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을 가득 메운 정적을 깨고 누군가가 우리가 갇혀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와 화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잔뜩 긴장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어둠을 밝히기 위해 남자가 횃불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에 눈이 갑작스럽게 빛에 노출되어 방으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남자는 횃불을 벽에 걸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허리춤에 채워진 검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정신이 들었으면 고개를 드시오.”
남자의 낮은 음성에 화인과 내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뒤에 걸린 횃불로 인해 남자의 얼굴은 어둠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빛에 비친 그의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다.
“우리를 여기에 끌고 온 것이 당신입니까?”
나의 질문에 남자는 살짝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렇소.”
“왜 우리를 끌고 온 것입니까? 죽이려는 것입니까?”
“그대들이 잘 협조만 해 준다면 어떤 위해도 없을 것이오.”
“협조를 요청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닌 것 같군요. 그랬다면 이리 우리를 납치하여 포박할리는 없을 테니까.”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하시오.”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딘가 매우 익숙하다고 느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음에 남자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쭈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같게 했다.
“내가 모시는 분들이 듣고 싶은 대답. 그것이면 되오. 미리 궁녀.”
벽에 걸린 횃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남자의 얼굴에 내려앉으며 마침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 당신은…!”
불빛에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한 때 변태귀족이라 불렀던 귀택전의 귀족, 목마지였다.
화인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나까지 납치한 사람이 목마지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눈동자가 5.0의 강진만큼 거칠게 흔들렸다.
“사밀이 시킨 것입니까?”
메이는 목을 겨우 가다듬으며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내 질문에 마지는 어떤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귀택전에서 봐왔던 마지는 그 누구보다도 웃음이 많았고 눈은 항상 장난기로 반짝였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쭈그려 앉은 마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 눈은 한 없이 공허했다.
“내 뒤에 누가 있건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소.”
“어차피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이니, 화인은 풀어주십시오.”
“그럴 수 없소.”
내 부탁을 담백하게 거절한 마지는 다시 몸을 일으켜 방 한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제부터 내가 질문을 하겠소. 그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길 바라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사지가 잘려나가는 고통이 있을 것이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숨은 무시무시한 뜻에 화인은 이제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미리, 그대는 누구의 사주를 받아 감히 이 나라의 지존이신 전하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오?”
마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정말로 황당한 것이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내가 왕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고?
난 그저 사밀 영감이 시키는 대로 밀서만 숨겨놨을 뿐이라고!
그리고 목마지 당신도 사밀과 한패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며 마지를 노려봤다.
“난 그런 적 없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내 대답에 마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정말로 난 그런 적 없어요! 내가 감히 이 나라, 백제의 왕을 위협한다고요?!”
내 고함 소리에 공허한 눈을 한 마지가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불빛에 단도의 날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날을 불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던 마지가 다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다시 묻겠소. 미리, 당신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오?”
“난 그런 적 없…!”
탁!
“꺄아아악!”
내 대답과 거의 동시에 마지가 화인이 묶여 있는 쪽으로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화인의 귀 바로 옆에 아슬아슬하게 꽂혔다.
“으흐흐흐흑. 으으흑.”
두려움에 화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떨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야 이 개XX야! 화인은 건들지 마!”
내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도 마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나보고 욕을 더 하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 편하게 앉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목마지는 사밀의 편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밀을 배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도, 사밀도 목마지에게 속았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계속 그렇게 소란스럽게 소리 지르시오. 목은 좀 아프겠지만.”
뭐라고? 지금 저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상황에서도 날 가지고 놀겠다는 저 심보는 대체 무슨 경우인지!
“….”
당황함에 정작 내 입에서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자 마지가 덧붙였다.
“문초 하는 곳이 조용해서야 되겠소? 이제부터 나는 여기에 앉아 그대들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을 터이니 나를 향해 욕을 해도 좋고,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도 되오.”
“이게 무슨….”
“으아아아앙! 대체 우리한테 왜 이래요! 흐흐흑. 저는 여태까지 남의 물건에 손 댄 적도 없고, 거짓말은 가끔 하긴 했지만 절대! 절대!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리. 저희 좀 살려주세요!”
내 목소리는 화인의 울음이 섞인 고함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동안의 설움이 터진 듯 화인은 꺽꺽대면서도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놓았다.
“좋소. 지금처럼 그렇게 하시오.”
의자에 앉은 마지가 그런 화인을 부추기기까지 하니 일단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마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우는 소리는 내면서 빌기도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다.
동이 터 창밖이 서서히 밝아지자 그제야 마지는 우리에게 그만하고 휴식을 취할 것을 허락했다.
나와 화인은 이미 목이 쉴 대로 쉬어버렸다.
“흠, 자백 한 번 받아내기 참 어렵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지는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했다.
그가 방을 빠져나가기 전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따가 다시 올 터이니, 그 때는 꼭 사실대로 실토하시오.”
마지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미리야, 저 나리께선 우리 편인가 봐.”
잔뜩 쉰 목소리로 화인이 말했다.
화인의 목소리엔 이젠 두려움보단 희망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목마지가 우리를 살려줄 것이라는 희망.
“나는… 잘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마지, 점점 겪을수록 점점 더 저 사람에 대해서 모르겠다.
그는 대체 누구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일까?
지친 나와 화인은 곧 골아 떨어졌다.
그 뒤로 목마지가 2번이나 더 우리를 찾아 왔으나 그는 처음과 같이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한 번의 해가 지고 한 번의 달이 졌다.
그리고 우리의 긴장도 많이 허물어졌다.
마지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갔고 우리는 이제는 익숙한 듯 몸이 묶인 채 잠에 빠져들었다.
촤악-!
어지러운 꿈을 헤매던 난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고 눈을 번쩍 뜨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푸하! 허억, 헉.”
“깨웠습니다. 나리.”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폈다.
무사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깨운 것인지 그의 손에는 나무물통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무사 옆에는 처음 보는 중년 귀족 남자가 서 있었다.
“마지의 말에 의하면 아직 알아낸 것이 없다지?”
“네, 밤낮으로 문초를 했으나 아직 그렇다할 성과는 없었습니다.”
중년 남자는 매서운 눈으로 나와 화인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이 닿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밤낮으로 문초를 했다라…. 직접 본 자가 있는가?”
“네? 무슨 뜻이신지”
“마지가 직접 저 아이들을 문초하는 것을 직접 본 자가 있나 물었네.”
“아, 작은 나리께서 방해된다며 항상 혼자 출입하셔서….”
“쯧쯧쯧. 역시 그렇군. 천한 피가 흐르는 녀석이라 그런지 비슷한 처지의 것들에겐 항상 물렀지.”
중년 남자는 내게 몇 걸음 다가왔다.
“어때, 마지가 너희를 엄히 다뤘더냐?”
“그렇습니… 윽!”
중년 남자는 대답하는 내 배를 발로 걷어찼다.
통증으로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직 입이 산 것을 보아하니, 매를 덜 맞았구나. 자, 어디부터 시작해야 길이 좀 들까.”
중년 남자는 느린 걸음으로 나와 화인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아, 그래.”
마음에 드는 끔찍한 고문이 생각났는지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그의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저 아이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여봐라, 숯과 인두를 가져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중년 남자가 화인을 가리키며 지시하자 내가 소리를 질렀다.
“화인에겐 손대지 마세요!”
“오호, 그래. 마지의 말이 맞았구나. 저 아이는 네게 꽤 소중한가 보구나. 그러면 더더욱 저 아이 먼저 시작해야겠다.”
“무, 묻는 말에 성심껏 대답할 테니 제발! 화인은 건들지 마세요!”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나.”
중년 남자는 나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너와 함께 반역을 꾀한 자가 누구더냐.”
“저는 반역을 꾀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먹은 것 같군.”
중년 남자가 옆의 무사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숯불에 달궈진 인두를 집어 화인의 다리를 지졌다.
“아아아아악!”
“안 돼! 하지 마! 당장 멈춰!”
중년 남자가 손짓을 하자 무사가 화인의 몸에서 인두를 떼었다.
내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네가 실제로 반역을 꾀했든 꾀하지 않았든 그게 궁금한 것이 아니야. 너의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나오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넌 그저 내가 불러주는 이름만 말하면 된다.”
“….”
“널 궁에 들여온 남자, 내두좌평 사밀이 반역을 꾀했다고 말해라.”
난 고개를 들어 충혈된 눈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은 사밀을 사로잡기 위해 날 잡아온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남자의 말대로 반역의 주동자로 사밀을 지목한다면 저들은 나를 증인으로 사밀을 역모로 몰아 죽일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바로 사밀이었다.
“어차피 짜여 있는 판,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달라지는 게 있겠습니까?”
“많은 것이 달라지지. 이 나라의 판도가 달라지고, 이 나라의 권력을 쥔 세력이 달라지며, 결론적으로 이 나라의 왕이 달라질 것이다.”
“…!”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달솔 어르신의 명이 있었습니다!”
“목숨이 달아나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거칠게 문이 열리며 목마지가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실신해 몸이 축 늘어진 화인에게서 새빨간 숯불에 넣어 달궈지고 있는 인두로 옮겨가다 눈물범벅이 되어 퀭해진 내 얼굴에서 멈췄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말을 못 들었느냐?”
“숙부님, 송구합니다. 하지만 곧 상좌평 어르신께서 오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무례를 무릅쓰고 왔나이다.”
“그렇군. 상좌평 어르신께서 당도하실 때쯤이면 이 아이의 입에서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군요.”
“헌데, 그동안 넌 말로써만 문초를 한 것 같더구나.”
“….”
“쯧쯧쯧. 참으로 한심하다. 내 너의 잘못을 벌하기 전에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무슨 말씀이온지….”
“네가 직접 저 아이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라. 아까 사용해보니 저 인두가 꽤 쓸모가 있더구나.”
그렇게 말하며 마지의 숙부, 모달은 마지의 손에 뜨겁게 달궈진 인두를 쥐어주었다.
인두를 손에 쥔 마지는 나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지가 주저 없이 팔이든, 다리든 내 몸 어딘가를 뜨거운 인두로 지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는 인두를 손에 쥔 채 미동조차 없었다.
마지가 움직이려는 기색이 없자 참지 못한 모달이 그의 손에서 인두를 뺏어들고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나는 두려움에 눈을 꾹 감았다.
푹. 쨍그랑!
“으윽….”
신음소리와 함께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내가 실눈을 떴다.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지가 자신의 숙부인 모달의 배에 검을 꽂은 것이었다.
금속 마찰음은 모달의 손에서 인두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네, 네가 어떻게… 감… 히.”
“숙부님, 기르는 개도 가끔은 주인의 목을 물어뜯기도 합니다.”
스윽.
마지가 자신의 숙부의 몸에 꽂았던 검을 빼내자 피가 사방으로 튀며 달솔 목모달이 바닥에 고꾸라지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