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면서도 내내 일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니까, 안필드에서 봤던 수상한 여자가 유근우 감독의 딸이라고. 한국에서 열렸던 2002 월드컵은 시온에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결승전까지 오르는 과정은 짜릿한 승부의 연속이었다. 선수들 개개인의 기량과 투지도 대단했지만, 감독의 용병술만큼 빛을 발하진 못했다.
흔히들 스포츠를 두고 ‘각본 없는 드라마’란 표현을 쓴다. 월드컵 당시 유근우 감독은 그 각본을 어딘가에 숨겨둔 사람 같았다. 들고 나오는 포메이션과 전술이 상대에게 정확히 먹혀 들었고, 적시에 이뤄진 선수교체로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로테이션으로 들어간 선수가 극적인 역전골을 넣는 경우가 많아, ‘감독이 골을 점지했다’ 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시온은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으로 유근우 감독에 대해 검색했다. 검색어를 입력하자마자 ‘유근우 실종’, ‘유근우 아내 죽음’ 등 무거운 관련어가 떴다. 힘겹게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유 감독은 그 꿈의 무대에 서지 못했다. 준결승전이 있던 날 아내가 지병으로 죽고, 유 감독 역시 같은 날 종적을 감추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뉴스에서 잇달아 다루면서, 유 감독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어딘가에서 따라 죽었을 거라고 추측들을 했다. 그가 실종된 지 벌써 16년이 되었으니 그 추측이 마냥 틀렸다고 보긴 어려울 듯싶다.
시온이 유 감독에게 갖는 감정은 남달랐다. 두 사람은 시온의 형인 재신을 통해 이어진 인연이었다. 처음엔 그저 멋있다고만 생각했다. 현역 때만큼이나 잘 관리한 체형에 중후한 목소리. 외관에서 풍기는 아우라에 압도되어, 웃으며 청하는 악수를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귀엽게 생겼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의외로 부드러웠단 것만 기억에 남았다.
형이 경기장에서 부상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병원에 와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유 감독을 원망하기도 했다. 형을 사랑하는 동생의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 감독이 실종되고, 형도 나서지 못하는 결승전이 아쉽게 패배로 끝나자 기분이 이상했다. 열한 살 인생 처음 겪는 새드 엔딩, 모두와 함께 좋았던 때를 회상하며 시온은 마음 한 자락에 미안함을 남겨 뒀다. 뭣 모르고 유 감독을 욕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게다가 그날, 유 감독이 사라지던 날, 시온은 병원에서 근우를 보았다. 가장 마지막에 그를 본 사람이라고, 시온의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만약 그때 우리가 뭔가를 했다면 유 감독이 실종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유근우 감독의 딸이라니…….” 시온은 정원이 더욱 궁금해졌다.
“아까 정원이 왔던데.”
“그랬어?”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청준에게 일수가 커피를 건넸다. 프림 하나에 설탕 세 스푼. 그의 취향에 맞게 직접 타온 것이었다.
“정말 맡기시려고요? 아무리 그래도 여잔데……. 우리 정원이가 좀 예뻐요? 자식들이 흑심이라도 품으면 어째요.”
‘우리 정원이’ 소리에 청준이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네가 걔 삼촌인 줄 알겠다.”
“삼촌 맞죠, 뭐.”
“오빠라며.”
“백날 고쳐줘도 죽어라 아저씨래요.”
“으유”라고 한숨을 내쉬면서 일수는 커피를 마셨다. 제 입엔 좀 달았다.
“걱정 마, 알아서 처신 잘 할 테니까.”
“알죠, 정원이 똑 부러진 거. 문제는 이쪽이에요.”
“이쪽?”
“말도 마세요. 아까 낮에 시온이가 정원이한테 어찌나 들이대던지.”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청준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정원이 오랜만에 봐서 좋긴 한데, 전 개인적으로 같이 안 했음 싶어요. 사람들 시선도 그렇고, 왠지 불안해서.”
“안 되지.” 청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아인 내 비밀 병기거든.”
* * *
탁탁탁, 가볍게 뛰는 소리가 고요히 잠든 새벽을 깨웠다. 보랏빛 어둠을 헤치며 아침 일찍 조깅을 하고 있는 이는 선수도 코치도 아닌 정원이었다.
어제 하루 잠깐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그녀는 이미 선수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축구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어 그런가, 정원의 존재는 선수들에게 좋은 화젯거리였다.
“봤어? 완전 예쁘다던데?”
“얼굴은 잘…… 모자 쓰고 있었잖아.”
정원의 이력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예쁘게 생겼나, 나이는 얼마쯤 돼 보였나 등이 주된 관심사였다. 시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유근우 감독 딸인 거 알면 난리 나겠네.’ 어딜 가나 들리는 정원에 대한 얘기가 어째 불쾌한 기색이다. 겨우 남들보다 하나 더 알고 있는 주제에 젠체하는 꼴이라니, 당사자인 정원이 알면 가소로워할 일이었다.
“시온이 형.” 식판을 들고 찬영이 옆으로 왔다. 삼겹살에 제육, LA갈비까지 밥과 국 자리를 제외하곤 전부 고기를 담았다. 한국에서 조리사들이 따라와 준 덕분에, 전지훈련 중에도 식탁 위는 한식으로 화려하게 채워졌다. 훈련 첫날, 식사를 하면서 시온은 조리장님을 런던으로 데려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들으셨어요? 어제 그 여자분이요, 유근우 감독님 따님이래요.”
“뭐어!” 찬영이 전한 귓속말에 시온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놀라셨죠, 저도 처음에 듣고 완전 충격 받아가지고.”
“누가 그래?”
“네?”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냐고.”
큰일이다. 김 코치가 알면 입 싸게 굴었느냐고 득달같이 달려 들 텐데.
“김 코치님이요.”
“뭐라고?” 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뭐 좋은 얘기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 생각이 없어도, 진짜.”
“좋은 얘기 아닌가?” 그때 등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날아왔다. 뒤를 돌아본 시온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이었다.
“난 우리 아빠 딸인 거 좋은데, 엄청 자랑스럽거든요.”
“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정원이 식당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적어도 선수들과 같은 시간에 먹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여러모로 예상을 뛰어넘는 여자다.
“거, 걱정한 거예요!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기분 별로잖아요.”
“내 걱정을 왜 해요, 정시온 선수가?”
“어어……”라고 말을 길게 늘어뜰이며 시온은 대답할 말을 찾았다. 마땅한 게 없었다.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요? 아닌데요?”
“그럼 어제 그건 뭐였죠?”
시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어제 일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의심을 거둔 건 아니었다. 정원은 여전히 시온에게 용의자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시온이 더 따져 묻지 않는 이유는 정원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엔 유 감독의 딸이란 그녀의 신분이 큰 작용을 했다.
“뭐야, 거짓말 같은 거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렇게 정원은 묘한 여운을 남기고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온은 허탈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에게 자꾸 말리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야, 정시온. 뭐냐, 둘이?”
어느새 옆에 나타난 장우가 시온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시온보다 한 뼘은 더 큰 탓에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렸다.
“뭐가요?”
“어제오늘 투샷이 자주 잡히던데?” 장우는 저 멀리 정원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이렇게 코치님이 누나 되고, 누나가 여보 되고, 세상사가 다 그런 거지 뭐.”
“누가 코치고 누가 누나야.”
“유정원.” 장우가 말했다. “이번에 대표팀 전력분석가로 왔어. 너보다 한 살 누나고.”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장우는 시온의 머리에 꿀밤을 놓는 시늉을 했다. “나 주장이거든?”
대표팀 주장인 장우에게 먼저 귀띔을 해준 모양이다. 순간 그의 완장이 부러워졌다.
“코치 누나랑 잘 해봐, 너도 이제 장가가야지.”
“됐거든요. 내가 형인 줄 아나, 누나가 여보 되게?”
“어쭈.” 장우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시온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런 건 한눈에 알아봐야지. 누나를 왜 거쳐요, 바보같이.”
못 당하겠다는 듯 장우는 고개를 저었다. “잘났다, 인마.” 아이 다루듯 시온의 엉덩이를 툭 쳤다. “밥이나 먹어.”
시온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뜬 장우의 말을 곱씹었다. 전력분석가라, 시선이 자연스레 정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감독과 함께였다. 조카와 삼촌간의 다정한 기류 따윈 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색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식사 중간중간 나누는 대화가 제법 진지한 것으로 보아, 축구 얘기를 하는 듯했다.
“알렉산더 쪽은?”
“아직이에요.”
소리를 낮춰 밀담을 주고 받던 정원은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다급히 자리에 앉는 시온의 모습이 꼭 녹슬어 삐걱거리는 로봇 같았다. 정원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었다. 그러자 청준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쳐다봤다. 왜 그러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정원은 젓가락으로 밥을 집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밥알과 함께 입안에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