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서로를 향한 믿음이란 이런 것일까.」
믿음이라는 것은 오래 알고 지낸다고 해서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모르던 두 사람이 알게 되고, 아는 사람에서 '친구'가 되어 가기까지도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또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관계가 발전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친구 관계만 해도 그러할진대 서로가 사랑이라는 전제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만나는 커플 관계는 더 알 수 없을 것이다. 준혁과 아리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첫 데이트를 했던 어제 서로가 너무나도 생각난 탓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준혁과 아리였다. 그러나 준혁은 등교 시간에 맞춰 다행히 일어났지만, 문제는 아리였다. 알람이 울려도 듣질 못했다. 몇 번의 알람이 울렸지만 깊은 잠에 빠져 소용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리는 자는 모습도 예쁘다. 준혁이랑 즐겁게 노는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자면서도 엄마 미소를 짓는다. 어차피 오늘은 이대로라면 지각은 확정이기 때문에 아리가 최대한 빨리 일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준혁은 아리의 집 근처 울타리에서 아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나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늦잠 자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못 말린다는 듯 안타까움이 묻어나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 같으면 전화도 여러 번 하고, 대문도 여러 번 두드렸을 준혁이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말없이, 행동 없이 그녀가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듯했다. 준혁이는 멋진 남자다. 밤늦도록 자기와 전화 통화를 했던 아리가 피곤할 것을 알고, 그녀가 충분히 잘 수 있도록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이다. 아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자기도 지각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혼자 학교로 가는 길도 외로울 것이고, 담임선생님께 벌이라도 받게 되면 또 혼자 받을 것인데, 예쁜 자기 여자 친구가 쪽팔리게 혼자 벌 받게 할 수 없었기에 같이 늦게 갈 요량인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아리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로부터 1초 후, 아리는 비명을 질렀다. "악! 또 지각이다!!" 또 다시 순식간에 준비하기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력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잠옷을 제 맘대로 벗어던져 두고 치우지 않은 채 교복을 입는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치마를 입었는데 거꾸로 입어서, 벗고 다시 입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로 부리나케 달려갈 준비를 끝마쳤다. 그래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나가려는 찰나, 문득 자기가 늦잠을 잤는데도 오늘따라 걱정하는 전화 한통 없었던 준혁이가 원망스러워졌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입술을 툭 내민 채 집에서 나왔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은 정말인가 보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누군가가 집 앞에 서있었다. 설마 했는데 그 누군가는 바로 준혁이었다. 방금 전까지 준혁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던 아리였지만, 준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히려 준혁이를 보니, 마음이 포근해지고 가슴이 뛰었다. 준혁이는 아리에게 말했다. "으이구, 우리 자기. 늦잠 잤구나?~" 그러면서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는 대답했다. "치, 자기는, 내가 늦게 일어나도 전화 한 통 없더라?"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은 여자의 자존심상 못하겠다는 것과 같은 아리의 생각이 쀼루퉁하게 말을 하게 했다. 준혁은 쀼루퉁한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던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우리 자기~ 속상했어? 기분 풀어줘." 그녀 아리는 또 그새 웃음꽃 활짝 핀 얼굴로 변했다.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한가 보다.
그러나 그들은 잊고 있었다. 학교에 지각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다 아리가 지각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준혁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야. 우리 지각했잖아. 어쩌지? 지금 가면 혼 엄청 날 텐데…" 그러자 준혁은 말했다. "그러면 지금 가도 1교시는 어차피 지각으로 줄 그일 텐데… 이왕 이렇게 늦은 김에 여유롭게 가면 되지~" 그리고는 아리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리는 얼떨떨했지만 능청스럽게 대처해주는 준혁이에게 고마웠고, 또 하나의 색다른 면을 알게 되어 기뻤다. 사랑의 힘은 출결사항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지은이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본 지은이라면 지각을 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만일 지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부리나케 학교로 뛰어갔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준혁의 손에 이끌려 아리는 평소에도 잘 맡지 않던 느티나무 숲속에 피어난 꽃향기를 맡아 보기도 하고, 울타리를 건너며 커플 셀카를 찍기도 하며 여유롭게 학교로 갔다.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너무나도 다정하게 두 사람은 나란히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문을 지나 각자의 반으로 들어갔을 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다. 준혁과 아리는 나란히 복도로 나가 무릎 꿇고 손을 들며 벌을 섰다. 준혁과 아리는 이 넓디넓은 복도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벌을 서고 있다는 생각에, 잘못을 뉘우쳐도 모자를 시간에 서로를 쳐다보며 윙크를 날리는 불가사의한 죄를 덧붙여 저지르고 말았다.
20분정도 벌을 섰을 때 1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생님들께서 수업을 마치고 복도로 나올 시간이었기에 다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다행히 선생님들께서는 벌은 그만서고 교실로 들어가라 하셨다. 그렇게 교실로 들어가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며 윙크를 날렸다. 아리가 교실로 들어가니 정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리야.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리 지각했어? 걱정했잖아."라고. 아리는 그런 정혜를 보며 어디서 그런 천연덕스러움을 배웠는지 배가 아픈 포즈를 취하며 "아침에 배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어.… 그래서 최대한 빨리 걷는다고 걸었는데 지각해버렸네…"라고 답해주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리얼했던 지 정혜와 아리가 나누는 얘기를 들었던 친구 몇이 아리에게 다가와 걱정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하자 아리는 다행이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편, 같은 시각 준혁이 교실로 들어서니 세민이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준혁에게 물었다. "준혁아. 무슨 일로 지각했냐?" 누가 아리와 커플 아니랄까봐 준혁도 배 아픈 연기를 펼쳤다. 그러면서 세민이에게 말했다. "어… 세민아. 네가 보다시피 배가 좀 아파가지고,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것도 못 먹은 데다 최대한 빨리 온다고 왔는데 지각해버렸네…"라고. 그러나 아리의 절친인 순진한 정혜와 달리 세민은 똑똑했다. 그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던 준혁이가 지각을 하니, 걱정되는 마음으로 준혁이네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하필 그 전화를 준혁이 어머니께서 받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민이는 어머니께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준혁이 친구 세민이에요. 준혁이 지금 집에 있어요? 어디 아파서 그런 건지 아직 학교에 오질 않았네요?"라고 여쭈었고, 어머니께서는 "아니? 평소랑 똑같이 나갔는데? 아프긴 무슨. 아침에 콘푸로스트 두 그릇이랑 딸기잼 듬뿍 바른 빵 두 조각까지 먹고 웃으면서 나갔어. 좀 있으면 도착하겠지 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연기를 펼치는 준혁이를 보며 한심스럽다는 듯 웃더니 다시금 물었다. "지각의 이유가 아리냐?"라고.
이에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하려했지만, 오랫동안 자신과 절친이었던 세민의 눈을 속일 수 없음을 깨닫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응… 아리 기다리다가…" 세민이는 그런 준혁이가 친구지만 귀여웠고, 그래서 절친한 친구답게 자기만 아는 비밀로 간직해주겠다고 했다. 그 대신, 아리 친구를 소개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으니 이른바 강제 강화도 조약과 같은 비밀 간직인 것이었다. 준혁은 이번 일 이후로 세민이를 대단한 친구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2교시를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오늘은 C.A. 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2교시가 C.A. 시간이었기 때문에 영화감상 반을 신청했던 준혁과 아리는 C.A. 실로 이동했다.
C.A. 수업이 시작되고, 25분 동안 영화를 감상하고, 25분 동안 감상평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먼저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제 갓 사랑을 시작한 준혁과 아리를 위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믿음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리와 같은 C.A. 반이였지만, 아리와 준혁은 무척 집중했다. 한참동안 영화를 바라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준혁과 아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영화가 끝났으니 이제 감상평을 발표 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내용들 중에 "사랑하는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차례대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준혁은 25분이라는 시간 안에 발표를 해야 하는 번호였고, 아리는 뒷 번호라 다음 시간에 해도 되었기에 준혁은 어떤 내용으로 발표를 할지 내용을 정리하고 고민했다. 그리고는 순서가 되어 발표했다. "여러분, 서로를 향한 믿음이란 이런 것일까요. 좋을 때만 웃을 줄 알고, 나쁠 때는 화내며 싸우는 모습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생각했을 때의 서로에 대한 믿음은요, 영화에서 보았다시피 좋을 때도 함께 웃을 줄 알고, 나쁜 일이 있어도 함께 극복하고 위해 줄줄 아는, 그런 것이 진정한 사랑하는 사이라면 가져야 될 믿음의 자세인 것 같아요." 준혁의 발표에 선생님은 '어린데도 생각을 깊게 하다니'라는 뜻과 '기특하다'는 뜻으로 진심어린 박수를 쳐주셨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 전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