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 선비의 옛날 데이트
"거짓말."
시파는 역시 믿지 않았다. 뭐, 믿을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았다. 원래 사람이든 뭐든 자기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니까. 일단 시간은 벌었다.
"거짓말 아니거든요! 내가 본 시파는 어명으로 옥에 갇혔어요. 죄명은 역모, 왕은 삼족을 멸하라 어명을 내렸어."
발끈거려 대꾸했다.
"그 다음은? 다음은 어떻게 됐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야!"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고고한 선비인 줄 알았는데 반역도라고 하니까 열받나봐."
"일부러 거짓말 하는 게야, 그런 게지?"
"감탄고토라고 아시지요, 선비나리?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 고고한 선비인생이 과거였으면 받으들이고, 이렇게 쓴 과거였으면 뱉을 생각이었어요? 원래 그런 게 선비인가?"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부러뜨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힘을 가했다.
"놓아주시지요, 시간의 파수꾼."
말순이 경고조로 말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역시 신다웠다. 비록 만들어진 신일지라도.
"저 아이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시파."
말순마저 시간의 파수꾼을 시파라고 불렀다. 그의 표정이 썩 탐탁지 않아 보였다. 속으로 시파라고 부르지 말라 했거늘, 구시렁댔다.
"...거짓인지 아닌지 내가 확인할 방도가 없잖소."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어깨를 두어 번 풍차돌리기 자세로 돌리고, 뻣뻣해진 목도 좀 풀었다. 간만에 몸이 긴장했다. 백 년도 더 묵은 시간의 힘을 얕잡아보면 안됐다. 진땀이 났다.
"누구를 거짓말쟁이로 아나."
가능한 한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방도는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가진 패가 이거 하나라서. 우선은 김말순 씨 부탁부터 들어주면 증명해드리죠. 까짓것."
일부러 김말순이란 이름에 힘을 줬다. 부를 때마다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놀려먹기에 딱이었다. 그가 다시 어금니를 깨무는 동안 말순에게 나 잘했지,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팔짱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갓이 앞으로 기울었다.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기에 속마음은 속세와의 인연을 다시 맺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백년하청-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라 여겼건만. 허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나는.'
그가 갓을 들었다.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소."
'위험을 무릅쓰고 저지를 일은 아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선의 선비가 보수적인 건 짐작했지만 새가슴까지 더해진 줄이야.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능력-사람의 생각을 보거나 읽을 수 있는 -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만 가진 패를 다 까야 하는지, 원. 이 세상은 죽어서도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일깨워줄 심사였다. 입술을 뗐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면 확인시켜드릴 방도가 있습니다. 제 능력이."
"엠마, 됐어. 의심이 참 많으십니다. 계약에는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신은 정장 마의에서 사진을 꺼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녀는 사진을 그의 눈앞에 보였다.
"그게 무엇이오?"
"자세히 보세요. 시파가 아는 사람이니까."
"모르는 자요."
"기억도 없는 분이 어떻게 한 번 보고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알아요. 자세히 좀 봐요."
내가 봐도 웃기지, 몇 백 살 먹은 할배를 채근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이게 말순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챘다. 그가 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머릿속 이미지를 엿보았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사진 속 여자를 비로소 떠올렸다. 여인은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인 듯했다. 비단 걸친 애기씨는 높은 담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도 도령!"
"마마!"
"마마?"
내 실수였다. 헛기침과 함께 서둘러 입을 닫았다. 혹여 그가 무슨 소리라도 듣고 눈치챘나 살폈지만 다행히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이미지화된 기억에 심취했다. 슬쩍 말순을 쳐다봤다. 그녀도 시파의 과거가 궁금한 건지, 아니면 혼자만 지루한 건지 짱구같이 입 안에 바람을 넣고 기다렸다.
"우리 오늘은 어디 가나요?"
"마마께서 가시옵고 싶은 곳으로 소신이 길을 잡겠나이다."
도씨 나리는 얼굴까지 새빨개져 수줍음을 탔다. 여인보다 더 붉은 뺨을 검은 갓으로 가리고, 그가 마마의 답변을 기다렸다. 마마께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뒤에 호위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무녀리 같은 도령이 손을 놓고 멀찍이 떨어졌다. 푸하하, 거리며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 앳된 모습을 말순도 봤어야 하는데. 반면, 옆에 제 과거를 들여다본 시파의 입가에는 미소가 실렸다.
"돌다리를 건너고 싶은데."
쭈뼛쭈뼛 굴었다. 방금 전 도령한테 거절당해 그새 마마의 용기가 쭈그러든 모양이었다. 원, 사내놈이. 보는 내 속이 답답할지경이었다.
"...."
뒤따라오는 호위의 눈치를 생각보다 더 살피며 따로따로 길을 걸었다. 어느덧 돌다리에 왔다. 지난밤 폭우리고 내린 것인지 개울물 수심이 좀 깊어 보였다. 얼핏 돌다리가 미끄러워 보였다.
"조심하시옵소서."
호위가 말했다. 마마는 꽃신을 조심히 들어 돌다리 위에 얹었다. 그런데 우리 어린 파수꾼이 호위를 살피고는 이내 마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마는 그 손을 부끄러워하며 잡았다.
애틋한 기억이었다. 시파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얼굴빛이 상기됐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체했다. 그는 헛기침을 연달아 하고는 말순에게 다가가 사진을 건넸다. 그녀는 사진을 돌려받았다. 그는 괜히 갓끈을 만지작거리더니.
"계약 조건이 무엇이오?"
하문하셨다.
"내 과거를 영화로 만들어주세요."
말순이 대답했다. 어이가 없는 사람은 비단 시파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What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내 소리에 귀를 막았다.
"왜, 영화관에서 감상하시려고?"
내가 깐죽거렀다. 말순은 나를 째렸다. 나는 졸보가 아니었다. 뭐요, 대들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가 재차 물었다.
"네."
그녀가 재차 대답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고작 고전영화 한 편 만들겠다고 이 고생을 시키다니. 세대 차이인가? 말순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은.