이 계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3학년 학생들의 국어를 담당하시는 터라 정혜네 반은 수업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정혜는 이제껏 담임선생님께서 국어 담당 선생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렇게 들어서는 정혜에게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국어선생님과 담임선생님께서는 진지하게 정혜에게 국어를 이해하기 쉽게 다시 설명해주신다. 정혜는 국어 실력이 약한 것이 아니다. 유독 약한 부분이 문단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므로, 유익한 내용이 담긴 여러 문단들을 준비해 오셔서는 먼저 정혜에게 풀어보라고 하신 후에 정혜가 풀게 되면, 그것이 정답이든 틀린 답이든 관계없이 보충설명을 해주시는 가르침 방식을 취하셨다. 6시부터 시작된 일명 [국어 특별훈련]은 7시 반까지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의 문단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새롭게 알게 된 정혜는 초반에만 잠시 어려워했을 뿐, 기본적인 기초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2, 3문제를 푼 이후에는 손쉽게 풀어나갔다. 그 모습을 뿌듯해하시던 국어선생님께서는 7시 30분이 되자 중국 요리 전문점에 전화를 걸어 짬뽕 세 그릇과 탕수육 한 그릇을 시켜 정혜와 같이 맛있게 먹었다. 요즘 열심히 하는 정혜에게 꼭 밥 한 끼 사주시고 싶어 하셨던 국어선생님의 표정은 너무나도 기쁜 표정이셨다. 이로써 정혜는, 국어를 거의 90%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10%는 정혜가 정말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저녁을 맛있게 다 먹어갈 때 쯤 국어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정혜야. 이제 이해는 다 된 것 같으냐?”라고.
그래서 정혜는 이렇게 대답해드렸다. “네, 선생님. 알기 전에는 어려웠는데 이제는 알았으니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국어선생님께서는 “그래. 오늘 했던 이 내용들을 집에 가서 꼭 복습을 해봐야 해. 복습만 잘해도 공부 80%는 다 한 거라잖아. 알겠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정혜는 “네! 꼭 다시 복습할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시던 담임선생님께서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래, 정혜야. 이제 그만 자율 학습실로 가서 하고 싶은 과목 공부하도록 해. 여기는 선생님들이 정리할게. 꼭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받았으면 좋겠다. 정혜야! 힘내!”라고. 그 말씀을 끝으로 인사를 드리고 다시 야간 자율학습실로 돌아가는 정혜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야간 자율학습은 딱히 마치는 시간이 정해져있지 않았다. 수업 이외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밤 10시 이전에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정혜는 야간 자율학습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갑자기 아리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아리에게 슬며시 전화를 걸었다. 곧 전화를 받은 아리는 말했다. “여보세요? 정혜야 이 시간에 웬 전화야?” 그러자 정혜도 대답했다. “아~ 갑자기 아리 네가 보고 싶어서… 언제 학교로 다시 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아리가 대답한다. “음…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내가 내일 간호사에게 물어보고 말해줄게.”라고. 정혜는 아리가 하루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아리와 준혁이가 사고 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줄곧 바래왔다. 아리와 전화 통화를 한 후 다시 야간 자율학습실로 가려는 정혜의 발걸음에서 왠지 모르게 슬픔이 베여 나온다. 점점 밤은 깊어져만 가고, 성적을 올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다시 공부에 매진하는 정혜에게, 달빛은 어두움을 알리 듯 더 밝은 빛을 뿜어낸다. 아리는 정혜의 전화를 받고 이야기를 하는 내내 정혜의 목소리가 힘없는 목소리라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이렇듯, 친한 친구는 서로 통하는 법이다. 정혜가 다친 아리를 걱정하고, 아리도 정혜에 대한 걱정을 하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사이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것들이 아니겠는가. 이 와중에도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흐르고 흘러 밤 9시 30분이 된다. 정혜는 9시 30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른다. 이렇게 오늘도 간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음을 알게 된 정혜와 아리, 그리고 세민과 정혜, 마지막으로 준혁과 아리는 내일은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오늘 하루의 생각 정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